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肅毅公遺事
公諱는 卿이니 延安人이니 麗季恭愍王朝에 佐命功臣判密直司事 兼贊成事니 以壁上一等勳推으로 奉延安府院君하고 贈諡肅毅公誠하다 按麗史列傳에 云判密直司事宋卿이 言於 洪彦博曰蒼生이 望公復相이 久矣라 今爲首相하니 何無一事協輿望乎아 去歲播遷에 宗社陷敵하고 主上이 蒙塵에 取天下笑는 公之不早圖也라 今公에 子握府兵하고 婿長憲司하니 富貴己極이라 下不憂國家오 彦博이 憚之라 十一年壬寅八月에 判密直司事宋卿이 罷라 賜忻都金帶綵衣苧麻纖布나 不受라 癸卯三月乙酉에 錄收復京城功하여 以贊成事宋卿으로 爲一等功臣하고 封延安君하며 圖形壁上하고 父母妻子를 超三等封官爵은 以己亥에 擊走紅巾敵毛居敬也라 甲辰春正月庚辰에 以贊成事宋卿으로 密直司事하고 金續命으로 爲西北面體覈使하고 乙巳六月庚寅에 以李公遂로 爲益山府院君하고 慶千興으로 爲淸原君하고 朴曦으로 爲春城君하고 宋卿으로 爲延安府院君하고 李遂山으로 爲壽春府院君하고 韓公義로 淸城君하다
肅毅公遺事
公의 諱는 卿이니 延安人이니 麗末 恭愍王朝에 佐命功臣 判密直司事 兼 贊成事로서 圖形壁上으로 一等勳으로 奉延安府院君하고 贈諡 肅毅公하다. 按麗史列傳에 依하면 判密直司事 宋卿이 洪彦博에게 말하기를 蒼生들은 公이 다시 宰相되기를 바란지 오래인데 이제 首相이 되어 어찌 한 가지 일도 興望에 和合함이 없는가. 지난해에 播遷함에 宗社가 적에게 陷沒되고 主上께서 蒙塵하여 天下에 웃음을 산 것은 公이 일찍 圖謀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오. 이제 公의 아들이 府兵을 掌握하고 사위는 憲司의 長하이 되어 富貴가 이미 極을 다하였는데 어찌 國家를 걱정하지 아니하는가 하니 彦博이 이를 꺼려서 十一年(1362년) 壬寅 八月 判密直司事宋卿을 罷免하고 忻都金帶綵衣苧麻纖布를 賜하였으나 받지 않았다. (그때 彦博의 사위 柳淵이 監察大夫가 되었으므로 卿이 이렇게 말한 것이다.) 같은 해에 金鏞의 亂을 平定, 서울[開京]을 收復한 功으로 十二年(1363년)癸卯三月乙酉에 贊成事 宋卿을 二等功臣 封延安君하고 十三年(1364년) 甲辰 春正月 庚辰에 己亥(1359년) 紅巾敵(頭目 毛居敬) 擊走시킨 功으로 一等功臣으로 圖形壁上하고 父母妻子를 超三等封官爵하였으며 贊成事 宋卿을 知密直司事하고 金續命을 西北面 體覈使로 하고 十四年(1365년)乙巳 六月 庚寅에 李公遂로 益山府院君하고 慶千興로 淸原君하고 朴曦으로 春城君하고 宋卿으로 延安府院君하고 李遂山으로 壽春府院君하고 韓公義로 淸城君하다.(<高麗史> 四卷 八六頁에 事載)
참 고
시조 휘(諱) 경(卿)이고 자는 구보(舊譜)에는 경(璟)이니 천성이 심심(沈深)하고 재주가 빼어나서 감화백채(甘和白采)의 자질이 어느 사람도 감히 추종하지 못할만 하였다. 또한 효도가 지극하고 배움이 돈독(敦篤)하여 깊히 성리(性理)의 오묘처(奧妙處)를 탐구하였고 기타 백가지류(百家支流)의 학설까지도 곡진(曲盡)히 통달하여 언제 어디서든지 본보기가 되었다. 나아가서는 고려 공민왕(高麗 恭愍王)때 정포은선생(鄭圃隱先生)과 동방급제(同榜及弟)했다. 벼슬은 추성익재보리동덕 좌명공신 광정대부 도첨사사중찬겸판전리사사 상호군(推誠翼載輔理同德 佐命功臣 匡靖大夫 都僉使司 中贊兼判典理司事 上護軍)에 이르렀고 연안군(延安君)에 봉(封)해졌다.
추증(追贈)된 익호(謚號)는 숙의공(肅毅公)이다. 공민왕 임인년(서기1362년)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이르럿으며 찬성사(贊成事)를 겸임하였다. 이때에 홍건적(紅巾賊)이 고려를 유린(蹂躪)하였는데 공(公)이 홍언박(洪彦博)에게 책망하기를 “모든 백성들이 공을 재상(宰相)에 복직되기를 원하여 현재 존귀(尊貴)한 수상(首相)이 되었으니 당연히 중인(衆人)의 소망에 적절해야 될 것이거늘 방금 종사(宗社)가 난적(亂敵)에게 함몰(陷沒)되고 성상(聖上)께서 몽진(蒙塵)하심은 곧 공이 미리 도모하지 아니한 소치라고 하겠으며 공의 아들은 부병(府兵)의 대권(大權)을 장악(掌握)하고 있으며 사위는 헌사(憲司)의 장(長)으로 중직(重職)에 있으니 인신(人臣)으로써 이보다 더한 구(貴)를 누리기 어려운 성총(聖寵)을 입고서도 왜 지성으로 국사(國事)를 근심치 아니하느고.”라고 하였다. 공(公)의 충고가 경직(勁直)하고 과감(果敢)함으로 홍언박(洪彦博)이 꺼려하여 결국 이 일로 인하여 파직(罷職)당하였다.(여사고<麗史攷>: 공민왕팔월판밀직사사송경파 열전운송경언어홍언박왈창생망공복상구의금위수상하무일언협여망호거세파천종사함적주상몽진천하소공지불조도야금공자악부병서장헌사부귀사극하불우국가언박탄지파경작<恭愍王八月判密直司事宋卿罷 列傳云宋卿言於洪彦博曰蒼生望公復相久矣今爲首相何無一言協輿望乎去歲播遷宗社陷賊主上蒙塵天下笑公之不早圖也今公子握府兵婿長憲司富貴巳極何不憂國家彦博憚之罷卿爵>) 공민왕31년(서기1362년) 8월에 파직(罷職)당하게 되었는데 흔도금대(忻都金帶)와 채의(彩衣)․저마(苧麻)․섬포(纖布) 등을 사사(謝賜)했으나 받지 아니했다. 공(公)은 계묘년(공민왕12년:서기1363년) 윤삼월에 연안군(延安君)송경(宋卿)은 이등훈(二等勳)에 책봉되었으며 11월의 임신록(壬申錄)에 찬성사(贊成事) 송경(宋卿)이 일등공도형벽상(一等功圖形壁上)이라고 기록이 되었는데 계묘년(공민왕12년:서기1363년)에 개경(開京:고려의 수도)을 수복하고 일등공신(一等功臣)의 홍예(弘譽)를 받들어 연안군(延安君)에 봉(封)해지고 관직(官職)이 도형벽상(圖形壁上)에 이르렀으며 부모처자(父母妻子)까지도 모두 삼등(三等)이 넘는 훈작(勳爵)에 봉(封)해진 것은 기해년(공민왕8년:서기1359)의 홍건적 모거경(紅巾賊 毛居敬)을 격파(擊破)하여 쫓아보냈으며 김용(金鏞)의 난을 평정했기 때문이다. 그 후 갑진년(서기1364년) 정월(正月)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었으며 그 다음해인 을사년(서기1365년) 6월에 연안부원군(延安府院君)에 봉(封)해졌으며 시호(諡號)가 숙의(肅毅)로 추증(追贈)되었다. 묘역(墓域)은 원래 장단 토란(長湍 土亂)에 위치하였는데 오래되어서 봉분(封墳)이 거의 능이(陵夷)되고 여러 차례 병화(兵火)를 겪어 막연(漠然)히 수호(守護)를 받지 못했기에 후손(後孫)으로써 한(恨)을 가지게 되어 제단(祭壇)을 마련하였는데 전북 진안군 마령면 강정리 구산서원(龜山書院) 후편(後便)에 설단(設壇)을 하였다.
神壇碑銘
肅毅公延安府院君祭壇碑銘幷序
孔子曰望墓爲壇이라하시고 退溪先生曰掃視墓域하고 以紙榜으로 祭於齌或於壇이라하니 有墳塋도 能如是는 況乎塚宅이 累經桑瀾에 深目이 無徵이라 歲薦香火가 無有其地則後裔之致誠이 於何可伸가 所以로 設壇而奉祀事하햐 以寓怵惕悽愴之心者往往焉이니 今此新起之壇은 延安宋氏始祖肅毅公延安府院君宋先生薦芬之所也라 壇已成에 吾友宋升煥翁이 與諸族議하야 伐石記實할새 使甲鍾으로 請余陰記하니 余人微識薄으로 辭而其請이 益勤하야 終難孤負盛意일새 摭其世譜及遺事而敍之하노라 公諱는 卿이요 初諱는 璟이니 性沈深才秀發하야 勘和白采가 逈出餘人이라 孝之極學之篤而探 究性理奧頤하고 傍通百家支流하야 爲鄕邦模楷라 麗恭愍王朝에 以佐命功臣으로 判密直司事兼贊成事라 言於洪彦博曰國民이 願公復相이러니 今爲首相하니 宜副衆望而宗社陷敵하고 聖上이 蒙塵은 公不早圖之致也라 公之子握府兵하고 公之壻長憲司하니 貴極人臣而不憂國家난 何也오 其勁直敢言이 有如此者라 彦博이 憚之하야 由是見罷에 賜忻都金帶綵衣苧麻纖布而公이 不受하다 錄收復京城爲一等功臣하야 封延安君하고 圖形壁上而父母妻子가 超三等封官爵은 以己亥擊破紅巾敵毛居敬故也라 甲辰에 直司事하고 乙巳에 爲延安府院君하야 贈諡 肅毅하다 噫라 公之學問이 淵深하고 勳業이 赫舃에 誠一代偉人이라 墓在長湍土亂云而累經兵火에 漠然失守하니 後裔痛刻骨髓하야 連世積營壇事而因循未遑이다가 始今成就하니 抑或有俟於今日歟아 子諱勛은 文吏議判書니 贈銀紫光祿大夫하고 孫長諱光彦은 文大司成이니 除原州牧使라 擊殺紅巾敵三百騎하고 殉節戰場에 封延安君하고 次諱雲龍은 神虎衛保勝中郞將이라 牧使生興道하니 和寧府少尹이라 是生三子에 長諱寶山은 號退休齌니 佔畢齌金先生門下요 司諫禮判이라 享龜月兩祠하고 次諱壽山은 號三樂堂이니 亦師事畢翁하고 奉常大夫門下舍人而奉月岡祠라 次諱九贇은 奉訓郞京市署令楊口縣監이니 有詩曰境靜心猶靜이요 人稀事亦稀云이라 中郞將이 生諱復隆하니 銀靑光祿大夫知樞密院事戶部尙書라 是生諱根하니 金紫光祿大夫知門下省事判戶部事요 是生諱有良하니 文科贈資憲大夫禮判兼五衛都摠府都摠管이라 古人云玉山이 多層峰이요 瑞風이 無凡毛라하니 其宋氏謂乎아 吁其韙矣라 是役也誠勤周章者는 各派任員也라 遂銘曰
於惟先生 麗季碩德 天資近道 孝篤學博忠 義凜凜 匡君扶國 以直被禍 一時見斥 黜斥何關 胸懷淡泊 收復京城 圖形上壁 府院君封 由破紅敵 積善餘慶 後裔赫舃 桑瀾滋久 莫保永宅 謁誠盡力 神壇是築 英靈感顧 洋洋降陟 摭其徽蹟 銘諸烏石
檀紀四千三百十九年丙寅正月初旬
晋陽 河千秀 謹撰
숙의공연안부원군제단비명병서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묘역(墓域)을 우러러 사모(思慕)하면서 제단(祭壇)을 만들었다하고 퇴계선생(退溪先生)께서도 묘역(墓域)을 소제(掃除)하며 살펴보고 지방(紙榜)을 갖추어 제각(齌閣)이나 제단(祭壇)에 향사(享祀)한다하니 분영(墳塋)에도 이처럼 지극(至極)한 정성(精誠)을 다하여 숭앙(崇仰)을 한다는데 더군다나 총댁(塚宅)이 수백여년(數百餘年)의 성상(星霜)을 겪었기에 그 형체(形體)마저 찾아볼 수 없게 되어 해마다 향화(香火)를 올리고저 하나 올릴 곳이 없다면 후예(後裔)는 치성(致誠)을 어디에다 펼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제단(祭壇)을 설치(設置)하여 사사(祀事)를 받들어 엄숙(嚴肅)히 두터운 정(情)을 추모(追慕)하며 슬픈 마음을 기탁(寄託)한 자(者)가 흔히들 있으니 지금 여기에 새로이 설치(設置)한 제단(祭壇)은 연안송씨(延安宋氏)의 始祖인 숙의공연안부원군송선생(肅毅公延安府院君宋先生)의 천신분필(薦新芬苾)하는 곳이다. 제단(祭壇)이 거의 완성(完成)될 즈음에 오우(吾友) 송승환옹(宋升煥翁)이 제족(諸族)들과 함께 비석(碑石)을 준비(準備)하여 공(公)의 생전(生前)의 업적(業蹟)을 기록(記錄)하자고 협의(協議)되어 그의 일가(一家) 갑종(甲鍾)과 함께 간절(懇切)히 음기문(陰記文)을 촉탁(囑託)하니 나의 재덕(才德)이 불민(不敏)하고 식견(識見)이 천박(淺薄)함으로 고사(固辭)하였으나 그 청(晴)함이 더욱 간절(懇切)하여 마침내 성의(誠意)를 저버릴 수 없어 세보(世譜)와 유사(遺事) 등(等)을 참고(參考)하여 아래와 같이 서술(敍述)한다.
공(公)의 휘(諱)는 경(卿)이고 초휘(初諱)는 경(璟)이니 천성(天性)이 심심(沈深)하고 재주가 빼어나서 감화백채(甘和白采)의 자질(資質)이 어느 사람도 감(敢)히 추종(追從)하지 못할만하였다. 또한 효도(孝道)가 지극(至極)하고 배움이 돈독(敦篤)하여 깊이 성리(性理)의 오묘처(奧妙處)를 탐구(探究)하였고 기타(其他) 백가지류(百家支流)의 학설(學說)까지도 곡진(曲盡)히 통달(通達)하여 언제 어디서든지 본보기가 되었다. 나아가서는 고려(高麗) 공민왕조(高麗 恭愍王朝)에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관직(官職)이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에 이르렀으며 찬성사(贊成事)를 겸임(兼任)하였다. 이때에 홍건적(紅巾賊)이 내국(內國)을 유린(蹂躪)했는데 공(公)이 홍언박(洪彦博)에게 책망(責望)하기를 모든 국민(國民)들이 공(公)을 재상(宰相)에 복직(復職)되기를 원(願)하여 현재(現在) 존귀(尊貴)한 수상(首相)이 되었으니 당연(當然)히 중인(衆人)의 소망(所望)에 적절(適切)해야 될 것이거늘 방금(方今) 종사(宗社)가 난적(亂敵)에게 함몰(陷沒)되고 성상(聖上)께서 몽진(蒙塵)하심은 곧 공(公)이 미리 도모(圖謀)하지 아니한 소치(所致)라고 하겠으며 공(公)의 아들은 부병(府兵)의 대권(大權)을 장악(掌握)하고 있으며 서(婿)는 헌사(憲司)의 장(長)으로 중직(重職)에 있으니 인신(人臣)으로써 이보다 더한 귀(貴)를 누리기 어려운 성총(聖寵)을 입고서도 왜 지성(至誠)으로 국사(國事)를 근심치 아니하는고하였다. 공(公)의 충고가 경직(勁直)하고 과감(果敢)함으로 홍언박(洪彦博)이 꺼려하여 결국 이 일로 인하여 파직(罷職)당하였다. 공(公)의 충고(忠告)가 경직(勁直)하고 과감(果敢)함으로 언박(彦博)이 꺼려하여 결국(結局) 이 일로 인(因)하여 파직(罷職)을 당하게 되었는데 흔도금대(忻都金帶)와 채의(彩衣)․저마(苧麻)․섬포(纖布) 등(等)을 사사(謝賜)했으나 받지 아니했다.
그 후(後) 一三六二年 계묘(癸卯-려조<麗朝>공민왕<恭愍王>十二年)에 경성(京城)을 수복(收復)하고 일등공신(一等功臣)의 홍예(弘譽)를 받들어 연안군(延安君)에 봉(封)해지고 관직(官職)이 도형벽상(圖形壁上)에 이르렀으며 부모처자(父母妻子)까지도 모두 삼등(三等)이 넘는 훈작(勳爵)에 봉(封)해진 것은 一三五九年 기해(己亥-공민왕<恭愍王>八年)에 홍건적 모거경(紅巾賊 毛居敬)을 격파(擊破)했기 때문이다. 그 후(後) 一三六四年 갑진(甲辰)에 벼슬이 밀직사사(密直司事)에 오르고 그 다음해 을사(乙巳)에 연안부원군(延安府院君)에 되었으며 시호(諡號)가 숙의(肅毅)로 추증(追贈)되었다.
아! 공(公)의 학문(學問)이 연심(淵深)하고 훈업(勳業) 또한 밝고 크기에 진실(眞實)로 일대(一代)의 위인(偉人)이라고 아니할 수 있겠는가?
묘역(墓域)은 원래 장단 토란(長湍 土亂)에 위치(位置)하였는데 오래되어서 봉분(封墳)이 거의 능이(陵夷)되고 여러 차례 병화(兵火)를 치러 막연(漠然)히 수호(守護)를 받지 못했기에 후손(後孫)으로써 그 누가 골수(骨髓)까지 깍여지는 아픔이 없겠는가.
때문에 계속 설단(設壇)할 사업(事業)을 경영(經營)했으나 늘 당시(當時)의 사정(事情)으로 인(因)하여 여황(餘遑)이 없다가 이제사 성취(成就)하게 되었으니 어떻게 보면 결국 오늘의 할 일을 조선(祖先)들께서 물려주신 듯도 하다. 아들 휘(諱) 훈(勛)은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이의판서(吏議判書)를 역임(歷任)하였으며 은자광록대부(銀紫光祿大夫)에 추증(追贈)되었고 장손(長孫) 광언(光彦)은 문과(文科)에 올라 대사성(大司成)을 지내고 원주목사(原州牧使)에 제수(除授)되었는데 난(亂)을 당(當)하여 홍건적(紅巾敵) 삼백기(三百騎)를 격살(擊殺)하고 전장(戰場)에서 순절(殉節)한 공(功)으로 연안군(延安君)에 봉(封)해지고 차손(次孫) 휘(諱) 운룡(雲龍)은 신호위보승중랑장(神虎衛保勝中郞將)에 올랐으며 목사(牧使)의 아들 휘(諱) 흥도(興道)는 화령부소윤(和寧府少尹)을 역임하였고 아들 삼형제(三兄弟)르 두었는데 장(長) 휘(諱) 보산(寶山) 호(號)가 퇴휴제(退休齌)이니 점필제(佔畢齌) 김종직(金宗直) 선생(先生)의 문하(門下)에서 친적(親炙)하여 벼슬이 사간(司諫)과 예판(禮判)에 이르렀으며 구산사(龜山祠) 월강사(月岡祠)에 봉향(奉享)되었고 차(次) 휘(諱) 수산(壽山)은 호(號)가 삼락당(三樂堂)이니 또한 점필제(佔畢齌) 선생(先生)에게 사사(師事)하여 官職이 봉상대부문하사인(奉常大夫門下舍人)에 이르렀는데 월강사(月岡祠)에 봉향(奉享)되었고 삼자(三子) 휘(諱) 구윤(九贇)은 봉훈랑(奉訓郞)·경시서령(京市署令)·양구현감(楊口縣監)을 역임(歷任)하였는데 시일구(詩一句)에 이르기를『境地가 고요하니 心情이 오히려 정요(靜寥)하고 인적(人跡)이 드무니 물사(物事) 또한 희활(稀闊)하다』라고 하였다.
중랑장(中郞將)이 휘(諱) 복융(復隆)을 낳으니 벼슬이 은청광록대부지추밀원사호부상서(銀靑光祿大夫知樞密院事戶部尙書)에 이르렀으며 복융(復隆)이 휘(諱) 근(根)을 낳으니 금자광록대부지문하성사판호부사(金紫光祿大夫知門下省事判戶部事)의 관직(官職)에 올랐으며 근(根)이 휘(諱) 유량(有良)을 낳으니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자헌대부예판겸오위도총부도총관(資憲大夫禮判兼五衛都摠府都摠管)에 추증(追贈)되었다.
고인(古人)이 이르기를 옥산(玉山)은 층봉(層峰)이 많고 서봉(瑞峯)은 범모(凡毛)가 없다 하더니 바로 송씨가문(宋氏家門)의 운잉(雲仍)이 번창(繁昌)하고 인품(人品)이 탁월(卓越)함을 두고 한 말이라 느껴진다. 이렇듯 아름다웁고 위연(韙然)한 조선(祖先)들의 사적(事蹟)을 소상(昭詳)히 들추어 낸 이 대역(大役)을 진실로 성의(誠意)를 다해 주선(周旋)한 이들을 약술(略述)한다면 각파(各派)의 임원(任員) 등(等)이라고 하겠다.
말미(末尾)에 비(碑)를 새긴 운(韻)을 부친다.
아. 선생(先生)은 고려(高麗) 말엽(末葉)의 큰 덕인(德人)이셨다. 천자(天姿)의 도(道)에 근흡(近洽)하시고 효도(孝道) 또한 독실(篤實)하시며 학문(學文)을 박섭(博涉)하였다. 충의(忠義)가 늠름(凜凜)하시며 군주(君主)를 바로 보필(輔弼)하여 종사(宗社)를 부지(扶持)하였도다. 직(直)으로써 재화(災禍)를 불사(不辭)하시고 일시(一時)는 파직당(罷職當)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찌 출척(黜陟)에 개의(介意)하랴. 흉금(胸襟)과 회포(懷抱)가 담박(淡泊)의 경지(境地)에 도달(到達)하였도다. 경성(京城)을 수복(收復)하고 도형벽상(圖形壁上)의 고위(高位)에 올랐도다. 부원군(府院君)에 봉(封)함을 받음은 홍건적(紅巾敵)을 격파(擊破)한 대훈(大勳)이로다. 적선(積善)하면 필(必)히 여경(餘慶)이 따르는 원리(原理)로 후예(後裔)들이 연(連)이어 혁석(赫舃)하도다. 그러나 지나온 세월(歲月)이 오래이다 보니 묘지(墓地)를 보존(保存)치 못했도다. 이제사 알성진력(謁誠盡力)하여 신단(神壇)을 축조(築造)하였도다. 영령(英靈)이 느껴 돌아보시사 양양(洋洋)히 척강(陟降)하시도다. 그 휘적(徽蹟)을 드리워서 미질(美質)의 오석(烏石)에 새겼도다.
단기 사천삼백십구년 병인 정월 초순
진양 하천수 근찬
告由山神祝文
維 歲次干支 月干支朔 日干支 某 敢昭告于
土地之神 伏以 惟吾先祖 肅毅府君 士林領袖 國家元勳 累閱兵火 莫保邱 墳 嗚呼
無處 歲一薦芬 酌古參今 神壇始築 制度草率 悚懼無斁 惟神庇護 克成事役 謹具
酒果 敬天一酌 伏惟
尊靈 庶賜歆格 尙
饗
宋升煥 謹製
고유산신축문
토지의 신령에게 감히 고합니다. 엎드려 생각하면 우리의 선조이신 숙의(肅毅)부군은 사림의 영수이며 국가의 원훈이시나 여러 번 전쟁의 화재를 겪으면서 무덤을 보존하지 못하였네. 슬프다. 일년에 한번 향화를 천할 곳이 없어 신단을 비로소 쌓으니 제도가 조잡하여 송구하기만 합니다. 오직 산신령께서는 비호하여 능히 이 일을 성취하게 하소서. 삼가히 술과 가일을 차려서 한잔 술을 올리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존령께서는 흠향하소서. 상향.
告由神壇祝文
維 歲次云云 宗孫 某 敢昭告于
顯先祖考肅毅公延安府院君府君 伏以 長湍佳城 年過六百 幾經兵燹 守護不 得 寤
寐思惟 悚懼莫測 設壇薦芬 古禮的確 雲裔合心 卜地新築 誠淺力微 僅成事役 畧
擧徽蹟 銘諸烏石 僅告事由 敬薦泂酌 伏惟
尊靈 斯歆斯格 尙
饗
後孫 宋升煥 謹製
고유신단축문
현 선조고 숙의공(肅毅公) 연안부원군부군에게 감히 고합니다. 엎드려 생각하면 장단(長湍)의 묘소는 육백년을 지나오면서 여러 번의 전장화재를 당하여 수호를 하지 못하였으니 자나깨나 생각을 하면 송구함을 헤아릴 수 없고 단을 쌓아 향화를 천하니 옛날 예의가 분명(的確)합니다. 자손이 합심하여 터를 잡아 새로 이 단을 쌓으려니 정성은 얕고 힘은 적어서 겨우 일을 마치고 간략하게 아름다운 자취를 열거하여 검은 돌을 새기고 삼가히 사유를 고하며 공경히 술잔을 올리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존령께서는 흠향하소서. 상향
후손 승환 삼가히 지음
時祭祝
維 歲次云云 宗孫 某 敢昭告于
顯先祖考肅毅公延安府院君府君之壇 氣序流易 霜露旣降 瞻掃封壇 不勝感 慕
謹以 淸酌庶羞 祗薦歲事 尙
饗
시제축
현선조고 숙의공(肅毅公) 연안부원군부군의 단에 감히 고합니다. 기후와 절서가 바뀌어 서리와 이슬이 이미 내리어 단소를 보살피고 청소를 하니 감동하여 사모함을 감당 할 수 없습니다. 삼가히 맑은 술과 여러 가지 반찬을 차려 공경히 연중행사를 올립니다. 상향
山神祝
維 歲次云云 幼學 某 敢昭告于
土地之神 恭修歲事于
顯先祖考肅毅公延安府院君府君之壇 惟時保佑 實賴 神休 敢以酒饌 敬伸奠 獻 尙
饗
산신축
토지의 신령에게 감히 고합니다. 선조고 숙의공(肅毅公) 연안부원군부군의 단소에 연중행사를 공손히 봉행하니 오직 때때로 도와서 신령의 아름다운 힘을 입게 하소서. 감히 술과 반찬을 차려 공경히 드리오니 상향하소서.
先代六位祭壇碑銘 幷書
自古로 우리 東國의 士大夫家에서 失墓를 하여 春露秋霜에 香火를 薦할 수 없으면 權宜로 設壇을 하여 俎豆를 奉行하여오니 此는 報本追遠하는 後裔의 誠孝라. 여기 鎭安郡馬靈面江亭里에 延安宋氏가 六位의 祭壇을 共設하여 先祖를 奉祀하고 壇前에 竪碣하여 懿蹟을 闡揚하고저 宗族이 合謀하고 宗親會長甲鍾甫에게 委囑하여 不佞에게 顯刻의 文을 晴하거늘 眷顧하여보면 至今에 世道가 多變하여 彛倫이 墜地하니 設壇奉祀하는 것은 不易之事라. 그 崇祖하는 孝心에 感動하여 不文不辭하고 譜牒과 遺事를 按察하여 보니 宋氏는 吾東의 名閥로 世世로 簪祖를 承襲하고 忠孝와 學文를 箕裘로 繼承하면서 雲仍이 詵詵하여 列邑에 布濩하니 其麗不億이라. 이것은 先祖의 積善餘蔭이 百世에 無窮히 綿延한 것이다. 肇祖는 高麗末恭愍王朝에 佐命功臣判密直司事兼贊成事요, 以壁上一等勳으로 封延安府院君하고 贈諡가 肅毅公이신 諱卿이요, 여기 奉安하신 六位는 二世이신 諱勛과 三世이신 諱光彦雲龍兄弟分과 光彦의 子諱興道와 雲龍의 子諱復隆과 子諱根이시다. 嗚呼라. 世遠蹟沒하고 累經兵燹하여 遺文과 實記는 庶幾絶無하여 生卒과 幽宅을 詳知할 수 없으니 어찌 杞宋의 嘆을 免하며 後裔가 痛恨을 禁하리오. 然이나 麗史에 記錄이 있어 略知大槪하니 不幸中多幸이라. 曰勛은 麗朝에 登文科하여 官이 吏議判書로 贈銀紫光祿大夫요 光彦은 學文이 鳴世하였고 威嚴이 莊嚴하였으며 登文科하여 官이 大司成이요, 辛丑에 原州牧使에 除授되었고 丁未年에 紅巾敵이 原州를 陷落하거늘 公이 三百餘騎를 攻殺하고 戰場에서 殉節하시닌 事聞朝廷하여 延安君에 追封하였다. 配는 英陽南氏典理判書輝珠의 女와 同福吳氏判書客寺事允候의 女이시다. 曰雲龍은 麗朝에 官이 內侍神虎衛保勝中郞將이요, 왈興道는 官이 和寧府少尹이며 配는 靑松沈氏라. 曰復隆은 官이 三重大匡知都僉議使司事政堂文學이며 一作銀靑光祿大夫知樞密院事戶部尙書요, 曰根은 官이 金紫光祿大夫知門下省事判戶部事이며 一作政堂文學贊成事이시다. 禮記에 曰先祖가 美德이 없는 것을 稱頌하는 것은 欺誣요, 善德이 있는 것을 不知하는 것은 不明이요, 知而不傳은 不仁이라. 次三子는 君子가 羞恥하였다 하니 어찌 貴門에서 이와 같이 고邁하신 六位를 顯揚하고 崇慕하지 아니하리오. 이어서 銘曰
緊惟宋氏는 我東名族으로 簪纓世襲하고 文忠彬郁이라. 竹帛垂勳하니 懿蹟芬彧하고 貽謨宏遠하여 德業涵蓄하니 奕世繁衍하여 流芳永續이라. 歲久失塋하니 後裔恨恧이요 伐石表壇하니 過必敬肅이라.
西曆 一九九六年 丙子 十月 日
成均館典學苞山 郭慶淳 謹撰
선대육위제단비명 병서
옛부터 우리나라의 사대부 집안에서 실묘를 하여 춘추로 향화를 올리 수 없으면 권도로 제단을 설치하여 제사를 봉행하니 이는 멀리 조상을 추모하여 보존하는 후손의 효성이다. 여기 진안군 마령면 강정리에 延安宋氏(연안송씨)가 여섯 위의 제단을 설치하여 선조의 제사를 받들고 제단 앞에 비석을 세워 아름다운 자취를 드러내어 선양하고저 종족이 합의하고 종친회장 甲鍾氏(갑종씨)에게 위촉하여 재주없는 나에게 비석에 새길 글을 청하거늘 돌이켜보면 지금 세상에 도덕이 점점 변하여 윤리가 땅에 떨어지고 없는데 제단을 설치하여 제사를 받드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라. 그 조상을 숭배하는 효심에 감동하여 글을 잘 못하나 사양하지 아니하고 족보와 유사를 살펴보니 宋氏(송씨)는 우리나라의 명문으로 대대로 벼슬을 이어오고 충효와 학문을 가업으로 계승하면서 자손이 번성하여 여러 고을에 퍼져 살고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으니 이것은 조상의 적선음덕이 백세에 무궁히 뻗어온 것이라. 시조는 고려말 공민왕조에 좌명곤신판밀직사겸찬성사요 벽상일등훈으로 延安府院君(연안부원군)에 봉하여지고 시호가 肅毅(숙의)이신 휘 경(卿)이요 여기 봉안하신 육위는 二世(이세)이신 휘 훈(勛)과 三世(삼세)이신 휘 광언(光彦)·운룡(雲龍) 형제분과 광언의 아들이신 휘 흥도(興道)와 운룡의 아들이신 휘 복융(復隆)과 아들이신 휘 근(根)이시다. 슬프다. 세월이 멀어 자취는 사라지고 여러 번 난리를 겪으면서 남기신 글과 실지 기록은 거의 없어져서 생년과 졸년과 묘소를 자세히 알 수 없으니 기송(杞宋:나라이름)의 한탄을 어찌 면하며 자손이 통한을 금할 수 있겠나. 그러나 고려사에 기록이 있어 간략하게 대강을 알 수 있으니 불행 중 다행한 일이라. 말하노니 훈(勛)은 고려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의판서로 증금자광록대부요 광언(光彦)은 학문이 세상을 울리었고 모습은 장엄하였으며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성이요 신축에 원주목사에 제수되었고 정미년에 홍건적이 원주를 함락하거늘 공이 三百(삼백)여 기를 공살하고 전장에서 순절하니 소문이 조정에 알려져서 연안군에 추봉하였다. 배위는 영양남씨 전리판서 휘주(輝珠)의 따님과 동복오씨판서객시사윤후(允候)의 따님이시다. 운룡(雲龍)은 고려조에 벼슬이 내시신호위보승중랑장이요 흥도(興道)는 벼슬이 화령부소윤이며 배위는 청송심씨이다. 복융(復隆)은 벼슬이 삼중대광 지도첨의사 정당문학이며 혹은 은청광록대부지추밀원사호부상서라 한다. 근(根)은 벼슬이 금자광록대부문하성사판호부사이며 혹은 정당문학찬성사라고도 한다. 예기에 말하기를 조상이 미덕이 없는 것을 칭송하는 것은 거짓이요 착한 덕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분명하지 못한 것이요 알면서도 후세에 전하지 아니하는 것은 어질지 못하다하였다. 이 세 가지를 군자는 수치로 여기었다하니 어찌 귀문에서 이와 같이 고매하신 여섯 분을 천양하고 숭배하지 아니하리오. 명(銘)을 지어 曰(왈)
자세히 생각하여 보면 송(宋)씨는 우리나라에 명문벌족으로 벼슬을 대대로 이어 오면서 학문과 충절이 빛이 나서 역사에 공적을 드리웠고 아름다운 자취가 향기롭고 빛이 나서 멀리 자손에게 좋은 계책을 끼치었고 덕업을 쌓으니 자손이 번성하여 아름다움을 계속 이어왔으나 오랜 세월에 실묘를 하여 후손이 한탄하고 부끄러워하였네. 이에 비석을 세워 제단을 표시하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반드시 공경하고 엄숙하리라.
서력 一九九六년 十월 일
성균관전학 포산 곽경순 근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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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시조 숙의공 유사와 제단비명및 선조 6위 제단비명을 진석총무께서 잘정리해서 올려준것 감사 드리며 모든회원이 꼭 열람하여주시기 바람니다
안동회장 낙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