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봉성 장씨(求禮·鳳城張氏)의 역사 속 인물들
구례·봉성 장씨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문무(文武)를 겸비한 인물들을 다수 배출한 가문으로 전해진다. 특히 충절과 청렴, 무맥(武脈)의 전통이 강한 가문으로 알려져 있다.
1. 시조 장악(張岳)
구례·봉성 장씨의 시조는 장악(張岳)으로 전해진다.
장악 공은 안동 장씨 시조 장정필(張貞弼)의 21세손이며, 고려 인종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고려의 고위 관료였다.
전해지는 기록에 따르면 장악 공이 나이 70이 되어 입조할 때마다 고향 생각에 수심이 가득하였는데, 이를 본 고려 인종이 봉성(鳳城)을 식읍으로 하사하고 봉성군(鳳城君)에 봉하였다고 한다.
이후 후손들은 구례(求禮)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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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청백리 무신 장필무(張弼武)
장필무 공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무신이며, 구례·봉성 장씨를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중종 때 무과에 급제한 뒤 첨절제사·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북방 방어와 여진족 토벌에 큰 공을 세웠다.
특히 장필무 공은 무신이면서도 청렴결백한 인물로 이름이 높았다. 《선조수정실록》에는:
“필무는 보통 이상으로 청렴하여 무인답지 않았고, 또 강직하여 뜻이 높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청렴함과 충절은 조정에서도 높이 평가되어 사후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고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또한 선조실록에는 선조가 장필무 공을 인견하면서 삼국지의 명장 장비(張飛)를 언급한 기록도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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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북방의 명장 장의현(張義賢)
장의현 공은 장필무 공의 아들로,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북방 무장이었다.
무과에 급제한 뒤 해남현감과 부령부사를 지냈으며, 선조 때 발생한 여진족 니탕개의 난 당시 북방 방어의 최전선에서 활약하였다.
특히 건원보가 공격받았을 때 군사를 이끌고 구원에 나서 왜적과 여진족의 침입을 막아내 큰 명성을 얻었다.
장의현 공은 단순한 지방 수령이 아니라 실제 전장에서 활약한 실전형 무장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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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임진왜란의 충신 장지현(張智賢)
장지현 공은 장필무 공의 아들로, 임진왜란 당시 추풍령 전투에서 왜군과 맞서 싸우다 장렬히 순절한 의병장이다.
신립 장군의 휘하에서 부장을 지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추풍령에서 왜군의 북상을 막아섰다.
전해지는 이야기에는 첫 번째 방어전에서 왜군의 진격을 막아내는 데 성공하였으며, 마지막까지 칼이 부러지고 엄지손가락의 살갗이 벗겨질 정도로 치열하게 싸웠다고 한다.
후세 사람들은 그의 충절을 기려 정려를 내리고 서원에 배향하였다.
현재 충청북도 영동군 추풍령 일대에는 장지현 공의 순절비와 전적지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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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 밖의 인물들
구례·봉성 장씨는 이외에도 여러 인물들이 중앙 관직과 군직에서 활약하였다.
- 장준(張浚) : 군자감정(軍資監正)
- 장정(張檉) : 부총관(副摠管)
- 장세후(張世後) : 중추부사(中樞府使)
- 장진구(張軫九) : 중추부사(中樞府使)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조선시대 중앙 군정과 왕실 방위 체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며 가문의 명성을 이어갔다.
또한 문과 급제자와 학문 계통 인물들도 배출되어, 구례·봉성 장씨는 문무를 함께 갖춘 가문으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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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봉성 장씨는 고려시대 재상급 인물에서 시작하여 조선시대 청백리 무신, 북방 명장, 임진왜란 충신과 의병장에 이르기까지 충절과 무맥의 전통을 이어온 가문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