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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십자회 비경
영원한 부모
장미십자회의 비경에는 창조에 대한 이러한 잠언이 들어 있습니다
첫 번째 잠언 1. 영원한 부모는 우주적 밤의 고요 속에 감싸여 있었고 빛은 없었다 성령의 불꽃이 다시 타오르지 않았기에. 변화는 다시 시작되지 않았고 형상도 다시 스스로 나투지 않아서 그곳엔 시간도 사물도 존재하지 않았다 행위의 대상이 없었기에 그곳엔 행위도 없었다 음양을 나타내는 사물이 없었기에 그곳엔 이원성도 없었다 영원한 부모는 원인없는,나뉠 수 없는,변화없는 무한한 무의식 속에서 꿈 없는 잠을 자며 휴식하고 있었다 영원한 부모 이외엔 존재하지 않았다
창조에 관한 첫번째 잠언에서 장미십자회 수련생은 『만물이 그로부터 유래한』 만물의 무한한 근원인 영원한 부모에 대한 개념을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됩니다 장미 십자회는 이 영원한 부모- 무한한 무의 상징을 안과 밖에 아무것도 없는 원으로 표현합니다 원은 한계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비록 원이 무한을 나타내는 최선의 상징일지라도 무한성을 유한한 형태로 나타내는 것은 불가능하지요 영원한 부모를 나타낼 유일한 상징은 무한한 우주일 것이며 이 역시 기호로서 나타낸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원을 크게 그린다 해도 우주는 그 경계를 넘어갈 테니까요 상징으로 나타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한 고대의 장미 십자회는 무한한 무의 상징으로 가장 의미가 가까운 텅 빈 원을 사용했지요
장미 십자회는 무한한 우주를 무한한 무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개념으로 여겼습니다 사실상 무한한 무는 의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물이 아니며 의식은 오직 사물만을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니까요 엄밀히 말하자면 『사물』이 아닌 무한한 무의 『무』는 『아무것도 없음』이 아니라, 오히려 『무제한의 모든 가능성』을 내포합니다
무한한 우주는 사물로 간주될 수 없지요 사물의 특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존재 가능성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무는 무-존재로도 표현될 수 있는데 여기엔 무한한 존재의 가능성이 창조의 무한한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무한한 우주는 존재이든 비존재이든 모든 것을 감싼 절대적 공간일 겁니다 무한한 우주의 바깥은 오직 무일 것이며,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무한한 우주엔 바깥이 없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무한한 우주는 늘 신비롭고 심원한 상징이었습니다 그 상징을 통해 우주적 밤의 고요 속에 감싸인 영원한 부모-무한한 무를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고대의 신비한 교리문답에는 이런 질문이 있지요 우주가 존재하든 안하든, 신들이 존재하든 안하든 늘 존재해 왔고 지금도 존재하며 앞으로도 존재할 것은 무엇인가? 답은 공간입니다 무한한 무를 나타내는 무한한 공간의 상징의 힘은 마음이 무한한 공간의 부재나 창조 이전의 부재 혹은 파괴 후의 부재를 생각하거나 상상하려고 할 때 인식됩니다
물론 인간의 마음과 인간의 상상으로 창조 전과 파괴 후의 공간의 소멸을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마음은 지금 존재하는 무엇이든 과거 현재 혹은 미래에 언제든 사라질 가능성에 상관없이 공간은 무한하며 영원한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동시에 마음은 공간을 사물로 규정지을 수 없으며 무로 간주할 수도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하여 무한한 공간은 늘 영원한 현재이자 사물의 유한성으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운 것으로 인지하게 됩니다
게다가 무한한 우주는 보이지 않고 다른 감각들로 알 수 없으며 존재로서 인식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보면 언제나 결론은 하나입니다 『이도 저도 아니다』 이는 옛 현자가 실체에 관해 말한 내용에 부합합니다 『존재의 실체는 속성과 형태와 특징이 없으며 절대적인 것보다 절대적인 것이다 이는 우리가 아는 바와는 다르며 우리는 그것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말과 생각으론 이를 표현할 수 없다 그 본질을 생각하며 침묵하는 것만이 현명한 대답이다 그것의 특성과 특질과 속성을 탐구하는 모든 생각들이 찾는 답은 간단하다- 아니 아니오-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 이는 현명한 이들이 말하는 답이다』 그리고 다른 현자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상상과 지성과 추상적인 생각으로 무한함을 설명하려는 것은 헛된 노력이다 유한한 형태는 무한을 (생각과 말 또한 포함해서) 표현할 수 없다 유한한 것들은 영원함과 불변함을 표현할 수 없으며 인과의 사슬로부터의 결과를 생각할 수가 없다 무한함은 이유가 없고 독립적인 것이다 우리는 현시가 일어나기 전에 존재의 본질의 무한한 비 현현함을 생각해 보면서 모든 방법과 시각을 동원해 우리는 무한한 우주의 개념이 고귀하고 가치 있는 존재의 실체를 상징함을 알았습니다
첫 번째 잠언은 영원한 어버이가 우주의 밤에 깊이 잠들어있다고 말합니다 이 문장은 우주의 낮과 밤은 관련된 가르침을 언급하고 있으며 많은 명칭이 있는 우주의 낮과 밤은 모든 비전의 가르침과 오컬트 철학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가장 고등한 인간들과 초인들 지성으로 리듬이 우주 속에 존재하는 것이 확실하다는 사실과 명백한 존재들의 가장 작은 부분에서 존재의 모든 부분까지 리듬이 언제나 명백히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최고의 오컬트 정보 자료에서 찾은 사실을 보면 모든 존재들은 스스로 우주의 낮이라 불리는 현시의 기간과 뒤이어 따라오는 우주의 밤이라 불리는 비 현시의 기간에 번갈아 가면서 머문다고 합니다 우주의 밤 동안에 영원한 어버이는 마치 의식이 없이 꿈이 없는 잠에 빠진 것처럼 존재하며 새로운 우주의 낮이 밝아옴에 따라 차차 눈을 떠 현시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주의 낮이 차츰 황혼으로 바뀌고 모든 것이 또다시 정지하고 고요해지면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우주의 밤의 어둠으로 빠져듭니다 이렇게 무한한 반복과 무한한 리듬 속에 우주는 낮과 밤을 연속해서 나타내는 것이며 이는 현시와 비 현시를 의미합니다 이는 영원토록 지속 되어 왔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지속될 것이며 끝나거나 방해 받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인류의 현자들이 밝혀낸 것입니다 위대한 오컬트 스승은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글로 남겼습니다 『비전의 교리는 불교와 브라만교와 심지어 카발라와 같이 무한한 미지의 실체는 영원과 활기차기도 하고 소극적이기도 한 정기적이고 조화로운 반복 속에 존재한다고 가르친다
마누의 시를 보면 이러한 상태를 범천의 낮과 밤이라고 표현해 놓았다 또한 깨어남과 잠듬으로도 부른다 활기가 가득 찬 기간에 접어들면 비경에서는 내면이 아닌 외부에서 영원불변의 법칙에 따라 신성한 존재가 팽창하기 시작하고 점차 활기를 띠는 우주력의 긴 사슬의 최종적인 결과로 인지할 수 있는 우주를 보게 된다고 설명한다 마찬가지로 소극적인 기간이 도래하면 신성한 존재가 수축되기 시작하며 앞에서의 창조 활동이 점차 처음으로 돌아가게 된다
볼 수 있던 우주가 분해가 되면서 요소가 흩어지고 어둠과 고독과 외로움이 닥치며 병아리들은 또다시 깊은 수심에 잠긴다 비경에서 나온 미지의 존재가 숨을 내쉬면 세상이 만들어지고 숨을 들이쉬면 세상이 사라졌다는 암유를 사용하면 개념을 더 명확히 전달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모든 영원의 세계와 우리의 현 우주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시작과 끝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연관 관계에서 허버트 스펜서 파의 학자들은 고대의 신비주의 이론과 가르침에서 그들의 현대 스승의 가르침의 튼튼한 기초를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리듬의 활동과 우주적 존재에 관한 스펜서의 가르침은 옛 신비주의 가르침의 아류인 것이다 진화에 관한 현대의 예언자의 펜으로 쓰여진 다음 글을 주목해 보자 『명백히 우리가 본 우주적으로 공존하는 흡인력과 배척력들은 우주 전체를 통해 모든 작은 변화들에 있어 리듬을 필요로 하며 전체가 변화하는 데에도 리듬을 필요로 하는데 이 힘들이 흡인력이 지배하는 측정할 수 없는 우주적 응축의 기간을 생성하며 또한 배척력이 지배하는 측정할 수 없는 우주적 확산의 기간을 생성하는데 이 두 기간들이 진화와 해체의 순차적 반복의 시기인 것이다』
이 첫 번째 격언은 계속 말한다: 『빛은 없었다 영혼의 불꽃이 아직 지펴지지 않았기에』 이것은 반만의 진리로 다른 반 쪽 진리의 존재를 모르는 채 무한의 현실을 영혼으로 간주하여 불꽃이 당연히 그것의 신비주의적이며 심오한 상징으로 생각하던 이들에게는 난해한 말로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가장 겸손한 스승들에 의해 알려진 최고의 고대 지혜는 알 자격이 있는 이들에게 모든 진리를 가르쳤으니 그것은 물질 뿐만 아니라 영혼의 배경에도 영원하며 무한한 영혼도 아니고 물질도 아닌 영혼과 물질의 무조건적인 근원이며 원천인 본질적인 정수가 있음을 알려 주었다
영혼에 대한 두 가지의 신비주의적이며 심오한 우주적으로 알려진 상징인 빛과 불꽃은 그 배경에 『빛도 없고 열도 없는』빛과 열의 본질적인 정수가 있는 것이다 무한한 현실은 빛이나 불꽃이 아닌 빛 혹은 불꽃으로 표현된 영혼의 정수다 학자들이 등불이나 촛불 가스 불이나 다른 종류의 물리적 불꽃을 숙고해 본다면 이 진리를 아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즉 그는 중앙의 불꽃 아래에 검고 투명한 무언가가 존재하며 그것이 바로 불꽃이 계속 타며 자양분을 얻고 지원을 받는 본질적인 정수임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신비주의 전문 용어로 이 존재의 높은 차원에 상응하는 것은 검은 불꽃이라 불리는데 그것은 불꽃이나 빛이 아닌 불꽃과 빛의 본질적 정수인 것이다 고대의 작가가 말했듯 본질적인 정수는 불의 기운이지 불 자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불의 특성인 열이나 불꽃 빛 등은 본질적 정수의 특성이 아닌 본질적 정수가 원인이 된 불의 특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잠자고 있는 영원한 부모인 무한한 비현현에 대해 학자들은 우리들이 자주 그렇게 생각하듯이 영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불꽃이 태어나고 그 안에서 보존되는 순수한 공간인 것이다 여기에 긴밀한 추론 및 구분이 있는데 계속 나가다 보면 학생들에게 명확해 지겠지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사안이다
첫 번째 격언은 덧붙여 말한다 『시간이란 없었다 변화가 시작되지 않았기에』여기서 다시 한 번 시간의 올바른 뜻을 이해하지 못한 학자들에게 난해한 문구가 있다 순전히 철학적인 의미에서의 시간적 어의는 존재의 연속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변하는 존재에 대한 측정』인 것이다 지속되는 존속 중에 아무런 형태의 변화나 활동의 변화 정도의 변화 정신적 물질적 변화가 없는 것이 시간이 없는 영원이다
사실 시간은 『변화의 측정』에 불과하다 변화 없이는 앞서 말한 것에 부합하는 시간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순수한 존재는 시간을 현현하지 않는다 시간이란 무엇이 되는 혹은 변화의 결과이며 항상 변화나 무엇이 된 것으로 측정되어 지는 것이다 현대의 한 교과서에서 발췌한 아래 문구가 순수한 연속성과 시간의 개념의 차이를 지적하는 것에 도움을 줄 것이다
『순수한 연속성이란 사물의 변화의 진행 상황에 관계 없는 개념이다 반대로 시간은 명백한 천상 물체들의 회전이나 지구가 지축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것 같은 특정 현상들로 점철되는 어느 연속의 부분에 대한 섬세한 측정인 것이다 우리의 시간 개념은 운동 상황에서 유래한다 특히 규칙적이며 안정된 천상에서 일어나는 움직임들은 그들의 완전한 상호 간의 근접성들로 인해 그것과 공존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시간이라 불리는 지속적이며 연속적인 수량에 대한 정확한 측정 도구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간이란 연속적인 움직임에 대한 인지된 수로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천상의 물체들이나 지구의 움직임에 근거한 시간은 흔히 그런 움직임에 기초한 도구들인 손목 시계나 벽시계 해시계 등으로 측정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깨어있는 상태와 꿈에서 우리의 마음상태와 생각 그리고 심상 등의 변화를 통해 시간의 흐름을 인식한다 그런 변화의 인식으로 우리의식에 나타나는 외부세계의 변화나 우리 마음상태의 변화없이는 우리에게 시간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가설의 영원 불변의 현실이 된다 외부세상은 누구를 위해서도 누구에 의해서도 존재하거나 현시되지 않는다
첫번째 격언에 묘사되어진것처럼 그것은 무의식과 꿈없는 잠속에 싸여있다 그런 현실이기에 시간은 존재할수 없다 -시간없는 그 자체로 존재할 것이다-시간이 없음은 변화가 다시 시작될때까지 지속된다 그러므로 학자는 우주의 밤의 잠에 빠진 영원불변의 근원에 대한 첫번째 격언의 필연적인 진리문구를 이해할 것이다 『변화가 시작되지 않았으므로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시간의 속성과 영원불변한 근원의 우주의 밤동안 변화가 없었음을 고려하면 다른견해를 수용하기는 불가능하다 학자는 가설의 무한한 실존과 변화의 부재를 이해할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순수한 존속과 시간의 부재를 가정해야만 한다 이 결론에서 논리적인 회피란 있을수없다
첫번째 금언은 더 명시하길: 『형태가 그자신을 재현하지 않았으므로 사물은 없었다』 여기서 다시 우리는 회피할수 없는 확신을 얻는다 사물이란 『분리된 실체와 분리가능하거나 구별가능한 생각의 대상으로써 존재하는것 또는 존재한다고 생각되는것』이다 모든 사물은 형태로 나타나야 한다 형태는
(1) 그것을 구성하는 물질로부터 구별되는것으로써 어떤것의 모양 또는 구조 그러므로 어떤것의 형태나 외형
(2) 감각이나 지성을 통해 감지되는 어떤 것의 형태화 또는 운동양식
(3) 개념을 구성하는 특성들의 집합 또는 존재하는 것이 그렇게 존재하도록 만드는 내부구조
엄격히 말해 사물은 그것을 다른것으로부터 구별시키는 특성 속성,특질의 구성으로 생각되어지거나 상상되어질수 있어야한다 그러므로 모든 사물은 감각과 지성으로 그렇게 구별되어지고 인지되어지기 위해 형태로 화현돼야 한다 영원불변한 근원은- 무한한 비현시- 그것이 비현시 상태에 있을 때엔 분명한 형태로 생각되거나 현시의 어떤 특정한 특성, 특질 또는 속성으로 표시 또는 나타내어질 수 없다 영원불변한 근원이 현시의 덮개를 가질때 그것은 사물의 모습으로 화현하기 시작한다 -이 사물들은 각각 다른 현시된 사물로부터 구별되는 어떤 특성,특질 속성과 형태로 나타난다
이것은 형이상학과 철학에서 자명하다 비현시는 어떤 특성 특질,속성의 세트를 (핵심적 본질에서) 가지거나 나타낼것으로 생각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나중에 사물의 현시에서 반대되는 특성, 특질 속성과 구별됨으로써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현시는 반대되는 두개의 특성 특질,속성의 세트를 (핵심적 본질에서) 가진다고 생각될 수 없다 『반대인 것은 서로 상쇄』되고 그것은 『모순되는 조건』이기때문이다
특성, 특질, 속성을 가지는 대신에 -또는 형태, 이 단어의 모든 의미에서- 비현시는 『그것의 현시에서 형태, 특성, 특질, 속성의 무한한 현시가능성』또는 『그것의 현시된 사물에서 형태, 특성, 특질, 속성의 무한한 현시가능성』을 가지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무한한 비현시는 물상이나 그것 자체로 또는 무한한 상징으로 간주될 수 없다 계몽된 신비주의 스승이 표현한것처럼 이것은 『모든 추측이 불가능함을 고려할때 무소부재하며 영원하고 무한한 불변의 법칙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인간개념의 힘을 초월하고 인간의 모든 표현과 그 유사물에의해 위축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생각의 범위를 넘어선다 -이것은 생각할 수 없고 말해질 수 없다』
우주의 밤동안 무한한 비현시 외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무한한 비현시로 보여지는 것이다 『형태가 그자신을 재현하지 않았으므로 사물은 없었다』 이 결론에서 논리적 회피는 있을수 없다 첫번째 격언은 더 명시하길: 『움직일 사물이 없었으므로 움직임도 없었다』 이 말은 설명이 거의 필요없다 거기에는 존재하는 사물도 움직일 사물도 없었다 그리고 무한의 모든 움직임은 물상을 통해 의해 또는 그속에 있다
모든 움직임은 변화가 필요하고 변화가 없는 곳에는 움직임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무한한 비현시는 모든 힘을 가졌기에 무력하게 간주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그 자체가 추상적인 움직임이므로 부동으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 제한된 관점에서말할때 영원불변의 근원은 그것의 무한한 비현시 상태에서 상대적인 움직임과 비교해서 절대적인 휴식의 상태같은 무한한 움직임의 상태에 거주한다고 말할 수 있다
첫 번째 격언에는 더 명시되길: 『양극을 나타내는 사물이 없었기에, 거기엔 반대되는 속성이 없었다』 모든 철학도들이 알고 있듯이혹은 알아야 하듯이 모든 사물은 고유의 속성과 특성의 결합체이다 각 속성과 특성은 양 극단의 한 부분 반대적인 것의 일면을 구성한다 사물로서의 한 가지 속성혹은 특징이 주어져 존재화되면 그것과는 정반대되는 다른 『극』이 뒤따라 필연적으로 생성된다
이 법칙에는 예외가 없다 처음에는 반대되는 것이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끊임없는 추구는 그것을 드러낼 것이며 그것의 필연적 존재는 논리적으로 예측될 수 있다,반대 되는 것엔 이런 것이 있다 단단함과 부드러움 뜨거움과 차가움 크고 작음 멀고 가까움 위와 아래 낮과 밤 빛과 어둠 길고 짧음 등. 우리의 언어가 발견된 속성, 혹은 특성의 반대되는 용어를 규정하는 일에 실패했을지라도 반대말은 무나 유같은 접두어를 붙여 표현할 수도 있다
어떤 사색가들은 무한이라는 단어의 반대적 속성으로 유한을 사용해 왔다 하지만 이 용어는 별로 적합하지 않다 무한이라는 단어는 한계와 경계의 부재 혹은 형상이 없음을 가리키며 크기와는 상관없이 어떤 한계도 속박도, 형상도 아니다 무한한 무를 이미지로 형상화하거나 그것이 무엇이든 객관적 실재성 모양 속성 혹은 특성으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그러므로 무한의 진정한 반대말이 아니다 이것은 오직 반대되는 특성 혹은 양극이 존재화되기 시작할 때 가능하다
무한한 무(무)는 무한한 창조의 가능성을 배재하고 있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의 혹은 여러 속성과 특성을 부여 받는다 하지만 무한한 비현시 그자체- 영원한 부모의 본질 안에는 이원성 혹은 반대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첫 번째 격언의 귀절들을 탐색하길 원할 때 다른 곳처럼 여기서도 학생들은 무한한 공간이란 상징을 통해 무한한 비현시를 생각하도록 인도된다
첫 번째 격언은 마침내 이렇게 끝을 맺는다 『영원한 부모는 원인없고 불가시적이며 변화도 없고 무한하며 무의식과 꿈 없는 잠 속에서 쉬고 있었다 영원한 부모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실재든 비실재든』 영원한 부모는 원인이 없으며 스스로 존재한다 무는 모든 만물을 만들어 내는 영원하고 근원적인 존재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영원은 필연적으로 원인이 없어야 한다 무한의 원인이 될 수 있는 건 없다 또한 무에서 나올 수도 없을 것이다 무에서 무를 창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원한 부모는 보이지 않으나 확연히 존재하는 것과 같다 분리되거나 조각으로 나뉠 수도 없다 본래는 조각이나 입자로 구성되어 있으나 조각이나 입자로 구성된 것은 조각이나 입자의 집합체에 불과할 것이며 실체나 단일체는 아닐 것이다 더욱이 무한은 본질인 무한성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조각이나 입자로 분리될 수 없다 분리된 무한은 더 이상 무한이 아니라 단지 유한한 것의 집합체일 것이다 절대적인 불가시성은 진정한 단일성과 무한한 존재로 예측될 수 있으며 이러한 논리적 결론에 예외는 없다
영원한 부모의 본질은 변화하지 않으며 확연한 것과 같다 영원한 부모는 무한히 변화할 수 있지만 여전히 그 본질은 같으며 결코 다른 것이 되지 않고 그 자체로 존재한다 더욱이 근본적으로 속성과 특성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므로 반대되는 양 극으로의 변이를 겪을 수 없다 형상이 없기에 형상의 변화를 통해 발생하는 변화도 겪지 않는다
영원한 부모는 절대적 불변성을 지니고 있다 이 논리적 결론의 예외는 없다 영원한 부모는 무한하고 확연히 존재한다 영원한 부모는 제한되거나 한정되거나 속박되거나 원인이 있거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는 절대적이고 본질적이며 궁극적이고 기초적이며 어떤 것에도 묶이거나 제한되지 않는다 영원한 부모는 절대적 불변성을 지니고 있다 이 논리적 결론의 예외는 없다 우리가 시간적 존재나 무존재의 상태를 알고자 할 때 진보적 형이상학자와 철학자들은 『무의식,꿈 없는 잠』에서 휴식하던 영원한 부모를 논리적 필연성으로 받아들인다
모든 형이상학자와 철학자들이 알듯이 의식은 (그것이 꿈일지라도) 변화 없이는 불가능하다 변화 없는 의식 상태는 오직 무의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철학도는 무한한 무의식을 『의식에 비해 열등한』것으로 간주하는 오류에 빠져서는 안된다 오히려 무한한 무의식은 평범한 의식을 『뛰어넘는』 무한한 초의식의 상태- 활동 없이 늘 『의식의 가능성』이 존재하는 초월적인 의식의 상태를 뜻한다 평범한 의식은 이러한 의식 상태의 상승이 아니라 하강을 의미한다
이 차이는 중요한 것으로, 철학도는 이것을 놓쳐선 안된다 우리가 알게 된 바와 같이 창조가 시작되면 마침내 영원한 부모는 무한한 우주의 『꿈』을 꾸기 시작할 것이며 음과 양이 서로 맞물려 연쇄적으로 존재한다 영원한 부모가 완전히 꿈에서 깨어나 무한한 자의식의 밝은 대낮으로 들어갈 때만이, 완전한 『깨어남』과 의식으로 인식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잠언을 묵상하며 나아갈 때,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영원한 부모 외에는 실제든 현현한 것이든 아무 것도 없었다』 여기서 다시 우리는 자명한 진리를 본다 다른 실존의 존재는- 무한하며 절대적인 현실과는 다른 그런 실재하는 존재는- 있을 수 없는 이유는 무한함과 절대성의 속성은 그 내면적 속성이 혼자이며 하나이고 유일함을 뜻하기 때문이다 무한한 현실에는 다른 현실의 존재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현현이 없는 경우에는 무한한 비현현의 시기에 존재하는 현현된 (나타난 혹은 창조된 것들)사물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 결론에서 빠져나갈 길은 없다
결국 학자들은 우주의 밤인 무한한 비현현의 상태에서의 영원한 부모 문제에 관해 첫 번째 격언의 문장에 있는 내용들의 진리를 받아들이기가 어렵거나 거의 불가능하다고 느낄 때는 다시 한 번 무한한 공간의 상징에 의존해야 할 것이다 그 상징은 학자로 하여금 『무한한 비현현을 생각하는』상황에는 충분히 적절한 것이다 물론 비록 그것이 대표하는 현실이나 상징을 머리 속에서 그리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라도 말이다 에드가 앨런 포우는 『무한함』의 관념이나 개념 및 생각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인간의 마음이 경주한 비슷한 노력들에 대해 다음 같이 잘 표현했다
『이 간단한 말들과 거의 모든 언어들 속에서 그 동의어가 존재하는 다른 종류의 표현들은 관념 자체의 표현이 아니라 관념을 표현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다 불가능한 개념화에 대한 가능한 시도를 대변하는 것이다 인간은 이 노력의 방향- 영원히 보이지 않는 이 시도의 목표가 그 뒤에 있는 구름-을 알릴 수 있는 용어가 필요했던 것이다 인간이 인간의 지성이 갖는 특정한 경향으로 다른 인간과 즉시 관계 설정을 하도록 수단이 될 수 있는 그런 적절한 단어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 중에 이 용어가 파생되어 대표하게 되었지만 그것은 관념의 관념을 대표하게 된 것이다
이 관념의 관념을 지칭하는 이런 류의 용어들을 내뱉자마자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자신이 개념에 대해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의 정신적인 비전을 해결되지 않은 성운이 있는 지성의 창공에 있는 어느 특정 지점으로 방향 설정을 해야 하는 것으로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진정 해결하기 위해 그는 본능적인 통찰력에 의해 어떤 노력도 하지 않게 되는데 그것은 그자체가 불가능하기도 하지만 모든 인간들의 목적에 그 해결이 중요치 않은 때문이다 그는 즉각적으로 그것이 어떻게 인간의 두뇌를 초월해 있으며 이유는 잘 몰라도 벗어나 있음을 안다』
장미 십자회의 비경에는 그러므로 영원한 부모의 본질적 정수를 정의하고자 하는 노력이 없다- 사실 스피노자의 유명한 격언에서 보인 취지처럼 『무한함을 정의한다는 것은 무한함을 부정하는 것이다』로 귀결된다 개성의 제한적인 특질이나 성격들 및 속성들을 영원한 부모 탓으로 하는 걸 거부함으로써 장미 십자회는 무한한 현실이 개성의 차원보다 열등함을 뜻하려 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것이 측정할 수 없이 더 높은 차원에 있어 모든 개성을 무한히 초월하는 것이므로 개성의 수준이나 용어로 말하는 것이 유치하다 말하고 있다
인간의 제한적인 지능으로도 검정 딱정벌레보다는 지능이 높을 가장 지능 높은 인간을 초월하는 높은 상태의 지능을 상상할 수는 있다고 저명한 사상가들은 생각해 왔다 그렇다면 그런 우월한 정도의 지능 있는 존재를 현현시키는 것은 하찮은 노력에 불과할 그런 엄청난 힘에게 있어 본질적으로 인간의 개성 차원보다 무한대로 초월적이라 실질적으로 개성의 수준에서 고려한다는 것은 차라리 모욕임을 당연히 알 수 있다
이 첫 번째 격언의 해석에 있어 자주 언급이 됐던 것처럼 무한한 비현현 시기 동안의 무한하고 절대적인 현실인 영원한 부모라는 존재의 상태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며 말의 범주를 초월한 것이다 그것은 오직 그것을 나타낼 수 있는 유일한 상징인 무한한 공간으로서만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상징이기는 해도 그것은 오직 부정적인 관점에서만 그렇게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헤겔이 말하듯 『존재』라는 용어가 유한하고 조건적이며 제한적인 존재를 말할 때는 실질적으로 비존재와 동일한 뜻인 절대적 존재의 상태에 있다는 것은 결국 물질의 특성이나 특질 및 속성 등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존재의 그 상태는 인간이 물질에 붙이는 속성들이나 모든 특질 및 특성들을 부정하는 뜻을 가진 용어들의 사용에 의해서만 추론될 수 있는 것이며 그 물질들에게조차 상상보다는 느낌으로 그들의 정신적 노력의 최대한 범위를 보이는 것이다
에드윈 아놀드는 그의 아름다운 시 『아시아의 빛』에서 무한한 현실의 본질에 있어 『사고의 초월』 이라는 불교적 개념에 대해 아래에 인용하는 말들로 잘 표현해 냈다 『옴 아마타야! 측정할 수 없음을 말로 측정하지 말라 밑이 없는 심연에 줄을 늘어뜨리지도 말라 묻는 이도 잘못이며 답하는 이도 잘못이다 말하지 말라 죽을 자의 눈으로 보는 자가 있는가? 아니면 죽을 마음으로 답을 알 것인가? 겹겹의 막이 들려도 뒤에는 또 겹겹의 막만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장미십자회는 절대적 본질인 무한한 비현현에 대해 절대적인 고요와 절대적인 투명함의 상태에서 쉬고 있는 순수한 공간의 무한한 바다라는 상징으로만 바라보며 죽을 자들의 눈으로 보면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것 같지만 깨달은 직감은 아무 것도 아닌 대신 모든 것임을 아무 것도 아닌 대신 절대적이며 무한한 존재이며 죽음 대신 무한한 생명임을 아는 것이다
죽을 자의 감각으로는 인식할 수 없고 상상하거나 그리는 데 있어 지성과 상상의 최고의 노력으로도 미치지 못하지만 순수 이성에 있어 최고의 견해는 그것이 존재함을 알려 주며 직감적인 믿음에 있어 최고의 견해는 그것의 모든 존재성과 현실을 의심함이 불가능함을 말하고 있다 무지한 이들과 반쯤 영리한 이들에게는 이 상징이 아무 것도 아님을 말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깨닫고 진정 현명한 이들에게 그것은 현실의 절대적 총체를 대표하는 걸로 보인다 그러니 너흰 무한한 공간의 이 상징을 외경으로 바라보라 그것이 존재의 무한한 정수의 본질을 표하는 데 미미할지라도 우리의 최고의 노력을 표하는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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