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저한 생식으로 목 임파선 종양을 고치고
최방원
(전북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 324호, 0677-64-3748)
나는 올해로 48세가 되었다.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느 누구보다 많은 고생을 했다. 69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군 만기제대 후 7년간 외항선원생활을 했다. 건강에 문제가 있었는지 혈기왕성하다는 나이에 가을만 되어도 내의를 입어야 했으며 세 시간 정도 버스를 타면 심한 피로와 수전증을 겪어야 했다. 혹시 배 타는 일이 건강을 해치는가 싶어 선원생활을 그만두고 80년부터 고향에서 미곡업을 시작했다. 막상 사업이라고 시작하니 농민들과 고향친구들을 자주 만나게 되었고 술도 마셨다. 81년 32세에 결혼을 해서 두 아들을 두었다. 별 문제 없는 단란한 가정이었다.
특별한 자본도 없이 시작한 사업인지라 초기에 힘이 들었다. 그러나 먼 훗날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뛰어다녔다. 일이 워낙 힘들어서 우리 부부는 피로가 겹쳐 매일 몸이 나른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세수를 하다 목에서 이상한 덩어리를 발견했다. 선원 생활 당시 신체검사를 받았을 때 고혈압이라고 했었는데 아마도 혈압이 높아서 그러겠지 생각하고 말았다. 그러나 몇 개월이 지나도 없어지질 않았다. 이대로 놔두면 안되겠구나 싶어 여러 군데 개인병원을 다녔다. 의사마다 혈압이 높아서 그러니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술이나 조금 줄이라고 했다. 워낙 술을 좋아했기에 줄이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술을 마시고 난 후라든가 피로가 겹치면 목 부위가 땡기고 커지는 기분이 들었다. 정말 안되겠구나 싶어 다음날 종합병원으로 갔더니 정확한 결과는 조직검사 후 알려주겠다고 했다. 병원에 온 김에 종합진찰을 받기로 했다. 역시 고혈압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혈압이 100/180이었다. 혈압강하제를 3개월간 복용한 후 종양제거수술을 하자고 했다.
3개월이 지나 수술을 받았는데 뜻밖에도 악성 임파선 종양이라고 했다. 듣는 순간 사형선고를 받는 기분이었다. 내가 불치병인 암환자가 되다니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가, 겨우 42세에 인생을 마감해야 되는가 싶어 눈물이 한없이 쏟아졌다. 지나간 삶을 생각해보니 많은 분에게 잘못했던 점만 머릿속을 스쳐갔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조모님, 어머니, 처자식이 눈앞을 가려왔다.
병실의 경험 있는 분들에게 암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을 들어보니 희망적이었다. 경험이 없었던 나는 10일 후 30분 동안 항암제를 맞았다. 항암제를 맞으며, 진저리가 나도록 고통스러운 것을 보니 분명히 그 지독한 암세포도 다 죽겠구나 싶어 참을 만했다. 통원치료를 받기로 하고 15일이 지나 퇴원을 했다.
집에 돌아와 거울을 보니 머리털이 다 빠져 있었다. 항암제치료를 시작한 지 25일이 지났을 무렵 방사선치료에 들어갔다. 방사선치료 5분을 받기 위해 왕복 네 시간을 소비해야 했다. 오히려 항암제주사는 고통이 덜한 편이었다. 방사선치료는 나에게 죽음과 같았다. 30일 동안 방사선치료를 받던 중 특히 밤이면 잠을 못 이룰 정도로 기침을 심하게 했다. 얼굴은 창백했고 몸은 앙상해졌으며 도무지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다. 처자식을 위해서라도 병을 극복하자고 수없이 다짐했지만 모든 것이 귀찮고 짜증스럽고 괴롭기만 했다. 그때 내게 희망을 준 것은 아내였다. 아내는 그 힘든 간호에도 늘 웃는 얼굴이었다. 아내의 아름다운 마음씀에 많은 위로를 받았다. 얼마나 따뜻하게 대해 주었던지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마음속으로 어서 병을 이겨내자고 약속했다.
나는 2개월마다 검진을 받기로 되어 있었는데 6개월이 지났을까, 진찰중 의사 선생님이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종양진찰실로 가자고 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의사는 또 수술을 권했다. 이게 웬일인가. 정말 죽고 싶었다. 모든 고통을 가까스로 참아왔는데 이제까지 헛수고를 했단 말인가. 현대의술이 이럴 수가 있을까? 회의가 밀려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고등학교 선배인 임사빈 선배가 찾아오셔서 좋은 건강법이 있다면서 권유했다. 선배는 서양의학에서 치유할 수 없는 임파선 종양을 앓고 있었는데 해관 장두석 선생님의 지도로 완쾌되었다고 하였다. 현대의학에 대한 배신감을 경험한 터라 나는 선뜻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래 한번 해보자. 하루 빨리 장두석 선생님을 찾아가서 매달려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장두석 선생님을 만나 촉수를 받는 순간 나는 이제 살았구나 하는 안도감이 생겼다. 92년 6월, 제18기 교육이 전북 익산군에서 있다는 사실을 알고 강의를 받았다. 10박 11일 동안 건강과 올바른 생활, 민족정신, 특히 식의주 생활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절실히 느꼈다. 흰쌀밥에 익힌 음식, 꽉 죄는 옷, 높은 아파트가 얼마나 나쁜지, 교육을 받으면서 내가 너무 잘못된 생활을 해왔다는 생각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고칠 게 너무 많았다.
교육중 단식을 하니 몸무게가 74킬로그램에서 60킬로그램으로 줄었다. 정신이 맑고 몸이 가벼워지니 날아갈 듯했다. 교육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오곡죽을 일주일 먹고 난 후 바로 생식에 들어갔다. 화식에만 젖어온 나에게 오곡가루와 풀이 웬일인가 싶어 가끔 눈물도 흘렸지만 그때마다 병원에서 겪은 고통을 생각했다. 체질개선만 하면 건강해진다는데 생채식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교육 때 배운 대로 열심히 했다. 생채식을 6개월간 했고 풍욕은 하루에 7∼8회 했다. 냉온욕, 각탕, 모관운동, 겨자찜질을 했다. 매일 생수 2리터를 먹고 매실엑기스, 감잎차, 난유, 죽염 등을 꾸준히 먹었다. 산야초를 뜯어다 녹즙도 마시면서 한 달에 한 번은 25분 냉욕도 했다. 밤마다 여덟 시간 동안 종양 부위에 마고약을 붙였다.
어느 결에 뒷골이 땡기는 증세가 사라졌다. 아마 고혈압이 없어진 것 같았다. 7개월이 지났을 무렵 종합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고 확인해보고 싶었다. 검진을 한 의사가 깜짝 놀랐다. 재수술을 하려고 했는데 어찌된 일이냐며 신기하고 기가 막히다는 듯 물었다. 나는 민족생활학교에서 배운 대로 말씀드렸다. 의사는 고개를 좌우로 움직이며 이것저것 물었다. 난 다시는 병원에 가지 않고 자연건강법으로 열심히 노력해서 병마에 시달리는 사람, 마음 고생이 있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겠다고 생각했다.
나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내가 곧 죽게 되었다는 소문을 접한 상태에서 회생하자 지금은 주위 분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더욱이 유선종(乳腺腫)이 있던 아내마저 제19기 교육을 받고 완치되자 우리의 기쁨은 더했다. 이제 우리 가족은 약국과 병원을 멀리하고 생활한다.
돌이켜보면 병 때문에 사경을 헤매면서 고통과 괴로움을 겪었고 잃은 것도 많지만 얻은 기쁨이 훨씬 많다. 앞만 보고 가는 나에게 옆사람을 돌아볼 기회를, 가정은 물론 사회적으로도 관심과 애정을 가질 기회를 나는 병을 통해 얻었다. 장두석 선생님을 알게 되어 병을 고친 데 대해 대단히 감사하고 있다.
나와 같이 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민족생활학교에서 배운 것을 모두 전달하려고 애쓰고 있다. 온 국민이 자연건강법을 실천한다면 병원이 없는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자연건강법을 하루라도 빨리 알았더라면 수술하지 않고 짧은 시간에 마음의 부자가 되면서 나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을 뿐이다. 자연건강법을 평생 실천하고 생활하리라고 굳게 다짐해본다.
의학적 소견
최방원 씨는 굉장히 고지식하여 하나 더하기 하나는 반드시 둘이어야 하는 사람으로, 해병대 출신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부인도 똑같이 밝고 명랑했다. 남편이 암이라고 해도, 자기가 유선종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받고 나서도 결코 실망하지 않는 낙천적인 성격이었다.
최방원 씨를 소개한 분이 임사빈 씨인데 그 역시 목 임파선 종양으로 내게 와서 교육을 받은 후 소생한 사람이다. 최방원 씨에게 필요한 것은 확신으로, 나는 임사빈 씨 이야기를 하면서 믿음을 주려 애썼다.
최방원 씨의 경우 방사선치료를 받은 부위의 세포가 되살아나면 100퍼센트 치유될 수 있다. 방사선으로 익은 세포가 체외 배설되고 새 세포가 살아나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생식을 해야 한다.
나는 임파선 종양에 대해 가능한 한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임파선에서 종양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전신에 자잘한 종양이 번져 있다는 것이다. 특히 사타구니에 있는 작은 종양들을 만지게 하며 그를 설득했다. 임사빈 씨도 옆에서 거들었다. 임사빈 씨는 내 말의 산 증인이었다.
최방원 씨가 건강을 회복한 것은 그의 정확함과 부인의 낙천적인 성격에 힘입은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그는 1년간 생식하라는 나의 권유를 받아들여 철저히 실천한 결과 건강을 회복했고, 무농약 곡식보급을 통해 민족생활의학운동에 함께 참여하고 있다.
최방원 씨의 종양은 아마도 선원 시절부터 생긴 것이 아닌가 추정해본다. 선원생활을 하면서 생선을 많이 먹어 생선의 노폐물이 체내에 쌓여 종양덩어리를 이루었을 것이다.
환우들의 질병을 이해하려면 그의 지나온 삶을 알아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의자(醫者)는 스승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잘못된 생활을 바로잡아주는 생활의 스승 말이다. 내가 이러저러한 설명을 하였을 때 최방원 씨는 모든 것을 솔직하게 말했고, 자신의 잘못을 곧 인정했다. 그의 이러한 태도가 그를 소생시켰다고 믿는다.
고창지역에는 이면우 선생을 중심으로 한 30여 분이 민족생활의학회 고창지역 모임을 해왔다. 이분들이 민족생활교육을 열어 5일간 함께 교육한 일도 있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마침내 고창지역 민족생활관이 건립되었다. 매우 기쁜 일이다.
고창은 토질이 좋고 물이 청정한 지역이다. 예로부터 질 좋은 진상품이 나는 지역이었다. 고창 민족생활의학회는 무공해 곡식을 비롯해 국산 콩, 메주, 곡식가루 등을 전국의 민족생활의학회 회원들에게 보급하고 있다.
최방원 씨와 고창 민족생활관이 민족생활의학의 보급을 위해 더욱 노력해주길 바라 마지 않는다.
《사람을 살리는 생채식》, 정신세계사, pp.333-3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