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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리 역사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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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시대 스크랩 구미시 역사의 인물
天風道人 추천 0 조회 133 13.08.21 02:3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왕산(旺山) 허위(許蔿) 선생!~
☞구미의 역사(인물,문화재) | 2006/10/19 16:24 돌베개

왕산(旺山) 허위(許蔿) 선생!~



▲왕산 허위 선생의 초상화!~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받은 의병대장 왕산허위선생!!~

「우리 이천만 동포에게 허위와 같은 진충갈력(盡忠竭力)용맹의 기상이 있었던들 오늘과 같은 국욕(國辱)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본시 고관이란 제 몸만 알고 나라는 모르는 법이지만, 허위는 그렇지 않았다. 따라서 허위는 관계(官界) 제일의 충신이라 할 것이다.」
- 안중근 의사의 허위 선생 평(評) -

(1854. 4. 1~1908. 9. 27)

1854년 경북 선산에서 대대로 유학을 숭상하던 이름 높은 학자 집안이자 독립운동가문에서 출생하신 선생은 어려서부터 성리학을 수학한 유학자로서, 충효사상과 위정척사사상에 입각한 애국애족의 민족정신을 갖고 있었다. 1895년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만행이 발생하자, 선생은 1896년 경북 김천에서 국모보수의 기치를 내걸고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김산의진을 조직하여 김천 일대에서 활동하다가 충북 진천까지 진격하는 등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전기 의병전쟁이 끝난 뒤 선생은 광무황제의 후의를 입어 성균관박사, 중추원의관, 평리원수반판사를 역임하였다. 그 뒤 1904년에는 오늘날 대법원장서리에 해당하는 평리원서리재판장이 되어 불의와 권세에 타협하지 않고 공정하고 신속하게 사무를 처리하여 큰 칭송을 얻었다. 나아가 선생은 항일 언론가 이자 개신유학자인 장지연과 교류하면서 전통 유학의 기반 위에 신학문을 수용하여 근대적 사고를 갖게 되었다. 그 토대 위에서 의정부참찬으로 근대적 개혁조치를 추진하던 중, 러일전쟁 도발과 함께 일제가 한국침략을 강화하자 결연히 맞서다 1905년 7월 강제로 귀향 조치되었다. 이어 [을사조약]과 [정미7조약]이 강제 체결되어 국망의 위기 상황이 도래하자 선생은 1907년 9월 경기 북부지역을 근거지로 재차 의병을 일으켰다. 여기서 선생은 인근의 연기우·김규식·이인영·김수민 등의 의병부대와 대일항전에 보조를 같이하면서 일제 군경을 격파하고 친일 매국분자를 소탕하는 활동을 벌였다.
특히 선생은 1907년 11월 전국 의병 연합체인 13도창의군의 편성을 주도하고, 군사장으로 그 해 말부터 두 달여 동안 서울 탈환작전을 펴 동대문 밖 10리 까지 진격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서울 진공작전 뒤 경기북부 지역으로 이동한 선생은 임진강과 한탄강을 무대로 일본군 진지 공격, 관공서 습격, 전신선 절단, 부일배 처단 등 강력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일제에게 피체되어 1908년 9월 27일, 서대문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해 55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하였다.

1908년 4월 정미의병 당시 ‘서울진공작전’ 을 주도했던 허 선생은 다음날 일제헌병에 체포되어서 4개월여 뒤에 51세의 일기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처형 되었다. 허위 선생 순국 후 일가족들은 일제의 핍박에 못 이겨 고향을 등지고 야반도주로 만주로 떠나게 되었고, 그 후 항일운동에 앞장서면서 일본에 쫓기는 생활이 시작 되었고 그때부터 형제들은 흩어지고 집시 같은 유량 생활을 하게 되었다.


온 집안이 독립운동에 투신. 동북항일연군 총대장 허형식, 저항시인 이육사!

허 위 선생의 아우 성산(허겸)은 부민단(망명 조선인의 자치단체)의 초대단장으로, 왕산의 아들 허 학은 학교를 세웠고, 허위 선생의 조카 허 형식은 동북항일연군 총대장 이였다. 허혀식의 부하로는 김일성 과 김책이 있었다. 일본군의 진격이 거세지자 그는 그의 부하였던 김일성과 김책을 소련으로 보내고 혼자 남아서 끝까지 북만주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결국 일본군의 총을 맞고 사망한다.
또 한 허위 선생의 사촌이자 허영식의 큰아버지인 허 형 도 을사오적 가운데 한 사람인 이근택 습격사건에 연루돼 체포된 경력이 있다.
그리고 허위 선생의 조카 허길(女)의 아들이 바로 유명한 저항시인 이육사 시인이다. 그는 한국의 저항시인 중에 유일한 직접 항일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사람으로 상해에서 일보 경찰에 체포되어 1944년 감옥에서 순국한다. 이렇듯 그 밖의 모든 가족들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허위선생의 조카 동북항일연군 총대장 허형식!


60년만에 귀화한 허위선생의 두 손자 드디어 할아버지 나라의 백성되다.

허위 선생의 4남 허국 선생(1971년 사망)의 두 아들 게오르기, 블라디슬라브 두 형제는 구소련의 ‘고려인 강제이주 정책’탓에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옮겨가며 험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독립유공자의 후손이라는 자부심과 명예를 지키며 머나먼 이국땅에서 두 형제가 평탄한 생활을 영위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두 형제는 부친의 뜻에 따라 배움을 놓지 않았고, 모스크바 국립대학과 우크라이나 오데사 대학에서 전기공학과 지질학을 각각 전공했다. 유명 국립대학에서 석사학위까지 마치고 ‘지식인’이 된 두 형제는 구소련의 공기업에 취직을 해 부족하지 않는 생활을 했다.
그렇지만 거주지였던 키르기스스탄이 분리. 독립되면서 다시 고난이 시작 되었고, 두 형제는 키르기스스탄 인이나 러시아인이 아닌, ‘고려인’이였기에 소수민족으로서 차별을 받았다.
전문지식이 있어도 자국민 우선시 하는 고용정책 때문에 일할 곳이 없었고, 손을 벌려도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이때부터 화물트럭 운전과 소작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이어온 두 형제는 모 다큐멘터리 제작업체의 후원으로 모국으로 돌아올 길을 되찾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7월18일, 왕산 허위 선생의 두 손자 허 게오르기(62)와 허 블라디슬라브(55)형제는 “특별귀화증”을 받고 마침내 할아버지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

민족의 영웅, 구미의 긍지!~

허위 선생의 후손들의 역경을 어찌 필설로 다 말할 수 있으랴!~.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아니 였더 라면, 만주로 망명치 않고 적당히 일제에 순종하면서 지냈다면 이 집안에서 정말 국회의원, 공무원 여럿 나왔을 것이다. 아니 최소한 지금 것 집에서 땅만 가지고 농사만 지었다면 동네부자소리 들으며 살 수 있지 않았을까?!
단재 신채호 선생의 외아들 신수범씨는 굶어죽다시피 했다.
영남의 대표적 독립지사 백산 안희제님의 맏아들 안상두님은 중앙정보부, 경찰에 끌려 가 무지막지 고초를 겪었다. 독립투사의 아들 이므로 친일 매국노의 후손들은 지금도 잘 먹고 잘살고 국회의원, 장관도 하고 조상이 매국한 댓 가로 받은 땅을 대한민국 법원은 마구 마구 찾아 주고 있다.
이 나라의 독립유공자 후손들은 법제화가 되어 있지 않아 각 처를 떠돌고 있다. 그들을 찾아 보상해주고 위로하는 일이야 말로 국민의 자긍심을 심어주는 일이고, 나라의 근간을 세우는 일이며,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는 대의를 행하는 것이다.

▲허위 선생의 유묵으로 ‘나랏일이 여기에 이르니 죽지 아니하고 어찌하랴. 내가 지금 죽을 곳을 얻었은즉 너희 형제간에 와서 보도록 하라’는 의미.1908년5월22일 경성헌병대에 쓴 글이다.


역사는 과거를 보고 현재를 배우며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역사는 나라를 위해 피를 흘리신 분들은 그 보답을 전혀 받지 못한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 주고 있다. 사회 모든 부분에 호국영령들에 대한 정신을 망각하고 자기주장만 앞세우는 생각들이 많다. 영령들이 지하에서 얼마나 분통 터져 하실지, 우리 서로가 가슴에 손을 얹고서 반성해야 할 때 이다.과연 국가의 이익이 뭔지?, 그분들에게 부끄러움 없는 철학을 우리 지도자들은 가져야 할 것 이다.
허위 선생 후손들의 귀화로 온정의 손길이 이어지고 있다. 고려대학교에서는 한국말을 모르는 허위선생 3세들에게 한국어 연수 장학생 혜택을 주었고, 우당장학회에서는 독립유공자녀 장학금을 약속했다. 이런 온정을 먼저 답지해야 할 곳은 이들이 고향인 '구미시’ 일것이다. 구미는 이들을 따듯하게 맞이하고 새로운 정착을 위해 적극 도와줘야 하고, 할아버지의 업적이 부끄럽지 않게 우리 모두가 관심 깊게 지켜봐야 할 것이다.
현재 왕산 허위 선생의 순국기념비는 대구 달성공원에 있으며, 허위 선생 유허비는 구미 ‘금오산’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서울 청량리에서 동대문까지의 길을 기념 코 져 왕산로(旺山路)라 명명된 것도 매우 뜻 깊은 사실이다. 지금현재 구미시에서 기념관 건립 등 왕산 추모 사업이 진행 중이며, 왕산의 일족은 왕산이 태어난 집터 600여평을 기념사업 부지로 내놓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현재 왕산기념공원은 8월말경 1차 준공을 앞두고 있다.
민족의 영웅, 구미의 긍지, 왕산 허위 선생을 통하여 새로운 구미의 정체성을 찾는 과업에 힘써야 할 것이다.


▲구미'금오산'에위치한 허위선생유허비



▲구미시 임은동 허위선생 생가터,현재 기념공원조성중..

나홀로 길을 걷네 - Svetl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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