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관계와 말 최성애 HD가족 클리닉 원장
강의나 치료 중에 부부 사이에도 대화를 잘 하는 방법이 있다고 말하면 강한 거부감을 보이는 분들이 가끔 있다. 그들은 흔히 이렇게 반박한다. “말만 바꾼다고 사람이 달라지는 게 아니잖습니까?”
그렇다. 말만 바꾼다고 ‘사람’은 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부부 치료란 ‘사람’을 바꾸는 게 아니라 ‘관계’를 치료하는 데 주목표를 둔다. 대화법을 모름으로써 부부 관계는 쉽게 망가질 수 있기 때문에 표현 방식을 조금 다르게 함으로써 거부감을 주지 않을 수 있고, 오해를 풀 수도 있고, 상처를 안 줄 수 있다. 따라서 말만 조금 바꿔도 부부 사이는 지금보다 훨씬 좋아질 것이다. 이는 애인 끼리나 동성 친구 사이, 부모와 자녀 사이, 상사와 부하 사이, 심지어 점원과 고객 사이에서도 일관된 현상이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라든가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 갚는다‘는 속담이 공연히 생겨났겠는가?
거의 모든 부부는 행복하기를 원해서 결혼했고 지금 이 순간에도 행복을 얻고 싶어할 것이다. 하지만 의도와는 다르게 자꾸 관계가 힘들어진다면 말하는 방식을 스스로 관찰해 보자.
부부 사이를 나쁘게 만드는 대화의 예는 다음과 같다. 아내: (아침 식탁에 앉자마자 격한 음성으로) “당신, 오늘 무슨 날인지 알기나 알아?” 남편: “왜 또 아침부터 시비야?” 아내: “뭐? 시비? 당신, 도대체 요즘 나한테 관심이나 있어? 있냐구?” 남편: “아 참, 재수 없게 아침부터 왜 그래? 남편은 식구들 먹여 살리느라 고생하는데 여편네는 집에서 복에 겨웠구나. 그래, 오늘 결혼 기념일이다, 그래서 이벤트 타령하려구 날 볶는 거지?” 아내: (냉소적으로) “결혼 기념일 좋~아하시네. 내 발등 내가 찍은 날이다. 아이구 내가 눈이 멀었었지. (큰소리로) 그래, 결혼 기념으로 찢어지자, 찢어져!” 남편: (밥 숟가락을 탁 놓고 휭 나가 버린다)
원래 이 아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오늘이 우리 결혼기념일이니까 뜻 깊게 잘 보내고 싶다‘는 마음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뜻과는 달리 대화가 자꾸 어긋나고 점점 말이 거칠고 격해진 것이다. 본래 남편이 하고 싶었던 말 또한 “나도 피곤하고 힘들다는 걸 좀 알아줬으면 좋겠어” 하는 마음에서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반응을 “왜 또 시비야?”라고 거칠게 하다보니 대화는 점점 원래 뜻과는 180도 다른 방향으로 치닫게 되어버렸다. 급기야 결혼 기념으로 헤어지자는 말로 결말이 나버렸으니 둘 다 얼마나 기분이 나쁘고 속상하겠는가?
도대체 왜 대화가 이렇게 망가져버렸을까? 이 부부의 대화법을 부부 치료의 세계적이 권위자인 가트맨 박사 방식으로 분석하면 이혼으로 가는 지름길 넷을 다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가 비난이다. ‘당신’으로 시작하는 대화는 대개는 비난성 발언이다. ‘도대체’, ‘왜’, ‘한번도, 결코, 항상, 절대’ 등의 말도 다 비난의 뜻을 함축한다. 왜냐하면 이 말을 듣는 사람은 ‘내가 인격적으로나 성격적으로 결함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구나’하는 인신공격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당연히 기분이 나빠질 것이다.
자존심에 공격을 받으면 상대는 반사적으로 반격태세를 취하게 된다. 이것이 이혼으로 가는 두 번째 지름길인 방어다. ‘왜, 또 아침부터 시비야?’ ‘뭐? 시비? 당신 도대체 나한테 관심이나 있어?’ 등은 ‘문제를 일으킨 장본인은 당신이다’는 방어성 발언이다. 이렇게 되면 원래 풀려고 했던 문제는 오리무중이 되어버리고 서로 누가 옳으냐 그르냐, 잘 났냐, 못났냐로 대화가 변질되어버린다. ‘좋아, 네가 5톤짜리 대포로 공격한다면 난 10톤짜리로 되받아주마’ 하는 자세가 되어 싸움은 격해지고 결국 둘 중 하나가 폭탄급 선언이나 행동으로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확대전으로 질주하게 된다.
불행한 부부들의 부부 싸움은 대개 이쯤에서 끝나지 않는다. 뭔가 결정타를 칠만한 무기가 없을까 하여 던지는 것이 경멸의 말이다. 이것이 이혼으로 가는 세 번째 지름길이며 독성이 아주 강하고 지속력도 크다. 가트맨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경멸을 받은 상대는 4년 이내에 감염성 질병에 걸릴 확률이 높을 정도로 경멸은 우리의 면역력을 파괴한다고 한다. ‘재수없게‘, ’여편네‘, ’복에 겨웠구나‘ 등은 경멸성 발언이다. 경멸의 본질은 내가 너보다 잘 났다는 것이다. 상대를 인격적으로 비하하는 것이며 어린애나 하인 취급하는 투의 말도 경멸에 포함된다. 때로 말은 하지 않더라도 표정만으로도 충분히 경멸을 표현할 수 있다. 가트맨 방식의 부부 대화 분류법 (coding, 코딩)을 할 때 눈을 위로 굴리면서 한 쪽 입만 뺨 쪽으로 당겨 올리는 냉소의 표정은 경멸에 포함된다. ’내 참, 기가 막혀서...너나 잘 하세요, 어쭈, 주제파악 좀 하시지, 이 바보야‘ 등은 모두 상대를 나보다 아래로 여기는 경멸이다.
위에 예로 든 부부의 대화는 남편이 대화를 중단하고 나가버리는 것으로 끝난다. 이것이 이혼으로 가는 지름길 네 번째인 담쌓기다. 담쌓기는 서로 눈 마주치지 않기, 말 안하기, 상대가 말하는데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들여다보기, 전화기 꺼놓기, 집에 늦게 들어오기, 각방쓰기, 외박하기, 가출하기, 별거하기 등으로 다 이혼이라는 종착역을 향한 여정길이다.
지난 35년 동안 약 3000쌍의 부부를 대상으로 연구한 가트맨 박사는 부부 싸움의 내용은 이혼과 무관하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 내용이 외도, 폭력, 돈 문제, 고부갈등, 술 문제 같이 심각한 것이든 설거지 행주 빨아 놓는 방식의 차이같이 사소한 것이든 부부의 불행감이나 이혼과는 상관관계가 미미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화 방식에 비난, 방어, 경멸, 담쌓기가 담겨 있으면 그 부부는 15년 이내에 이혼할 것을 92%의 정확도로 예측할 수 있다고 한다. 이 방대한 연구의 결론은 ‘말을 바꿈으로써 부부 관계가 개선되고 결혼의 행복도가 증가된다’는 것이다.
위의 대화를 어떻게 바꾸면 부부 사이가 좋아질까?
아내: (식탁에 앉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오늘이 우리 결혼한 지 12년 째 되는 기념일인데, 뭔가 뜻있는 일을 하면서 보내고 싶어” 남편: “어, 그러고 보니 오늘이 우리 결혼기념일이네. 당신이 말 안 해 줬으면 깜빡 잊고 지나갈 뻔 했어. 요즘 일이 잘 안 풀려서 결혼기념일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 미안해.” 아내: “괜찮아, 나도 당신이 요즘 너무 힘들어 보여서 걱정이야... 정말, 12년이 참 빨리 지나갔지? 우리가 처음 데이트 한 날로부터는 15년이 다 되니까 내 인생의 반 정도를 당신과 함께 지낸 셈이잖아.” 남편: “햐~ 세월이 유수같다더니...그래, 당신은 오늘을 어떻게 보내고 싶어?” 아내: “글쎄, 저녁까지 좀 생각해 보고 나중에 문자 보낼게. 당신 지각하겠다.” 남편: “당신이랑 결혼한 내가 행운아야. 고마워.“ 아내: (미소 지으며) “나도 고마워. 사랑해~”
이렇게 대화가 순풍에 돛단배처럼 유연하게 진전된 비결은 무엇일까? 얼핏 보기엔 별로 대단한 것 같지만 첫 마디가 중요하다. 가트맨 박사는 아내가 말을 부드럽게 시작하는 것이 나머지 대화의 흐름을 유연하게 풀어나가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고 지적한다. 왜, 하필 여자만 부드럽게 시작해야 할까? 물론 남자도 부드럽게 말하면 좋겠지만 아내의 부드러운 첫마디만큼 핵심 (key) 역할은 하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뇌 속에는 감정을 주관하는 변연계에 편도 (아미그달라)라는 부위가 있는데 남자들은 일반적으로 여자보다 아미그달라가 취약해서 아내가 큰소리로 격한 감정을 쏟아내면 차분하게 생각하고 다량의 정보를 받아들여 우선순위를 정하며 계획을 할 수 있게 하는 전두엽으로 뇌의 혈액 공급량이 흐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대로 위기 상황의 특징적 사고패턴인 “싸울 거냐, 도망갈 거냐”의 파충류적인 뇌 활동 부분에 혈액이 다량 공급되고 이 때에는 심장박동이 95회 이상 뛰면서 혈액 속에 아드레날린과 같은 흥분호르몬과 스트레스 호르몬이 충전된다는 것이다. 대화가 격해질 때 이런 변화가 여성에게도 일어날 수 있지만 평균적으로 남성이 훨씬 더 빨리 이런 변화를 일으키고 평정상태로 회복하는 데 걸리는 시간도 여성보다 훨씬 느리다. 따라서 아내의 부드럽고 작은 목소리는 흥분에 취약한 남성의 전두엽을 다치지 않고 다량의 정보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 차분히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해 준다는 것이다.
그러면 부부 관계를 좋게 하는 데 남편이 일조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일까? 가트맨 박사는 아내의 영향력을 받아들이라고 충고한다. 아내의 말에 “당신이 말 안 해 줬으면 깜빡 잊을 뻔 했네”, “당신은 오늘을 어떻게 보내고 싶어?” 등은 아내의 영향력을 받아들이는 자세다. 다시 말해 아내 위에 지배하고 군림하지 않고 아내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태도이다. “내 사전에 결혼기념일이란 없다”, “하고 싶으면 너 혼자 해”라든가, “제발 남편 좀 들볶지 마라” 이런 말들은 모두 아내의 영향력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전면 거부의 태도이다. 아내의 입장에서는 절벽 앞에 선 기분이라 산을 넘고 바위를 뚫어야 할 만큼 감정이 북받치게 하는 반응이다.
반대로 아내를 무장해제 시켜주고 동지로 포용하는 남편의 효과적인 대답은, “그래, 한 번 생각해 볼게”, “당신 말도 일리가 있네”,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구나”, “역시 당신은 머리가 좋아” 등등이다. 대화법을 배워서 부부 관계를 좋게 하는 것은 큰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막대한 시간투자를 요하는 일도 아니다. 오늘부터 실천해 보면 바로 그 효과를 체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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