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안산이고 조선조 초 왕자의 난을 평정하여 좌명공신(佐命功臣) 연성군(蓮城君)에 봉해진 위정공(威靖公) 김정경의 다섯째 아들인 안성위(대호군, 시호 호평공 한)의 15대 후손이다.
* 안성위의 아들 참판공 휘 맹혁파(청산)라고도 합니다.
김흥섭(金興燮)의 아들로 포천 청산면 금동리에서 출생하였다.어려서부터 효성이 극진하고 재예(才藝)가 뛰어나서 배우면 잊지 않고 기억하였으며 어머니의 마음을 잘 받들고 아침, 저녁으로 한냉서열(寒冷暑熱)을 살펴 편안하게 하여 드렸다.
17세 되던 겨울 어머니가 중한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게 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해 소생시켜 드렸다.
그런데 얼마 후 어머니께서 또 병환이 나자 정성을 다하여 시탕(侍湯)하였으나 별 효과를 얻지 못하여 동동촉촉(洞洞燭燭-공경하고 삼가서 매우 조심스러운 모습)하던 중 의원 말이 노루의 간(肝)이라야 약효가 있겠다 하므로
김기병은 산에 올라 노루를 구하고자 이 골짝, 저 산골을 헤메며 노루 한 마리만 눈에 띠도록 하여달라고 하늘에 심축(心祝)하기 여러 날 만에 노루 한 마리가 앞을 지나는 지라 김기병은 손쉽게 노루를 잡아 그 간을 어머니께 약으로 드렸더니 특효가 있어 어머니 병환이 나았다.
김기병은 부부가 합심하여 어머니 받들기를 더욱 더 정성을 다하여 어머니를 즐겁게 해드려 그의 어머니 70세가 넘으셨다.
그 후 노환으로 또 위독하여지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넣기 여러번 기적으로 회생하여 여러 날 동안 연명(延命)하다 추운 겨울에 산과(山果)를 잡숫고자 함으로 김기병은 눈이 쌓인 높은 산에 올라 사방을 헤매었으나 막연한 일이었다.
오직 효심에서 우러나오는 일념뿐이었다.
아득히 눈이 쌓인 바위 밑에 앙상한 머루덩굴이 솟아 있으므로 김기병은 쌓인 눈과 낙엽을 헤치고 보자 머루 두어 송이가 달려 있었다.
기쁨에 넘쳐 어머니께 바치니 병환은 완쾌되었으며 보는 사람들은 하늘이 도움이라고 찬탄치 않는 이 없었으며 탁이(卓異)한 효행이라고 군천(郡薦)으로 조정에서는 양로지자(養老之資)를 후상(厚賞)하는 은전(恩典)을 내렸고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융희(隆熙)4년 두 번째로 특상을 내렸다.김기병이 별세 후 유의지사(有意志士)의 찬양문이 많았고, 각 교화단체의 포상도 있었으며, 그 아들 김태진(金泰鎭)도 효우(孝友)가 출중하였다고 한다.
安山 金氏의 遠祖 金殷傅이하 역대 先祖들의 遺文과 遺事 등을 모은 책이다. 당초 金殷傅의 15대손 金處巖이 朝鮮 正祖때 편찬했으나 刊年은 未詳이다. 奎章閣所藏本은 筆寫本이며 그 경위나 연대는 未詳하다. 4卷 2冊이며, 제1책은 安山世碣, 제2책은 安山世輓이다. 권별내용은 다음과 같다.
1635년(仁祖 13)경부터 시작하여 英祖朝에 이르기까지 安山金氏 家系 가운데 특기할만한 인물이 죽었을 때 그 죽음을 애도하여 보내온 글과 祭文을 모아 놓은 것이다. 各輓은 당시 名士들의 것이며, 祭文은 대체로 親族이 지은 것이다. 金處巖(1755∼?)이 編하였다. 그 내용은 仁祖朝의 大司憲公挽부터 시작하였는데 그 당시 金壽增, 金昌集등 34명의 弔辭와 祭文 4편이 있다. 그 다음에는 副摠管公挽, 肅廟朝致祭文, 節度使公挽·祭文, 王世子致祭文, 防禦使公挽·祭文, 通德郞公挽·祭文, 生員公挽·祭文, 大司諫公挽·祭文, 通德郞公挽·祭文 등의 순서로 실려 있고 제일 마지막 祭文이 編者가 쓴 것으로 兄 金處莘의 죽음에 대한 祭文이다.
조선 후기의 시인 김상채(金尙彩)의 시문집. 3권 1책. 목판본. 1816년(순조 16) 손자 종식(宗軾)에 의하여 편집, 간행되었다.
≪창암집≫의 권두에 조종영(趙鍾永)의 서문이 있다. 권말에 당시 여항문인(閭巷文人)들의 모임인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를 이끌어 나갔던 장혼(張混)과 풍양조씨(豊壤趙氏) 세도의 중심인물이었던 조인영(趙寅永)의 발문이 있다. 장혼은 종식과 친구 사이이다.
≪창암집≫의 권1·2에 실린 시들은 자연을 소재로 한 평범한 것이거나, 안분자족하고자 하는 생활의식을 읊은 것들이다. 권1 초두의 사언시 8수는 효(孝)·제(悌)·충(忠)·신(信)·예(禮)·의(義)·염(廉)·치(恥) 등 유가적 덕목을 소재로 하여 쓴 것이다. 각각 8행씩으로 교육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권2의 〈술계자질시 述誡子姪詩〉도 이와 거의 동일한 내용이다. 그리고 이 시에 화답한 엄한붕(嚴漢朋)·홍우택(洪禹澤)·김시빈(金時彬) 등 12인의 당시 여항시인들의 시가 같이 실려 있어서, 저자의 여항문단에서의 활동을 짐작하게 한다.
권3에 실린 문(文)들은 대개 개인적인 것들이다. 〈족보서〉는 자신의 집안인 안산김씨(安山金氏)의 족보내력을 기술한 것이다. 〈기일록서〉는 자손들에게 선조의 기일을 지킬 것을 당부한 글이다. 그리고 〈가록서〉와 〈선영중즙기〉 역시 한미한 자신의 집안 내력에 대하여 쓴 글이다. 〈장빙군행장〉은 장인 장창한(張昌漢)의 행장이다.
≪창암집≫의 잡저 〈효선성훈계술편팔장교회자질〉은 사친(事親)·봉제(奉祭)·교자(敎子)·우애(友愛)·근학(勤學)·목족(睦族)·적선(積善)·치가(治家)의 8조목으로, 이를 자손들에게 지킬 것을 당부한 내용이다. 그리고 〈삼성재유고 三省齋遺稿〉가 말미에 부록으로 첨부되어 있다.
이는 아들 제량(濟良)의 시문 약간을 모은 것이다. 종식이 할아버지의 문집을 간행하면서 아버지의 것도 함께 수습하여 넣은 것이다. 내용은 시 13수, 문 1편이다. 국립중앙도서관도서에 있다.
본관은 안산이고 조선조 초 왕자의 난을 평정하여 좌명공신(佐命功臣) 연성군(蓮城君)에 봉해진 위정공(威靖公) 김정경의 다섯째 아들인 안성위(대호군, 시호 호평공 한)의 15대 후손이다.
* 안성위의 아들 참판공 휘 맹혁파(청산)라고도 합니다.
김흥섭(金興燮)의 아들로 포천 청산면 금동리에서 출생하였다.어려서부터 효성이 극진하고 재예(才藝)가 뛰어나서 배우면 잊지 않고 기억하였으며 어머니의 마음을 잘 받들고 아침, 저녁으로 한냉서열(寒冷暑熱)을 살펴 편안하게 하여 드렸다.
17세 되던 겨울 어머니가 중한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게 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해 소생시켜 드렸다.
그런데 얼마 후 어머니께서 또 병환이 나자 정성을 다하여 시탕(侍湯)하였으나 별 효과를 얻지 못하여 동동촉촉(洞洞燭燭-공경하고 삼가서 매우 조심스러운 모습)하던 중 의원 말이 노루의 간(肝)이라야 약효가 있겠다 하므로
김기병은 산에 올라 노루를 구하고자 이 골짝, 저 산골을 헤메며 노루 한 마리만 눈에 띠도록 하여달라고 하늘에 심축(心祝)하기 여러 날 만에 노루 한 마리가 앞을 지나는 지라 김기병은 손쉽게 노루를 잡아 그 간을 어머니께 약으로 드렸더니 특효가 있어 어머니 병환이 나았다.
김기병은 부부가 합심하여 어머니 받들기를 더욱 더 정성을 다하여 어머니를 즐겁게 해드려 그의 어머니 70세가 넘으셨다.
그 후 노환으로 또 위독하여지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넣기 여러번 기적으로 회생하여 여러 날 동안 연명(延命)하다 추운 겨울에 산과(山果)를 잡숫고자 함으로 김기병은 눈이 쌓인 높은 산에 올라 사방을 헤매었으나 막연한 일이었다.
오직 효심에서 우러나오는 일념뿐이었다.
아득히 눈이 쌓인 바위 밑에 앙상한 머루덩굴이 솟아 있으므로 김기병은 쌓인 눈과 낙엽을 헤치고 보자 머루 두어 송이가 달려 있었다.
기쁨에 넘쳐 어머니께 바치니 병환은 완쾌되었으며 보는 사람들은 하늘이 도움이라고 찬탄치 않는 이 없었으며 탁이(卓異)한 효행이라고 군천(郡薦)으로 조정에서는 양로지자(養老之資)를 후상(厚賞)하는 은전(恩典)을 내렸고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융희(隆熙)4년 두 번째로 특상을 내렸다.김기병이 별세 후 유의지사(有意志士)의 찬양문이 많았고, 각 교화단체의 포상도 있었으며, 그 아들 김태진(金泰鎭)도 효우(孝友)가 출중하였다고 한다.
安山 金氏의 遠祖 金殷傅이하 역대 先祖들의 遺文과 遺事 등을 모은 책이다. 당초 金殷傅의 15대손 金處巖이 朝鮮 正祖때 편찬했으나 刊年은 未詳이다. 奎章閣所藏本은 筆寫本이며 그 경위나 연대는 未詳하다. 4卷 2冊이며, 제1책은 安山世碣, 제2책은 安山世輓이다. 권별내용은 다음과 같다.
1635년(仁祖 13)경부터 시작하여 英祖朝에 이르기까지 安山金氏 家系 가운데 특기할만한 인물이 죽었을 때 그 죽음을 애도하여 보내온 글과 祭文을 모아 놓은 것이다. 各輓은 당시 名士들의 것이며, 祭文은 대체로 親族이 지은 것이다. 金處巖(1755∼?)이 編하였다. 그 내용은 仁祖朝의 大司憲公挽부터 시작하였는데 그 당시 金壽增, 金昌集등 34명의 弔辭와 祭文 4편이 있다. 그 다음에는 副摠管公挽, 肅廟朝致祭文, 節度使公挽·祭文, 王世子致祭文, 防禦使公挽·祭文, 通德郞公挽·祭文, 生員公挽·祭文, 大司諫公挽·祭文, 通德郞公挽·祭文 등의 순서로 실려 있고 제일 마지막 祭文이 編者가 쓴 것으로 兄 金處莘의 죽음에 대한 祭文이다.
조선 후기의 시인 김상채(金尙彩)의 시문집. 3권 1책. 목판본. 1816년(순조 16) 손자 종식(宗軾)에 의하여 편집, 간행되었다.
≪창암집≫의 권두에 조종영(趙鍾永)의 서문이 있다. 권말에 당시 여항문인(閭巷文人)들의 모임인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를 이끌어 나갔던 장혼(張混)과 풍양조씨(豊壤趙氏) 세도의 중심인물이었던 조인영(趙寅永)의 발문이 있다. 장혼은 종식과 친구 사이이다.
≪창암집≫의 권1·2에 실린 시들은 자연을 소재로 한 평범한 것이거나, 안분자족하고자 하는 생활의식을 읊은 것들이다. 권1 초두의 사언시 8수는 효(孝)·제(悌)·충(忠)·신(信)·예(禮)·의(義)·염(廉)·치(恥) 등 유가적 덕목을 소재로 하여 쓴 것이다. 각각 8행씩으로 교육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권2의 〈술계자질시 述誡子姪詩〉도 이와 거의 동일한 내용이다. 그리고 이 시에 화답한 엄한붕(嚴漢朋)·홍우택(洪禹澤)·김시빈(金時彬) 등 12인의 당시 여항시인들의 시가 같이 실려 있어서, 저자의 여항문단에서의 활동을 짐작하게 한다.
권3에 실린 문(文)들은 대개 개인적인 것들이다. 〈족보서〉는 자신의 집안인 안산김씨(安山金氏)의 족보내력을 기술한 것이다. 〈기일록서〉는 자손들에게 선조의 기일을 지킬 것을 당부한 글이다. 그리고 〈가록서〉와 〈선영중즙기〉 역시 한미한 자신의 집안 내력에 대하여 쓴 글이다. 〈장빙군행장〉은 장인 장창한(張昌漢)의 행장이다.
≪창암집≫의 잡저 〈효선성훈계술편팔장교회자질〉은 사친(事親)·봉제(奉祭)·교자(敎子)·우애(友愛)·근학(勤學)·목족(睦族)·적선(積善)·치가(治家)의 8조목으로, 이를 자손들에게 지킬 것을 당부한 내용이다. 그리고 〈삼성재유고 三省齋遺稿〉가 말미에 부록으로 첨부되어 있다.
이는 아들 제량(濟良)의 시문 약간을 모은 것이다. 종식이 할아버지의 문집을 간행하면서 아버지의 것도 함께 수습하여 넣은 것이다. 내용은 시 13수, 문 1편이다. 국립중앙도서관도서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