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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은 본래 낙안군 으로서 침략자 일본의 간섭에 의해 폐군의 설움을 안고 순천군에 편입된 고장이다.
경술치국 이후 라인영씨 등 애국지사들은 경술 조약에 반대하는 격문을 일본 통감부에 보내고 오적을
암살하기 위한 거사를 준비했던 분들이다.
그후 이병채, 안규휴, 안주환, 안덕환, 안규진, 이한역, 안계순, 서병기 김기석씨 등이 각처에 격문을 보내고 일진회의 반역 행위를 규탄하기도 하였다.
그후 서울에 계시던 안호영 선생께서 기미 2월말경 독립선언서와 각종 밀서를 내의 속에 은밀하게 숨겨
향리인 낙안에 내려와 김종수(하송), 안덕환(신기) 등과 함께 항일 독립운동을 하기로 밀약을 하고 박태문, 곽인석, 김선재, 안규삼씨 등과 함께 모임을 갖는다.
이에 뜻있는 분들이 합세 하는데 전평규, 안용갑, 안응섭씨등 33인이 서명(서울33인과 같은맥락)하였다.
이들은 일본 헌병들의 감시를 피해 3월 2일밤 다시 모여 도란사 라는 모임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도란이란 고대 중국 한나라 명장인 관우, 유비, 장비의 도원 결의와 진나라 문사들의 란정에 모여 모임을
갖던 일에서 두 글자를 빌려 도란사라 이름 짓고 다음 3월5일 밤 김천근의 집에 다시 모여 다른 이름인 이팔사를 갖기에 이른다.
2.8 이란 일본에 있는 우리 유학생들이 청년회관에 모여 대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 독립만세를 외친 날로 이팔청춘의 기백으로 용감하게 싸우자는 뜻이 담겨있다.
이들은 오리를 잡아 피를 나누어 마시며, "오등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동일 동시에 죽기로싸우자"고 외치며 천지 신명에게 맹세하고 도란사가 모체가 되어 2.8 사에 이르고 만일에 대비 투옥되거나 유족 돕기 후원체인 혜지사를 결성하였다.
신기리 사람들의 만세운동
1919년 4월 9일 벌교 장날을 기해 1대대장인 안덕환을 선두로 강정수, 김남득, 신용석, 정인채. 전평규, 안용갑, 한철순, 한흥량등이 벌교 강억서가 운영하는 음식점에 모여 회식을 갖고 많은 주민들과 함께 벌교 장좌리 아랫 시장에 이르러 장에 모인 사람들과 합세하여 만세를부르니 온통 시장 안은 만세 시위장으로 변해 시장 안은 태극기의 물결과 만세소리가 하늘에 진동 하였으며 이를 본 일본 헌병들도 당황하고 어쩔 줄 몰라 하였고 그들의 간장을 서늘하게 한 가운데 많은 부상자를 내고 체포되었다.
하송리 사람들의 만세운동
서울에 있는 동향인 안호영으로 부터 서울에서 가져온 밀령을 접수한 김종주와 유흥주는 신기리 안덕환,곽인석,박태문등과 긴밀히 연락 하고 하송리를 주축으로 한 거사 준비를 한다.
우리 고장 낙안에서도 이러한 애국지사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후손만대에 기리고 또 자랑삼아 이어 가야 할 것이다. 성명 안용갑(安鏞甲) 생존기간 1889. 4.24 ~ 1947. 1.16 출생지 전남 순천 운동계열 3.1운동 사망지 훈격(연도) 애족장 (90) 공적내용 전남 순천(順天) 사람이다. 1919년 4월 3일 전남 순천군(順天郡) 낙안면(樂安面) 신기리(新基里)에서 동지 33인과 같이 이팔사(二八社)를 비밀결사로 조직하였다. 동년 4월 9일과 13일 보성군(寶城郡) 벌교읍(筏橋邑) 장날에 운집한 다수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피체되었다. 동년 7월 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20년 4월 29일에 소위 은사 감형되어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신분장지문조회회보서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328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576·594면 독립유공자(공훈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