소설가 : 김 용 필
( 고구려 유적탐사 및 백두산 기행 )
“ 아, 고구려 그리고 백두산 ”
백두산에 올라보니 아, 이곳은 백두산이 아닌 장백산이어라. 저 멀리 백두산을 어찌 하리..........
2007년 7월 23일, 교장님을 비롯하여 11명의 **공고 교원들이 4박5일 고구려 유적탐사 및 백두산 기행에 힘찬 행보를 내 디뎠다. 인천 공항에서 심양, 통화, 집안, 송강하, 백두산, 통화, 환인, 심양, 다시 인천이었다.
비행기는 08시40분에 출발하여 10시(현지시간 11시) 심양 ‘도선’ 공항 도착, 1시간 20분 소요 1,030km를 날아왔다.
Ⅰ.심양 (瀋陽)
요령성 심양은 동북의 중심도시로 지형적으로 백두산에서 뻗은 용상의 산맥이 흘러 용의 꼬리 부분에 속하는 곳으로 승천을 하는 용문 터로 혼화강(삼수강)이 휘둘러 흐르는 양지바른 땅에 자리 잡고 있었다. 옛 후금(청나라)의 시조 누루하치가 태어난 곳이며 청나라 첫 수도이며 만주족의 주 무대였다. 지금도 청나라 초기 수도로의 위엄을 갖추고 있었다. 연중 황사가 뒤덮여 흙비가 내리며 한족이60%, 조선족이20%, 몽고족, 만주족 4,000명, 회족, 기타 등 550만의 인구를 가진 중국 5대 도시답게 대평원에 넓은 자리를 잡고 있었다.
후금이 청나라로 국명을 개정한 것은 명나라는 불의 나라요, 후금은 금의 나라라서 불이 금을 녹인다는 악재를 없애기 위하여 불을 끄는 물인 청나라로 바꾸었다.
심양에 도착하니 현지 가이드가 나와 우릴 맞으며 곧장 식당으로 데리고 갔다. 기내식으로 포만감을 느끼고 있어 시간을 늦추어 달랬더니 7시간 장거리를 달려야 하는데 먹을 데가 없다기에 다시 1시간 만에 점심 식사를 하였다.
점심을 먹고 버스는 통화를 행하여 달렸다. 날씨는 36.5도의 폭염, 다행히 버스에 에어컨이 빵빵하게 터지는 바람에 무더위는 덜했다. 온산 온들에 푸른 옥수수 밭이 한없이 펼쳐졌다. 이곳에서 쌀농사 보다는 옥수수 농사가 이익이 많단다. 옥수수는 고량주, 빵재료, 가공식품, 기름, 사료로 쓰이고, 옥수수 대는 땔감과 건축용 재료 및 공업 제품을 만드는데 쓰기에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고 한다. 중국에선 자동차를 기차라 하고 기차를 화차라고 한다. 참고로 중국에선 단동 쌀이 최고이다.
버스는 흠집이 많이 난 아스팔트 도로를 털털거리면서 달리고 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중국의 가옥들, 어디를 가나 똑같은 빨간 지붕의 일자형 단층집(남방에선 2층)이 흉물스럽다. 창이 깨지고 무너져 내려 폐허 같은 집인데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 길은 잘 나 있었으나 차량 흐름이 거의 없고 차선이 없는 도로에 사람과 차량이 같이 다녔다. 들판엔 방목하는 소와 말들이 풀을 뜯고, 소 한 마리 값이 우리 돈 50만원이고 돼지고기 값이 더 비싸다. 중국의 주요 정책 중의 하나가 산림녹화이다. 고속도를 따라 우거진 가로수를 볼 수 있는데 가로수로, 황사를 막기 위한 방풍림이나 열악하고 추한 민가 모습을 가리기 위한 방책인 듯하다.
심양에서 1시간 쯤 달려 만주족 자치구이며 누르하치의 생가가 있는 신안(신주)에 달하고 저 멀리 수림 속으로 누르하치 조부능인 용능진의 전경이 한눈에 보인다. 가이드 말을 빌자며 심양은 다민족 사회기에 민족간에 언어가 통하지 않은 예가 많다는 것이다. 조선족은 가장 영리한 민족 임에도 제 1세대들은 조선족의 정통성을 고집하면서 중국어를 무시하고 사는데 2세대, 3세대. 4세대들은 세월이 갈수록 한족에 동화되어 민족 정체성을 잃어 한국말을 전혀 모르고 산다는 말이 서글펐다.
소수 민족 중에서 조국이 있는 나라는 그런대로 대우를 받는다. 한국의 조선족, 몽고의 몽고족을 제외하고는 엄청난 무시와 괄시를 받는다는 것이다. 조국이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느끼게 하는 부분이다. 중국인들은 물을 싫어하는 민족이다. 해서 씻지 않고 산다. 몸에선 냄새가 펄펄 나도 씻지를 않는다니 그것도 문화인 것을.......
한족 여성들은 일을 하지 않고 남자만 부려 먹고 사는데 조선족 여성들은 남성을 받들며 같이 일하기에 그런대로 윤택한 편이라고, 한족의 남자와 조선족 여자가 결혼하면 최고로 좋고 한족여성과 조선족 남자가 결혼하며 최악이란다.
Ⅱ. 통화(通化)
버스는 끝없는 옥수수 밭을 가로 지르며 295킬로미터를 달려 5시간 만에 혼강(비류수)이 흐르는 통화시에 도착하였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산악과 계곡을 끼고 집안 으로 향하였다. 오녀산 계곡을 끼고 2시간 100킬로미터를 달려 집안에 도착하였다. 집안은 우리나라 경주와 같은 유적도시다. 험준한 산을 넘으니 분지 안에 넓은 평야가 나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건너편 산들은 나무가 거의 없는 민둥산들이었다. 경작을 하기 위하여 농토를 만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그곳은 북한이었다. 압록강을 끼고 접경한 북한 땅이었다. 집안에서 기차를 타고 만포진을 통하여 북한으로 들어 갈수 있는데 하루에 한번 무역상품을 싫은 국경 열차가 오간다.
통화시에 속하는 집안은 고구려의 2차 수도인 국내성이 있었던 곳이다. 일명 무덤의 도시라고 하는 순박한 고촌으로 옛 정취를 그대로 지닌 초라한 빈촌이었다. 사면으로 용산 무산등 고산이 드리워진 대평지 가운데로 압록강이 흐르는 천연의 요새였다. 고구려 제2대 비류왕이 환인의 남의집살이를 하다가 이곳으로 수도를 옮겨 20대 장수왕이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기 전 까지 427년 간 고구려 수도였다.
감개무량하다. 그러나 건너 민둥산 북한을 바라보니 저곳이 내 나라 끝인데 하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울컥해 졌다. 7시간 버스에서 지친 몸이라 호텔로 들어갔다. 호텔이라기보다는 장급여관에 불가한 숙소였다.
먼저 시내 관광을 나섰다. 시장을 돌다가 그만 기절할 것 같은 풍경은 노상에서 파는 식품이 불결하고 비위생적이라는 것, 비위가 상했다. 도시는 쓰러지는 고옥에 이렇다 할 건물하나 없는 고구려 수도였다. 내버려 둔 오지인데 한국 사람들이 고구려 유적지 탐사를 많이 오는 바람에 개발을 서둘러 경제가 살아났다는 고도였다. 압록강 중류에 인구 23만 명에 조선족이 1,500명이 살고 있고 동토의 북한을 자유롭게 오가며 무역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북한으로 쉽게 누구나 갈수는 있지만 돌아올 수는 없다는 가이드 말이 재미있다.
Ⅲ. 집안 (集安)
7월24일 집안의 첫 고구려 역사 탐방 길에 올랐다.
집안에서-심양 295km, 장춘 410km, 단동 230km, 대련 520km, 여순 620km, 평양360km, 서울 500km.
1. 국동 대혈 (國東大泬)
국경선 압록강을 따라 30분을 달려 한적한 강변에 차는 멎었다. 잠시 압록강 저편 북한의 민둥산을 바라보다가 산포도 밭을 끼고 산으로 올랐다. 중국 정부에서 파견한 현지 가이드와 대혈지기 노인의 안내를 받으며 고구려의 부강과 안녕을 기원하는 제단으로 향하였다. 집안은 중국에서 유일하게 산포도의 주산지이다. 싱그런 포도나무에 포도가 주렁주렁 열렸는데 놀라운 것은 포도나무 잎이 온통 백색이라는 것이다. 가보았더니 농약 (DDT- 금기된 농약)을 입혀 놓았다. 중국 농산물의 진면목이 드러나 보이는 같아 여간 불쾌하지 않았다.
20분 쯤 산을 오르니 국동대혈 신단이 나왔다. 1년에 한 번씩 국왕이 제주가 되어 국가 안녕을 비는 제사를 지내던 곳인데 구름 같은 홍교암혈아래 제단이 놓여 있었다. 앞에서 보면 뒤가 뻥뚫린 통천문으로 하늘을 볼 수 있고 중앙에 간개 (簡介)라는 고인돌이 제단인데 무너져 내려 있었다. 신녀가 이곳에 살면서 제단을 관리 하였다. 난 제단 아래 서서 고구려의 명성이 다시 오길 빌었다.
2. 광개토 대왕비 (好太王陵)
집안의 북쪽 무덤 군이 있는 중앙에 호태왕 비 즉 광개토 대왕의 비가 유리벽 속에 안치되어 있었다. 중국이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이곳 고구려를 중국의 부속 변방국가라고 고집하면서 서둘러 세계문화유산에 자기 것으로 입적하였다. 그리고 고구려의 영토모두 평양까지 자기 역사라고 주장하며 집안의 유적에 과감한 투자를 하였다.
호태왕비가 있는 이곳은 민가였는데 갑자기 6개월 시안으로 비 주변의 민가 천여호를 뜯어내고 정원을 조성하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기적하였다는 것이다. 얼마나 급했으며 6개월 만에, 공산주의 국가만이 할 수 있는 힘이었다.
웅장한 대왕의 비는 414년 장수왕이 부친의 유업을 기르기 위하여 세운 공적비 인데 4면의 석재 비로 높이가 6,69미터 측면1,5미터 정면 2,0미터 1개의 석대위에 세웠다. 글자는 44행 41자 1,775자를 해각했는데 지금은 1,590자만 남았다. 일본이 역사왜곡으로 없애 버렸다. 남쪽의 제1면은 고구려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고 주몽의 건국정신을 새겨두었고
* 참고(고주몽에서 고는 고기알 덩어리며 주몽은 활이란다.)
서쪽의 2,3면은 광개토대왕(18세에 왕위에 올라 39세로 승하)의 업적을 새긴 것인데 22년 동안 6개국 1,400개 부족을 점령 통합하였다. 백제와 신라 가야까지 지배했고 멀리 일본까지 원정을 했던 것이다. 동쪽 4면은 광개토대왕의 비문 릉이 선 위치를 새겨 두었다.
당시 천하를 호령하던 대왕의 위업을 감히 짐작할 수 있었다. 대왕은 난공불락의 요새인 집안을 남겨두고 대군을 손수 이끌고 대륙의 벌판을 종횡으로 누벼 국톨르 넓혔다. 대왕은 118만 평방킬로미터, 한반도의 20배에 해당하는 대 제국을 만들었다.
3. 광개토대왕의 릉
호태왕 비에서 2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적석총이 푸른 잔디위에 높이 솟아있었다. 고구려의 무덤은 돌로 쌓은 적석묘인 석총과 흙으로 만든 흑총이 있는데 돌로 쌓은 것은 왕이나 관리의 묘이고 흙으로 만든 묘는 평민들의 묘이다. 집안의 북부 용산은 왕족의 무덤 군이고 무산엔 평민 무덤인데 현재 2,300개의 산 같은 무덤이 있다.
대왕의 무덤은 둘레 100여 미터의 장릉으로 지금은 석총이 허물어져 나무계단으로 올라가서 관람하고 있었다. 대왕의 릉에 올라 멀리 집안시를 바라보며 다시 한 번 난공불락의 요새이며 명당임을 알 수 있었다.
4. 장수왕릉(將軍塚)
용산(龍山)에 위치한 20대 장수왕릉은 대왕이 릉을 만들고 평양으로 제3수도를 옮겨서 진 묘인지 가묘인지는 판별이 안 된다.
장군총(將軍塚)이라고 하며 동양의 피라미드라 일컫는 대왕릉은 지장적총 무덤으로 분묘 상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 있었다고 함.
1,100개 돌로 쌓아 작은 3층석단을 묶어 큰 7층으로 만든 묘이다. 내부는 4벽의 공간으로 7개의 석층이 분별되며 최상층 대들보는 1개의 석판으로 덮었다. 그리고 지하의 지상대엔 왕의 내외분이 안치되었고 무덤밖엔 12개의 보호석이 버티고 있어 무덤이 물러나거나 무너짐을 방지하고 있었다. 물리학적으로 밀러나는 힘을 흡수하는 건축술이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1개의 보호석이 없어졌는데 그 이유를 모른다.
우린 대왕의 릉 위로 올라가서 대왕의 유적을 상기하였다. 왜, 대왕이 이곳에 자기무덤을 만들고 평양으로 천도를 했는가? 아마 신라와 백제의 힘을 꺾기 위해서가 아닌가. 장수왕은 가슴에 한을 품고 있었다. 백제의 근초고왕에게 승복하고 죽은 증조부 고국천왕의 한을 새기고 있었다. 고구려를 정복했던 백제에 울분을 품고 평양으로 수도를 옮겨 백제를 칠 요령이었다. 결국 백제를 치고 북한산에서 개로왕을 죽임으로써 한을 풀었다. 그러나 백제는 수도를 부여로 옮기고 왕족은 일본으로 피신하는 위기를 맞았던 것이다.
대왕의 릉 옆엔 시종들이 순장된 무덤이 있었다. 대왕은 98세까지 세계 역사상에서 가장 오랜 집권으로 영화를 누린 왕이었다.
5. 5회분 5호묘 (五灰分 五號墓)
집안의 무산(武山)은 무덤군 있는 곳인데 이중 태왕촌 마을에 왕족의 무덤인 5개의 봉투묘 고분이 있다. 산같이 흙을 높이 쌓아 만든 묘인데 고구려 후기 6세기경에 만든 것인데 이곳 중에 한 개를 개봉하여 내부를 관람시키는데 중국인 전문 안내원이 이곳은 중국의 시조 염제와 신농씨의 생활상을 벽화로 그린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럴까? 내부로 들어가니 냉장고처럼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지하 3미터에 지장대엔 3개의 좌석이 있는데 부부와 그들을 지키는 장군, 시종일거라는 추측, 4벽엔 벽화 4신도 (청룡, 백호, 주작, 현무) 가 선명한 색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천정엔 日月神, 飛天像 龍虎圖가 아름다운 색채를 보여주고 있었다.
6. 일본의 고구려 정복비
무산의 태왕촌 중앙에 이상한 비석이 높이 서 있었는데 일본이 고구려를 정복했다는 기념비다. 중국가이드는 애써 감추려고 하였지만 이 비는 일본이 광개토대왕비를 조작하면서까지 일본이 고구려를 지배했다는 역사 왜곡을 한 것이다. 일본이 이곳에 만주국을 세우면서 옛 고구려가 자기 영토라는 것을 증명하며 만주국의 태동은 당연한 역사의 순리라고 생각하였다. 역사의 날조였다.
7. 환도산성(丸都山城)
환도산성은 위나암성 이라고도 하며 국내성 안의 요새에 세워진 행궁이었다. 3면은 험한 산세이고 남쪽 한면이 성각이다. 성길이 6951미터 높이 5미터, 성문 6개, 10대 산상왕이 재건한 궁으로 국가의 위기를 맞을 때 왕궁을 옮겨 지탱할 목적으로 지은 행궁이다. 3면이 산으로 드리워지고 남쪽의 한 면만 석벽성만 방어하면 철벽의 요사였다.
8. 국내성 (國內城)
집안의 도시가운데 국내성의 궁궐터가 남아 있었다. 국내성은 압록강을 끼고 남북으로 남쪽은 북한, 북쪽은 중국이 갖고 있었다. 성의 둘레는 2686미터의 토담 성으로 6개의 성문이 있고 건문루, 각루, 마면 장으로 나와 방어진을 쳤다. 허물어진 성벽 안에 도시가 형성되어 담 역할을 하고 있었다. 원래 국내성은 압록강을 가운데 두고 남북으로 있었다.
그런데 북한쪽 국내성은 개발이 안 되어 볼 수가 없었다. 당시 인구 4,000명이 살았던 궁궐이다. 중국이 집안을 역사 유적 도시로 만들어 자기 문화유산으로 등재하고 이를 이용하여 막대한 관광수입을 기대하고 있는데 북한압록강 건너 국내성을 개발하지 못하고 있으니 안타깝다.
9. 압록강 (鴨綠江) 뱃놀이
북한과 중국의 국경은 압록강을 두고 나누어져 있었다. 그런데 강은 공유물이란다. 북한의 벌거숭이산은 탈북자를 막기 위하여, 농토를 이용하기 위하여, 땔감용으로 쓰기 위하여 베어버렸단다.
압록강 유람 장에서 일행은 보트를 타고 20여분 강을 질주 하며 강 건너 50미터도 안 되는 곳의 북한 땅을 바라보며 모두 숙연해 있었다. 저긴데. 가보고 싶은 저기엔 우리의 동포가 살고 있는데.........
북한의 주민생활은 말이 아니 라는 것이다. 거의 기아상태로 굶어죽는 사람이 무지기수 란다. 주린 짐승처럼 먹이를 찾아 목숨을 걸고 강을 건넌다는 것이다. 뱃놀이를 하면서 미안한 생각이 들었고 통일은 꼭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북한식 불고기 정식을 먹고 백두산이 있는 백산제일도시를 향하여 버스를 탔다.
Ⅳ. 서파(西陂 )백두산
10. 長白山 第一市 (白山市)에서 송강하 가는 길
松江河는 백두산 천지에 오르는 서파 등정 최 종단 도시였다. 송강하 가는 길은 신흥개발시인 백산시를 거쳐 평원을 달려 계곡의 임업시험단지를 끼고 올라 2,000미터 대고원 평원을 달려야 나온다.
고산평원의 백산시, 중국이 동북공정으로 백두산을 국제적인 관광지로 만들기 위하여 새로운 공항을 건설하고 신도시를 개발하는 곳이었다. 일명 백산시 라는 장백산 제일시는 신흥도시로 수많은 아파트와 호텔을 신축하고 있었다. 곧 비행장이 완성되며 세계적인 관광도시가 된다는 것이다.
백산시를 지나 한참 달리며 로천 탄광촌인 임광시가 나왔다. 온 산이 탄광이어서 그냥 노상에서 석탄을 파내고 있었다. 그래서 2군데의 화력발전소가 있었다. 노천탄이어서 탄의 질이 좋지 않은지 마을 곳곳엔 탄을 쌓아놓고 탄과 돌을 가려내는 작업이 진풍경이었다. 임광시에서 조금 더 가니 공업도시인 강원시가 나온다. 이곳 역시 임산물 집산촌락이었다.
버스는 계속 혼강을 따라 올라갔다. 혼강은 장백산에서 내려 통화로 흘러 심양을 거처 요하로 흐르는 강인데 이강의 중류에서 송강이 만난다. 혼강과 송강은 장백산의 원수가 흐르는 강이다. 버스는 고산 1,000미터 2,000미터를 향하여 달렸다. 달리는 길 양편으론 길림이란 이름에 걸맞게 울창한 경제림이 온산에 가득 차 있었다. 알고 보니 이곳 송강하 고원평원이 국가 임업장려단지 였다. 질 좋은 수목을 심어 보호하고 가꾸는 곳이었다.
270킬로미터 7시간을 달려왔으나 송강하는 여원했다. 해는 저물어 가고 어둠이 내리는 시각에 산상 고원 소산촌 (小山村)으로 진입하였다. 송강하가 가까워짐이다. 환상적인 2,000미터 산상 고원 분지 이정표엔 소산초은 98킬로미터 직선으로 대 평야를 끝없이 펼쳐낸다는 것이다. 고산 대평원 가슴을 설레게 하였다. 무성한 수목과 대평원의 들판, 그 사이로 송강이 흐르고 있었다. 백두산 천지에서 내려오는 물이 모여 만든 강이다. 저녁연기 운해가 고산 대평원을 덮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고원에 이런 평야가 있단 말인가? 너무나 기름진 땅이었다. 1시간 30여분 달려 목적지인 松江河에 도착하였다.
숙소는 여기서 다시 10킬로미터를 더 가서 백두산 초입의 백계산장 (白鷄山莊)이었다. 버스에서 내리니 기온이 급강하하여 내일 백두산 등정이 불가능할까 염려 되었는데 가이드 왈, 내일은 최고의 기상상태라서 천지의 물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저녁을 마치고 산장의 마당에 나와 하늘을 보니 아주 가까운 위치에 별이 총총하고 달이 낮게 떠있었다. 평생소원이 이루어 진듯하다. 평생에 한번 갈망한 백두산을 찾아온 것이다. 장장 18시간의 긴 버스 여행이었다. 미국 대륙을 횡단하는 시간이었다.
통일만 되었더라면 이 먼 길을 오지 않아도 서울에서 버스로 4시간, 비행기로 한 시간이면 아름다운 진짜 백두산을 볼 수 있을 터인데.........
오는 길에 이색적인 풍경들 중 푸른 옥수수 밭. 고산 대평원의 소산촌 송강하. 노천탄광, 붉은 지붕의 일자집들, 홀홀 벗고 활보하는 사람들. 차는 아랑곳하지 않고 대로를 걷는 모습들, 똑같은 붉은 간판들,
송강하는 백산 제일시에서 가장 백두산에 가까운 도시다. 여기서 북파로 가는 길이 갈린다. 송강하 란 즉 강(江)과 하(河)가 같은 말이어서 송강은 지명이고 하가 강으로 붙어 이른 지명이다.
7월 25일
백계산장에서 30여분 올라가서 고산 화원을 구경하고 20여분 가서 금강 대협곡을 관광하고 30분 더 오르면 백두산 천지 주차장에 이른다. 이곳에서 1,236개 계단을 오르며 백두산정계비가 세워진 서파 정상 장백산에 이른다. 여기서 한번 짚고 넘어갈 것은 백두산정계비 국경해석이다.
북으로 토문강 송하를 경계로 국경을 정한다. 라고 청나라 황제 강희제가 국경선을 그으면서 비문에 적은 것인데 강희제가 국경을 정할 때 조선의 책임자를 불러 같이 정하기로 하였으나 조선의 선비는 춥다고 참석하지 않았고 당시 평안도 관찰사의 낮은 직관을 보냈다. 이자는 청나라가 만든 비문에 조인만 했을 뿐이다.
따라서 조선의 조정은 토문강을 두만강으로 송강을 압록강으로 해석하는 우를 범했다. 청나라 입장에선 훨씬 중국 쪽으로 국경이 그어졌던 것을 조선은 아무것도 모르고 지멋대로 해석하는 바람에 국경이 지금의 국경이 그어졌고 청나라가 그은 국경은 국경선대로 아무도 손대지 않은 채 황무지로 남아 있었다.
그 땅이 소위 말하는 간도였다. 간도는 북간도돠 서간도가 있는데 서간도는 송강의 유역이고 북간도는 토문강 유역이다. 그것을 안 일본이 그 땅을 중국에 판 간도 협약을 맺었고 청나라는 그 땅을 일본에게서 사서 자기 영토로 만든 것이다. 간도는 백두산 정계비상으로 우리 땅이 분명하다.
11. 금강 대협곡(金剛大峽谷)
백두산 천지에서 흘러나온 용암이 협곡을 만들어 기암의 풍치를 형성하고 그 계곳사이로 천지의 물이 흐르는 모양이 장관이다. 곧 허물어져 내릴 것 같은 협곡의 산상엔 협곡의 모양을 따라 나무 널판 마루를 만들어 관광로로 이용하고 있었다. 흑색과 황색의 계곡은 미국의 그랜드 캐년같은 형상으로 관광객의 미관을 즐겁게 한다.
1,200여 미터 관광코스를 돌아 나오면 대협곡의 정수를 다볼수 있다. 높이 80미터 금강 폭포를 보지 못함이 아쉽다.
12. 백두산 천지(天地)
금강대협곡을 나와 30분쯤 버스를 타고 오르며 장엄한 고산 화원이 펼쳐진다. 화원은 천녀 고목사이로 펼쳐진 푸른 잔디속에 수많은 고산 화초가 싱그런 얼굴을 자아내고 있었다. 6월에 절정을 이루는 고산 화원은 7월말이라 꽃이 다지고 앙상한 몰골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데 차츰 더 오르니 아직도 봄이 남아 야생화를 볼 수 있었다. 천지 주차장을 향하여 꼬불꼬불 돌아 버스에서 보는 풍경은 알프스를 보는 풍치다. 푸른 산허리가 장엄할 뿐 아니라 아름다운 자태를 보이고 있다. 멀리 백두산 용암분출자국이 하얗게 올려다 보인다. 30여분 오르니 천지 주차장이 나왔다.
이곳까지 운영하는 차량은 중국정부 소속 관광공사 버스였다. 버스에서 내려 푸른 잔디속의 야생화 군락을 보며 1,236개의 300여 미터 계단을 숨 가쁘게 오른다. 인력거가 이색적이다. 이용료 우리돈 20,000원 정도.
힘들게 계단을 높이 300여 미터 1200개 계단을 정상에 올랐다. 백두산과 천지가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최상의 날씨다. 물은 별로 많지 않았으나 동, 서, 남, 북파를 따라 오른 봉오리 사이로 깊은 용암 분지 안에 파란물의 천지를 보는 순간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장백산 천지, 난 분명히 백두산에 왔는데 이곳은 백두산이 아니고 장백산이었다. 멀리 백두산 최고봉인 북한의 백운봉이 보인다. 망원경으로 보니 초소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내 숙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백두산에 한번 올라라 했는데 뒤늦게 이루어 진 것이다. 다만 북파의 장백 폭포를 못 본 것이 아쉽다. 난 우리나라 최고봉에 올라 남아의 기개를 펴며 건강과 미래의 구상을 해본다.
이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질 것 같았다. 사실 백두산엔 국경이 분명치 않다고 한다. 경비병이 북으론 한 발자국도 들어 놓지 못하게 지키고 있었다. 천지풍경에 젖어 한동안 백두산을 감상하고 있다가 숨을 돌렸다. 하산하면서 천지에서 새어나와 바위 사이로 흐르는 물에 손을 담가보았다. 살을 에는 듯 차갑다. 백두산 정기가 짜릿한 감흥으로 온몸에 배여 들었다. 서파 행 관광객은 거의 중국 사람들이 많았다.
13. 고산 화원(高山花園)
서파의 산 준령은 온통 화원이다. 고목과 화원이 어우러진 곳이다. 고산화원은 6월에 절기를 끝내고 앙상한 꽃대만 남아 있었다. 그러나 정상엔 아직 봄 기운이라 키 작은 야생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6월 중순에서 9월까지 백두산 고산화원은 1800종의 꽃으로 온통 야생화 천국을 이룬다고 한다.
초지와 야생화 아름답게 펼쳐져 내리는 산언덕이 한 폭의 그림 같다.
14. 쌍 제자하
하산하는 길에 버스에서 내려 제자하를 구경하였다. 두 개의 제자하가 흘러 쌍제자 하라고 한다. 제자하는 용암이 흘러 생긴 지칭 사이로 물이 흐르는 것이다. 땅 밑의 강이란 뜻이다. 즉 지하수로 흐르는 물길을 지표에서 볼 수 있다. 백두산은 용암층이어서 모든 물은 지층사이로 흐른다. 천지의 물은 그렇게 빠져 나가는 것이다.
쌍저하를 나와 달리는 하산길에 광활하게 펼쳐진 고원에 하늘을 찌르는 천년 고목들이 나뒹어져 있었다.
버스는 다시 장백산 초입에 멎는다. 백두산 관광의 끝이다.
백두산 등정은 서파와 북파(중국령) 남파와 동파(북한령)로 나누는데 남파 동파는 갈수 없고 서파와 북파로 오를 수 있는데 북파는 산상까지 차가 오르는 행로이며 장백폭포와 유황 온천을 구경할 수 있는 곳이고 서파는 1200개 돌 계단을 오르는 험한 코스이다
이번 기행에서 북파의 장백폭포를 보지 못함이 아쉽고 더욱 분한 것은 백두산 제일봉인 백운봉(북한)을 오르지 못 한 것이다.
다시 버스를 타고 백계산장을 떠나 송강하를 지나오던 길을 되돌아 환인으로 4시간 여정이 시작되었다.
Ⅴ.환인(桓仁)
7월 26일
15. 고구려 첫수도 桓仁(졸본성)
고구려의 수도를 오녀산성이라고 하는데 오녀산성은 제2의 행성이고 본 수도는 환인에 있었다. 비류수 S자형의 중앙에 차지한 환인성은 S자의 상부의 졸본서성 쌍료현 동명향이거나 S자 하부의 졸본동강, 공주령시 회덕진 이라고 짐작한다.
고주몽은 졸본국의 고득막하의 손녀의 사위이다. 배다른 세 아들 중 장자는 첫부인인 부여국 여인에게서 난 유리 왕자, 고두막하의 공주 사이에서 난 비류, 소서노와 사이에서 난 온조 이다. 3왕자와 소서노 왕비 간에 왕권 다툼이 벌어져 서로 원수가 되어 피토하는 왕권다툼을 하다가 헤어진다. 장자는 고구려 태자가 되고 차자는 계모인 소서노를 따라 남하하여 한강유역에서 비류백제를 만들고 삼자는 어려서 못 데리고 왔는데 자라서 요서로 가서 대방을 정복하고 요서백제를 세운다.
16. 졸본성(홀승골성/오녀 산성:五女 山城)
오녀산의 오녀산성을 고구려 수도라고 하지만 이곳은 졸본국의 수도이며 고구려 제2의 행성이다, 고구려는 항상 두 개의 도성을 가졌는데 도성 안에 도성을 가지고 있었다. 환도 산성은 국내성 안에 있었으나 오녀산성은 환인성 밖 오녀산에 있었다.
오녀산성은 5명의 신녀가 살았다고 해서 오녀성이라고 불렀다.
870미터의 기암절벽의 산상에 가로 1500미터 세로 300미터 높이800미터에 존재하는 성이며 수도이다. 이성에 오르려면 버스로 20분을 올라 해발 500미터에서 980개 계단 300미터를 오르면 산성에 도달한다.
이곳이 졸본의 수도이며 고주몽의 장인이 다스리던 성이다. 산상에 오르며 궁궐터가 나오고 천지란 연못이 있다. 당시엔 180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온돌의 주거지가 나오고 성각을 지키는 지장 대와 식량을 운반하는 행로가 나있다.
해발 800미토 고성에 어떻게 생필품을 옮길 수 있었겠는가. 아무튼 정주한 수고가 아니고 난을 피해 임시로 거주한 수도임이 틀림없다.
오녀산성은 세계에서 유래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 성벽 수도라는 것이 불가사이 하다.
17. 상고 성자 와 하고 성자.
상고 성자는 고구려 적석총 무덤 군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하고 성자는 바로 고구려 수도인 것으로 추정된다. 한인성에 있는 무덤 군이다.
18. 주몽이 달리던 환인호 유람
주몽이 부여군에 쫓겨 잡힐 위기에 놓였는데 비류의 거북들이 나타나 주몽을 건너 주었다. 그리고 강을 건너 환인에 도읍을 정하였다. 혼강(비류수)에 댐을 막아 유람객의 피로를 풀어주고 있었다. 30여분의 왕복 고주몽이 거북을 타고 강을 건너던 코스를 체험해 보는 맛도 한 운치를 더했다.
7월 27일
19. 심양을 떠나면서
아침을 먹고 호텔 체크아웃을 마치고 곧장 공항으로 가면서 청나라 고도 심양의 시내를 가로 질러갔다. 이곳은 분명히 우리 땅, 고조선, 고구려, 발해였는데, 그리고 이 땅에서 또 우리의 조상이 건국한 요나라, 금나라, 후금,(청나라)은 중국사로 편입되어 버렸으니 누구의 잘못인가......
인질로 잡혀온 5만의 병사와 10만의 조선 여인들 중 5만은 환향했으나 5만 명은 청나라 인종 개량의 산모가 되었고 그녀들이 낳은 17만 호로자식들은 청나라 발전에 위대한 공적을 남겼다. 대장군, 김영, 도르곤의 왕비 항보실 등 그들은 청태종이 기대한 인종개량의 승리였고 그 후예들이 지금 이 땅에서 모친의 조국이 어딘지도 모르고 살고 있다. 드넓은 대륙, 기름진 땅을 바라보니 그들이 생각난다.
한산한 거리, 일자리기 벌로 없는 탓인지 러시아워인데도 차량이 뜸하고 자전거행렬도 변변찮다. 늙은 도시였다. 한 때 일본이 만주국을 세웠을 땐 모든 자본과 기술이 이곳으로 옮겨져 중국 동북3성은 중국의 중요 공업지대였는데 그때의 산업은 노쇠하여 사라지고 지금은 한적한 전원의 농업도시로 전략하여 그 명성과 맥을 잃고 말았다. 중국의 5대 도시라고 하지만 강남과 화북의 도시에 비해 너무 낙후되어 있었다. 앞으로 동북개발이 활발하게 추진되면 다시 활력을 기대한다.
이번 여행은 중국을 여행한다는 것보다 고구려 유적을 탐방하러 갔다는데 의미를 두지만 속지주의 문화재, 우리 문화재가 중국에 있으니 우린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중국의 문화를 탐사 했을 뿐이다.
감명 깊은 것은 백두산에서 보는 천하. 한. 중 국경 압록강에서 보트를 타고 북한의 산하를 턱밑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는 것이며 불편한 것은 중국의 화장실 문화다. 도시는 덜하지만 시골은 불쾌하기 짝이 없다. 여행 내내 화장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고 심지어는 식사조차 못했다.
아, 고구려, 잃어버린 땅 .......비행기는 1시간 20분 만에 인천에 도착하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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