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에 이르는 화두가 있는 나유타료 주련
나유타료(那由他寮)는 ‘나유타의 집’ 즉 끝없는 시간의 집을 말한다.
나유타는 범어로 ‘nayuta’로 수량 또는 시간의 단위를 나타내는 말로 나유다(那由多) 나유타(那由陀) 등으로 쓰인다. 불교에서의 수의 단위는 광대무변하다.
인도에서는 수의 단위가 1, 10, 100, 1천, 1만, 1낙차, 1도낙차, 1구지, 1말타, 1아유다, 1대아유다, 1나유타, 1대나유다, 1아승기로 1아유타가 10억이고, 1나유타는 백천 곧 10만 아유타이다.
이러한 무수한 시간의 단위를 승방의 현판으로 사용하였을까? 아버지 사도세자가 오래도록 선정에 들도록 바랐을까? 정조대왕의 염원하는 바가 이리도 큰 것인가? 모든 중생들이 이 주련을 화두로 하여 깨달음에 이르게 하기 위한 방편인가? 깊은 상념에 잠긴 채 나유타료의 주련을 보자
직도불조부지처지시반도( 直到佛祖不知處 祗是半塗)
차향부모미생전시도일구 (且向父母未生前 試道一句)
부처와 조사의 뜻을 알지 못하는 곳에 맞닥뜨렸어도 이는 바로잡기 위한 진흙의 한 조각 일뿐이니
장차 ‘부모에게서 나기 전 어떤 것이 참 나인가’를 알고자 한다면 시험 삼아 깨달음의 한 마디 일러보아라
참으로 멋진 주련이다. 용주사의 사풍(寺風)과 바로 맞아떨어진다. 달마조사에서 전강선사로 이어진 용주사의 선(禪)의 진수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 주련의 내용을 살펴보면 부처님과 조사들의 깨달음의 뜻을 알지 못하여 은산철벽(銀山鐵壁)이 내 앞을 가로 막아 눈앞이 캄캄하여도 걱정할 것 없다. 화두타파가 안되어도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말이다. 이는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하나의 허상(虛像)일 뿐이다. 진흙의 한 조각이 물을 만나면 형체도 없이 사라지는 것처럼 은산철벽도 깨달음에 이르면 자유자재한 텅 빈 공간일 뿐이다.
그래서 옛 선사들이 진흙 소를 타고 바다 속을 들어가는 이치를 알았던 것처럼 우리들도 마음 푹 놓고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바로 그 다음 구(句)가 은산철벽을 부수는 방법을 일러주고 있다. 바로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이다.
부모에게 태어나기 이전의 나(我)는 누구인가? 부모가 있어 사람의 몸을 받았는데 도대체 그 이전의 나(我)라니? 부모 이전인 내가 없었다고 나를 부정하면 불교의 윤회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진리를 부정하는 꼴이 된다. ‘부모미생전’의 화두를 들고 은산철벽 앞에 맞닥뜨리거나 백척의 장대에 올라 한발 앞으로 나아가 지혜의 바다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옛날 대주 혜해(大珠 慧海) 스님이 마조스님께 물었다. “불법을 구하려 합니다.” “자기의 보배 창고(寶藏)는 살피지 않고 집을 버리고 사방으로 치달려 무엇 하려느냐?” “무엇이 저 혜해의 보배 창고 입니까?” “바로 지금 나에게 묻는 그것이 보배창고이다. 그것은 일체를 다 갖추었으므로 조금도 부족함이 없어 작용이 자유 자재하니 어찌 밖에서 구할 필요가 있겠느냐?” 대주스님은 이 한마디 말에 지혜의 바다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면 부모에게 태어나기 이전의 나를 확연히 알게 될 것이고 생사의 연결고리를 헌옷 벗듯 훌훌 털어버릴 것이다. 이럴 때 나오는 깨달음의 노래, 환희의 노래를 부르라는 뜻이다.
‘부모미생전’ 이란 화두를 이덕무가 용주사 나유타료의 주련에 사용한 것은 이미 용주사 이전 ‘갈양사’ 일 때부터 현 용주사는 참선하는 스님들의 도량이었던 것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일부 용주사의 역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이 ‘현 용주사는 갈양사가 아니다.’ 하고 말하고 있지만 944년 고려 성종 때 최량이『고려국 수주부 화산 갈양사 변지 무애원명묘각흥복우 혜거국사 법휘지광시 홍제존자 보광지탑비명 병서』라고 쓴 혜거국사 비문에 명확히 나와 있다. ‘수주부’는 ‘수원’의 옛 지명이고 ‘화산(花山)’은 지금도 화산이며, ‘갈양사’는 정조 대왕으로 인해 사찰 이름이 ‘용주사’로 바뀐 것뿐이다. 이처럼 명확하게 용주사의 역사를 알려주는 비문이 있는데 용주사의 역사를 왜곡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또한 정조대왕께 부모은중경을 말씀하신 보경당 사일 스님은 장흥 보림사의 스님으로 장흥 보림사는 우리나라 구산선문 중 가지산문의 종가이다. 용주사는 염거화상이 창건하신 사찰로 도의-염거-체징스님으로 이어지는 가지산문의 맥을 이어왔다. 고려시대에는 혜거국사가 주석하면서 일대 선풍을 드날렸다. 이렇듯 가지산문의 전법을 이어받아 천년을 이어온 조계종풍은 조선후기 보경당 사일 스님이 갈양사에 주석하시며 선종을 이어온 사찰이다. 이러한 이유로 창건당시 스님들이 머물던 승당(僧堂)으로 사용된 나유타료에는 선종 1700공안의 하나인 ‘부모미생전’을 주제로 주련을 지었던 것이다.
그 당시 주련의 내용을 짓고, 글씨를 썼던 이덕무는 자신의 책 청장관 전서 제20권 아정유고 12에 “ 경술년 9월에 용주사가 낙성되니 상(王)의 명으로 전각 및 승방의 주련 16구를 지어 올리고 몸소 가서 각자하는 것을 감독하고 그것을 달았다.” 고 하였다. 주련을 직접 짓고 정조대왕께 올려서 정조대왕의 승인을 받아 왕의 명에 따라 직접 주련의 글씨를 쓰고 새기는 것을 감독하고 완성되자 직접 주련을 단 경우는 우리나라의 사찰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다.
이덕무가 쓴 주련의 내용이 끝없는 시간의 집 나유타료에 그대로 남아 1200년 이어온 선종의 면모를 느낄 수 있어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