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을 전경 사진 |
1996.5.10 2012.5.9
1. 마을기본 현황
인구수(명) |
가구수(호수) |
토지면적(ha) |
일반작물 |
벼 | ||||||||
총 |
남 |
여 |
총 |
농가 |
비농가 |
총 |
전 |
답 |
임야 |
기타 |
특 작 물 |
배추,마늘 |
118 |
56 |
62 |
49 |
49 |
0 |
183 |
26 |
49 |
95 |
13 |
주소득원 |
보리 |
2. 마을 성씨 분포
성 씨 |
세대수 |
성 씨 |
세대수 |
성 씨 |
세대수 |
여흥민씨 |
30 |
해주문씨 |
1 |
초개정씨 |
1 |
김해김씨 |
3 |
밀양박씨 |
1 |
장흥임씨 |
1 |
원주이씨 |
2 |
3. 행정 조직
이 장 |
민 필 기 |
새마을지도자 |
민 훈 기 |
개발위원장 |
민 대 두 |
부 녀 회 장 |
김 명 초 |
노 인 회 장 |
민 병 종 |
청 년 회 장 |
4. 마을 회관
• 위 치 : 해남군 마산면 화내리 509번지
• 설 립 일 : 1970. 04. 20.
5. 주요 시설물.
원주이씨 이계정 장군을 주벽으로 모신 영산사와 삼효문이 있다.
여흥민씨 제각, 팔각정(쉼터)
6. 민간 조직
구 분 |
조직년도 |
계원수 |
주 요 내 용 |
비 고 |
동 계 |
1936년 |
30 |
마을의 전반적인 사업 논의 |
|
죽 성 계 |
1980년 |
13 |
마을 청년들의 모임 |
|
일 심 계 |
1915년 |
39 |
||
십 전 계 |
1910년 |
|||
부 녀 회 |
1970년 |
부녀회 사업 및 마을 대소사 준비 |
||
노 인 회 |
1990년 |
노인회 친목활동 |
7. 역대 이장
연 도 |
이 름 |
주 요 사 업 |
비 고 |
1960~1970년대 |
민병민 |
회관준공 |
|
1970~1980년대 |
민옥식 |
하천사업 |
|
1980~1990년대 |
민대두 |
안길포장 |
|
1990~2007년대 |
민경열 |
마을회관식당 신축 |
|
2008~2009년대 |
이용수 |
마을안길포장 |
|
2010~2011현재 |
민필기 |
팔각정(쉼터) |
8. 마을 형성 및 입향
원래 화내마을은 마을 뒤쪽에 죽산고현성지 와 인접하여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 형성시기가 오래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실제 우리 마을에서 동쪽으로 마을을 형성하고 있는 여흥민씨에 의하면 1500년경 민오가 처음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민오는 민중건의 큰아들이며 계유정란에 순결한 민신의 증 손자이다. 민오는 계유정란 난을 피해 외숙을 따라 진도로 옮겨 왔고 초계정씨와 결혼하여 해남군 삼산면 저산에 거주하다가 지금의 해남읍 남송으로 이주 하였다. 그의 두 아들중 큰 아들 오가 마산면 화내마을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9. 전해오는 옛 지명과 유래
마산면 화내리는 마산면소재지 마을이다. 마산면은 민·이·박 3성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이중 화내리가 여흥민씨들의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여흥민씨는 이 외에도 마산면 덕인·노하·오호리 등지에 주로 많이 모여 살고 있다.
현재 해남에 약 700여 세대가 살고 있으며 마산에 약 150세대 가량이 살고 있다고 한다. 이곳 마산면 화내리는 약 120세대가 살고 있으며 이중 70여세대가 여흥민씨이다.
화내리는 마을뒤쪽에 위치한 죽산고현성지와 인접하여 있어 그 형성시기가 오래되었을 것으로 보고있다.
화내는 백제의 고토(古土)로 고서이현(古西伊縣) 또는 동안현(固安縣,통일신라)이 있었으므로 곶이, 구지안, 고안이라 하였는데 조선시대 말엽에 말의의 먹이었다 하여 '수안' 으로 불리다 현재의 ‘화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여흥민씨의 세거지(조상 대대로 살아 온 땅)
마산면은 여흥민씨의 충정공파의 세거지 라고 할 수 있다. 여흥민씨의 계보를 적고있는 「여흥민씨대동보」에는 해남시조를 계유사화(癸酉士禍, 수양대군이 단종을 축출하고 왕위에 오르면서 절개 있는 신하들에게 화를 입힌 사건)에 연루되어 해남으로 내려온 민중건(閔仲騫)으로 기록하고 있다. 민중건의 조부는 민신(閔伸)으로 그는 이조판서까지 지낸 사람이나 계유사화 때 세조(수양대군)로부터 멸문의 화를 당하게 된다.
그런데 민신의 손자인 민중건은 집안 노복(종)의 등에 업혀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남아 진도군수 김종(金淙, 민중건의 외숙)에게 피난을 간다. 그러나 김종이 다시 타지로 떠나게 되자 그는 해남의 호장(戶長)이었던 초계정씨 정문필(鄭文弼)에게 민중건을 맡겼다고 한다. 그는 이곳에서 자라 나중에 정호장의 딸과 결혼을 하게되어 일족을 이루게 된 것이다.
여흥민씨가 마산면으로 들어간 것은 민중건의 현손(5대손)인 민회안(閔懷顔)때로 마산면(당시 마포면)에 터를 잡고 살게 되어 여흥민씨의 세거지가 된다.
현재 마산면 장촌(남계마을)리에 종택이 남아있다. 본래는 뚜드럭재 바로 넘어 첫들머리인 양지뜸에 있던 종가가 이곳 남계리로 이사를 했다고 한다.
현재 이곳에 종가의 후손은 아무도 살고 있지 않고 관리인만 살고 있는데 종손인 민병걸씨가 현재 미국 몽클레어주립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 중에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집안의 사당이라고 할 수 있는 '여흥민씨부조묘'도 양지뜸에서 이곳 종택 옆으로 옮겼다.
종가의 바로 왼편에 있는 '여흥민씨부조묘' 에는 민신, 민보창, 민보해, 민보석 등 4부자가 배향되어 있다. 민신은 조선초기의 문신으로 문종때 병조판서를 지내고 1453년에 이조판서가 된 인물로 해남의 낙남조인 민중건의 조부이다.
부조묘는 고려중엽이후 사당을 짓게 되면서부터 등장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해남에는 이곳 충정공 민신묘와 충장공 정운묘 2곳이 있다. 부조묘는 정면 3간, 측면 2간에 맞배지붕으로 되어있다. 현재 향토문화유적 제2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시조묘와 제각은 황산면 성산에 있다.
여흥민씨 계보중 민신은 민오와 민구의 2형제를 낳게 되는데 해남읍 해리의 만석꾼이었던 민의관(민경호)은 장손이며, 국회의원이자 전남도지사를 지낸 민병남(계곡면 성진)과 국회의원을 지낸 민병초씨가 이 손에서 배출된다.
이와 함께 임진왜란 때 순절한 민치온이나 전(前) 민화식 해남군수는 민구의 손이라고 한다. 현재 이 지역의 유력한 유지들이 여흥민씨 들이기도 하다.
여흥민씨는 왕비를 4명이나 배출한 집안이기도 하다. 조선의 태종비였던 원경왕후, 숙종비였던 인현왕후, 고종비였던 명성황후, 숙종비였던 숙명왕후다.
화내마을은 150여년 전에 만들어진 동계가 전해져 내려오며 또한 여흥민씨들이 참여하는 '일심계'와 '십전계'도 있다.
◯ 화내리(고안, 곶이, 구지안, 수안, 화내) : 본래 백제 때 고시이현 도는 고안현이 있었으므로 곶이, 구지안 또는 고안이라 하였는데, 조선 때 말을 먹이었으므로 수안 또는 화내라 하여 해남군 마포면에 편입되었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낙동리, 양자리, 안정리와 봉시리, 장재리, 노하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화내리라 하여 마산면에 편입되었다.
◯ 가매-바우 : 욧굴에 있는 바위. 가마처럼 생겼다.
◯ 가재-둠벙 : 양군터 앞에 있던 둠벙. 가재가 많았다.
◯ 묘동(요골) : 마을 서남쪽에 있는 큰 골짜기로 주위에 원주이씨 선조 산소가 있다
◯ 대고랑(골) : 죽성산 및 큰 골짜기 대나무가 많고 송쟁이라 부르는 작은 동네가 있다. 송씨, 김씨, 민씨, 세성받이가 살다가 현재는 민씨 두집만 남아 있다.
◯ 무지개샘(엿마지기샘): 송쟁이 앞 논 가운데 있는 샘으로 물이 매우 시원해서 땀띠가 죽는다고 했다. 비온 뒤 무지개가 자주 서 무지개 샘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경지정리 사업으로 인해 없어지고 말았다.
◯ 벙-굴 : 소정이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외호리의 벙굴에 연해 있다.
◯ 보리멧-잔등 : 화내리와 장촌리 경계에 있는 등성이.
◯ 비레(석호) : 화내 동쪽, 내 건너에 있는 마을. 비레(너럭바우)가 많다.
◯ 삼효-정려 : 묘동에 있는, 원주 사람 이 문길, 이 광일, 이 신언의 3효자 정문.
◯ 보리멧 자등 : 화내리와 장촌리 경계에 있는 등성이를 말한다.
◯ 붉은대기 : 방죽안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땅(흙)이 붉다고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붉은대기라고 한다.
◯ 대나뭇-골착 : 벙굴 동쪽에 있는 골짜기. 대나무가 많았다.
◯ 석-등 : 화내 남쪽에 있는 등성이.
◯ 소-둠벙 : 화내 서쪽에 있던 둠벙.
◯ 송정이(송정리) : 화내 동북쪽에 있는 마을. 소나무 정자가 있었다.
◯ 양군터 : 화내리 서북쪽에 있는 마을 면사무소 부근 죽산현이 있을때 군병을 양성하던 곳이었다. 지금의 마산초등학고 주변의 토지가 그 장소이다.
◯ 양지뜸 : 현재의 양지를 말한다
◯ 엿마지기-새앰 : 송정이 앞에 있는 샘. 여섯마지기에 물을 댔다.
◯ 옥담-안 : 화내와 마산 초등학교 사이에 있는 들. 앞에 죽산현의 감옥이 있었다.
◯ 욧-굴(묘동) : 화내 서남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
◯ 영산사-터 : 욧굴에 있는 원주 이씨의 사당 영산사의 터.
◯ 진-둠벙 : 화내 북쪽에 있는, 긴 둠벙.
◯ 쪽도리-바우 : 투구바우 아래쪽에 있는 바위. 쪽도리(족두리)처럼 생김.
◯ 투구-바우 : 양군터 동쪽에 있는 바위. 모양이 투구처럼 생겼다.
10. 문화 유적
◯ 영산사는 1732젼 (영조8년)에 설립된 사우로 임란공신인 이계정(1542~1596년)을 위시한 이숙형(1563~1595년), 이준(1579~1609), 이원해(1559~?), 이성춘(1557~?)등 원주이씨 문중의 9충신을 배양하고 있는 사우이다. 이곳 영산사에는 문중에서 그동안 지켜온 여러 문서들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되어 오고 있다. 지정된 문서중에 [선조밀부여지]는 이계정이 충청수사로 임명된 후 선조가 내린 밀부와 밀지다.
이 유지는 위급 상황이 생길 경우 밀명을 내리면 하사(下賜)를 부(符, 대나무)와 재조하여 시행할 것을 적은 것이다. 전란 중인 상황에서 군사권을 가진 장군(水使)에데 왕이 명령과 작전을 하달하는 제도를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임진왜란의 군사관련 유지로는 이계정이 1595년(선조28년) 충청수사로서 군비. 군량. 군병 등의 운영에 관해 선조롭터 지시받은 내용이다. 당시의 전비와 운영 상태를 고증할 1차적인 자료의 가치가 있으며, 군량의 각도 분당내용과 부족한 수군의 보충 등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다.
『선무원종공신녹권』은 1605년(선조38년)이준에게 내려진 것으로 임진왜란 공신9,000여명이 등재되어 있다. 『진무원종공신녹권』은 인조3년(1625) 이광림에게 내려진 것으로 이괄의 난 평정에 공을 세운 인물에 대한 포상록이다. 관안(官案)은 춘추관기사관을 지냈던 이유(李劉, 1662~1716년)돠 관련된 문서로 숙종대의 내외직관원명록(內外職官員名錄)이다.
『영산원적』은 영산사와 직접 관련된 유일한 문서로 창설당시 초대 원장 홍만조, 권중경이하 경향(京鄕)유림 명단이다. 산막리 동계문서는 인조 23젼(1645)에 창설된 산막리 동계에 관련된 문서로 계안(契案), 동상례문서(東床禮文書), 서계문서(書契文書)등 1720~1915년 사이의 12책으로 되어있다.
◯ 역마산(驛馬山), 일명 영매산(英梅山)은 해남과 마산면 경계인 두드럭재에서 마산면 고암마을 앞까지 약 5㎞에 걸쳐 있는 산이다. 역마산은 해발309m의 높이에 산세가 큰 동물이 누워있는 형상을 갖추고 마산면을 남과 북으로 가로 지르며 면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이 산 남쪽가 북쪽에는 크고 작은 마을이 형성돼 오랜 세월 사람들이 살아오고 있고, 큰 봉 아래 묘동(卯洞)에는 원주이씨 이계정 장군을 주벽으로 모신 영산사(英山祠)와 삼효문(三孝門)이 있다 그 앞산 허리를 돌아가면 여흥민씨 제각이 있는 양지등(陽池登)이 나온다. 한마디로 역마산은 이 고장에 터를 잡고 누대를 살아온 조상들의 흔적을 담고 있는 유서 깊은 산이다. 이 산을 역마산이라 부르게 된 것은 안정마을 뒷산 능선 모양이 말같이 생겨 붙여진 이름이라고 이도림(73세) 전 면장은 증언한다. 마산면은 흔히 남쪽을 신마산, 북쪽을 구마산이라 부르며 지역을 구분하는데, 구마산 지역은 해남읍 뒷산인 만대산과 역마산이 가로막아 교통이 불편한 독립된 지역이 됐다. 장촌과 연구마을에는 무안박씨가, 화내마을에는 여흥민씨가, 산막, 외호마을에는 원주이씨 등이 집성촌을 이루고 수백 년 동안 서로 경쟁하듯 교육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교육열 때문에 예부터 서당과 학교가 다른 지역에 비해 일찍 들어서고 문장가와 관계로 진출한 인사들도 많이 배출했다. 이곳에 또한 경향 각 처에서 기라성처럼 많은 수가 성장하고 있어 이 양지등(陽池登)은 마산뿐 아니라 해남지방에서도 몇 손가락에 꼽히는 명당(明堂)이라 할 수 있다. 해남 땅은 노령산맥의 정맥이 흐르는 지선으로 흑석산, 두륜산, 달마산, 등의 크고 작은 명산이 있고, 그 산 골짜기 따라 계곡천, 옥천천, 삼산천, 해남천, 현산천, 등이 흐른다. 반도형 땅 남도 끝자락에 위치한 해남은 진도, 완도 섬을 가까이 두고 있어 조선시대 전쟁에서 밀려난 고관대작들이 섬으로 유배 가던 중 남기고 간 문(文)과 예(藝)뿐만 아니라 각종 생활문화가 일찍이 발달되었던, 예부터 선진적인 전통을 갖춘 고장이다.
11. 주민 생활상
물이 좋고 숲이 좋다 조용하고 아담 한 마을이다. 미맥위주의 농사를 짓으며, 마늘과 배추가 주 소득원이다. 마을주민들이 순박하고 조용하여 적은 것이라도 나눠 쓰고 나눠 먹을 줄 아는 인심 좋은 동네다. 예전에는 150가구가이 넘는 인구가 살았지만 젊은 사람들은 일터을 찿아 대도시로 떠나버리고 이젠 고령화로 인하여 나이 드신 어르신들이 농사를 짓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현실속에서 주민들의 일심 단결하여 서로 돕고 살아가는 인정이 넘치는 마을이다.
12. 교육.
○ 1940~1950년대 마을에 서당이 없어서 옆 마을 장촌에 있는 서당에 다니면서 한글과 한문, (명심보감)등을 배우고 공부를 하였다. 1960년대는 4H클럽 활동이 활발하여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청소년을 대상으로 배움에 도움을 주었다. 현재는 대부분 노령화로 인하여 활발한 교육활동은 어렵지만 해남군 농업기술센터의 마을 순회방문으로 새로운 농사 교육을 통해 더욱 효율적인 영농이 이루어지고 있다.
13. 민속.
○ 지금으로부터 약 50여년전부터 실시 해오는 우리 고유 명절 설날에 마을 어르신들을 한자리에 모셔놓고 합동 세배를 올린다. 마을회관에서 떡국을 써서 음식을 접 한다.
14. 미담
○ 매년 11월 중순이면 타지에 거주하고 있는 화내마을 향우가 고향을 찾아 부모님과 친족을 뵙고 조상님께 성묘를 하여 또한 서울 향우 고향 어른신들이 좋아하는 각종 음식을 준비해서 대접하고 하루 밤 고향에서 오순도순 애기하며 지내고 다음해에는 고향 어른신들을 서울로 초청해서 관광을 시켜 준다.
구성원으로 회장 1명, 감사 1명 , 총무 1명으로 구성된 향우회입니다.
○ 화내마을 출신 민상금(68세)씨는 매년 돼지 한 마리를 마을에 희사하여 동네에서 귀감이 되고 있다.
15. 특기 사항
16. 인물
성 명 |
출생 년 월 일 사망 년 월 일 |
주요 경력 및 수상내역 |
참 고 문 헌 |
민우언 |
1562 ~ 1640 |
삼봉 화내마을 입향조 |
|
민광호 |
1825 ~ |
전라남도 영암 군수 역임 |
|
민건호 |
1864~ 1935 |
고종 경호 무과 규사역중하부사 중추원의관, 승종2품 |
|
민직호 |
고종 임오 무과 합격 정3품, 비서강승 |
||
민경호 |
중추원의관 |
||
민정호 |
마산면 초대면장 |
||
민영옥 |
관찰부 종사랑 |
||
민영진 |
무과 급제 정3품 |
||
민영남 |
1907~1985 |
일본 경도대 졸업 국회의원과 전라남도 도지사 역임 |
|
민상식 |
마산면 3대 면장 해남 향교 정교 |
||
민윤식 |
마산면 6대 면장 |
||
민동식 |
도의원 해남여객사장 |
||
민병후 |
마산면의원 |
||
민병익 |
마산면 17대 면장 마산초등학교 총동창회장 |
||
민병초 |
국회의원 대한통운 사장 |
||
민남식 |
서울대 교수 |
||
민선식 |
프랑스 낭트대학 학장 공학박사 |
||
민선기 |
마산초등학교 교장 |
||
민경기 |
담양군수, 전남교육원 원장 |
||
민병휘 |
한일은행 을지로 지점장 동수련원장 |
||
민병모 |
국민은행 여수, 광주, 서울중곡동 지점장 대화정밀주식회사 대표이사 |
||
민병동 |
국방부 행정사무관 도미 |
||
민병쾌 |
조은은행 순천, 종로 지점장 상무이사 한성투자 사장 |
||
민병재 |
감사원 감사 |
||
민병찬 |
전주대학교 교수 |
||
민경완 |
해남군청 기획홍보실장 화물자동차 협회 대표이사 |
||
민상금 |
서울시의원 김대중총재 보좌관 한국토지 공사감사 |
||
민병무 |
광양, 곡성, 화순, 무안 경찰서 정보과장 강진 경찰서 경무과장 마산면노인회 회장 면지편찬위원회 위원장 |
||
민병토 |
관악구청 복지과장 |
||
민경술 |
화순군청 사무관 |
||
민원기 |
마산초등학교 교장 |
||
민경수 |
전남대학교 교수 |
||
민경석 |
해남군청 산림과장 |
||
민경봉 |
순천안과 병원장 군의관 소령 |
||
민기홍 |
지적공사 과장 |
||
민경현 |
생물학 박사 청와대 조경 담당관 |
||
민수정 |
한의학박사 남제주군 민생한약방 |
||
민우기 |
KBS 탤런트 예명 : 민욱 |
||
민사기 |
전 조선대 교수 이학박사 숭실대 자연과학대학장 |
||
민 경 |
영암 부군수 |
||
민경환 |
해군대령 |
||
민양성 |
해군소령 |
||
민호기 |
미국 하버드대 교수 |
||
민정기 |
미국 국무성 외교관 |
||
민영돈 |
전 광주 조선대 병원장 |
||
민창재 |
나주 동신대 교수 |
||
민석배 |
국세청 과장 군산 세무서장 |
||
민병구 |
대전고등학교 교장 |
||
민선기 |
한보건설 건축부장 |
||
민정식 |
나주 동신대 교수 |
||
민경화 |
해남군청 기획홍보실장 노인복지관장 |
||
민영기 |
대신증권 부장 |
||
민완기 |
현대산업개발 부장 |
||
민상준 |
LG전자 차장 |
||
민한웅 |
우리은행 차장 |
||
민진홍 |
마산농협 조합장 |
||
민건기 |
세종증권 부장 |
||
민경환 |
해군대령 |
17. 자료 작성시 참여자
• 민병동, 민훈기, 민경수, 민병익, 민필기, 민병종
※ 화내리 사진
죽성계 사진 |
죽성계 사진 |
|
|
화내리 마을 동계 책 |
화내리 마을 동계 책 |
|
|
▢ 일반 현황
법정리 |
행정리 |
세대수 |
인구수 |
65세 이상 고령인구 | ||
계 |
남 |
여 | ||||
화내리 |
화내리 |
61 |
116 |
54 |
62 |
54(46.6%) |
▢ 임원 및 마을특성
이 장 |
새마을 지도자 |
개발위원장 |
마을 특성 | |
남 |
여 | |||
민필기(49년생) |
민훈기(51년생) |
김명초(50년생) |
민대두(38년생) |
‘물안마을’에서 禾內로 개칭 여흥민씨 집성촌 |
010 9432 3791 |
016 606 5505 |
010 3637 5232 |
011 9383 5331 |
▢ 주요 현황
주요 사업 |
전년도 |
소규모급수시설정비(2009), 안길정비(2009), 농로포장(2009) 가로화단조성(2009) |
금년도 |
||
숙원 사업 |
배수로 1개소 10m, 용배수로 2개소 200m | |
농로포장 5개소 1,850m | ||
주요 인사 |
||
기 타 |
||
행정구역 연혁 및 명칭유래 조사서
===================================================
행정구역 |
연혁 및 명칭 유래 |
馬 山 面 |
○연 혁 -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 : 百濟古西伊縣, 統一新羅에 固安縣 - 고려시대 : 竹山縣 - 조선시대 : 馬浦面 - 일제시대 : 馬山面 - 대한민국 : 馬山面
○명칭유래 - 百濟의 古西伊縣으로 統一新羅에 固安(一云同安)縣, 高麗에 竹山縣이라고 하였는데, 朝鮮朝에는 竹山縣을 因稱하였다. 지금은 溪谷面. 山二面, 그리고 黃山面의 一部를 縣域으로 하는 三王朝의 縣邑으로 新羅는 이것을 陽武郡(康津)의 領縣으로 하고 高麗는 靈巖의 仕內로 하였다
- 太宗 9年(1409), 지금 山二面을 나누어 珍山縣으로 하고 竹山縣과 더불어 海珍郡의 屬縣을 삼았다. 世宗19年(1437), 海珍을 나누어 海南縣을 복구하니 以未 竹山, 珍山은 海南에 딸린 땅이 되었다. 任亂 後에 海南縣 馬浦面이 되고, 高宗32년(1895), 海南縣이 郡(二等郡)으로 改稱되어 海南郡 馬浦面이 되었다.
- 1914年 郡面廢合으로 山一面 병합하여 馬山面을 稱하여 舊馬浦 27個洞里, 舊山一15個洞里를 조정 12個里로 개편 관할하였으며 1973년 伏坪里를 해남읍에 넘겨주고 11個里가 되었다
- 1983年 1월 15日 月巖里가 溪谷面에 編入되고, 1992年 10月 13日 龍沼里에서 六日市里로 分割되어 11個法政里에 35個 行政里로 개편 오늘에 이르고 있음 |
행정구역 |
연혁 및 명칭 유래 |
禾 內 里 |
- 백제의 고토로 고서이현 또는 동안, 고안현(통일신라)이 있었으므로 곶이, 구지안 또는 고안이라 하였음
- 조선 때 말을 먹이었다하여 수안 또는 화내라 칭하며 해남군 마포면(현재의 마산면)에 편입
- 현재 화내, 안정, 후동 3개 자연마을로 구성 |
長 村 里 |
- 본래 해남군 마포면(현재의 마산면)의 지역으로서 장자 (부자)가 살았으므로 장자촌, 장재 또는 장촌이라 칭하였음
- 현재 장촌, 남계 2개 자연마을로 구성 |
孟 津 里 |
- 본래 해남군 마포면(현재의 마산면)의 지역으로 큰나루가 있었으므로 맏나루, 맏나리, 말나리, 맹진으로 불리우다 맹진으로 개칭되었음
- 개촌이래 조선 중종초까지는 지명을 細谷村이라 하였다가 중종이후 入鄕祖 孟健의 孟字와 村前의 江을 기념하는 뜻에서 나루 津字를 합하여 孟津이라 칭하였다고도 전하여 짐
- 현재 맹진, 북창 2개 자연마을로 구성 |
루ㆍ정ㆍ각
여흥민씨(화내) 재실(追遠堂)
1. 현 황
여흥민씨 양촌파문중 재실은 마산 상등에서 마산면소재지로 넘어 내려오는 고갯길 좌측 50m 산등선에 있다 정면 4칸, 측면1칸 반의 팔작지붕으로 삼문을 갖추고 있으나 삼문중 중앙 부분만 문이 있으며 양쪽문은 합판으로 가려져 있으며, 흙돌담장로 둘러져 있다. 건축연도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해남읍 해리 소재 본래 건축물을 마산면 화내리로 이건하였다. 최근 함석기와 지붕으로 교체한 것으로 보인다.
2. 관련사진
3. 특이사항
관리자 : 민훈기 (면 적 : 20평)
루ㆍ정ㆍ각
삼 효 문 (三孝門)
1. 현 황
화내리의 영산사 아래편에 자리한 효자문이다. 효자 李文吉(1551~?)은 江陵府事 李英華(1517~?)의 孫으로 화산면 탄동리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소년시절에 아버지를 공양하기 위해 얼어있는 저수지에서 고기를 잡아서 돌아오다가 추위로 쓰러져 죽음에 직면하였으나 지극한 효성이 하늘에 닿아 동네 젊은이에게 선몽되어 죽음을 면하였다. 공은 학행도 뛰어나 ≪花峰集≫ ≪愛日菴言≫ 등의 저술도 남겼다. 그의 아들 광일과 孫子인 愼言(1500~?)도 代를 이어 효행이 지극하여 조정에서는 1714년(숙종 40)에 문길에게 禮曹參議를, 광일은 戶曹正郞, 신언은 通政大夫를 각각 증직하고 태생지인 화산면 탄동리에 旌閭를 하사하였는데 1926년에 후손들이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현재 비각은 정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삼문과 담장으로 둘러져 있으며 내부에는 孝子碑3기가 있다.
3. 특이사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