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이 한양에서 500리 떨어진 영월로 유배를 떠나게 되고 아직 신혼중에 남편과 생이별을 한 정순왕후는 동대문 밖 '淨業院(정업원)' 근처 초막에 살면서 평생 단종을 그리워하며 지냈다.
원래 淨業院(정업원)은 부군을 잃은 후궁들이 여생을 보냈던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정순왕후가 가보니 이성계의 계비 강씨 소생 셋째 딸 경순공주가 거기에 있었다. 왕자의 난에서 계비 소생 방석, 방번이 제거되고 경순공주의 부군 이제도 제거되어 홀로 된 경순공주는 이성계가 머리를 깎아 주며 비구니가 되라고 정업원으로 보냈던 것이다.
이성계의 딸과 함께 있고 싶지 않았던 단종비 정순왕후는 정업원에 들어가지 않고 그 근처에 초막을 짓고 기거하면서 시녀들이 구해 오는 양식으로 생계를 잇다가 후에는 염색 일을 하며 여생을 보냈는데 곤궁하게 살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세조가 집과 식량, 옷감을 내려 보냈으나 받지 않았다.
오히려 쫓겨난 왕비의 형편이 어렵다는 소식을 들은 동네 아낙네들이 도와주었는데 조정에서 이를 막게 되자 아낙들은 감시병들이 알 수 없도록 여자들만의 禁男(금남) 채소시장을 열어 몰래 먹거리를 건네주는 등 정순왕후를 돌보았다고 한다.
단종을 떠나보낸 정순왕후는 부처님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삭발염의를 했다. 함께 왔던 시녀 3명은 희안 지심 계지라는 법명을 각각 받았고 정순왕후의 상좌가 되었으며 후궁 2명중 김씨는 원경, 권씨는 혜경이라는 법명을 받았고, 왕후의 사제가 되었다. 정순왕후는 청룡사의 노비구 지진스님으로부터 ‘虛鏡(허경)’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매일 동쪽을 바라보며 목놓아 울던 東望峰(동망봉)
이렇게 지내던중 그해 10월 마침내 단종의 사사 소식을 들은 정순왕후는 아침저녁으로 산봉우리에 올라 단종의 유배지인 동쪽을 향해 통곡을 했는데, 곡소리가 산 아랫마을까지 들렸으며 온 마을 여인들이 땅을 한 번 치고 가슴을 한 번 치는 동정 哭을 했다고 전한다.
그 뒤 영조가 이 봉우리를 東望峰(동망봉)이라 칭하며 비석을 내렸으나 일제시대에 이 일대가 채석장으로 사용되는 바람에 현재는 그 흔적이 남아있지 않고, 바위 또한 모두 떨어져 나가 흉물스런 절벽으로만 남아 있다.
<東望峰(동망봉)... 정순왕후가 매일 아침 저녁 이곳에 올라 님 계신 영월, 동쪽을 바라보며 명복을 빌던 곳.
영조 41년(1771) 영조 친필로 이곳 바위에 東望峰이라 새겼다고 하나 일제강점기때 채석장이 생기면서 흔적도 없어졌다.
동대문 지나 동묘 맞은편 언덕위 숭인근린공원에 지금은 표지석만 세워져 있다. 바로 옆에는 東望亭(동망정)을 세웠다.>
<동대문을 지나 동묘 사거리에서 올려다 보니 동망정 지붕이 보인다.>
淨業院(정업원)터에 남아있는 영조 친필 비석
당시 정업원은 지금 청룡사라는 비구니 사찰이 되어 있고, 한켠에 이곳이 정업원이었음을 알려주는 비각이 있다.
東望峰(동망봉)이 있는 숭인공원에서 동망공원을 지나 창신역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청룡사가 나온다.
<정업원 자리의 청룡사.....>
<청룡사 아랫쪽에 정업원터라고 기록된 비각이 있다.
영조 친필인데 평상시 잠겨져 있어 열어볼 수 없으나 특별히 진공스님께서 열어주시고 설명까지 해주셨다. 감사드린다.>
<정업원 비각...>
<영조 친필로 前峯後巖於千萬年(전봉후암어천만년)... 앞산 봉우리와 뒷산 바위는 천만년을 가리~라고 씌어진 현판.>
<영조 47년(1771) 정순왕후를 추모하기 위하여 비를 세웠다.
검은색 靄石(애석)으로된 비석의 앞면에는 淨業院舊基(정업원구기)... 정업원 옛터라고 씌어있으며
뒷면에는 歲辛卯九月六日飮涕書( 세신묘구월육일 음체서)... 신묘년(영조4년)(1771년) 9월6일 눈물을 머금고 쓰다...
라고 씌어 있다.>
정순왕후가 염색일을 하던 紫芝洞泉(자주동샘)
정순왕후는 주변의 아낙들이 도와주거나 시녀들이 걷어오는 먹거리로 먹고 살았다고 하며, 세조가 미안한 마음에 내려준 집에는 들어가지 않고 하사품 물건들은 하나도 손대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언제까지나 동냥으로 살아갈 수는 없었을터, 비단에 자주색 물을 들이는 염색일을 하며 살았다고 전해진다.
그때 물들이는 일을 했던 흔적을 찾아본다.
<청룡사에서 조금 돌아가면 쌍룡 아파트 단지 한쪽에 명신초등학교가 있는데 그 옆이 원각사이다.
정순왕후는 이곳에서 단종의 3년상을 치루었다고 전해진다.>
<원각사 바로 아래는 芝峰(지봉)이수광이 '지봉유설'을 지었다는 庇雨堂(비우당) 있다.
이수광의 외가 5대 할아버지가 청백리로 이곳에 초가삼간을 짓고 살았는데 우산으로 빗물을 피했다는 일화가 있으며
이수광의 아버지가 추후 집을 조금 넓혔는데 집이 소박하다고 누가 말하면 '우산에 비하여 사치스럽다'고 했다 한다.>
<비우당의 마당 한쪽에 '자주동샘'이 있다. 한자로는 紫芝洞泉... 그대로 읽기가 민망하다. ㅎ
정순왕후가 비단을 빨면 자주색 물이 들었다는 슬픈 전설이 어려있는 샘...
이곳에서 염색일을 하며 지낸것으로 보인다.>
<바로 옆에 바위에 새겨진 글씨... 紫芝洞泉이다.>
조선시대에는 동대문밖, 그러니까 4대문 밖이었을테지만 바로 인접한 창신동쯤에 이런 곳이 있을 줄이야
지하철 동묘역에서 걸어 10분이면 올라가볼수 있다.
반나절 시간만 내며 동망봉, 정업원, 자주동천까지 찬찬히 둘러보면서 단종哀事에 젖어 볼수 있는 곳이다.
관운장을 모신 동묘와 그 주변의 벼룩시장은 보너스다.
*** 4. 22(화) 오후3시, 동망봉에서는 정순왕후 추모제향이 열린다.
< 계 속 >
첫댓글 단종과 정순왕후 이야긴 언제나 눈물 짓게 만드네여~~ㅠ
잘 읽었습니다
삽님의 "걸어서 한양답사"를 따라서 언제 혼자 가 볼 생각입니다
숙연한 맘으로 지나갔던곳!
그런! 슬픔이 곳곳에 무심히 지나쳐던 곳들입니다
잘보고갑니다.
유난히 가슴이 아린 역사의 흔적입니다~,,,,
다시한번 가보고싶은곳 이기도 하구요^^
추모제를 가볼걸....시간도 있었는데 아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