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의 능陵과 원園
강 근 숙
4. 파주 장릉長陵
갈 끝자락 뒹구는 낙엽을 밟으며 장릉으로 들어섰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곱던 잎사귀를 내려놓고 빈 몸으로 서 있는 성근 나뭇가지 사이로 고풍스런 재실齋室이 보인다. 장릉은 비공개 능이라 관리소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미리 간다는 연락을 하여 능을 관리하는 낯익은 얼굴이 반기며 따끈한 커피를 내놓는다. 정적만이 흐르는 고즈넉한 공간, 재실 한 쪽에 앉아 차를 마셨다. 시끄러운 세상에서 떨어져 나온 외딴 섬처럼 참으로 편안했다.
재실은 산릉제례를 위하여 3일 전에 목욕재계하고 준비하는 곳으로 좌우에 각각 향을 보관하는 향대청과 제기를 보관하는 전사청이 있다. 쪽마루 벽에는 제물을 나르던 나무들것이 걸려있고, 아궁이 앞에는 제관이 몸을 씻는 쇠로 만든 목욕통이 놓여있다. 물을 뺄 수 있도록 밑이 뚫린 것이 조선시대 물건 같지는 않은데 거무죽죽 녹슨 모양에서 세월의 흔적이 보인다.
재위 기간 내내 고통과 굴욕의 세월을 보내다 세상을 떠난 인조대왕을 만나러 가는 길, 금천교禁川橋를 건너 홍전문紅箭門 앞에 서면 쭉 뻗은 참도 박석이 보인다. 여기서부터는 신의 영역이다.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드리는 정자각 오른쪽에는 능지기가 기거하는 수복방과 비각碑閣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정자각 뒤쪽에서 능상까지 오르는 사초지는 생기 저장탱크이며 인위적으로 만들지 않는다. 가파른 사초지 중간쯤 올라가서야 능침이 보인다. 이는 은밀하고 깊숙한 왕과 왕비의 침전은 함부로 들여다 볼 수 없는 이치이다.
조선시대 42기基 능 중에 장릉은 3기基가 된다. 김포 장릉章陵은 인조의 부모인 원종元宗과 인헌왕후仁獻王后 구씨를 모신 능이고, 영월 장릉莊陵은 조선 6대 단종端宗의 능이며, 우리 고장 파주에 있는 사적 203호 장릉長陵은 조선시대 16대 왕인 인조仁祖와 인열왕후仁烈王后의 합장릉이다. 선조의 손자이며 광해군의 조카인 인조는 서인 세력을 등에 업고 반정反正으로 왕위에 올랐고, 27년 재위 기간 중 세 차례나 몽진을 한 치욕적이고 한 많은 세월을 살다간 비운의 왕이다. 즉위 다음해 이괄의 난을 겪었고 3년 뒤에 정묘호란, 그리고 9년 뒤에는 병자호란을 겪었다.
장릉은 원래 임진각 가는 길목 운천리 대덕골에 있었다. 뱀과 전갈이 석물 틈에 집을 지어 1731년(영조7)에 지금의 위치인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로 옮기면서 합장 하였다. 석물 틈에 뱀과 전갈이 있으면 후손이 요절하거나 장애자가 난다는 말이 있다. 영조는 큰 아들 효장세자가 열 살에 요절하자 천장을 단행한다. 오랜 논란 끝에 천장한 이곳은 명당이 분명하리라. 능 뒤쪽 불룩한 잉孕에 올라 보았다. 파주 지역은 물론 멀리 일산신시가지 까지 훤히 내다보인다. 어떤 자리가 명당인지 모르나 이렇게 가슴이 탁 트이는 살아있는 사람도 편한 자리 아니겠는가.
장릉은 왕과 왕비의 합장릉으로 봉분은 하나이나 그 앞에 상석을 나란히
배치해 2위位임을 나타냈다. 봉분 아래로 12면의 병풍석을 세우고 그 아래쪽은 치마 주름처럼 돌난간을 둘렀다. 2기의 상석아래 중앙에 장명등長明燈을 배치하였으며 양쪽으로 망주석을 세웠다. 옛 능에서 옮겨올 때 척수가 맞지 않은 병풍석, 난간석, 혼유석은 새로 만들었고 다른 석물은 그대로이다. 처음 조성한 17세기 석물과 새로 조성한 18세기 석물이 함께 어우러지는 장릉, 병풍석은 모란과 연꽃무늬를 새겼으며 무석인武石人은 부리부리한 눈에 뚜렷한 표정이 생동감이 느껴진다.
인열왕후는 4명의 아들을 두었고 넷째 용성대군을 낳은 후 산후병으로 승하했다. 무려 756기基의 묘를 이장하고 장사를 지냈는데 발인 날 청룡기, 백호기, 현무기, 기마병과 군사 6770명의 장례행렬에 백성들은 출정군으로 오해하고 불안해했다. 통일로를 따라 북진하는 수천 명의 장례행렬이 출정군과 흡사해 첩보를 입수한 청나라의 심기도 편할 리 없다. 장례를 치른 이듬해 1636년 12월, 국호를 청이라 고친 홍타이지는 10만 대군을 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인조가 그 많은 묘를 이장하고 그곳에 능을 쓴 것은 능을 지키는 수호군이 유사시 국방경비대 역할을 하라고 한 것은 아니었을까.
청군은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왔고 보름이 안 돼 개성을 점령하였다. 인조는 비빈종실들을 강화도에 피신시키고 세자백관과 더불어 남한산성으로 물러가 항거하였다. 병력 1만 3천여 명과 양곡 1만 4천 여석이 있었으나 45일이 경과하자 양식이 떨어지고 혹한에 군사들은 전의를 상실하여 한 나라의 왕이 무릎을 꿇었다. 항복을 받기위해 쌓은 수항단위에 앉은 청태종에게 인조는 신하임을 나타내는 쪽빛 군복을 입고 삼배고두례를 올렸다. 한 번 절할 때마다 세 번 머리팍을 땅에다 쳐야했고 그럴 때마다 소리가 크게 나야했다. 청태종은 소리가 크게 나지 않는다고 다시 할 것을 요구해 인조의 머리팍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청태종은 인조로부터 항복의 의식을 행한 삼전도에 자신의 공덕을 새긴 기념비를 세우라고 요구했다. 당대 문장가가 지은 글을 청에 보냈으나 내용이 미흡하다고 거부하였다. 결국에는 인조의 특명으로 이조판서 이경석의 글이 받아 들여져서 이를 새기도록 하였다. 이경석은 후일에 영의정까지 지내면서 평생 동안 글을 배운 것을 한탄했고, 공덕비문을 썼던 오준은 뒷날 이를 부끄럽게 여기고 붓을 잡았던 손가락을 돌멩이로 짓이겨 다시는 붓을 들지 않았다 한다.
청태종은 철군하면서 볼모로 왕자와 충신, 그리고 척화론斥和論자인 삼학사(오달재, 홍익환, 윤집)를 끌고 갔다. 황금 1만량, 백금 1만량, 그리고 전마戰馬 3천 필과 정병精兵 만 명을 강요당한 병자호란丙子胡亂, 그때 50만에 달하는 조선여자를 끌고 갔는데 훗날 많은 돈을 받고 돌려보냈다. 천신만고 끝에 고향으로 돌아온 여인들, 나라가 힘이 없어 오랑캐들에게 짓밟힌 환향녀還鄕女를 순결을 지키지 못했다 하여 지금도 절개 없는 여자를 빗대어 ‘화냥년’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고 있다.
역사는 그렇게 몇 백 년이 흐른 지금, 그 시대 사연들은 세월 속에 묻히고 조선 왕릉은 자랑스러운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장릉 앞에 서면 굴욕 당한 인조의 모습이 떠오르고 오랑캐에게 짓밟힌 조선 여인들이 떠오른다. ‘다시는 치욕의 역사를 되풀이 하지 말자’는 교훈이 새겨져 있는 인조仁祖 장릉長陵, 조선 왕릉은 그냥 무덤이 아니라 선조의 얼이 살아 숨 쉬는 역사책이다. 햇살 좋은 날, 능역을 돌아 나오는 등 뒤로 낙엽이 우수수 떨어진다. 침입군을 맞아 싸우던 선인들의 함성이 들리는 듯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