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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춘천분지 산길 2014,10,28.맑음. 세월교-마적산-경운산-오봉산-청평사-소양호-(오봉산-배후령-수리봉;도솔지맥 탐방으로 대체)
06시7분 상봉역 發 춘천역 行 전철로...그리고 건너편 버스류장에서 12번 버스를 타고... 윗샘밭(泉田)종점 정류장에서 하차,길 건너 해강아파트 쪽으로 진행하다 풀내음 식당 입간판 앞으로... 춘천 동원초등학교 정류장에서 내려 해강아파트 뒤로 와도 되는 마적산 들머리
너무 잡아 당겼더니(줌인) 그림 상태가 좀...피어 오르는 흐릿한 물안개 신북읍 율문리,샘밭(泉田里) 일대 신북읍;강원도 춘천시 북쪽에 위치한 읍이다. 시의 유일한 읍이다. 용산리(龍山里) · 지내리(池內里) · 발산리(鉢山里) · 산천리(山泉里) 등 7개 법정리를 관할한다. 북쪽으로 배봉산이 병풍처럼 막아 주고 있으며, 서쪽은 북한강, 동쪽은 소양강과 접해 있다. 춘천을 중심으로 북쪽 중간에 위치한다 하여 북중면(北中面)이라 하였다. 『호구총수』에 북중면은 율대리(栗岱里) · 천구리(泉丘里) · 산본리(山本里) · 발산리(鉢山里) · 장본리(獐本里) · 유포리(柳浦里) · 천전리(泉田里)의 7개 동리로 편성되어 있었다. 『여지도서』에도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1914년 신북면으로 개칭하였는데 새로 만들었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해동지도』에는 북중면 주위에 고맥도(古貊都)와 우두산(牛頭山)이 표현되어 있다. 이 사료는 신북읍 일대가 고대 맥국의 수도였음을 보여준다. 한편, 『1872년지방지도』에는 고맥도가 맥국허(貊國墟) 우두산이 우두촌(牛頭村)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발산(鉢山)도 수록되어 있다. 1914년 면 폐합에 따라 북내일작면(北內一作面)의 14개 리를 편입하여 신북면이 되었고 이후 1995년 읍으로 승격되었다. 화악산도 당겨 보고.. 삼림욕장 누운 소나무... 이노끼도 아니고 ㅎ~~
소양댐 정상에서 춘천 쪽을 향해 오른쪽으로 아름다운 산이 있는데 이 산이 바로 마적산이다. 마적산은 오봉산의 주능선이 남서쪽으로 뻗어내리다가 정남 방향으로 꺾이면서 최고봉인 785m의 봉우리를 비롯하여 크고 작은 여러 개의 봉우리를 형성하고 있다. 마적산은 아주 옛날 천지개벽으로 온 세상이 물에 잠기고 마적산 정상만 물에 잠기지 않았다고한다. 물에 잠기지 않은 마적산 정상 형태가 말발굽 모양으로 보여 마적산(馬跡山)이라 불렀다고한다. 마적산(馬蹟山)은 마작산(麻作山)이라고도 하는데 원래는 무작개라는 여인의 이름을 따서 무작산 이었다고 한다. ♥♠마적산 전망데크에서의 조망
古代 貊國이였던 신북읍 일대 원래 맥(貊)은 예(濊)·한(韓)과 더불어 우리 민족의 주된 구성체로서, 『시경(詩經)』·『서경(書經)』등을 보면 중국 주대(周代)에 주나라의 동북방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 뒤 북중국의 요동(遼東)·만주지역으로 이동해 고구려·부여 등이 국명(國名)을 가지기 전까지 예와 맥으로 중국측 기록에 보인다. 이들은 북방정세의 변화 또는 다른 요인에 의해 한반도 내로 이주한 고구려와 계통을 같이하는 맥족(貊族)의 한 집단이었다. 맥국(貊國)의 위치는『삼국사기』지리지에 당나라 사람 가탐(賈耽)이 쓴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를 인용해 “고구려의 남동쪽 예의 서쪽이 옛 맥의 땅인데 지금 신라의 북쪽이 삭주(朔州: 지금의 강원도 춘천)이며, 선덕여왕(善德女王) 6년(637)에 우수주(牛首州)로 삼아 군주(軍主)를 두었다”고 하였다. 또한『삼국유사』는 “춘주(春州)는 옛 우두주(牛頭州)로 옛날의 맥국인데 혹 지금의 삭주를 맥국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평양성을 맥국이라고 한다”고 하여 춘천을 맥국이라고 보고 있으면서, 일연(一然) 생존시의 삭주(지금의 평안북도)설과 평양성설을 추가하고 있다. 삭주설은 시대적 혼동이며, 평양성을 맥국으로 본 것은 고구려의 주요 구성체가 맥족이었으므로 고구려 초기에는 맥과 고구려라는 국명이 함께 사용했기 때문이다.
경운산(慶雲山) 현재는 오봉산과 마적산 사이의 794m 봉우리를 경운산 정상으로 표기하고 있다. 현재의 경운산 정상에는 정상석은 없으며, 정상을 비껴지나가는 등산로 남쪽 아래에 참호의 흔적이 있고, 정상에는 돌출된 바위 몇개와 나무가 있는 그저그런 봉우리이다.
경운산 가는 길에 내려다 보이는 청평사
오봉산;소양강댐 건너 청평사 뒤에 솟은 비로봉, 보현봉, 문수봉, 관음봉, 나한봉의 다섯 봉우리를 말한다. 옛 이름은 경운산이었고 오봉산, 경수산, 청평산으로 불리다 산꾼들에게 알려지면서 오봉산이 되었다. 소양호 청솔바위의 앞모습과 뒷모습(左) 앞에 보이는 산이 죽엽산이고 뒤에 높이 솟은 산이 사명산...도솔지맥 마루금이다 간척리 일대와 좌측의 배후령길
오봉산 ♥♠청평사 하산길
♥♠홈통바위
청평사;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新興寺)의 말사이다. 973년(광종 24) 영현선사(永賢禪師)가 창건하여 백암선원(白岩禪院)이라 하였다. 그 뒤 폐사가 되었다가 1068년(문종 22) 이의(李顗)가 중건하고 보현원(普賢院)이라 하였으며, 1089년(선종 6) 이의의 아들인 이자현(李資玄)이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은거하자 도적이 없어지고 호랑이와 이리가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이에 산이름을 청평(淸平)이라 하고 절 이름을 문수원(文殊院)이라 한 뒤, 견성암(見性庵)·양신암(養神庵)·칠성암(七星庵)·등운암(騰雲庵)·복희암(福禧庵)·지장암(地藏庵)· 식암(息庵)·선동암(仙洞庵) 등 8암자를 짓고 크게 중창하였다. 1327년(충숙왕 14) 원나라 황제 진종(晉宗)의 비가 불경·재물을 시주하였고, 1367년(공민왕 16)에 나옹(懶翁)이 복희암에서 2년 동안 머물렀다. 1 555년(명종 10) 보우(普雨)가 이곳에 와서 청평사로 개칭하였고, 대부분 건물을 신축하였다. 1711년(숙종 37)에 환성(喚惺)이 중수하였고, 1728년(영조 4)에 각선(禪覺)이 삼존불상을 조성하였다. 6·25전쟁 때 구광전(九光殿)과 사성전(四聖殿) 등이 소실되었다. 1977년 공철(空徹)이 극락보전과 삼성각을 중건하였고, 1979년 향봉(香峯)이 해탈문과 적멸보궁을, 1984년 서호(西昊)가 요사와 청평루·서향원(瑞香院)을, 1988년 석진(石眞)이 대웅전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해서 보물 제165호로 지정된 청평사 회전문(淸平寺回轉門)과 극락보전(極樂寶殿), 적멸보궁·청평루·서향원·해탈문·불각(佛閣) 1동이 있으며 조금 떨어진 곳에 요사채가 있다. 사지(寺址)는 강원도기념물 제5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재 남아 있는 불전·회랑·문 등의 초석을 통하여 전성기의 규모를 파악할 수 있다. 문화재로는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8호인 삼층석탑과 진락공부도(眞樂公浮屠)·환적당부도(幻寂堂浮屠) 등이 있다. 이 중 삼층석탑은 공주탑이라고도 하는데 현재 2층 옥개석만 남아 있고, 3층 이상은 없어졌으며, 2층 옥개 위에 잡석들을 올려 놓았다. 이 탑은 상삿뱀에 몸이 얽혀 갖은 고생을 하던 원순제(元順帝:산동 성주라는 설도 있음.)의 공주가 이 절에 와서 가사불사(袈裟佛事)를 행한 뒤, 상삿뱀을 떨쳐버리게 되자 이 소식을 들은 원순제가 은혜를 보답하기 위하여 세웠다는 전설이 전한다. 또한, 이 절에 있는 고려 정원(高麗庭苑)은 지금까지 밝혀진 정원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일본 경도(京都)의 사이호사(西芳寺) 고산수식(枯山水式) 정원보다 200여 년 앞선 것으로 밝혀졌다. 1981년 조사단의 지표발굴 및 측량조사에서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전형적인 고려시대의 연못인 영지(影池)와 거기서 400m쯤 떨어진 청평사 계곡 하류에서 정원 조성용 암석 및 석축을 발견하였다. 그곳에서 다시 2㎞ 떨어진 상류에서는 이 정원을 만든 이자현이 새긴 ‘청평식암(淸平息菴)’이라는 각자(刻字)가 발견되어 기록상에 나타나 있는 영지 중심의 대규모 고려 정원임이 확인되었다. 또, 구성폭포에서 식암에 이르는 2㎞ 9,000여 평의 방대한 지역에는 계곡을 따라 주변의 자연 경관을 최대한으로 살려 수로를 만들고, 계곡의 물을 자연스럽게 정원 안으로 끌어들여 영지에 연결시켰으며 주위에 정자와 암자 등을 세우는 등,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여 선(禪)을 익히는 정신수양의 도량으로 짜임새 있게 가꾸어졌음이 밝혀졌다. 영지는 청평사 뒤의 오봉산이 비치도록 되어 있으며, 연못 가운데 세 개의 큰 돌이 있고, 그 사이에 갈대를 심어 단순하면서도 아름답게 꾸몄다. 이자현은 청평사를 중건하고 정원을 만들면서 이 영지를 중심으로 대규모의 정원을 꾸몄던 것이다. 누석식(壘石式) 정원을 중심으로 영지와 정자, 청각적 효과를 위한 수구식(水溝式) 정원까지 동원, 평지의 정원(平庭)과 계곡에 자리한 정원(溪庭), 산속의 정원(山庭) 등 지형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정원을 마련해 수도하는 선원의 특색에 걸맞도록 꾸몄다. 문수원 정원에 관한 이같은 기록들은 「청평사문수원기비」(淸平寺文殊院記碑)에서 밝혀진 것들이다. 조선시대 학자 우담 정시한(愚潭 丁時翰)은 이곳 선동식암에서 여러 날을 묵으며 청평사의 모습을 감상하고 진락공 이자현의 유적을 두루 찾아 그 고풍을 추모했다고 그의 저서 『산중일기』(山中日記)에서 토로하고 있다. 『문수원기』(文殊院記)에서 “능엄경은 마음의 본 바탕을 밝히는 지름길”이라 기록할 정도로 『능엄경』을 독파해 불도를 깨달았다. 예종은 종종 그를 서울로 청하였으나 한번도 응하지 않았으며, 평생 수도생활로 일관하다가 청평사에서 생을 마감한다. 이자헌 부도;고려시대의 학자이자 거사(居士)로 잘 알려진 이자현의 사리를 보관한 탑이다. 진락(眞樂)은 그의 시호(諡號)이다. 승탑은 화강암으로 만든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으로서 청평사 입구에 세워져 있으며, 전체 높이는 1.8m이다. 승탑 옆에는 승탑비가 세워져 있다. 이자현은 인종(仁宗) 때 벼슬을 버리고 청평산(오봉산에 들어가 아버지가 지은 보현원(普賢院)을 중건한 뒤 '문수원(文殊院)'이라 개칭하고 선학(禪學)을 닦았다. 보현원과 문수원은 모두 청평사의 옛 명칭이며, 청평사라는 명칭도 이자현의 호인 청평거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따라서 청평사에는 승탑 외에도 이자현의 자취가 많이 남아 있는데, 사찰 입구에 그가 조성한 영지(影池)도 잘 알려진 유적이다. 청평사지는 강원도기념물 55호로 지정되어 있다. 삼층석탑(공주탑);1984년 6월 2일 강원도문화재자료 제8호로 지정되었다. 탑의 높이는 3.08m이며 환희령이라 불리는 작은 언덕 위에 있다. 사찰의 중심건물인 대웅전 앞마당에 서 있는 탑과 달리 사찰 길목의 높은 곳에 있는데 이러한 탑을 원탑(願塔) 또는 공양탑(供養塔)이라 부른다. 청평사가 973년(광종 24)에 창건된 사실로 볼 때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신라양식의 탑으로 추정된다. 탑의 꼭대기를 장식하는 상륜부는 없어졌으며 탑신부의 옥개석과 탑신을 각각 한 개의 돌로 만들었으며 탑신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돋을새김해 넣었다. 옥개석의 전각부분이 들려있어 날렵한 감을 주며 위로 올라가면서 적당히 줄어드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공주굴
중국 원나라 순제의 딸은 매우 아름다운 미모를 갖추고 있었다. 궁중을 출입하는 자들은 하나같이 연정을 품고 있었지만, 신분의 차이가 있어 감히 마음을 표하지는 못하였다. 공주에게 사랑의 고백조차 할 수 없었던 그는 마침내 상사병을 앓다가 죽고 말았다. 청년은 죽는 그 순간 맹세를 했다. 난데없이 뱀이 몸을 휘감고 있는 것을 보고 기겁을 하였다. 뱀은 밤이고 낮이고 떨어질 줄 몰랐다. 그것도 잠시일 뿐 다시 공주의 몸을 휘감는 것이었다. 죽기 전에 명산대천이나 유람하겠다며 중국 천지를 다 돌아 다녔다. 그리고 배를 타고 고려로 와서 금강산 구경 길에 올랐다가 청평사가 유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참배하고자 하였다. 10여 년 동안을 함께 있었지만 한번도 이와 같은 일은 없었으므로 공주는 이상히 여기며 타일렀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내가 좋아하는 절 구경을 못하게 하느냐? 만일 들어가기 싫거든 잠깐만 여기에 떨어져 있으라. 속히 절 구경을 하고 돌아와서 너와 함께 가리라.” 10년 만에 홀몸이 된 공주는 구성폭포를 맞으며 몸을 씻고 절 안으로 들어갔다. 아름다운 비단과 바늘이 널려 있는 방을 발견했다. 아무도 없는 그 방으로 들어간 공주는 열심히 바느질을 했다. 뱀이 다시 공주의 몸을 감으려 하는 순간, 갑자기 비바람이 몰아치면서 벼락이 떨어져 상사뱀이 새까맣게 태워 죽여 버렸다. 순제는 부처의 은덕에 감사하며 이 절에 공주탑을 세웠다고 한다.
소양호;면적 1,608ha, 저수량 29억t, 수면직선거리 60km, 굴곡수면거리 120km로, 1973년 동양 최대의 사력댐인 소양강댐이 만들어지면서 생겼다. 면적과 저수량에서 한국 최대의 크기로, 내륙의 바다라고도 한다. 수상교통로로 소양강댐에서 양구읍 석현리선착장까지 27km 거리를 30분 만에 달리는 관광쾌속선이 있고, 인제군 부평리선착장까지 64㎞ 거리를 2시간에 달릴 뿐만 아니라 내설악의 경관까지 즐길 수 있는 관광쾌속선이 매년 5월에서 10월까지 하루 2회 운항되고 있다. 드문드문 떠 있는 섬 사이로 가두리 양식장과 향어· 송어·잉어·뱀장어·빙어 등 5 0여 종의 담수어가 사는 호수 주변의 계곡에서는 낚시를 즐길 수 있다. 양구군 주변에는 양구선사박물관·제4땅굴·을지전망대·통일부양구북한관· 전쟁기념관·팔랑폭포·직연폭포·후곡약수터·천미계곡·월명계곡·웅진계곡· 광치계곡· 두무계곡·수입천과 양구 팔랑민속관 등이 있고, 인제군 주변에는 경로정·합강정·내설악·내린천 등이 있다. 소양댐 준공기념탑 ♥♣도솔지맥 탐방때 다녀 왔던 길이라 양통고개 까지의 춘천분지 길은 생략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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