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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 負(부)也(야)者(자)小(소)人(인)之(지)事(사)也(야)
등짐(負)이란(也) 것은(者) 소인(小人)의(之) 일(事)이다(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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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은 부차승(負且乘)의 부(負)를 밝히고 있다.
부야자소인지사야(負也者小人之事也)는 해괘(解卦) 육삼(六三)의 효사(爻辭)인 <부차승(負且乘)>에서 <부(負)>를 <소인지사(小人之事) 즉 소인(小人)의 일(事)>로 새겨(玩) 헤아리고(擬) 가늠한(斷) 것이다. 여기서 <부(負)>는 <등짐 진 꼴(相)>을 진술(陳述)하여 묘사(描寫)함이 아니라 <등짐 지는 일(事)>을 완의(玩擬)하여 따져(議) 가늠하게(斷) 하는 짓(象)의 사(辭)이다. 상(相)은 눈에 보이는 보습(貌)이고 상(象)은 마음가기(志)로 하여금 살펴(觀) 헤아리고(擬) 따져(議) 변화(變化)를 가늠하게(斷) 하는 신의(神意)를 나게(生) 한다. 다시 말하지만 부차승(負且乘)의 <부(負)>는 등짐 진 광경을 묘사(描寫)해주는 진술(陳述)이 아니라 묘사(妙思)하여 신의(神意)를 누리게 하는 상(象)이다. 상모(相貌)는 신의(神意)를 일으키지 못한다. 그러나 상조(象兆)는 늘 지(志)로 하여금 변하여(變) 새로되는(化) 뜻(意)을 유발(誘發)한다. 말하자면 상(象)은 늘 변화지의(變化之意) 즉 신의(神意)를 재촉한다. 신의(神意)는 창의(創意)를 낳는다(生). <등짐을 짐(負)>을 상(象)으로 삼아 소인(小人)의 짓거리(事)를 관완(觀玩)함이란 소인(小人)이 일삼는 <동이불화(同而不和)의 동(同)-비이부주(比而不周)의 비(比)-소인회토(小人懷土)의 토(土)> 등등이 비롯하는 <아욕(我欲)의 심술(心術)>을 의의(擬議)하여 판단하게(斷) 함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소인(小人)이 일삼는 아욕(我欲)의 짓(象)으로 삼아 부차승(負且乘)의 <부(負)>를 살펴(觀) 새길(玩) 수 있어야 <부차승(負且乘) 치구지(致寇至)의 효사(爻辭)와 상교(相交)가 이루어진다. 소인(小人)의 일(事)은 왜 궁(窮)하고 마는 것인가? 아욕(我欲)의 심술(心術) 탓이다. 사욕(私欲)이 빚어내는 교만(驕慢)은 자벌(自伐)로 이어져 끝내는 매사(每事)를 궁색(窮塞)하게 한다. 세상사(世上事)란 상대(相對)가 있게 마련이고 서로 배려하지 않으면 상대(相對)는 겨루기를 마다 않음이 세파(世波)이다. 세파(世波)와 삿대질하기를 마다않는 소인(小人)은 아욕(我欲)의 교만(驕慢) 탓으로 일마다(每事) 궁(窮)하고 흉(凶)하게 마련임을 모른다. 그래서 부차승(負且乘)의 <부(負)>는 『논어(論語)』「이인(里仁)」에 나오는 <군자유어의(君子喩於義) 소인유어리(小人喩於利)>를 떠올려준다. 무엇보다 소인(小人)의 심술(心術)은 사리(私利)에(於) 약삭빠르다(喩). 그래서 소인(小人)은 『예기(禮記)』「곡례(曲禮)상(上)」에 나오는 <임재무구득(臨財毋苟得) 임난무구면(臨難毋苟免) 흔무구승(很毋求勝) 분무구다(分毋求多) 의사무질(疑事毋質) 직이물유(直而勿有)>를 서슴없이 얕보고 팽개친다. <부차승(負且乘)의 부(負)>가 소인(小人)이 범하는 아욕(我欲)을 살펴(觀) 새겨(玩) 헤아리고(擬) 따져(議) 늘 새롭게 판단하도록(斷) 마음가기(志)를 재촉하는 말씀이 <부차승(負且乘)의 <부(負)>이다.
(註: 군자유어의(君子喩於義) 소인유어리(小人喩於利) <군자는(君子) 대의(義)를(於) 밝히고(喩) 소인은(小人) 사리(利)를(於) 밝힌다(喩).>)
(註: 소인동이불화(小人同而不和) <소인은(小人) 패거리 짓되(同而) 어울리지 못한다(不和).> 소인비이부주(小人比而不周) <소인은(小人) 서로 견주되(比而) 두루하지 못한다(不周).> 소인회토(小人懷土) <소인은(小人) (가슴속에) 땅을(土) 품는다(懷).> 회토(懷土)의 <토(土)>는 아욕(我欲)의 비유(比喩)임.)
(註: 임재무구득(臨財毋苟得) 임난무구면(臨難毋苟免) 흔무구승(很毋求勝) 분무구다(分毋求多) 의사무질(疑事毋質) 직이물유(直而勿有) <재물을(財) 만나면(臨) 구차하게(苟) 취하fi(得) 말고(毋) 환난을(難) 만나면(臨) 구차하게(苟) 피하려i(免) 말고(毋) 다투면(很) 이기고자(勝) 노리지(求) 말고(毋) 나누면(分) (제몫이) 많기를(多) 노리지(求) 말고(毋) 이를(事) 의심나면(疑) 캐묻지(質) 말고(毋) 바로잡아주되(直而) 제 의견인양(有) 하지 말라(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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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 乘(승)也(야)者(자)君(군)子(자)之(지)器(기)也(야)
수레(乘)란(也) 것은(者) 군자(君子)의(之) 기물(器)이다(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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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는 부차승(負且乘)의 승(乘)을 밝히고 있다.
승야자군자지기야(乘也者君子之器也)는 해괘(解卦) 육삼(六三)의 효사(爻辭)인 <부차승(負且乘)>에서 <승(乘)>을 <군자지기(君子之器)) 즉 군자(君子)의 기물(器)>로 새겨(玩) 헤아리고(擬) 가늠한(斷) 것이다. 여기서 <승(乘)>은 <수레(乘)의 꼴(相)>을 진술(陳述)하여 묘사(描寫)함이 아니라 <수레를 이용하는 일(事)>을 완의(玩擬)하여 따져(議) 가늠하게(斷) 하는 짓(象)의 사(辭)이다. 상(相)은 신의(神意)를 나게(生) 한다. 다시 말하지만 부차승(負且乘)의 <승(乘)>은 수레를 타고 있는 광경을 묘사(描寫)해주는 진술(陳述)이 아니라 묘사(妙思)하여 신의(神意)를 누리게 하는 짓(象) 즉 징조(徵兆)이다. 상조(象兆)란 늘 지(志)로 하여금 변하여(變) 새로되는(化) 뜻(意)을 유발(誘發)하여 늘 변화지의(變化之意) 즉 신의(神意)를 재촉한다. 신의(神意)는 창의(創意)를 낳는다(生). <수레(乘)>를 상(象)으로 삼아 군자(君子)를 관완(觀玩)함이란 군자(君子)가 일삼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화(和)-주이불비(周而不比)의 주(周)-군자회덕(君子懷德)의 덕(德)> 등등이 비롯하는 <신독(愼獨)의 심지(心志)>를 의의(擬議)하여 판단하게(斷) 함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군자(君子)가 일삼는 신독(愼獨)의 짓(象)으로 삼아 부차승(負且乘)의 <승(乘)>을 살펴(觀) 새길(玩) 수 있어야 <부차승(負且乘) 치구지(致寇至)의 효사(爻辭)와 상교(相交)가 이루어진다. 군자(君子)는 왜 통(通)하는 것인가? 신독(愼獨)의 심지(心志) 때문이다. 신독(愼獨)이 빚어내는 자비(自卑)는 자겸(自謙)으로 이어져 끝내는 매사(每事)를 통변(通變)하게 한다. 세상사(世上事)란 상대(相對)가 있게 마련이고 서로 배려하면 상대(相對)도 따라 겸허(謙虛)해짐이 세파(世波)이다. 세파(世波)와 다투어 겨루기를 결코 범하지 않는 군자는 신독(愼獨)의 자비(自卑) 덕으로 일마다(每事) 통(通)하여 길(吉)하게 마련임을 사무친다. 그래서 부차승(負且乘)의 <승(乘)>은 『논어(論語)』「이인(里仁)」에 나오는 <군자유어의(君子喩於義) 소인유어리(小人喩於利)>를 떠올려준다. 무엇보다 군자(君子)의 심지(心志)는 올바름(義)에(於) 밝아(喩) 자겸(自謙)하여 맑아 『중용(中庸)』에 나오는 <의금상경(衣錦尙絅)>을 환기(喚起)시킨다. 띠리사 군자(君子)는 『예기(禮記)』「곡례(曲禮)상(上)」에 나오는 <임재무구득(臨財毋苟得) 임난무구면(臨難毋苟免) 흔무구승(很毋求勝) 분무구다(分毋求多) 의사무질(疑事毋質) 직이물유(直而勿有)>를 사무치면서 산다. <부차승(負且乘)의 승(乘)>이 군자(君子)의 심지(心志)를 살펴(觀) 새겨(玩) 헤아리고(擬) 따져(議) 늘 새롭게 가늠하게(斷) 하는 말씀이 <부차승(負且乘)의 <승(乘)>이다.
(註: 군자화이부동(君子和而不同) <군자는(君子) 어울리되(和而) 패거리짓지 않는다(不同).> 군자주이불비(君子周而不比) <군자는(君子) 두루하되(周而) 겨루지 않는다(不比).> 군자회덕(君子懷德) <군자는(君子) 덕을(德) 품는다(懷).>}
(註: 의금상경(衣錦尙絅) <비단옷을(錦) 입으면(衣) 홑옷을(絅) 덧입는다(尙)>)
(註: 임재무구득(臨財毋苟得) 임난무구면(臨難毋苟免) 흔무구승(很毋求勝) 분무구다(分毋求多) 의사무질(疑事毋質) 직이물유(直而勿有) <재물을(財) 만나면(臨) 구차하게(苟) 취하fi(得) 말고(毋) 환난을(難) 만나면(臨) 구차하게(苟) 피하려i(免) 말고(毋) 다투면(很) 이기고자(勝) 노리지(求) 말고(毋) 나누면(分) (제몫이) 많기를(多) 노리지(求) 말고(毋) 이를(事) 의심나면(疑) 캐묻지(質) 말고(毋) 바로잡아주되(直而) 제 의견인양(有) 하지 말라(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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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 小(소)人(인)而(이)乘(승)君(군)子(자)之(지)器(기) 盜(도)思(사)奪(탈)之(지)矣(의)
소인(小人)이면서(而) 군자(君子)의(之) 기물을(器) 탄다면(乘) 도둑이(盜) 그 기물을(之) 뺏으려고(奪) 생각하는 것(思)이다(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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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는 탈지(奪之)의 도(盜)를 밝히고 있다.
<소인이승군자지기(小人而乘君子之器) 도사탈지의(盜思奪之矣)>는 해괘(解卦) 육삼(六三)의 효사(爻辭) 부차승(負且乘)의 <승(乘)>이 <치구지(致寇至)>로 이어져 소인지사(小人之事)가 흉(凶)하게 마련임을 새기고(玩) 헤아려(擬) 가늠하게(斷) 한다. 도사탈지의(盜思奪之矣)의. <탈지(奪之)>는 <치구지(致寇至)의 지(至)>를 풀이함(紬繹)이요 동시에 온갖 아욕(我欲) 즉 내욕심(我欲)의 심술(心術)을 주역(紬繹)한 것이다. <도(盜)> 즉 아욕(我欲)의 심술(心術)은 오로지 남의 것을 빼앗고자(欲奪) 함이다. 탈지(奪之)의 <지(之)>는 <남이 좋아하는 것>을 나타내는 지시어(指示語)로 여기고 새기면 된다. 도적(盜)을 부르는(致) 짓거리는 위해(危害)를 자초(自招)하고 만다. 아무리 꿀단지라도 그 속에 꿀이 없으면 생쥐가 들락거리지 않는 법이다. 소인(小人)이 군자(君子) 행세를 자행(恣行)하고자 군자(君子)가 타야할 수레타기(乘)를 한다면 다른 소인(小人)이 그 수레를 빼앗고자(欲奪) 샘을 내게 된다. 빼앗고자 하는 시샘이 곧 <도사(盜思)>이다. 소인(小人)의 짓거리를 범하면서 군자(君子)로 대접받기를 탐(貪)하는 교만(驕慢)은 <치구(致寇)>로 이어지고야 만다. 이는 곧 소인(小人)이 범하는 동이불화(同而不和)의 흉(凶)이다. 『논어(論語)』「팔일(八佾)」에 나오는 <군자무소쟁(君子無所爭)>을 상기(想起)한다면 패거리만 짓고서(同而) 어울리지 못함(不和)은 탈지(奪之)의 도(盜)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을 빼앗자(奪)면 겨루고(比) 다투어야(爭) 한다. 군자의 일(事)에는 쟁탈(爭奪)이란 없다. 그러나 소인지사(小人之事)는 쟁탈(爭奪)이 승패(勝敗)로 셈해져서 치구(致寇)의 흉(凶)‘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그러나 소인(小人)은 빼앗고자(奪) 하는 사(私)-탐(貪)의 심술(心術) 탓으로 군자(君子)의 기물인 수레(乘)를 서로 빼앗고자(奪) 한다. 그래서 [15-4]의 자왈(子曰)이 해괘(解卦:☳☵) 육삼(六三)의 효사(爻辭) 치구지(致寇至)를 <도사탈지(盜思奪之)>라고 풀이해둔 셈이다. 도사탈지(盜思奪之) 이것은 아욕(我欲)의 흉(凶)을 관완(觀玩)-의의(擬議)하여 가늠하게(斷) 한다.
(註: 소인동이불화(小人同而不和) <소인은(小人) 패거리 짓고서(同而) 서로 어울리지 못한다(不和).>
(註: 군자무소쟁(君子無所爭) <군자한테는(君子) 다투는(爭) 것이란(所) 없다(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