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입문
불자의 신행생활
가정은 우리들이 태어나서 인격이 성숙해 가는 곳이고, 인류사회에 봉사하기 위한 기초적인 장소이다.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며 조건없이 베풀고 돕는 기본적인 보살의 생활을 배우는 곳이 가정이다. 사회생활을 위한 기능과 지식은 학교에서 얻을지라도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품성과 지혜는 가정교육을 통해 길러진다.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일깨우고, 세상을 살아가는 자신감을 키우는 곳이 가정이다. 그래서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나 행동 하나하나는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큰 영향을 준다.
불교에서는 모든 중생이 불성을 지니고 있으며 '본래 부처'라고 했다. 따라서 자식과 부모는 서로 부처님처럼 존중해야 한다. 자식은 부모님을 깊이 받들고, 부모는 자녀를 밝은 지혜와 덕성을 지닌 존재로서 사랑하고 존중하며 키워야 한다. 자식을 부모의 욕망 대상이나 소유물로 키워서는 안 되며, 있는 그대로 그들의 가치를 인정해줄 때 상호 소통이 되며 아름다운 관계가 형성된다.
그리고 가정은 수행 도량이 되어야 한다. 자기 삶을 참되게 살아가는 것이 수행이라면, 살아 있는 모든 시간은 바로 수행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재가자들이 출가한 스님들처럼 오로지 수행만 할 수는 없지만 하루 하루를 경건하게 보내고 수행의 정신으로 살아가야 한다. 따라서 각자의 자질과 능력에 따라 앞서 소개한 수행법을 꾸준히 실천해 나가야 한다.
새벽 수행은 하루를 시작하여 그날 하루를 즐겁고 보람되게 하고, 저녁 수행은 하루를 정리하고 알찬 내일을 기약하며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게 한다. 또한 수행 시간만이 아니라 평소에 모든 일, 모든 사람에 대해 언제나 육바라밀을 실천하도록 자신의 생활을 가다듬는다면 나날이 복되고 좋은 날이 될 것이다.
가정에서 신행을 잘하기 위해서는 가정마다 원불(願佛)을 모시는 것도 좋다. 항간에는 집안에 부처님을 모시는 것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으나, 우리 조상들은 가정에 원불을 모시고 평상시에도 지극한 신행을 계속해 왔다. 가정마다 원불을 모시는 것은 항상 지극한 신행을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다만 원불을 모신 후에는 정성을 다해 모셔야 한다. 그 밖에도 가정에서 종단의 법요의식에 따라 제사를 모시는 것도 가정 신행의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1) 거룩한 생명
한 개인의 생명은 타인의 생명과 구별되는 독립된 인격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뗄 수 없는 여러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나를 낳아준 부모와의 인연이 없었다면 세상에 태어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나 불법을 만나는 소중한 인연을 '맹구우목(盲龜遇木)'의 비유로 설명한다.
큰 바다에 눈먼 거북이 한 마리가 살고 있다. 이 거북이는 백 년에 한 번씩 머리를 물 위로 내놓는데, 그 때 바다 한가운데 떠다니는 구멍 뚫린 나무판자를 만나면 잠시 거기에 목을 넣고 쉰다. 그러나 판자를 만나지 못하면 그냥 물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눈까지 먼 거북이가 넓은 바다에 떠돌아다니는 구멍 뚫린 나무판자를 만나는 것만큼 인간으로 태어나 불법을 만나기가 그토록 힘들다는 것이다. 실로 거룩한 인연이다.
그래서 우리의 옛 선조들은 거룩한 생명을 탯 속에 있을 때부터 소중히 여겨 바른 인성을 가질 수 있도록 태교에 정성을 다하였다. 불자들 또한 태교를 할 때부터 부처님 말씀을 듣고 부처님과 같이 아름답고 편한 마음으로 뱃속의 태아를 잘 보살펴야 한다. 낙태는 더욱 안 될 말이다.
아기가 갓 태어났을 때에는 가정과 사찰에서 바르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축원해준다. 아이가 성장하여 유치원 다닐 때부터 불교를 자연스럽게 접해서 사찰 법회에 나가도록 부모가 적극 지도해야 한다. 가정에서도 불교를 바탕으로 신행활동의 모범을 보여 아이들이 보고 배울 수 있도록 배려하면 더욱 좋다. 어릴 적부터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면 불교적 덕성을 지닌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평소에 사찰에 자주 가서 절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친숙해지도록 해주고, 스님을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도록 인도해야 한다. 그리하여 어린아이가 부처님께 귀의하여 가르침을 배우고 스님들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가지고 자란다면 바른 인간, 바른 신행인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바른 사람, 바른 불교인으로 교육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부처님은 모든 중생이 부처님과 똑같은 성품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불교의 교육관은 인간 각자가 지극히 거룩한 가치와 덕성을 지닌 고귀한 존재임을 자각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자신에게 거룩한 부처님의 성품이 있음을 아는 사람은 자신을 함부로 대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사람은 남을 업신여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으로 길러내는 데 불교 교육의 목적이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계를 받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수계는 자기 삶을 경건하고 바르게 유지하겠다는 다짐이다. 다만 어린아이들에게는 삼귀의와 어린이 오계를 주고, 자라서 스스로의 의지로 계를 받아 지닐 수 있을 때에 정식으로 오계를 받도록 하는 것이 좋다.
청소년이 되어서도 사찰의 중고등학생회에 나가 신행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부모가 앞장서야 한다. 요즘 입시 과열로 인해 쉴새없이 아이들을 학원이나 과외로 내모는 부모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좋은 성적을 얻는 것보다는 고귀하고 아름다운 품성을 지닌 인격체로 키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2) 불교의 혼례와 인생길
사람들은 성인이 되면 배우자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된다. 요즘 결혼하는 풍속을 보면 진정한 사랑보다는 이해관계나 부귀, 학력, 외모에 많이 치우치는 듯 하다. 진정한 내면의 모습과 사랑보다는 욕망의 대상으로 배우자를 택한다. 그러나 보니 상대방이 자기의 기대를 벗어날 경우 증오하고 싸우며 심지어 이혼을 하기도 한다.
배우자는 서로를 아끼고 존중하며 가정을 통해 인생을 완성해가는 동반자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배우자를 그려 보고 그런 배우자를 찾기 위해 서원을 세우고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도 상대방의 이상적인 배우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기도해야 한다. 그렇게 하다 보면 이상적인 선남선녀가 만나 행복한 결혼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불교의 혼례와 그 절차는, 과거 구원겁 전에 선혜선인과 구리선녀가 각각 꽃 다섯 송이와 두 송이를 연등 부처님께 바치면서 서원을 빌었다는 전생담에서 유래한다. 그들은 깨달음과 지혜를 성취하고 성불하기 전까지 부부의 인연을 보살도를 닦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꽃을 바친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혼례를 올릴 때 꽃을 바치는 헌화의식과 혼인을 고하는 고불식을 반드시 한다.
혼인하기 전에 두 사람이 부처님 전에 기도를 올리고 스님을 청해 법문을 듣고 미래의 행복한 삶을 약속하는 것은 뜻 깊은 일이다. 그리고 두 사람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행복한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장차 성불하겠노라는 서원을 세웠을 때 비로소 완벽한 결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결혼 후에도 뜻 깊은 날에는 함께 서원을 발하며 그날을 기념하고, 인생의 고비도 함께 이겨 나간 다면 참으로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육바라밀을 비롯한 이타적 삶으로 인생을 풍부하게 갈무리해 가는 것도 필요하다. 인생을 마감할 때 지난 세월이 후회없는 삶이라면, 그래서 죽음을 자연스럽게 맞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리고 죽음을 맞이하여 그 이별의 순간에 극락왕생을 발원하고 영가에게 집착을 놓게 해주는 법문과 평화로운 말을 들려주어 그 가시는 길을 진정 자유롭고 바람처럼 가볍게 해주어야 한다. 불자들은 죽을 때까지 부처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실천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인생의 마지막을 밝히는 불교의 장례의식은 그러한 절차로 짜여져 있다.
3) 역경을 이겨내는 불자의 자세
세상을 살다 보면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만나기도 한다. 그 때 우리는 불보살님의 가피력에 의지하여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보다 더 나은 길은 수행의 힘으로 스스로 고난을 이겨 내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어려움과 역경을 남의 탓으로 돌린다. 그래서 남을 원망하고 세상을 한탄하다. 그러나 불자들은 우리에게 발생하는 재난이나 환경이 모두 내 마음의 상태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관을 당하면 무엇보다도 자기 스스로 지은 허물임을 알고 깊이 참회해야 한다. 그 허물은 금생의 것일 수도 있고 전생의 것일 수도 있다.
또한 고난을 다했다고 해서 절망에 빠질 필요는 없다. 역경은 과거에 지은 잘못된 과보가 현재에 나타나 소멸되는 것이니, 잠복 중에 있던 나쁜 원인이 소멸되면 다행스러운 일이며 새로운 희망이 싹틀 전조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불자는 고난 앞에서도 오히려 감사하고 불평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고난을 관조하여 극복하는 평온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지은 바 원인이 있어서 고난이 나타나는 것처럼, 희망은 오늘 새롭게 씨를 뿌림으로써 커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난을 당해서도 새 희망을 일으키고 용맹정진하여 새로운 전환의 계기를 만들어가야 한다. 불자들은 고난과 역경을 당해서도 좌절하지 않고 당당하게 일어서, 끊임없이 깨달음의 마음을 일으켜 운명 그 자체를 바꿔 나가야 한다. 왜냐 하면 운명은 고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역경을 이겨내는 불자의 마음가짐은 {보왕삼매론}에 잘 나타나 있다.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으면 업신여기는 마음과 사치한 마음이 생기나니,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 ‘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라’ 하셨느니라.
공부하는 마음에 장애 없기를 바라지 말라.
마음에 장애가 없으면 배우는 것이 넘치게 되나니,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 ‘장애 속에서 해탈을 얻으라’ 하셨느니라.
수행하는데 마 없기를 바라지 말라.
수행하는데 마(魔)가 없으면 서원이 굳건해지지 못하나니,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 ‘모든 마군을 수행의 벗으로 삼으라’ 하셨느니라.
일을 도모하되 쉽게 되기를 바라지 말라.
일이 쉽게 되면 뜻이 경솔해지니,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 ‘여러 겁을 겪어서 일을 성취하라’ 하셨느니라.
친구를 사귀되 내가 이롭기를 바라지 말라.
내가 이롭고자 하면 의리를 상하게 되나니,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 ‘순결로써 사귐을 길게하라’ 하셨느니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주기를 바라지 말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주면 마음이 스스로 교만해지나니,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 ‘내 뜻에 맞지 않는 사람들로써 원림(園林)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공덕을 베풀려면 과보를 바라지 말라.
과보를 바라면 도모하는 뜻을 가지게 되나니,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 ‘덕 베푸는 것을 헌신처럼 버리라’ 하셨느니라.
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말라.
이익이 분에 넘치면 어리석은 마음이 생기기 쉽나니,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 '적은 이익으로써 부자가 되어라' 하셨느니라.
억울함을 당해서 밝히려고 하지 말라.
억울함을 밝히면 원망하는 마음을 돕게 되나니,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 ‘억울함을 당하는 것으로써 수행하는 문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이와 같이 막히는 데서 도리어 통하는 것이요, 행함을 구하는 것이 도리어 막히는 것이니, 이래서 부처님께서는 저 장애 가운데서 보리도를 얻으셨느니라. 저 앙굴리라마와 데바닷다의 무리가 모두 반역의 짓을 했지만 우리 부처님께서는 모두 수기를 주셔서 성불하게 하셨으니, 어찌 저의 거슬리는 것이 나를 순종함이 아니며 제가 방해한 것이 오히려 나를 성취하게 함이 아니리요, 요즘 세상에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만일 먼저 역경에서 견디어 보지 못하면 장애에 부딪힐 때 능히 이겨내지 못해서 법왕의 큰 보배를 잃어버리게 되나니, 이 어찌 슬프지 아니하랴. <보왕삼매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