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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 1383 리지… 1972년 보우회 초등반 한 ‘곰길’ 지릉
길이 끝나는 곳에서 삶은 시작된다
글·사진 이영준 기자·
길이 끝나는 곳에서 등산이 시작된다는 말이 현대 등산의 근간이자 기본철학이라는 것은
누구나 듣고 배우고 수긍해서 안다.
허나 막상 길이 끝나는 곳에 닥쳤을 때 계속 앞으로 전진 하는 사람은 별로 많은 것 같지 않다.
‘현재의 길’을 가는 사람들의 주변에는 얼마든지 쉽고 안전한 우회로가 계속 이어져 있으며,
이런 탓에 굳이 길 끝을 지나 위험과 곤란에 부딪쳐야만 하는 동기도 희미해지기 때문이다.
산악인구가 늘고, 그에 따른 여러 가지 문화가 풍성해지며 어쩌면 우리는 길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되는
등산 본래의 의미를 잃고 있는 지도 모른다.
수많은 지정탐방로로 안내되는 설악산의 길부터 줄지어 고정로프를 잡고 올라가는 세계최고봉의 길까지,
일률적으로 도식화되어 나타나는 수많은 ‘등산의 성과’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래서 이런 길이 난무하는 시대에 도전과 응전, 모험과 극복, 진정한 인간의지의 승리를 찾기란
전설 속의 이야기를 헤집는 것과도 같은 일일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가지 않는 길은 세월이 지나며 사라진다. 길이 사라진다는 것은
그 길에 담긴 인간의 흔적이 사라진다는 것이지만, 역사까지 소멸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어느 순간부터 배낭 속에 담겨있지 않았던 지도와 나침반을 다시 챙겨 설악산으로 향한다.
취재팀은 길이 끝나는 곳으로 향하고 있다.
1383 리지는 귀때기청봉에서 내설악으로 이어지는 유일한 암릉길이다.
설악산의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었던 가파른 나이프 리지가 줄곧 이어진다. 등반 중인 김헌수씨.
1972년 보우산악회가 초등반한 곰길과 1383 리지
1383 리지는 설악산 ‘곰길’에서 뻗어 나온 지릉이다. 곰길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은 건
어느 해 설악산을 취재하며 만났던 약초꾼으로부터였다.
오세암 오르던 길에서 그가 가리킨 손끝에는 귀때기청봉에서 뻗어 내린 가파른 칼날능선이 악귀처럼 솟아있었고,
그는 “70년대 초반에 보우산악회가 처음 등반했다고 하는데,
이후로 찾는 사람이 거의 없고 지금은 정규 등산로도 아니라서 아마 찾아가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었다.
이후 사람들에게 곰길에 대해 물었을 때 “부쉬(bush·잡목지대)가 엄청난 곳이라 여름에 가기는 어렵다”는 정보 밖에는
더 이상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는데, 그 또한 적어도 30년은 된 이야기들이었다.
그러던 중 곰길에 대한 기록을 다시 발견한 건 <한국산악> 1972년판에서였다.
책에는 ‘설악산 곰길 초등반기-1972년 6월의 기록’이라는 제목으로 7쪽 분량의 원고가 실려 있다.
1972년 2월, 봉정암 산장에서 산장지기 이석진씨로부터 귀때기청봉 일대의 암릉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보우산악회 멤버들은 그해 5월 중순 정예멤버만으로 구성된 정찰대를 파견한다.
보우산악회는 보성고등학교 산악부 졸업생들의 모임으로,
당시 등반대원은 홍흥기, 이강호, 이상동, 최효중, 허욱 등이었다.
백담사를 지나 사미소에 캠프를 친 그들은 5월 11일 쾌청한 아침
영시암터의 화전을 건너 서북주능선으로 향하는 지릉에 올라서기 시작했다.
현지 주민들이 ‘코클바위’라고 부르는 암봉을 향해 전진하던 그들은 이틀간의 운행 끝에 1287봉에 도달하고
첫 번째 시등을 마쳤다. 그해 6월 4일 다시 설악산을 찾은 그들은 하루만에 1287봉에 도달하고
이후 1박2일간 1383 리지를 등반한 후 곡백운 계곡을 내려왔다.
마을 주민들로부터 그전까지 아무도 등반한 적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들은 자신들이 등반한 길을
‘곰길’이라 이름붙이고 크게 솜다리길, 1287 암릉, 1383 암릉으로 나누었다.
등반기록에는 ‘주로 암릉과 수풀로서 일반 등로의 개척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본격적인 등반대의 훈련장으로써의 가치는 높으며,
1383 암릉은 주로 암봉과 피너클로, 암릉만으로의 종주가 가능하며 설악산에서도 그 존재를 찾아보기 힘들다’라고 적었다.
1383 리지로 향한 사람들은 보우산악회 멤버들인 박정림·김헌수·김정욱씨와 등반을 리딩할
젊은 클라이머 이호영씨(한국산악회)였다. 그들은 사실 몇 달 전부터 다시 그 길을 오르기 위해 벼르고 있던 중이었다.
“벌써 30년 가까운 일인데, 그 길을 갔었다는 기억만 있지 부쉬나 나이프 리지 이런 거밖에 생각 안나요.
그땐 1383 리지라고는 안 그랬어요. 곰길, 곰길 암릉 그렇게 구분해 불렀지.”
가장 고참인 박정림씨는 1974년 산악부에 들었지만, 곰길을 마지막으로 등반해 본 건 1980년의 일이라고 했다.
75년 입학한 김헌수씨와 5년 후배 김정욱씨는 재학생 시절부터 박정림씨로부터 길을 전수받았지만
1989년 여름 등반을 마지막으로 다시 찾지 못했다.
이후 여느 고등학교 산악부처럼 침체를 겪은 보우산악회에서도 곰길은 더 이상 전해지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서서히 잊혀간 것이다.
그 전까지는 대부분 수렴동 산장을 베이스캠프로 해 백운동 계곡을 거슬러 올라 건천골로 어프로치를 했다고 했지만,
취재팀은 거꾸로 한계령에서 서북주능선에 올라선 뒤 백운동으로 하산한 후 다시 올라 붙기로 했다.
거리상 수렴동 산장으로 가는 것보다 이 방향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한계령휴게소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4시. 어두컴컴한 가운데 주변을 둘러싼 산안개 속에 제법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재킷을 껴입고 채비를 갖춘 후 계단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산행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등 뒤로 부연 동이 트기 시작했지만 주위를 둘러싼 안개는 걷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서늘한 탓에 오르막에서도 땀이 그다지 나지 않는 것은 좋았지만 혹시 비라도 내리면 등반을 망칠까 싶어 걱정이 들기도 했다.
서북주능선과 만나는 지점에 도착한 건 한계령을 출발한 지 1시간 50여분 만이었다.
지난 수해로 능선 아래 있던 샘터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군데군데 새로 계단을 만들어 놓은 이 길은 그 전 제작된 등산지도에는 2시간 30분이 걸리는 구간이라고 표시돼 있다.
편한 길 덕에 뜻밖의 시간을 번 셈이다.
일행은 귀때기청봉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1383 리지로 가려면 귀때기청봉 정상까지 올라
개척자들이 ‘솜다리길’이라고 이름 붙인 귀때기청봉~1287봉 구간 능선을 따르거나,
귀때기청봉 오르기 전 곡백운 계곡으로 갈라지는 길을 따라 내려온 후 무명골과의 합수지점에서 사면을 치고 올라야 한다.
안개가 여전히 자욱했기에 귀때기청봉 정상에서 정확한 독도가 힘들 것 같아 취재팀은 곡백운으로 내려서는 길을 택했다.
귀때기청봉에서 내설악으로 이어지는 유일한 암릉
곡백운 상류는 무성한 잡목 숲이 우거져 있었으나 많은 사람이 오간 듯 길의 흔적은 선명히 이어져 있었다.
어렵지 않게 합수점에 도착하니 쉬어가기 좋은 너른 암반이 나타났다.
주변은 수해로 인해 여기저기 나무가 쓰러지고 돌 더미가 굴러 떨어져 있었다. 이곳에서 무명골로 접어들어야 한다.
“대머리 바위만 찾으면 돼. 방향은 맞는 것 같으니 금방 갈 거야.”
1시간쯤 무명 계곡을 거슬러 오르다 더 이상 계곡길이 끊어진 지점에서 일행은 장비를 모두 착용했다.
사람들이 이야기했던 부쉬 지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근래 들어 잘 쓰이지 않는 등반용어 중 하나가 바로 ‘부쉬 등반(bush climbing)’이다.
1962년 나온 손경석의 <종합등산기술백과>에는 ‘등산은 산길로만 올라가는 것이 아니고
때로는 길이 없는 골짜기나 등성마루의 숲길을 따라 갈 경우도 많다’며 부쉬 등반 요령과 주의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책에는 ‘매우 끈기 있는 노력과 인내심을 가지고 조급히 서둘지 말고 여유 있고 과감한 행동을 하여야 한다’고 덧붙이고 있다.
하지만 이후 부쉬 등반에 대한 이해가 조금 바뀐 것 같다. 1990년 나온 <등산용어사전>에서는 부쉬에 대해
‘백 패킹의 경우 관목, 덤불 숲속을 헤치며 자연에 친숙하려는 뜻이 있지만 암벽등반에서는 장애물이 되어
극력으로 피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적혀있으며, 최근 발간된 등산교재 <등산>에서는 아예 언급조차 없다.
기관에서 등산로를 관리하기 시작하고, 이에 따라 사람들의 산행 패턴도 바뀐 탓이다.
“옛날에 낫 들고 온 적도 있지.”
“나는 왜 기억이 하나도 안 나는 거지?”
박정림씨의 기억이 더 오래됐는데도 그나마 희미한 흔적들이 남아있는 것 같은데, 김헌수씨는 아예 깜깜하기만 한가보다.
하지만 부쉬 지대를 헤집고 다닌 지 몇 시간째인데도 ‘대머리 바위’는 나오지 않고 있다.
“대머리처럼 둥그런 바위로 슬랩을 올라야 했거든요. 안개가 좀 걷히면 보이지 않을까….”
이미 온통 흙투성이에 여기저기 살갗이 긁히고 찢긴 일행은 더 이상 힘을 쓰는 것이 부질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나마 전망이 트인 벼랑에 앉아 하늘이 개기만을 기다렸다. 이미 시간은 오전을 다 넘기고 있었다.
어프로치에만 벌써 6시간 넘게 소모한 것이다.
“우리가 지금 온 길이 아마 설악산이 생기고 처음 생긴 사람 발자국일지도 몰라.”
“여긴 가자고 해도 아무도 안 올 거 같아요.”
“예전엔 바위 한번 만지려면 그만큼 대가를 치러야 했지.”
언제쯤 바위가 나올까 답답한 표정의 이호영을 보고 김헌수씨가 한 마디 거든다.
더 이상 하늘이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자 일행은 지금까지 온 길이 아까워서라도 전진을 계속하기로 했다.
이제 현상보다 직관의 역할이 더 커졌다. 다행이도 다시 부쉬 지대를 한참 내려와 안부에 다다르니
그때까지 보이지 않던 커다란 바위벽 앞이었다.
모두의 기억에 남아있는 ‘대머리 바위’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바위를 만나자 다들 어떻게 넘어설까를 고민하기 시작한다.
축축이 젖은 탓에 이끼가 살아있어 직상하기에는 어려워 보였지만 이호영은 앞줄을 묶고 등반을 시도했다.
“못 올라갈 것 같으면 그게 길이 아닌 거니까 내려와야 해.”
박정림씨의 당부를 듣고 5m쯤 올라 이리 저리 루트를 살피던 이호영씨는 바위가 너무 미끄럽고
확보물을 설치할 만한 크랙이 없는 것 같다며 클라이밍 다운을 해 내려왔다. 넘어설 수 없다면 돌아가야 한다.
다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안자일렌을 하고 한참 동안 부쉬를 헤친 끝에
작은 바위 모퉁이를 하나 돌아가자 쉬어갈만 한 테라스가 나타났다.
처음으로 녹슨 하켄을 발견한 크랙을 오르기 위해 장비를 고르고 있는 이호영씨.
부쉬 지대 끝에 나오는 나이프 리지가 압권
“이제야 찾았네요.”
김정욱씨가 가리킨 끝에는 크랙에 녹슨 하켄이 하나 박혀 있었다.
일행은 모두 반가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처음 그 하켄을 박았을 사람이 이곳까지 오며 겪었을
여러 가지 곤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초여름의 능선에서도 제법 찬바람이 불어 앞사람이 올라가기를 기다리는 동안
턱이 덜덜 떨릴 정도의 추위가 몰려왔지만,
5m 정도 되는 와이드 크랙을 캠을 사용해 어렵지 않게 올라서자 드디어 모두를 감탄케 할 풍경이 펼쳐졌다.
바위턱 너머에는 잔잔하면서도 여울진 칼날능선이 끝없이 이어져 있던 것이다.
“기억난다! 저 너머에 말 타기 하던 곳!”
바위를 만난 산꾼들은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파도 같은 피너클을 타고 넘는다.
20년 만에, 30년 만에 다시 회귀한 듯한 그들은 어느 새 검정 교복 까까머리가 되어 땟국에 절고 손등이 긁혀
피가 흘러도 마냥 신났다. 하늘은 어두웠지만 사방을 둘러싸고 있던 안개도 차츰 개어 시야가 트이기 시작했다.
용아장성의 우툴두툴한 바윗길과 멀리 희미하게 공룡능선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거센 바람이 불고 지나갈 때는 몸을 움츠리기도 했지만,
바람 끝에는 서북주능선의 실루엣과 구불구불한 백운동 계곡의 물줄기가 보이곤 했다.
“안자일렌으로 등반하다가 상대가 떨어지면 그 반대방향으로 뛰자고, 그런 약속만 하고 쭉 건너던 곳이에요.”
“폭이 50cm 정도 되는 곳인데, 양쪽이 까마득한 절벽이라 서서는 도저히 못가고 다들 엉덩이를 깔고 앉아서 건넜죠.
무서웠지만, 거기서 바라보던 풍경이 이제야 생생히 떠올라요.”
그들이 말한 ‘말 타기 코스’는 첫 번째 나이프 리지를 한참 건너 안부로 하강해 내려선 후에 있었다.
철옹성처럼 버티고 선 자연 성벽이 수백m를 굽이져 있는
그곳은 한눈에 보더라도 넘어서는 데 서너 시간은 족히 걸릴 것 같았다.
시간이 어느덧 오후 5시에 가까워지고 있어 더 등반할 것이냐, 하강 후 탈출할 것이냐를 놓고 고민한 가운데,
우리는 다시 잡목숲을 헤치고 긴 하산을 해야 했다.
울창한 계곡을 내려와 곡백운과 만나는 물줄기에 이르자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했다.
“형, 우리는 또 그 바위 위에서 말 타기를 하고 있을 날이 있을 거야 그치?”
“20년 후쯤 오면 길 다 없어질 텐데?”
첫 크랙을 오르고 있는 김헌수씨를 이호영씨가 확보 중이다.
기존 확보물들은 매우 낡았거나 갯수도 많지 않으므로 암각이나 나무를 이용해 확보해야 한다.
비박지를 찾아 몸을 눕힌 사람들은 밤새 끙끙댔다.
길이 끝나는 곳을 넘어 30여년 전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다녀 온 대가는 녹록치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어릴 때, 어쩌면 목숨까지 내놓고 저런 바위를 넘어 다녔는데,
그 뒤로 사회로 나와 하지 못 할 일이 없었다”고 계곡을 내려오며 말했던 그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등산이 시작된다면, 길이 끝나는 곳에서 인생은 시작된다. 사위는 깊은 어둠에 잠겨가고,
가끔씩 그들이 내는 신음 위로 백운동 계곡의 거센 물소리가 배냇이불처럼 덮였다.
첫댓글 멋진 곳이죠. 1992년엔가 갔었는데 백운동계곡으로 진입하는 걸로 기억합니다. 저도 손경석씨의 등산기술백과를 갖고 있습니다. 좋은 책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