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아름다움 보다는 그들의 가난과 여행자를 위협하는 안전이 먼저 언급되는 슬픈 도시 나폴리. 경계를 늦추지 않는 도시 산책을 하고, 세상 전부를 훤히 내려다볼 수 있는 짜릿한 언덕에 올랐으며, 피자 마르게타리가 탄생했던 그 골목의 피제리아에서 원조를 입에 넣었다. 온몸을 휘감고 있던 공포를 내려놓게 만들었던 묘한 매력의 나폴리.
“나폴리에 가고 싶어. 나폴리가 안전했으면 좋겠어.” 8년 전 배낭을 메고 이탈리아 전역을 한 달 동안이나 돌아다니면서도 건너 뛴 도시가 하나있다. 나폴리Napoli. 당시 [타임아웃]이라는 영국 가이드북을 들고 여행했는데, 실컷 2천5백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고 도시의 아름다움으로 매혹시키더니 마지막 줄에 ‘단’이라며 문장 하나를 덧붙였다. ‘너무 두려워하진 말되, 항상 경계하라!’ 수백만 명이 엄청난 인구 밀도로 살아가고 있으니 하찮은 범죄들이 매일 일어나는 건 당연하다며 번쩍거리는 장신구를 하지 말고, 눈에 띄는 큰 가방은 메지 말아야 하며, 최소한의 현금만 지니고 다니라고. 게다가 맨 끝에 조언이라고 한 말이 나를 충격 속으로 빠뜨렸더랬다. 스쿠터를 타고 가방을 낚아채는 뜨내기 도둑들이 있는데, 만약 그 광경을 목격하더라도 절대 침착하라는 것. 영웅놀이를 하지 말란다. 내가 남을 도와주는 건 안할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을 읽고 여행하는 사람들도 내가 그런 상황에 빠지면 나 몰라라 할 게 아닌가. 아, 이런 무정의 도시. 나는 그렇게 나폴리를 포기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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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치 감상을 위해 보메로 언덕까지 오토바이를 타고 올라온다. 2 카스텔 델 오보를 배경으로 연주하던 거리의 음악가들. 3 걷다 보면 마주하는 나폴리의 아주 흔한 가난한 동네 풍경 |
파랗고도 검은 바다. 거대한 기운을 뿜으며 밀려오는 나폴리의 파도 앞에 드디어 섰다. 소심한 마음을 갖고 태어난 지라 멀리는 가지 못했고, 비싼 돈 주고 잡은 호텔 앞에 잠깐 나가 바람을 쐬는 것으로 만족하는 중이었다. 해안을 따라 이어지는 확 트인 대로 비아 프란체스코Via Francesco는 내가 평생(?) 공포로 느꼈던 나폴리와는 사뭇 다른 인상이었다. 땀 흘리며 조깅하는 나폴리탄, 귀여운 강아지를 끌고 산책하는 이들, 자전거와 롤러블레이드를 타는 가족들, 남들 시선은 아랑곳 않고 키스를 퍼붓는 열정의 남녀들. 거기에 이스키아의 요새를 꼭 닮은 카스텔 델 오보Castel dell’Ovo를 배경으로 낚시를 하거나 노래를 하는 거리의 음악가들을 보고 있자니 경계가 무슨 말이더냐 마음의 빗장이 스르르 풀려 버렸다.
어떤 것보다도 사람이 무서웠는데, 나폴리탄은 그 어떤 도시에서 만난 이들보다 행복한 표정이었으므로. 나름의 허름한 복장으로 위장한 채 길을 나섰다. 왕궁Palazzo Reale과 광대한 플래비시토 광장Piazza del Plebiscito이 차례로 나타났지만, 목적은 오로지 하나였다. 사람 많은 대로만 걷고서 안전하게 호텔로 돌아오기. 현지인과 관광객들이 파도처럼 밀려서 이동하는, 우리의 명동을 떠올리게 하는 큼지막한 쇼핑 거리 비아 톨레도Via Toledo는 겉으로 전혀 문제없어 보였다. 그러나 이스키아 섬에서 만났던 토니의 말이 끝내 마음에 걸렸다. “나도 몰라요. 나폴리의 나쁜 구역은. 우리 눈으로 봐서는 좋고 나쁨을 구분할 수 없거든요. 경계를 늦추지 마요.”
비아 톨레도를 걷다보니 왼쪽 언덕으로 비좁고 답답한 골목길이 촘촘하게 이어졌다. 16세기에 지어진 낡고 허름한 건물들엔 얼룩이 그대로인 빨래들이 펄럭였다. 쓸모없어 보이는 물건들을 신문지 위에 대충 올려놓고 파는 노인들도 보였다. 콰르티에리 스파뇰리Quartieri spagnoli, 나폴리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의 동네라고 했다. 실업률과 호흡질환 발병률이 유럽에서 가장 높은 곳. 보통의 여행이었다면, 골목 사이를 신나게 헤맸을 텐데 멀리서 까치발을 들고 힐끗 보는 것으로 마음을 달랬다. 오히려 다소 위험할 수도 있던 목적 없는 산책은 운 좋게도 카스텔 산텔모Castel Sant’ Elmo로 향하는 푸니큘라 역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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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보메로 언덕에서 내려다 본 기막힌 풍경. 오른쪽에 보이는 게 베수비오 화산과 산타루치아 항구다. 8 나폴리의 젊은이들은 해안가에 앉아 여유를 즐긴다 9 열정의 도시. 나폴리 거리에는 키스하는 연인들이 유난히 많다. |
경계 열심히 잘했다고 주는 나폴리의 사탕인가?도시에서 가장 높은 보메로 언덕Vomero Hill에 오르자 저 멀리 베수비오 화산이 볼펜을 대고 꾹꾹 눌러 그린 듯이 선명했고, 그 아래 산타루치아 항구가 환상적으로 빛났다. 무엇보다 감동은 단숨에 나폴리 전부를 보게 된 것. 그동안의 한이 풀리는 것 같았다. 8년 전에 내가 읽었던 가이드북 저자는 글의 순서를 잘못 썼다. 위험하지만 아름답다고 했어야지, 왜 아름답지만 위험하다고 했더냐. 천국 같은 보메로 언덕에서 다시 지상으로 내려가는 길.
주차되어 있는 차들의 운전석이 알록달록 예쁘기에 들여다보니 동그랗고 커다란 쇳덩어리 자물쇠가 핸들마다 메어있더라. 역시 전 세계 자동차 도난률 1위에 빛나는 나폴리로다. 하하하. 가방 단속을 다시 단단히 하고, 아주 시원하게 웃음을 뱉었다. 나폴리 넌 누구에게도 나쁜 놈이구나.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으면 그 미모의 간을 살짝 볼 수 있는 참으로 미묘한 나폴리 여행이었다. 그 어떤 나쁜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평화의 하루.
오! 나폴리 피자여
Margherita
위험하다고들 말이 많아도 결국에 나폴리 시내로 들어가는 이유는 전 세계인들에게 공통적이다. 피자. 수없이 언급되어서 이제 식상해졌을 지도 모르는, 결국 피자 마르게리타Margherita 이야기일지라도 나폴리하면 무조건 영원불멸할 골든 룰이라 그 이야기를 또 해야겠다. 열 번, 스무 번 말해도 전혀 입 아프지 않을 만큼 맛있고, 또 재미있는 스토리이므로. 피자 마르게리타는 그냥 막 대충 만든 듯 혹은 빈약한 듯 보이지만, 군더더기 없이 담백한 매력을 뿜는다. 전 세계인들이 가장 많이 먹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마르게리타의 탄생은 188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보이 왕가의 움베르토 1세와 마르게리타 왕비를 환영하기 위해서 나폴리에 있는 오래된 피제리아 브란디Brandi에서 일하던 장인 피자올로 라파엘레 에스포지토Raffaele Esposito가 새롭게 개발한 것으로 이탈리아 왕국의 국기를 나타내기 위해 초록색으로 바질을, 하얀색으로는 모짜렐라 치즈를, 또 빨강색은 토마토로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아주 콘셉츄얼한 아이디어를 냈더랬다. 여왕에게 바쳐진 피자는 그때부터 영광스럽게도 그녀의 이름을 따라 마르게리타 피자로서의 운명을 살게 되었다.
피자 마르게리타가 처음으로 만들어진 브란디. 화덕으로 들어간 피자는 1-2분이면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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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우, 토마토, 올리브 오일, 바질만 있다면 마르게리타 완성. 2 친절한 피제리아의 직원들. 브란디는 피자말고도 파스타 등 사이드 디쉬도 훌륭하다. |
재료와 방법은 결과물처럼이나 간단하다. 피자 도우 위에 산 마르자노 토마토, 슬라이스한 버팔로 모짜렐라, 올리브 오일, 그리고 바질을 올려 나무가 활활 타오르는 화덕 안에서 1-2분 안에 빠르게 굽기. 물론 그 간단함은 절대로 무시할 간단함이 아니다. 그 속에 숨겨진 디테일로 나폴리 피자 협회Associazone Verace Pizza Napoletana에서 제시하는 룰만 종이 10장을 넘긴단다. 치즈 없이 토마토소스와 올리브 오일, 마늘, 오레가노를 올린 피자 마리나라Marinara 혹은 정어리를 올린 피자 나폴리타나Napoletana도 나폴리에서 꼭 먹어볼 피자이니 참고하길.
나폴리의 아웃렛에서 만난 시모나에게 한국에서 얼마 전에 시켜 먹었던 유명한 미국 프랜차이즈 피자 사진을 보여주며 물었었다. 미국과 이탈리아 피자의 가장 큰 차이점이 무엇인지 말이다. 그녀는 내 핸드폰을 손으로 밀치며 소리쳤다. “아, 정말. 이거는 피자가 아니잖아요. 우리 마르게리타 먹어보고도 그래요?” 앞으로는 나도 그녀처럼 나폴리에서 원조 피자를 먹어본 티 좀 내고 다녀야겠다.
Brandi
나폴리에서 단 하나의 피자집을 가야한다면, 역시 원조가 가장 안전한 선택일 거다. 브란디는 전 세계인의 입에 매일같이 오르락내리락 대는 마르게리타 피자를 처음으로 발명한 원조 피제리아니까. 드높은 인기에 불친절해질 만도 한데, 직원들은 화덕에서 피자 굽다말고 인증샷 찍어주기에도 애쓴다. 나폴리 스타일의 다양한 사이드 디쉬도 선보이니 여럿이 함께 간다면 피자 외에 다른 메뉴도 주문하기를 추천한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피자와 맥주, ‘피맥’을 선호하지만 브란디의 와인 리스트도 훌륭하니 참고하도록. 플레시비토 광장과 가까운 골목에 있어서 도심을 여행하다 슬쩍 들르기에 좋다.
- 주소 Salita Sant’ Anna di Palazzo 1-2
- 문의 +39-081-416-928
- 영업시간 오후 12시 30분부터 3시 30분까지, 오후 7시부터 자정까지
Di
Matto
올드 시티에서 잘 나가는 디 마테오가 처음 피자를 굽기 시작한 건 1936년. 살바토레 디 마테오Salvatore Di Matteo라는 피자올로가 문을 열었다. 그는 앤초비가 들어가는 피자 나폴리탄 메뉴를 개발해낸 장인이다. 명성을 듣고 찾아간 여행자라면 전혀 인상적이지 않은 실내 인테리어에 실망하곤 하지만, 피자 맛만큼은 엄지를 들만큼 환상적이다. 나폴리를 처음 방문하는 이라면 당연히 마르게리타를 주문하겠지만, 디 마테오는 원하는 토핑을 골라서 주문할 수 있는 나폴리에서 몇 안 되는 피제리아 중 하나이니 도전해보길. 딥 프라이드한 작은 튀김요리 프리투라Frittura도 디 마테오의 추천 메뉴다.
- 주소 Via dei Tribunali 94
- 문의 +39-081-455-262
- 영업시간 오전 10시부터 자정까지(8월 중 2주 휴무)
Da
Michele
오래도록 줄 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 것. 전통적으로 유명했던 다 미켈레는 줄리아 로버츠 주연의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에 등장한 이후로 대기 줄이 엿가락처럼 늘어났다. 다행히도 화덕 안에서 피자가 구워지는 속도는 평균 1분 10초로 LTE 급. 재료가 빈약하거나 혹은 멋이 없어 보여도 맛만큼은 끝내준다. 도우의 겉은 바삭하고, 안의 올리브 오일과 토마토소스는 유난히 걸쭉하다. 버팔로 치즈가 아닌 우유로 만든 치즈 피오르디라떼Fiordilatte를 사용하는 게 특징으로 메뉴는 오로지 마르게리타와 마리나라, 단 2종류뿐이다. 음료도 맥주와 물, 단 2종류.
- 주소 Via Sersale 1
- 문의 +39-081-553-9204
- 영업시간 오전 10시부터 오후 11시까지(일요일 휴무, 8월 중 2주 휴무)
발행2015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