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는 백제에 잃어버린 이 일대 영토를 되찾기 위해 애쓰던 시기(510년대 중반 추정)에 20대 초반의 태자(후에 안장왕이 됨)를 이 곳 백제 땅으로 보내 정보수집 활동을 시킨다. 태자는 지금의 고봉산 일대를 돌아 다니다 한씨 성(姓)을 가진 여인을 만나고 두 사람은 첫눈에 서로 수려한 외모에 반해 깊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러던 중 태자의 임무가 끝나고 태자가 '꼭 돌아온다'는 약속을 남긴 채 다시 고구려로 돌아가면서 이들은 잠시 이별의 시간을 맞는다.
이별의 시간은 태자의 경우 왕위 등극과 백제 침공 준비 등 태자로서 당연한 일로 채워졌지만 한주(韓珠)미녀는 춘향과 똑같은 시련을 겪게 된다. 생일을 맞은 백제 태수는 미모가 뛰어난 한주(韓珠)미녀를 불러 수청을 강요하지만 한주(韓珠)미녀는 '정혼한 사람이 있다'며 한사코 이를 거부하고 정혼자마저 밝히지 않아 옥에 갇힌채 죽음의 위기에 내몰리면서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죽고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 고 단심가를 읊조린다.
태수의 명이 내려지는 순간 관아를 에워싸고 있던 광대패들이 갑자기 백제 군사를 공격한다.
고구려 22대 왕이 된 안장왕의 오른팔인 을밀(乙密)장군 부대가 광대패로 변장하고 있다 기습 공격, 백제 군사와 대접전을 벌이게 된다.
이 와중에 한주(韓珠)미녀는 이 곳을 무사히 빠져 나온 뒤 고봉산에 올라 봉화를 올려 국경에서 기다리고 있던 안장왕과 고구려 대군을 기쁨으로 맞이한다. 이후 안장왕은 이 일대를 모두 점령하고 한주(韓珠)미녀를 고구려로 데리고 가 왕과 왕비가 돼 잘 살았다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는 비록 상세한 내용은 구전되고 있지만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와 신채호(申采浩)의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 기록돼 있고 고봉산에 유적도 남아 있는 엄연한 사실(史實)이다. 다만 이름 표기가 조금 달라 삼국사기에는 '한씨 성(姓)을 가진 백제 여인'이라고, 조선상고사에는 '백제 한주(韓珠)미녀'라고 각각 표현돼 있다.
알다시피 삼국사기는 삼국시대 역사를 가장 정확하게 기록한 역사서로, 조선상고사는 근대에 쓰여진 우리나라 정통 역사서로, 안장왕과 한주미녀 이야기가 꾸며진 이야기가 아닌 역사적 근거를 바탕으로 한
것임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한씨미녀가 달을성현의 높은 곳에 올라 봉화를 올려 안장왕을 맞았다.그후 그 이름을 고봉(高烽)으로 했으며 백제땅 개백현(지금의 행주산성)의 이름을 왕을 맞이했다 하여 왕봉(王逢)으로
바꾸었다'고 기록돼 있다.
또 조선상고사에는 '해상잡록(海上雜錄:삼국시대 기록을 정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저자.연대 미상이며 현존하지 않는다)에 안장왕과 한주(韓珠)미녀의 기록이 보인다'고 적고 있다. 특히 조선상고사에 백제 성왕(聖王) 7년(안장왕 11년.529년) 고구려가 북쪽 변방 혈성을 빼앗았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혈성이 곧 강화와 인근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다.
고봉산에서는 삼국시대 기와편이 무수히 나오고 있고 정상에 봉화대도 남아 있다. 이 때문에 이 이야기가 조선 중기에 나온 춘향전의 원전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신채호는 심지어 정몽주(鄭夢周)의 단심가(丹心歌: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도 한주미녀가 지은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한주(韓珠)미녀가 백제 태수 수청을 거절하고 옥에 갇혀 있을때 정절을 지키기 위해 안장왕을 향해 읊조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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