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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빛낸 인물들 스크랩 세계적인 기업인 (1)
좋은사람 추천 0 조회 17 08.11.22 00:5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과연 이병철 그는 누구인가? (이화여대 이어령 교수 )

 

제일제당(1953), 제일모직 (1954), 동방생명(1957), 안국화재해상보험(1958), 세계백화점(1962), 삼성문화재단(1965), 전주제지(1965), 중앙개발(1966), 한국종합병원(1966) 중앙일보-동양방송(1966), 삼성전자(1969), 삼성전관(1970), 제일합섬(1972), 삼성전기(1973), 삼성코닝(1973), 호텔신라(1973), 삼성석유화학(1974), 삼성중공업(1974), 용인자연농원(1975), 삼성항공(1977), 삼성시계(1977), 삼성건설(1977), 한국엔지니어링(1978), 삼성반도체통신(1980) 그가 사업을 하기 위해 투자한 초기 자본은 쌀300석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로부터 50년 후 그가 이룩한 삼성그룹은 166개의 계열기업에 103 조 가량의 매출액(2001년도 8월 기준)을 기록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이병철은 원래 부자였으니까 라고 하며 그의 놀라운 업적을 애써 무시하려 한다.

 

일본의 3 대 경영의 신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내셔널 그룹의 창업주 마쓰시타 고노스케, 혼다자동차의 창업주 혼다 소이치로, 소니의 창업주 이부카 마사루가 그들이다. 이 셋을 비교해도 전혀 밀리지 않는 사람이 바로 이병철이라는 사람이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기업가라고 말하고 싶다.

 

[정주영] 호암 이병철 회장이 걸출한 사업가였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이들이 알 것이다. 그분은 자신의 치밀한 판단력과 혜안으로 삼성이라는 대그룹을 일구었으며, 오늘날 삼성이 한국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세계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놓았다.

 

[워싱턴 포스트 캐서린 그레이엄 명예회장 ] 세상 사람들은 흔히 경영을 간단히 말하자면 돈벌이로 생각한다. 호암 선생도 물론 그런 면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호암은 물질에 대한 욕망을 이미 뛰어넘은 대단한 사업가였다. 나는 사업가에도 일류와 이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일류 사업가가 되자면 사적인 탐욕을 뛰어넘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호암은 일류 사업가였다.

 

[제너럴 일렉트릭 잭 웰치 회장]호암 선생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은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안색도 좋아보이지 않았다. 호암 선생에게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는데, 호암 선생 역시 자신의 시간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연한 모습이었고, 마지막 순간까지 평생 해왔던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참 아름다웠다.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해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대가의 자세가 아닌가 잠시 숙연해졌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진짜 경영자라면 호암선생처럼 최후의 순간까지, 경영 일선에서 자신의 마지막 생명까지 불태워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도 했었다.

 

한국 경제의 짧은 역사 속에 가장 위대한 인물을 선정한다면 이병철이라고 주저없이 말하겠다. 내가 한국 경제사의 인물로 선정한 기준은 다음과 같다. 경제인, 사업가의 첫 번째 목적은 이윤 창출이다. 두 번째 목적은 일자리 창출, , 경제만 잘하면 되는 것이다. 상공업 천시풍토와 한일합방, 6.25를 겪으면서 한국 무역을 세계 12위까지 끌어올린 장본인인 이병철이라면 한국 경제사에서 가장 뛰어난 경제인으로 선택해도 부족함이 없지 않을까 생각된다.

 

1 . 투기성 사업의 무용성

그는 26세에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쌀 300석 분의 토지로 도정업, 운송회사 , 토지 매입을 차례로 해나갔다. 여기서 도정업이라는 것은 벼를 사다가 껍질을 벗겨 쌀을 만드는 일을 말한다. 이 같은 사업을 하면서 이병철은  경남 일대에서 최대의 지주가 된다. 그러나 1937 3월 터진 중일 전쟁으로 인해 일본 정부가 은행의 대출을 중단함에 따라 전답의 시세가 폭락, 은행 대출금에만 의존하던 이병철에게는 현금 2 만원과 전답 10만평만을 제외하고 모든게 원점으로 돌아간 것이다. 이 때 말한 것이 ` 3가 있으면 3가 있다` 이다. `교만한 자 치고 망하지 않은 자 없다.`

그 당시 상황을 통해 얻은 경험을 통해
(1).
사업은 국내외 정세를 정확히 통찰해야 한다
.
(2).
무모한 과욕을 버리고 자기 능력과 한계를 냉철히 판단해야 한다
.
(3).
요행을 바라는 투기는 절대로 피해야 한다
.
(4).
직관력의 연마를 중시하는 한편 제 2 , 3 의 대비책을 강구해야한다
.
(5).
대세가 기울어 이미 실패라는 판단이 서면 깨끗이 미련을 버리고 차선의 길을 택해야 한다.

 

짧은 보고서에 위에 5가지 경험을 적어놓은 이유는 위와 같은 사항이 현재에도 그대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이병철은 중일전쟁으로 국제 정세가 국내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을 깨달았다면 현재는 그 당시보다 경제적인 급변은 더욱 심하기 때문이다. IMF로 인해 국내 경제는 어떤 보호막도 없이 해외에 그대로 방치되기 때문이다. 요행을 바라는 투기는 주식투자, 떴다방, 복권, 일확천금을 노리라고 언론에서 조장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주식투자를 강조하는 언론 때문에 많은 이들이 주식투자를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개미투자자들 중에서 돈을 벌고 있는 이가 과연 몇이나 있을까? 기관 과 외국인 투자자, 소수의 몇몇 대규모 자본만이 돈을 벌고 있는 것인 현실이다. 복권 같은 경우에는 언론의 행태가 더욱 심한 편이다. 20억을 벌었다고 광고하고, 언론에서 보도하고, 그런 의도가 어디에 있을까? 그것 역시 사업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병철은 도정업, 운송회사, 부동산 투기를 하면서 이처럼 자신의 이득을 위해 남을 희생시키는 사업은 무익하다고 하였다. 나라를 위해서도, 국민을 위해서도, 어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오로지 소수의 개인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라고 정의했다.  

 

2. 최고라는 것은 무엇일까?

최고라는 것은 삼성의 모토이기도 하다. 최고만이 살아남습니다. 최고가 되는 길! 삼성이 나아가고자 하는 길입니다. 모든 기업이 최고가 되기를 원하지만, 삼성은 원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기업이기도 하다. 그런 최고라는 개념을 심어준 인물이 바로 이병철이다. 이병철에게 최고라는 의미는 최고의 품질, 최고의 인재를 의미한다. 일종의 장인정신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최선을 다하는 것. 이병철이 꿈꾸는 것이다. 평소에 이병철이 자주 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노력하는 유전자는 따로 있다. 누구나 성공하기를 원하기는 하지만, 누구나 다 노력하게 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래서 생각해볼 때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노력은 유전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1) 품질로서의 최고
이병철에게 최고라는 개념이 잡힌 것은 1950 2월 도쿄를 방문했을 때 라고 한다. 뒷 길에 허름한 이발소에 별생각없이 들어가서 주인에게 말했다
. 이발일은 언제부터 하셨나요?` `제가 3대 째니까, 가업이 된지 이럭저럭 60년쯤 되나 봅니다. 자식 놈도 이어주었으면 합니다만...`

이병철은 사소한 대화에서 일본인들의 투철한 직업의식을 느꼈다. 삼성의 기업정신은 일본의 장인정신과 비슷하다. 일본이들은 이러한 장인정신을 일컬어 잇쇼켄메이 라고 한다. , 한 가지 일에 목숨을 걸고 그 분야에서의 최고를 이루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정신을 바탕으로 한 것이 제일모직이라고 할 수 있다. 1954년에 설립된 제일모직이 설립된 배경은 이렇다. 당시에 사회적 분위기는 돈없는 사람들에게 양복지는 뜬구름 잡는 소리라며 욕먹기 십상이고,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마카오 신사가 부유함을 상징했던 그런 시절이었다. 물론, 지금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조르지오 아르마니, 프라다를 입고있어야 부유함을 보여진다고 생각하는 것. 물론, 명품을 선호하는 이유는 디자인, 원단, 브랜드가 주는 이미지이다. 그러나, 그 차이점이 단지 브랜드에서 오는 것이라면 브랜드의 고급성이 주는 인식의 차이만 바꾸어 놓는다면, 우리 제품도 명품이라 불리울 수 있지 않을까. 이병철도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제일모직의 브랜드를 광고하기 시작한다. 해외 유명 브랜드보다 낫다는 광고 문구를 쓰기도 하고, 직접 입기도 하고, 실제로 최고의 품질을 만들기 위해 막대한 자본과 노력을 투자하여 해외 유수의 평가 단체로부터 인정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이로 인해 이병철은 제일 제당과 제일 모직의 성공으로 전국 납세액의 4%를 내는 국내 최고의 부자가 되었다. 이것은 이병철 개인만의 성공이 아니라, 마침내 한국 땅에서 외제 양복지를 몰아내고 국민 생활에 새바람을 불어 넣었으며, 연간 250만 달러에 달하는 거액의 외화를 절약하게 되었다. 요새 우리 사회를 일컬어 세계화 시대라고 말을 한다. 외국계 기업들이 우리 기업들을 차지하고, 국민들은 국내 제품보다 외국 제품을 선호하는 등, 물론 이러한 과정들이 세계화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일방적인 세계화라면 문제가 되는 것 같다. 세계화란 세계 각국의 특성들이 한데 뭉쳐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현재의 세계화는 서구 선진 몇몇 나라들의 문화만이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것 같다. 이병철의 제일모직이 한국에서도 외국 제품 못지않은 제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면, 우리들이 해야할 것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못만드는 최고 품질의 제품을 만드는 것이 우리들의 역할이 아닐까?

 

2) 인재도 최고
이병철이 삼성물산공사를 주식회사체제로 출범하면서, 회사운영 기본방침을 밝혔다.

첫째, 일정한 자본금의 규모를 정하지 않고 사원이면 누구나 응분의 투자를 하고, 이익의 배당을 투자액에 비례해 공평하게 받을 수 있는 제도를 채택한다. 둘째, 사장이거나 평사원이거나 간에 공존공영의 정신으로 일에 몰두하는 것은 물론, 능력에 따른 대우와 신상필벌의 기풍을 마련한다. 셋째, 사원의 생활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운영에 지장이 없는 범위 안에서 가능한 한 우대해 가족적 분위기가 항상 유지되도록 한다. 당시 이병철은 임원들에게 25%의 출자를 하게 했다. 그 이유는 출자자들에게 회사 이익이 곧 자기 이익이므로 서로 분발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이병철의 초기 회사에 대한 생각은 공존공영 이 단어일 것이다. 나만의 회사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회사이니, 우리 모두를 위해 열심히 하자. 이것은 앞에서 말한 일본 경영의 신인 네셔널 그룹의 마쓰시타에게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다. 일본 경제가 불황이어서 모든 회사들이 직원들을 해고할 무렵에 마쓰시타도 임원들로부터 직원들을 해고해야만 한다는 강요를 많이 받았다. 더 이상 버텼다간 회사가 무너질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마쓰시타는 우리 모두의 회사이기 때문에 과실이 아닌 이상 회사를 위해 개인을 버리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였다. 집이 어렵다고 가장이 어린 아이들을 길거리에 내모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모든 직원들에게 이와 같은 사실을 말하면서 직원들의 반나절 직장생활을 하자고 주장했다.지금의 노동 시간 단축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현재 우리 노동계가 주장하는 것이 5일 근무제이다. 노동 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창출을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인원의 절반이 반나절만 일하고 나머지 반나절은 직접 물건을 들고 파는 것이다. 그런 아주 힘든 시기를 서로 도와가며 이겨낸 것이다. 물론 이 같은 마쓰시타의 희생정신은 나중에 미국이 일본을 점령한 후 대기업 해체를 명령했을 때, 마쓰시타 전기(내셔널 그룹)의 전 직원들이 매일매일 미국방에 항의하는 것으로 연결되었다고 한다.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내는 이유는 정리 해고와 관련해서 하고 싶은 말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기업의 입장에서는 정리 해고는 기업의 재정상태와 관련해서 극복을 위한 가장 쉬운 지름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리 해고의 대상은 40~50?은 날의 열정을 다바쳐 지금은 신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 과연 이것이 공존공영의 길일까? 기업의 역할은 이윤 획득과 일자리 창출이다. 그 두가지는 어떤 것이 먼저 선행한다고 말할 수 없다. 이윤 획득에 약간 지장을 줄지라도 일자리가 창출된다면 기업은 감수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두 가지가 힘들다면 다른 방법으로라도 방법을 강구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재 우리 기업들은 정부와 해외 기업의 강요에 고용 시장의 유연성이라는 허울좋은 닉네임을 뒤집어쓴 채 정리해고를 감행하고 있다. `3가 있으면 3가 있다.`는 이병철 회장의 말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철의 인재 양성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얘기하고자 한다.

 

이병철은 인재를 뽑기 위해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공채 사원을 뽑은 기업인라고 한다. 이전까지는 연고 위주로 사람을 뽑다가 `삼성의 인재는 내가 뽑겠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1957 년에 시행한 것이다. 당시에는 고위 관직으로부터 인사청탁이 많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공채 출신과 인사청탁으로 들어온 사원과는 승진과 봉급을 다르게 했다. 승진과 봉급에서 공채출신이 연고 입사자보다 앞서도록 한 것이다. 이병철의 자존심이 발휘된 부분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다만 폐쇄적인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그래서일까 삼성은 최고 일류 기업이고, 선호도 1위인 기업인 것은 사실이지만, 냉정함이 많이 엿보이는 기업인 것 같기도 하다. 물론 그 이유를 위와 같은 데서 찾는다면 웃기겠지만.

 

삼성 그룹의 특징 중 하나는 전문경영인 영입을 통한 경영이다. 이병철이 삼성상회를 만들어서 별표국수를 발매했을 때부터 이순근이라는 전문경영인을 쓴 것이다. 전문 경영인에게 믿고 맡기는 것이다. `못미더운 사람은 아예 쓰지 않고, 쓰거든 믿고 맡긴다.` 는 경영방침은 이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오늘날 삼성은 과장부터 전결권을 갖고 있는 회사라고 한다. 위와 같은 경영방침은 삼성의 모든 사업 분야에서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병철은 여기다 조건을 달았다고도 볼 수 있겠다. 믿고 맡기되 따질 것은 꼼꼼하게 따진다는 것이다. 과거 삼성이 전주 제지 공장을 지을 때, 이병철은 부지의 입지 조건보다 지역사회에 대한 배려를 먼저 생각했다. 전주에 제지공장을 짓겠다고 하자, 지역 주민들이 땅을 내놓아 부지를 사들였다. 그러나 부지상의 부적합문제로 부하 직원들이 다른 지역을 물색하자, 이병철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전주의 입지 조건이 다른 데 비해 나쁘다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게 아니오? 내가 항상 말했듯이 기업이란 눈앞의 영리만을 추구해서는 안 되는거요. 기업을 일으킬 때는 국가나 사회에 만들어 바친다는 생각으로 시작해야 하오. 특히 이번 제지공장은 지역사회 발전이라는 전주 시민들의 간절한 소망이 깃들여 있는 사업이 아니오?` 이병철은 되도록 삼성의 기업방향을 자신의 가치관과 병행하여 나아가고자 했던 것 같다. 모든 분야에서 그렇게 하진 못했겠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부분이라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자세가 엿보이는 부분이기도 하다.

 

3. 미래의 계획

 

 1) 나와 나라가 사는 길

이병철은 6.25 후 다시 빈털터리가 되었다. 그가 재기한 일화는 다음에 소개하기로 하고, 이병철은 평소부터 가지고 있었던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하다, 제조업을 하기로 결심한다. 어떤 제조업을 할 것인가에 대해 치밀한 사전 조사를 한 끝에 당시 우리나라에서 100% 수입품에 의존했던 설탕, 페니실린, 종이 중에서 현실적으로 이병철이 할 수 있는 설탕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제당에 참여를 하고자 하였으나, 막대한 자금과 기술력이 부족했다. 힘든 난관을 이겨내고 1953 11 5일 제일제당이 만들어진 것이다. 설탕이 생산된 지 불과 6개월 만에 50 톤으로 늘어났고, 제일제당 설립 4년 째인 1956년에는 150, 1957년에은 200톤으로 시설이 늘어났다. 시설만 늘어날 뿐만 아니라 수요도 폭발적이어서 없어서 못팔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지경이 이르자, 주위 사람들은 설탕값을 조금만 올리면 많은 자본을 얻게 될 것이라고 조언했으나, 이병철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근당 이익이 10환이 아니라 60환이 되면 이익도 그 여섯 배가 되어 현재 80억 환의 여섯 배가 되니 모두 480억 환인데, 대체 그렇게 많은 돈을 벌어 어쩌자는 거요? 장사에도 도의가 있는 법이오. 나는 독과점업자가 되어 사리사욕만을 채울 생각이 추호도 없으니 설탕값 올리자는 의견은 없었던 걸로 합시다.`

 

이 같은 생각은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았던 것 같다.

`사업에서 공존공영은 늘 강조해온 것인데, 과잉경쟁을 하지말고 이익을 서로 보전하면서 연구소에서 생산비용을 낮추고, 질을 높여 이익을 소비자에게 돌려주도록 해야 한다.` 이 말은 이병철이 아랫사람들에게 늘 하달하는 업무지시 내용이다.

이것과 관련하여 홍화상의 `카리스마 VS 카리스마`에서 평한 내용이 있다.

`시장은 흐르는 물과 같다. 물을 막거나 흐려놓으면 고기는 그 곳을 떠난다. 현명한 어부는 물의 흐름을 막지 않고 물을 흐려놓지도 않으면서 고기를 잡는 법이다. 시장질서를 지켜가면서 장사를 하는 것이 서로가 잘사는 지혜다.`

 

1967년 한국 비료 사건 이후 해외 여행을 하면서 새로운 사업을 찾고자 고심하던 터에  평소의 자세대로 치밀한 사업계획을 통해 전자산업을 추진하기 시작한다. 이병철은 전자산업의 사업성을 검토해 본 결과 기술, 노동력, 부가가치, 내수와 수출전망 등 사업 전반에 있어서 우리나라의 경제실정에 곡 알맞은 사업이었다. 이병철에게는 나름대로의 경영철학이 있었다. 반드시 자기 능력의 한계를 올바르게 파악하고, 그 한계를 넘어서지 않는 범위 내에서 사업을 시작한다는 걸 철칙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한 철학 하에 이병철은 수원 45만평의 대지를 살 대 삼성이 부동산 사업에 뛰어든다는 비난여론을 뒤에 엎고, 1969 1 13일 삼성전자 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면서, 미래의 반도체 시장 전망까지 점쳤다고 한다. 그러한 미래 예측은 10여년 후인 1984년 삼성반도체 공장이 준공되면서 현실로 나타나기도 했다. 훌륭한 사업가는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그 눈빛은 미래를 향한다고 했다. 세상에는 현실을 직시하는 사람들도 많고, 미래를 향하는 사람도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이 두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는 이는 드문 것 같다. ` 무슨 일을 시작해서 끝을 맺으려면 처음부터 철저하게 계획을 새워 밀고 나가는 것과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밀어붙여 결과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2 ) 사업의 성공을 위한 계획

이병철은 미래를 계획할 때 두 가지를 검토한다고 앞에서 말한 바 있다. 첫째는 국가와 민족을 위함이요, 둘째는 그 사업을 성공시키기 위해 치밀한 사전조사를 바탕으로 한 사업계획 이병철의 사업철학은 1976 5 (서울 경제 신문) `재계회고`에서 밝힌 논문으로부터 알 수 있겠다. `사업의 착수에서 우선 국민과 인류에 필요한 것인지를 살피고, 그 다음 수익성, 자금, 인력, 기술 등을 따져 자기 능력에 맞는 사업을 전개하도록 해야한다.`

 

`경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전준비와 계획이다. 당초에 계획을 잘못 세워 중도에 자금난으로 허덕인다거나 판로가 막혀 당황하게 된다면 경영자로서의 자격이 부족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내가 부동산에서 실패를 본 것은 이와 같이 "경영"이 처음부터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자기 능력의 한계를 올바르게 파악하고 이를 넘어서지 말아야 한다는 또 하나의 기업 철학도 이 때 배운 것이다.`

 

1998년도 김대중 정권이 들어오면서 새로운 변화가 있었다고 한다면, IT 강국을 강조하면서 벤처붐이 불었다는 것이다. 그로 인한 폐해는 각종 벤처 비리 사건, 또는 벤처 기업체의 부실이다. 이병철이 살아서 이런 상황을 보았다면 이런 말을 했을지 모르겠다.

 

`사전 준비 계획 없이 사업하는 것은 기업이 망하는 지름길이다. 나라에서 장려한다고 자신의 한계를 모르고 사업을 확장한 메디슨이 그 경우이다. 메디슨은 의료 기계 기술이라는 좋은 사업아이템을 가지고도 벤처자금 등 주력 기술과는 상관없는 사업에 치밀한 계획 없이 확장했기 때문이다. 정부의 장려, 혜택으로 인한 사업은 정부의 관리가 소홀해지거나, 정권이 혼란해지는 경제 외적인 상황이 일어난다면 길 잃어버린 미아처럼 헤매는 상황이 발생되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 경제 상황이 그렇다.`

 

이병철은 1987년에 이 세상의 생을 마감했다. 15년이 지난 후 우리의 경제 철학은 무엇인가? 이병철이 무의미한다고 강조했던 투기성 사업에만 너무 집착을 하는 것은 아닌가? 설령, 그 사업이 투기성 사업이 아니라 할지라도 투기성 마음은 없는 것인가? 이병철 경영철학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아닌지 생각된다.

 

4. 외부적 상황이 기업가에게 미치는 영향

외부적 상황의 중요성이 기업가에게 끼치는 영향력은 아주 크다. 물론 기업가에게만 끼치는 것은 아니다. 북한의 주민들이 굶어죽는 상황이 발생한 것도 북한 체제 때문일 것이고, 아프리카 일대의 기아 문제 역시 선진국들의 임시방편적인 대책과 지도층의 부도덕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외부적 상황은 거시적인 관점에서 전쟁, 재난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고, 중동사태, 흉년으로 인한 물가 인플레, 정책의 변화로 인한 사회 변화 등 예기치 않게 발생되는 상황을 뜻한다. 기업가들은 이런 외부적 상황을 미리 알고있던 것처럼 대처할 수는 물론 불가능하다. 기업가들은 예기치 않은 상황이 왔을 때에 피해를 최소화하고, 최악의 상황에서 길을 찾을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된다. 이병철은 그러한 면에서 최대의 피해자라고 볼 수 있겠지만, 그 누구보다 실망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하여 희망의 씨앗을 발견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1) 독재 권력과의 관계

돈과 정치는 결코 떨어질 수 없는 관계라고 한다. 기업가들에게 권력이 필요한 것인지, 권력가들에게 자본이 필요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독립적인 기업인은 보았어도 독립적인 권력가는 보지 못했다는 점에서 해답이 나올 것 같기도 하다. 1995년도쯤 중국에서 이건희 회장이 말했던 것이 생각난다. `우리나라 경제는 1류고 정치는 3류다.` 이건희 회장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 한 마디로 정치가 경제의 발목를 붙잡는다는 말이다. 1961 5 16일 박정희는 국내 정세가 혼란스럽다는 이유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당시 군사정부는 불안정한 위치로 인해 민심을 잡고자 여러 가지 민심정책을 행하였는데, 그 중 한가지가 부정 축재 혐의로 기업 매출액 1위부터 11위까지 열한 명을 부정축재자로 지목했고, 그 첫 번째가 이병철이었다. 당시 이병철은 일본에 체류 중이었다고 한다. 이병철은 6 24일 제국호텔에서 AP, UPI 등 외신기자들에게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빈곤 제거를 위해 전 재산을 국가에 헌납할 용의가 있다. 귀국하는 대로 이에 필요한 절차를 밟고, 정부의 조치를 기다리겠다.`

 

미리 선수를 친 것이다. 당시 군사 정부도 민심에 끌려서 부정 축재 혐의로 이병철을 지목한 것이지, 근거가 있어서 지목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여튼 귀국 후 이병철은 박정희를 만나 자신의 의견을 얘기한다. 기업인의 본분은 사업을 일으켜 일자리를 마련하고 세금을 내고 확대투자를 해서 키워나가는 것이다. 기업인을 활용해야한다. 이 같은 이병철의 입장은 박정희의 의견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이병철은 자신의 위기를 넘겼다. 이렇게 위기를 넘길 수 있었던 것은 이병철의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음 절에서 밝히겠지만, 이병철은 일제시대, 2차 세계대전, 6.25 , 4.19의거 속에서도 살아남은 경제인이기 때문에 일시적인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사 정부에 대한 대처 방법을 알았던 것이다.

 

그런 이병철도 크게 후회한 사업이 있다. 한국 비료 사업이다. 일반인들에게는 한국 비료하면 삼성이 사카린을 취급했던 범죄 행위로 기억을 한다. 그 사건에 대한 자세한 조사 자료가 없기 때문에 이병철님의 장남 이맹희님의 의견을 참고로 하고 있다는 것을 미리 밝혀둔다. 이병철은 비료 사업을 2 차례에 걸쳐 시도하게 되는데, 그 첫 시도는 1960년대쯤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허락 하에 비료 사업을 무난하게 추진 중이던 이병철은 1960 4.19의거 때문에 좌절을 맛보게 된다. 물론 이때도 부정축재자로 몰려 막대한 벌금을 물기도 한다. 그렇게 첫 시도가 무산된 뒤, 비료사업을 접었다가 군사정부의 요구로 인해 다시 비료 사업을 재개하기 시작한다. 여러 가지 힘든 난관을 극복한 뒤, 겨우 비료 공장이 정상적으로 가동될 무렵 이병철은 `한비 밀수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한비 밀수 사건`이란 사카린-식료품을 만드는 공업재료로써 단 맛을 내는 물질. 당시에는 필수품이었다고 한다.-   이 시장에 누출되어 그것을 조사하던 와중에 삼성이 밀수하게 됐다는 것을 알게된 것이다. 이맹희씨는 이렇게 설명한다. 삼성이 미쓰이측의 기계를 사준데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100만달러를 주기로 했는데,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하여 박대통령에게 의견을 여쭤본 결과 100만 달러어치 물건으로 들여와 1/3은 정치자금, 1/3건설자금, 1/3은 한국비료의 운영자금으로 쓰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하여튼 `한비 사건`으로 인해 이병철은 10년 간 힘들게 가꾸었던 한국 비료를 국가에 헌납하게 된다. 물론 한국 비료는 1994년 한국 비료 민영화 방침에 따라 공개입찰을 실시하였는데, 삼성이 최저입찰가보다 1000억이 더 많은 2300억을 제시해 회사를 찾아갔다고 한다. 참으로 삼성에게는 한이 서려있는 기업이었던 것 같다.

 

한국은 다른 나라보다 급변하는 정치적 상황이 많았기 때문에 기업인들로 하여금 경영에만 신경을 쏟지 못하게 한 것 같다. 경영만 잘한다고 성장을 못하는 기업이 한국에는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 반대도 가능한 곳이 한국이다. 그러한 상황은 시간이 50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 같다. 내 생각에 그러한 풍토를 없애기 위해서는 정치가 경제계에 영향력을 끼치는 것을 막아야한다고 생각한다. 올 연말에는 대선이 있다. 다음 대통령이 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미래의 대통령에게 한가지 바라는 것이 있다. 무엇을 하겠다고 나서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정치인들의 역할은 일반 국정에 관한 것에만 집중을 하고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달라는 것이다. `무엇을 장려하겠다`는 말만 들어도 겁이 난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는 옛 속담이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2) 예측 불허인 세계 상황과의 관계

이병철이 국제 정세가 일반 경제에도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은 대공황이었다. 대공황이 일어날 당시에는 이병철은 일본에 있었는데, 일본의 경제 위기를 보면서 느낀 것이 많았던 것 같다. 그 후에 1937 3월 터진 중일전쟁은 경남에서 대지주로서의 꿈을 부풀던 이병철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사건이었다. 중일전쟁으로 인해 일제는 쌀가게를 문닫게 한다. 정주영이 파산한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이것은 우리나라 국민들 대부분이 겪은 것일 것이다. 또 국제 상황이 바뀐 것은 우리 국민들에게 비참한 과거인 1950 6.25이다. 삼성물산공사가 보관하던 물품들이 모두 타버려 없어진 것이다. 이병철이 41살에 일어난 일이다. 자칫 자포자기할 수 있었던 이병철에게 행운이 돌아왔다. 이병철은 아마 이때도 그 생각을 했을 것이다. `3가 있으면 3가 있다.` 그 행운이란 다름 아닌 예전에 과수원과, 양조장을 했었는데,  그만 벌이고 있는 사업들이 너무 커서 대구에 있는 조그만 사업체는 이창업이라는 사람에게 맡기고 잊었던 것이다. 그런데 전쟁으로부터 피하기 위해 대구에 왔는데, 이창업이 이익금이라고 3억원을 내놓은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운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단순히 행운이라고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이병철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을 뜻하는 것이다.  

우리 한국 경제는 현재 IMF 이후 외국 경제에 대한 의존도가 점점 심해지고 있다. 대부분의 유망한 기업들은 외국에 팔려나간지 오래고, 일반 국민들은 그것에 대한 인식도 가지지 못한 채 자신의 앞 날 만을 염려하며 주식 투자에 정열을 쏟는다. 그런 와중에도 삼성 전자가 성장하는 것을 보았을 때, 그 뿌리가 얼마나 튼튼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한때 이건희 회장이 개인의 취미생활인 자동차를 사업으로 확장시키려는 무모한 시도를 해서 위태로워진 적이 있었던 것을 제외하곤 삼성은 언제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기업으로 서있었다.

 

이병철 회장의 경영 10계명

 

△신용을 금쪽같이 지켜라
△사람을 온전히 믿고 맡겨라
△판단은신중하게, 결정은 신속하게
△근검절약을 솔선수범하라
△매모광이 돼라
△세심하게 일하라
△행하는 자 이루고, 가는 자 닿는다
△신상필벌을 정확히 지켜라
△전문가의 말을 경청하라
△사원들을 일류로 대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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