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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왕신리 310 ❏배향인물: 권 행(權幸) 권산해(權山海) 권덕린(權德麟) ❏창건연도: 1784년(정조 8) ❏향 사 일: 4월 초정(初丁) |
1784년(정조 8)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권행(權幸)의 공적을 추모하기 위하여 이 지역에 추원사(追遠祠)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권산해(權山海)와 권덕린(權德麟)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운곡서원으로 개편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30년 유허지(遺墟址)에 설단(設壇)하여 향사를 지내왔으며, 1976년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3월 초정(初丁)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1)권행(權幸, 생몰년 미상)
고려 전기의 공신으로 안동권씨의 시조이다. ≪고려사≫ 태조세가에는 ‘행(行)’이라 하였다. 본성은 김(金)이라고 한다.
930년(태조 13)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고창군(古昌郡 :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을 포위하여 전세가 고려에게 매우 불리하였다. 이 때 유금필(庾黔弼)의 주장으로 공격을 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 승리는 당시 고창지방 호족으로 추측되는 이들이 협조를 잘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전공으로 태조는 안동을 본관으로 삼게 하고, 대상(大相)이라는 관계를 내려주었다. ≪증보문헌비고≫에는 삼한벽상공신삼중대광태사아부(三韓壁上功臣三重大匡太師亞父)로 봉해진 기록도 보인다.
2)권산해(權山海, 1403~1456)
조선 전기의 의인(義人).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덕보(德甫), 호는 죽림(竹林). 1440년(세종 22)에 천거되어 녹사·주부가 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1454년(단종 2)에 처음으로 종부시첨정(宗簿寺僉正)이 되었다.
1455년에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울분을 못이겨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세조가 조정에 나올 것을 종용하였으나 병을 치료한다는 핑계로 나가지 않았다. 이듬해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참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사건에 가담하지 못한 것을 스스로 한탄하다 끝내 자살하고 말았다.
관직을 박탈당하였으며 자손들도 백년동안 벼슬길이 막혔다. 그러나 1789년(정조 13)에 관직이 추복되고, 뒤에 이조참판에 추증, 경주의 운곡서원(雲谷書院)에 제향되었다.
3)권덕린(權德麟, 1529~157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군서(君瑞), 호는 구봉(龜峰). 효충(孝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명추(命錘)이고, 아버지는 첨정 계중(繼中)이다. 이언적(李彦迪)의 문인이다.
1553년(명종 8)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고, 성균관전적을 거쳐 병조·예조의 좌랑을 역임하였다. 양재역 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된 이언적이 1553년 그곳에서 죽었는데, 그는 스승의 영구(靈柩)를 중로에서 맞이하여 돌아왔다.
그리고 누구도 감히 이언적의 전사(奠祀 : 제물을 올려 제사를 지냄)를 주장하지 못하였는데도 죽음을 무릅쓰고 홀로 창의(倡議)하여 옥산서원(玉山書院)을 세워 제향하였다. 그 관직이 합천군수에 이르렀다. 경주의 운천서원(雲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구봉유집≫이 남아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경덕사(景德祠), 신문(神門), 5칸의 중정당(中正堂), 각 1칸의 동무(東廡)와 서무(西廡), 각 3칸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외삼문(外三門), 6칸의 유연정(悠然亭), 주소 등이 있다.
1)사당
사당인 경덕사(景德祠)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집으로 맞배지붕 겹처마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당 앞 마당은 자갈로 깔려있다.
2)강당
강당인 정의당(正懿堂)은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겹처마 민도리 건물이다.
3)동재·서재
동재인 돈교재(敦敎齋)와 서재인 잠심재(潛心齋)는 둘 다 정면 3칸, 측면 2칸 맞배지붕의 홑처마로 구성되어 있다.
4)기타
견심문(見心門)은 외삼문으로 3칸이다.
유물로는 ≪태사실기 太師實記≫·≪죽림실기 竹林實記≫·≪구봉집 龜峰集≫·≪효경 孝經≫·≪두고세고 杜臯世稿≫ 등의 목판과 문집 약간권이 소장되어 있다.
참고-경북서원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