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위해 입산…봉사 위해 하산
15년간 재가자에 법문 큰 인기
시조.산문.서예로도 불법 전파
조계종 첫 중앙상임포교사였던 영담(影潭) 김어수(金魚水)는 사실 시조시인으로 더 유명하다.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 포교사로 대중과 함께 울고 웃으며 살았던 그는 날마다 한 줄씩 시를 썼다. “나는 가슴으로 부르는 노래는 명창에 가까우면서도 입으로 부르는 노래는 음치에 가깝다”는 그의 말대로 어수는 명창이었다. 그가 가슴으로 부른 노래는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본명은 소석(素石), ‘어수’는 법명이다. 강원도 영월 상동면 출신이다. 아버지는 환갑의 나이에 어수를 낳았다. 늦둥이에 7대독자인 그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막내였다. 대나무처럼 꼿꼿한 선비였던 그의 아버지는 을사늑약 이후 한일합방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고, 을사오적을 규탄하는 등 반대운동에 동참했다. 일본에게 주권이 넘어갔을 즈음, 더 이상 고향에 머무를 수 없었던 그의 가족은 주변의 눈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왔다. 그 때 어수의 나이 세살이었다. 아버지는 괴나리봇짐 하나 메고 앞장섰다. 어머니는 막내아들을 업고 따라 나섰다. 기차도 자동차도 없던 시절, 추풍령을 넘어 남으로 남으로 내려갔다. 그의 가족이 짐을 푼 곳은 부산 동래 범어사 부근. 아버지는 범어사 소유의 산판을 관리하는 일을 맡아 생계를 꾸렸다.
꼬박 이십리 길을 걸어 나와야 사람구경을 할 수 있는 깊은 산중에서 어수는 산과 하늘, 숲과 냇물을 보고 자랐다. 어머니를 따라 다니며 산나물, 버섯, 약초를 캐는 것도 중요한 일과였다. 아버지는 그의 선생님이었다. 네 살 때부터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한 어수는 열 살 무렵에는 사서삼경까지 읽게 됐다.
산 속에 살던 그에게 신식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왔다. 범어사가 불교계 인재양성을 위해 명정보통학교를 설립했던 것. 어수도 이곳에 입학했다. 유교집안에서 자란 부모는 아들이 신학문을 공부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하지만 가난한 형편을 생각해보면, 학비가 무료였던 명정학교에 다닐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운이었다. 입학하자마자 두각을 드러낸 그는 곧 3학년으로 월반했다.
그러나 보통학교를 졸업하던 해, 그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 잇따라 찾아왔다. 겨울 아버지를 잃고 이듬해 가을 어머니까지 그의 곁을 떠난 것. 일년 새 부모를 모두 잃은 13세의 소년은 땅이 꺼진 것과 같은 절망감을 느꼈다. 〈가로수 밑에 부숴지는 햇살〉(한국출판문화공사. 1983)에서 어수는 당시의 심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천지가 캄캄할 뿐이다. 막막한 하늘 아래 한 방울 뿌려진 물방울이라고나 할까. 슬프다느니 외롭다느니 하는 말은 사치스럽다.” 마냥 슬퍼할 수 없는 처지였다. 당장 먹고사는 것부터 걱정이었다. 남의 집 머슴살이부터 이발소 심부름꾼까지 닥치는 대로 일했다. 이곳저곳 전전하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이 범어사였다. 출가한 그는 행자생활을 시작했다. 밥하고 나무하고 청소하는 일 역시 쉽지 않았지만,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운 어수는 다른 사람보다 경전을 읽고 쓰는데 능숙했다. 덕분에 출가한지 5년만인 1926년 공비유학생으로 선발돼 일본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어수는 1930년 5년제인 일본 교토(京都) 하나소노(花園)중학교를 졸업했다. 이즈음 그의 이름이 문단에 알려졌다. 1932년 6월 조선일보에 ‘조시(弔詩)’를 발표해 등단한 것. 연이어 신문잡지에 시조시 및 수필을 발표하면서 시조시인으로 입지를 넓혀갔다.
대교과를 졸업하고 24세 무렵 그는 바랑을 짊어지고 스님들을 찾아다녔다. 진응.서응.해은스님과 혜월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사찰을 다니며 수행에 매진했다. 이 무렵 범어사에서 만난 석주스님(1912~2003)과의 인연은 평생 계속된다. 한편, 어수는 중앙불교전문학교에 진학했다. 중앙불전 재학 중, 경전번역에 참여해 〈안락국태자경(安樂國太子經)〉(불교시보사. 1937)을 번역해 출간했다. 또 이곳에서 서정주, 김달진 등을 만나 교우했으며, 김달진.나운경(羅雲卿)과 〈룸비니〉를 발간하는 등 시작(詩作)을 멈추지 않았다.
1938년 중앙불전을 졸업한 그는 해방을 앞두고 하산했다. 동아일보 기자로 잠깐 재직하다 교육계에 투신, 부산을 비롯해 경남 각지 중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산은 산 물은 물〉(부름. 1981)에서 밝힌 하산의 변에 어수는 “입산도 중요하지만 하산에도 뜻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기 수양을 위해 입산이 필요한 것처럼, 남에게 봉사하기 위해 하산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말을 실천하기 위해 뛰어다닌 어수의 삶을 짐작할 수 있다.
교직을 은퇴한 뒤 그는 1969년 11월 대한불교 조계종 중앙상임포교사에 임명됐다. 불전을 졸업한지 30여년만의 일이다. 당시 총무원장이었던 청담스님은 포교의 중요성을 인식해 상임 포교사 제도를 만들었다. 스님과 재가자 모두 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는데, 첫 회에 무진장스님, 법성스님, 김어수, 선진규 등 4명이 합격했다. 임명장을 받은 어수는 세상을 뜨기 전까지 15년간 재가자들에게 법문하는 일에 매진했다. 포교사로서 제2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대한불교청년회, 전국신도회 등 재가자들의 신행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어수를 찾는 곳이 많았다. 부산 법륜사, 양산 통도사, 서울 조계사 등 전국 사찰이 그의 강의실이 됐다. 연간 강의 횟수가 250~280회에 달할 정도니 그야말로 연중무휴였다. 한 손에는 옥으로 만든 염주를, 다른 한 손에는 짧은 주장자를 들고 강의실에 나타나면 사람들은 환호했다. 서예에 조예가 깊었던 그는 글씨를 써 나눠주는 것을 좋아했다. 어수의 상징이기도 한 물고기와 냇물이 새겨진 낙관이 찍힌 반야심경 8폭 병풍은 불자들 사이에서 인기였다.
혼자 있을 때보다 청년들과 함께 있을 때가 더 많았다. 법문을 하고 받은 보시금은 의례 청년 불자들의 찻값으로 쓰였다. 경기 남양주 불암사 상욱스님은 “감기에 걸려도 자리에 눕는 날이 없을 정도로 법문을 다녔다”며 “어수법사의 법문을 듣고 불교에 귀의한 사람은 물론이고 출가한 사람도 여럿일 정도로 한국최고의 포교사였다”고 평가했다. 중앙상임포교사로 20여 년간 함께 활동한 선진규 봉화산청소년수련원장 역시 “청렴하고 포교사에 대한 사명감이 투철한 분이었다”며 “대불청, 대불련, 각 사찰 신도모임 등에서 법문을 청하면 천리길도 마다않고 달려갔다”고 회상했다. 중앙상임포교사로서 어수의 사명감은 누구보다 강했다. 그가 죽기 3일전 아들을 시켜 총무원에 사직서를 제출하도록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늘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불교란 약간의 교리 설명이나 식수행상(識數行相)을 안다고 해서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어디까지나 수행이 기저가 돼 거기서 쌓아진 자증(自證)의 발로가 없어서는 천언만담(千言萬談)을 하더라도 그것은 바람소리나 새 울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남에게 감화를 줄 수가 없고 귀의 신봉케 할 수 있는 힘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달안개 피는 언덕길 중).” 포교사로서 자신을 돌아보고 다그쳤던 그는 스스로에게는 엄격했지만 대중에게는 항상 따뜻했다. 주변에는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영결식이 진행된 조계사는 어수가 세연을 달리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조계사 인파로 가득 찼다.
어수는 80평생 동안 부처님에게 시공양(詩供養)을 올렸다. 그가 떠난 지 20년, 세상은 변했고 그를 기억하는 사람보다 모르는 이가 더 많아졌다. 하지만 그가 뿌린 진리의 씨앗은 싹을 틔워 사람과 사람에게 전해졌다. 책을 펼 때마다 그가 피운 시조문학의 꽃이 향기를 잃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불심(佛心)에 젖은 뜨락에서 평생을 서성거리며 살아온” 어수가 남긴 글에는 “꿈속의 엷은 안개처럼 주야로 그려보는” 부처님의 고운 얼굴이 담겨져 있다.
어현경 기자
eonaldo@ibulgyo.com
범어사 학인시절부터 문예잡지를 애독하며 시공부를 했던 김어수는 1932년 6월 조선일보에 ‘조시(弔詩)’를 발표해 등단했다. 중앙불교전문학교 재학 중에도 시작활동을 멈추지 않았으며, 동아일보, 중앙일보, 한국일보 등에 꾸준히 시를 발표했다. 해방 이후 교단에 투신한 그는 25년 간 국어교사로 재직했다. 교직에서 은퇴한 이후 그의 문단활동은 더 활발해졌다. 1966년 한국문인협회 울산지부 초대회장에 선출됐으며, 1978년 동국시조시인회 회장, 1981년 한국문인협회 시조분과회장을 역임했다. 또 1983년 한국현대시조시인협회가 창설되자 초대회장에 취임했다.
‘낙상(落想)’ ‘산촌한정(山村寒情)’ 등의 시조를 발표하는 한편, 찬불가 ‘부처님오신날’ 등을 작사했다. 시조집 〈회귀선의 꽃구름〉(신진문화사. 1976), 〈이 짙은 향기를 어이하리〉(보림사. 1983)과 수필집 〈달안개 피는 언덕길〉(신신문화사. 1975), 〈가로수 밑에 부숴지는 햇살〉(한국출판문화사. 1983) 등의 저서가 있다. 이밖에도 〈반야심경〉 해설서인 〈스님에게서 온 편지〉(미래. 1983), 〈법구경〉(보성문화사. 1979) 등을 출간했다. 시조를 발표한 공로를 인정받아 어수는 1980년 정인승과 함께 제5회 노산시조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시라고 써온 지가 벌써 40년이 지났다. 끄집어 내보아야 맨 구질구질한 소리뿐이다. 사람이 때가 벗어져야지 글만 때를 벗을 수는 없는 것 같다. 시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사람이 시가 돼야 한다는 것인가 보다.” 어수의 말처럼 그의 문학에는 고뇌와 철학, 인격이 담겨있다. 김동준 동국대 명예교수는 ‘인생적 경영과 문학적 통률의 미학’에서 “어수문학의 특색은 자연친애에서 낳온 사물에 대한 애정에서 출발한다”며 “인간사나 일상사보다는 자연사에 눈을 돌리고 거기서 인간 김어수의 철학을 발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나는 본시 불심에 젖은 뜨락에서 오늘까지 서성거리며 살아온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산에서 산 날이 많았으며 푸른 하늘, 밝은 달, 흐르는 물, 봄 저녁 두견새 소리, 무서리 흐르는 가을밤에 그대로 인생을 생각도 해 보았고, 낭만의 여정에서 고독의 하얀 그림자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생활의 전부이다(달안개 피는 언덕길 중).” 이와 관련해 김동준 교수는 “불교적 공허가 김어수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인간적 충만으로 인식되는 경지”로 보았으며, 불교적인 절대공허가 아닌 초탈의 의지가 시조에 녹아있다고 평가했다. 임헌도 시인은 ‘어수의 문학세계’에서 “우리 민족문학으로서 서정성을 잘 살리면서 자연의 형상을 조화있게 추구함은 물론 조국애와 국토애, 민족애 내지는 인간애를 발견할 수 있다”고 봤다. 특히 “어수가 해인사 송광사 금강산 등 남북을 합쳐 53곳의 명승고적을 찾아다니며 느낀 감흥을 그린 시조집 〈이 짙은 향기를 어이하리〉(보림사. 1983)에는 조국애와 민족애가 고스란히 담겨있다”고 덧붙였다. ‘신앙과 조국과 낭만의 문학’에서 공석하 역시 “조국 땅에 대한 끝없는 애정과 종교적 신앙이 결부된 시집”이라며 “역사적 사건과 현실, 작가의 느낌이 융합돼 갈등이나 번뇌를 초월해 절대의 빛이나 신앙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해석했다.
범어사에서 출가해 수행자로 25년을 살았고, 말년에는 포교사로 삶을 회향한 김어수. 그의 문학에서 불교와 산사는 빼놓을 수 없는 소재였다. 그에게 있어 시조를 쓰는 것은 자신의 때를 벗기는 과정이었다.
어현경 기자 eonaldo@ibulgy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