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일류 문화 국가 창조의 중심 신동명천제단 카페지기 대조영입니다. 이번 주간 훈화는 <제466회 충무공 탄신일 특집 -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불패 신화 비결은 시대를 앞서 나간 리더십에 있다> 입니다.
23전 23승, 작은 싸움을 포함해 36전 36승으로 임진왜란 당시 불패 신화를 이룬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일생은 수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첫째, 이순신 제독의 집안은 가난뱅이였습니다. 이순신 제독의 할아버지인 이백록은 조선 11대 왕인 중종의 장례식 중에 아들의 혼인을 화려하게 치렀다는 누명을 쓰고 처벌을 받았습니다. 이순신 제독의 아버지인 이정의 호소로 누명임이 드러났지만, 이후 아버지가 벼슬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이순신 제독의 집안 살림은 쪼들렸고, 이순신 제독은 외가에서 자랐습니다.
둘째, 이순신 제독은 무려 28세의 나이에 무과에 응시했습니다. 이미 혼인을 하고, 두 아들을 두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안타깝게도, 말에서 떨어지는 실수를 저질러 첫 무과에서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이순신 제독은 나뭇가지로 다친 발목을 묶어 이를 부목으로 삼아 다시 말에 올라타 과제를 완수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습니다. 4년 후, 이순신 제독은 무려 32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했습니다. 신임 군관이라 하기에는 꽤 많은 나이였습니다.
셋째, 이순신 제독은 불의한 상관들과의 충돌로 많은 모함에 시달렸습니다. 조산보 만호 겸 녹둔도 둔전관 시절, 매번 이순신 제독의 증원 요청을 거부했던 북병사 이일은 여진족 부족의 침략으로 녹둔도가 초토화되자, 이순신 제독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 씌웠고, 이순신 제독은 백의종군에 처해졌습니다. 임진왜란 중에는 간신들의 모함과 왜군 간첩의 계략으로 한양으로 압송되었습니다. 충신들의 상소로 사형을 면한 대신 다시 백의종군에 처해졌습니다. 삼도 수군 통제사였던 이순신 제독에게 병졸이 되어 나가 싸우라는 것이었습니다.
넷째, 이순신 제독은 모든 군수 물자를 자급에 의존하고 스스로 군자금을 마련했습니다. 전라 좌도 수군 절도사 시절부터 나무와 곡식을 손수 전라 좌수영 소유의 땅에 심어 가꾸고, 광산을 직접 채굴하여 목재, 군량, 철광석 등 각종 군수 물자를 스스로 마련했습니다. 이것으로 부하들을 먹이고, 각종 무기와 함선을 만들었습니다. 지원을 받은 것은 중종이 설치한 임시 국방 회의 기구인 비변사에서 조금 주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다섯째, 이순신 제독은 많은 부하를 죽이고, 사정없이 매를 쳤습니다. <불멸의 이순신>에서 줄곧 아군이나 동료를 향해 창칼을 뽑지 말라고 했던 이순신 제독은 군법을 어긴 부하만큼은 아주 엄하게 처벌했습니다. 허락 없이 전장을 이탈한 자, 백성을 수탈한 자, 적에게 군수 물자나 기밀을 빼돌린 자, 기타 군법을 크게 어긴 자는 가차없이 사형에 처했습니다. 부하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고, 부하들을 때리거나 죽일 때마다 이순신 제독은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러나 나라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 외에도 무과에 급제한 후 무려 14년 동안 변방 오지의 말단 수비 장교만을 지냈고, 고질적인 위장병과 전염병에 시달리는 등 일생을 수난의 연속으로 보냈던 이순신 제독의 불패 신화는 결코 무기의 성능과 병력의 규모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왜군은 수십 년 전에 자국 영토에 표류해 온 포르투갈 인이 전해 준 조총을 대량 보급했습니다. 반면, 조선은 상무 정신의 약화로 국방 정책을 소홀히 함으로써, 아무런 대비가 없는 상태였습니다. 병력 규모도 절대 열세였습니다. 왜군은 무려 15 ~ 20만에 달하는 대군을 크게 셋으로 나누어 쳐들어왔고, 함선도 약 1천 척에 달했습니다.
<불멸의 이순신>에서 매회 나타나는 이순신 제독의 대사와 행동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작전을 짤 때 부하들의 의견을 존중하면서도 스스로가 옳다고 확신하는 방안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냉철한 판단력, 전투의 승패 원인을 먼저 자신에게서 찾으려 했던 '내 탓이오' 정신과, '너를 믿는다'는 한 마디만으로 부하들의 사기를 올려 주던 신뢰의 힘, 최전선에서 부하들과 기쁨과 슬픔을 함께 했던 시대를 앞서 나간 리더십으로 이순신 제독은 절대 열세 상황을 극복하고 불패 신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부하를 신뢰하지 못하는 지휘관은 역시 부하들의 불신에 시달리게 됩니다. 따라서 무기나 병력 규모 측면에서 적보다 우세할지라도 병사와 장교가 서로를 경멸하고 불신하며, 지휘관이 부하들을 존중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주장만을 밀어부치며, 승패의 원인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군대는 결코 전쟁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노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일제에게 패하고, 2차 대전 당시 세계 최강의 전함이었던 독일 대전함 비스마르크 호가 영국의 한낱 중소형 전함들에게 격침당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노일전쟁 중 대마도 해전에서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이 이끄는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이긴 도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 제독은 승전 축하 연회장에서 '이순신 제독이야말로 해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제독이며, 이순신 제독과 비교하면 나는 부사관도 못 된다'고 했으며, 토쿠토미 테이이찌로는 저서 <조선역<朝鮮役)>을 통해 '그는 이기고 죽었으며 죽어서도 이겼다'고 칭송했습니다. 이순신 제독과 한산도 대첩에서 맞붙었던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는 '가장 죽이고 싶은 자는 이순신이며, 가장 싫은 자도 이순신이다. 또 가장 같이 차를 마시고 싶은 자도 이순신이며 가장 흠모하는 자도 이순신이다'라고 일기에 썼으며, 그 후손들도 충무공 탄신일 기념 행사가 열릴 때면 한국을 찾아오고 있습니다.
내일이 충무공 탄신일인데 많은 한국인들은 그 의미를 모르고 있습니다. 위와 같이 일본에서는 충무공 이순신 제독을 군신(軍神)으로 떠받들고 있지만, 우리는 충무공 탄신일의 의미를 망각한 채 남북 관계가 잘못되면 일단 북한에게 그 책임을 떠넘기기에 바쁘고, 서로를 불신하고 있습니다. 한국인들이 요하네스 본프레레 감독이 대한민국 축구 국가 대표 감독을 지낼 당시 그를 비난했던 이유가 경기의 승패 원인을 선수와 코치에게 돌리고, 이들을 믿지 않았던 비뚤어진 리더십에 있습니다. 역사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조명하고 미래를 투시하는 거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충무공 이순신 제독을 통해 미래를 예측하고 이를 대비하는 유비무환의 정신,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나가는 혁신 정신, 관습과 타성을 과감히 돌파하는 개혁 정신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