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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 전 |
『性理學訓』, 『童子須知』 |
8세-15세 (小學) |
『小學』, 『大學』, 『論語』, 『孟子』, 『中庸』, 『易』, 『書』, 『詩』, 『儀禮』, 『禮記』, 『周禮』, 『春秋』 순으로 유가경전 학습 |
15세-20세 |
『大學章句』와 『或問』, 『論語集注』, 『孟子集注』 『中庸章句』와 『或問』, 『論語或問』, 『孟子或問』순으로 학습한 후, 경전필사와 함께 『通鑒』, 『韓文』, 『楚辭』등의 순서로 학습 |
20세-23세 |
과거시험 공부 |
정단례의 교과과정 학습계획은 체계적이어서 다른 서원에 광범위하고 신속하게 채택되었다. 『清会典事例』 卷三九五에서 청 건륭제는 전국 각지의 서원에 균일하게 '分年讀書法의 교육과정을 본받아 經史에 통달하게하라'라는 명확한 지침을 내렸다.
이외에 대유학자들이 서원을 관장하면서 자신들이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교과과정을 제정하였다. 예로 청초 동림서원에서 강학을 했던 陸世儀 역시 3단계의 교과과정을 만들어 학생들을 지도하였다.
通讀時期 (5-15세) |
小學, 『四書』, 『五經』, 『太極』, 『通書』와 古文, 古詩 등 |
講貫時期 (15-25세) |
『四書』, 『五經』, 『性理』, 『綱目』과 國家儀禮, 律令과 地理 水利 兵法 등 각종 서적 |
涉獵時期 (25-30세) |
상술한 것 이외에 범위를 넓혀서 二十一史, 諸家經濟, 天文, 地理와 古文, 古詩 등의 서적 |
다른 한편으로 서원은 월별교과과정을 제정하기도 하였다. 梁啓超는 湖南의 時務學堂을 주관하는 교학기간에 『讀書分月課程』을 만들어 매월 읽어야할 목록을 정독과 통독 두 가지로 나누어 규정하였다. 예로 일월에 정독할 책으로 『禮記•學記』 『少儀』 『管子•弟子職』 『孟子』 『春秋公羊傳』, 통독할 책으로 『宋元學案』 중 부분학안, 『史記•儒林列傳』 『漢書•藝文志』 등이 있었다.
많은 서원은 일별교육과정을 제정하였다. 명 유학자 王守仁은 교학할 때, 일일교육과정을 考德, 背書와 誦書, 習禮 혹은 作課藝, 復誦書와 講書, 歌詩 와 같이 五節로 정하였다.
(三)學規
서원제도화의 가장 보편적인 특징 중의 하나는 학규의 제정이다. 학규는 서원교육의 목표를 확립하면서 특히 학생의 수덕과 학문 그리고 일상생활의 준칙과 규범을 포함하고 있다. 서원의 학규는 비록 불교사원제도의 영향과 계발을 받아, 佛舍의 淸規와 일련의 연원관계를 맺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의 출현 역시 중국고대사학제도화의 발전을 반영하고 있다.
현존하는 서원학규 중 가장 이르면서, 가장 유명한 것은 주희가 제정한 『白鹿洞書院學規』(『白鹿洞書院揭示』 혹은 『白鹿洞書院敎條』라고도 부름)이다. 南宋 淳熙6년(1179) 주희가 南康軍에 관직을 맡으면서 백록동서원을 중수하였다. 서원에서 그의 교육방침과 배양목표를 관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그는 학규를 제정하였다. 이것은 古代儒家 宋明理學의 온전한 교육강령으로 明五倫의 교육종지와 學文思辨行의 교육과정과 교육방법, 도덕수신의 윈칙과 방법, 일상생활의 행위준칙을 포함하고 있다. 이때문에 아주 빠르게 전파되면서 다른 서원에 보편적인 학규로 채택되어 중국서원사에 있어서 깊은 영향을 주었다.
남송이후 역대 서원이 광범위하게 『白鹿洞書院學規』를 채택하면서, 각 지역에서 서원을 관장하는 사람들은 당시 사회정치적 조건과 학술종지 그리고 학생의 서로 다른 요구에 맞추어 각종 학규를 제정하였다.
顧憲成은 명 만력시기에 동림서원을 세우고 그는 『백록동서원학규』를 계속해서 채택하는 것 외에도 보충 및 증정하여 비교적 면밀한 규약을 만들었다. 이름하여 『東林會約』 이다. 『동림회약』은 먼저 孔子, 顔淵, 曾參, 子思,孟子를 배움의 요지로 삼았다. 다음으로 『白鹿洞規』를 내고 마지막으로 飭四要、破二惑、崇九益、屏九损을 제의하였다. 四要는 要知本、要立志、要尊经、要审几를 가리키고, 二惑은 강학을 반대하고 강학이 무용하다고 여기는 두 가지 이유를 가리킨다. 九益은 강학의 아홉가지 좋은점을 가리키면서 도의를 열심히 갈고 닦아 성현의 도를 이루는 것 등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九损은 강학 중에 자주 범하는 아홉가지 병폐로 比昵狎玩과 谈论琐怪 등을 포함하고 있다.
『會約』은 동림서원 학생이 송대 이학자들의 학술정신을 계승하고 왕학 말류의 폐습을 바로 잡도록 하였다. 이외에 『동림회약』은 아직 강회의 組織과 要望 그리고 儀式 등에 대해 상세한 규약을 제정하였다. 명말 동림서원 강학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동림회약』 역시 서원사에 있어서 중요한 학규가 되었다.
청대서원의 관학화 정도가 심화되면서 학생에 대한 요망은 날이 갈수록 엄격해졌다. 이로 청대서원의 학규는 아래와 같은 특징을 지니게 되었다. 첫째 학규의 종류가 많아지면서 각각의 서원마다 학생에 대한 요망에 근거하여 일련의 학규와 조례를 자체적으로 제정하였고 특히 특정시기를 전후로 하여 다양한 학규가 제정되었다. 한 예로 청 이전에 嶽麓書院은 자체적인 학규 제정이 미비하였다. 그렇지만 청 康熙부터 道光에 이르는 이백년동안 10여종에 달하는 學規, 學箴, 戒條가 제정하였다. 둘째 금지하고 방비하는 성격의 규정이 날이 갈수로 많아졌다.
주희가 『白鹿洞書院學規』를 정하면서, 학생들에게 도덕적 자율을 강조하면서 학생들이 성인을 배우고 현인을 사모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였다. 그렇지만 청대 서원학규의 대부분이 적극적인 장려에서 소극적인 방비로 전환되면서 금지하고 방비하는 성격의 학규가 다량으로 나타났다. 이외에도 통제식 교육과 함께 체벌적인 조치도 늘어났다.
학규의 출현은 서원교육의 정규화, 제도화의 강화를 상징하고 있다. 그것은 학생의 사상과 품성을 배양하고 학문의 발전을 촉진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서원의 발전과 변화에 따라 많은 서원의 학규는 학생의 사상과 언행을 엄격하게 속박하여 부작용을 일으켰다.
(四) 試驗
서원은 교학뿐만 아니라 시험 방식을 통한 학생들의 학업수준 심사 역시도 중시하였다. 동시에 상응하는 장려 조취를 취하면서 시험제도를 확립하였다.
시험제도는 이미 송대의 서원에서 채택되었다. 『宋史 尹谷傳』의 기재에 따르면 '초, 담사는 평소 독학으로 배움을 구함을 중히 여긴다. 주의 학생은 월별 시험에 높은 점수로 湘西의 악록서원의 학생으로 올라간다. 또 높은 점수로 악록정사의 학생으로 올라간다. 담인은 삼학생이라 부른다.'"初,潭士以居学肆业为重。州学生月试积分高等,升湘西岳麓书院生; 又积分高等,升岳麓精舍生。潭人号为三学生。"
이는 서원이 실시한 시험제도의 유명한 예이다. 악록서원은 일찍이 송대부터 비교적 완전한 시험제도를 갖추고 있었다. 그렇지만 송 원 명 시기의 다른 서원에서는 이와같은 시험제도가 보편화 되어 있지 않았다.
청대에 이르러 시험제도가 각지의 서원에 보편적으로 널리 시행되어 정형화된 제도가 되었다.
청대서원의 시험은 官課와 師課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진다. 소위 관과는 '大課' 라고도 불려졌다. 일반적으로 지방관원이 주관하여 문제를 출제하였고 시험의 내용은 八股文, 詩賦, 古文, 解經, 策論 등이었다. 그리고 시험성적에 따라 등급을 다음의 예처럼 나누었다. 生員은 超等, 特等, 一等으로, 童生은 優取, 上取, 次取로 나누었다. 그러한 연후에 합격자 명단을 게시하여 차례대로 상을 내렸다. 사과는 齋課 혹은 館課라고도 불리는데 서원 산장의 주관으로 문제를 출제하고 시험을 치렀다. 시험의 내용과 등급을 나누는 방법은 관과와 대체로 일치하였다.
서원은 '月課'라 불리는 관과와 사과를 각각 한번씩, 매월 두 차례에 걸쳐 시험을 실시하였는데 구체적인 시간은 각 서원마다 달랐다. 이외에 季課도 있었다. 광주 학해당은 매년 네 번의 시험을 규정하고 학장이 출제와 채점을 한 후 우열을 평정하여 장학금을 지급하였다.
시험은 서원교육의 중요한 부분으로 학생의 등급(正課生 副課生)과 학비(장학금)의 액수를 결정하였다. 수험생의 부정을 방지하기 위하여 서원은 엄격한 시험규율을 마련하였다. 예로 청대 『奎文書院課士條規』의 규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생과 동은 두 곳으로 나누어 시험을 치르되 서로 섞여 앉거나, 왕래할 수 없다. 위반자는 퇴치한다. 서원 내 시험을 보면서 사사로이 나갈 수 없다. 위반자는 퇴치한다. 시험은 타인에게 부탁하여 대신 치르게 할 수 없고 또한 외부로부터 건네어 들여올 수 없다. 위반자와 대리자는 함께 제명한다. 시험은 마땅히 독창적 구상을 내어 놓는 것으로 성문을 베껴 비슷하게 따라가서는 안된다. 위반자는 제명한다. 생과 동 스스로 답안지를 받아 들고 시험을 치르면서 다른 이름으로 답안지를 받아서는 안된다. 만약 두 번 답안지를 받은 자는 제명한다.(淸 咸豊版 『定州誌』 卷1)
이로 보건대, 서원에서 시험제도를 매우 중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엄격한 條規는 주로 시험시에 나타나는 부정행위를 막기 위함이었다.
서원의 입장에서 학업평가 시험제도를 제정하는 것은 필요한 것이었다. 그것은 학생의 학업 수준을 검사하여 살피고 다그치는 역할을 하였다. 그렇지만 청대 서원의 시험 내용은 대부분 팔고문이었다.(당연히 적지 않은 서원이 팔고문 시험을 치르지 않았다. 예로 學海堂과 詁經精舍를 들 수 있다.) 결코 학생의 견실한 학문을 반영할 수 없어 흔히 학생이 장학금을 획득하는 수단이 되었다. 그래서 당시에 많은 학자들이 이러한 시험제도를 비판하였고 송 명의 유학자들이 서원을 세운 초지에 위배되고 서원이 거의 명리를 다투는 장소가 되었다고 여겼다. 이러한 학자들의 비평에도 일리는 있다.
서원의 藏書와 出版
장서는 서원이 전통사학보다 우수한 독특한 특징이다. 그것은 현대 대학의 도서관에 해당하며 서원이 기능을 완비한 교육기구로의 구현이다. 班書閣은 『書院藏書考』에서 ‘서원의 명칭이 서원으로 불리게 된 연유는 바로 장서에 기인한다.‘书院之所以名之曰书院者,即以藏书故也。'라고 말하고 있다.
서원이 藏書의 기능을 구비할 수 있었던 것은 사회물질적인 조건인 목판인쇄술의 발명에 기초를 두고 있다. 고대서원이 당에 시작하여 송에 흥성한 것은 바로 목판인쇄술의 발전과 함께하고 있다. 학교교육이 간접적인 책의 지식 전파를 위주로 하였고 인쇄술발달로 서적의 광범위한 전파가 가능할 수 있었다. 이러한 원인으로 교육발전 역시 촉진되었다. 특히 서원의 출현을 가져왔다.서원이 대량의 장서를 구비할 수 있었던 조건으로 장서를 기초로 하여 학습, 교육, 저서 그리고 인쇄 등 일련의 서적과 관련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점은 서원이전의 전통사학이 구비할 수 없었던 것으로 서원이 고급형태의 사학이 되는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장서는 서원교육의 발전을 촉진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학술연구의 번영을 촉진할 수 있었다. 바로 서원이 교육과 학술을 발전시키는 중요한 물질적 조건이었다.
고대서원 장서의 유래는 비교적 다양하다. 그중 아래 몇 가지 예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어서의 하사이다. 황제 자신이 유학을 숭상하고 교육을 중시하는 문화교육 정책을 보여주기 위하여 서원을 장려하는 한편 통제하기 위하여 서원에 어서를 하사하였다. 특히 송대와 청대에 가장 두드러지게 보이고 있다. 북송시기에 유명한 서원 대부분이 조정의 어서를 받았다. 예로 白鹿洞書院은 北宋 太平興國 2년(977)에 宋 太宗이 하사한 ‘九經’을 받았다. 南宋 淳熙8년(1181) 조정에서 하사한 國子監의 경서를 받기도 하였다. 崇陽書院은 북송시기 두 번에 걸쳐 조정에서 하사한 구경을 받았다. 嶽麓書院은 咸平4년(1001)에 眞宗이 하사한 각종0 經書와 釋文義疏 『史記』 『玉篇』 『唐韵』 등을 받았다. 淸 康熙 擁正 乾隆 역시 각종 서적을 서원에 하사하였다. 물론 황제의 御書를 하사받은 서원이 많지는 않다. 그렇지만 황제의 어서 하사의 기준은 높은 편으로 서원 장서에 대한 영향력이 아주 컸다. 그래서 황제의 어서를 받은 서원은 書樓를 지어 하사받은 御書를 보관하였다. 어떤 서원은 서루의 명칭을 ‘御書樓’라고 정하였다. 황제의 어서 하사는 서원장서의 발전을 촉진하는 작용을 하였다.
둘째, 개인 기증이다. 서원교육은 사회적 위상와 영향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연유로 지방 각계의 지지를 받아 많은 관료와 향사들은 적극적으로 서원에 도서를 기증하였다. 이 때문에 개인 기증은 서원장서의 중요한 원천의 하나가 되었다. 예로 청대 학자인 張伯行은 福州에 鰲峰書院을 세우면서 집안에 있던 장서 천권을 서원에 기증하고 書樓를 세워 각종 경전을 보관하였다. 江西 端州의 同知인 焦贡亨은 병상에 있으면서 崇陽書院의 藏書樓에 도서를 기증하여 유생들이 읽도록 하였다. 개인이 자원하여 기증하는 것 외에도 서원은 적극적으로 관료와 향사 그리고 서방에서 서적을 구하였다. 청대에 악록서원은 각종 서적기증관련 조례를 제정하고, 관민의 지지를 호소하여 집안에 보관중인 서적을 서원에 기증하도록 하였다. 결과적으로 개인기증이 서원장서의 주된 원천이 될 수 있었다. 淸 同治년간 악록서원은 『新捐官書目錄』(『嶽麓書院續誌』 卷終에 실림)을 편찬하였다. 총5720冊으로 그중 관료와 향사들이 기증한 것이 4750冊으로 84%를 차지하였다.
셋째, 서원의 유상구입이다. 서원 자체 경비로 구입하는 것과 관부 보조금으로 구입하는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陸九淵의 문하생인 澎興宗이 象山書院을 세우면서 서적이 너무 적은 것을 보고는 서원 자체경비로 구입한 것이 전자의 좋은 예이다. 그리고 후자의 예는 서원의 관학화 현상이 보편화되어 가던 청대의 서원을 들 수 있다. 건륭원년(1736) 조정에서 정식으로 총독(總督)과 순무(巡撫)에게 공량을 유용하여 ‘十三經’과 ‘二十一史’등의 서적을 구매하여 각급 성회의 서원에 하달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러한 도서 구입 역시 서원 장서의 중요한 원천중의 하나였다.
넷째, 서원 자체적으로 서적을 출판하였다. 서원은 본시 서적 출판의 전통을 지니고 있었고 이것 역시 서원장서의 중요한 원천중의 하나였다. 이어서 서원출판에 관해 자세히 설명할 예정이니, 여기에서는 잠시 생략하고자 한다.
송대 이후, 장서에는 네가지 형식이 있었다. 정부장서, 개인장서, 사원장서, 서원장서 였다. 기타 몇 가지 장서형식과 비교해 보면 서원장서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 번째 특징으로 서원장서의 내용은 학술연구와 교학과 주로 관련이 있었다. 예로 각종유가경전, 사적, 이학저서 그리고 국가경제와 민생과 관련한 경세치용의 학문과 문자훈고와 관련한 소학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서적은 모두 서원교학과 학술연구 등 활동을 벌이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렇지만 각 시기별 학술 사조가 달라, 서원장서의 내용 역시 차이가 있었다. 북송서원은 주로 漢唐經書의 傳注를 강습하였다. 각 서원의 장서는 주로 『五經正義』 『史記』 그리고 각종 사장과 훈고류의 서적이었다. 남송 원 명 시기의 이학은 서원에서의 연구와 전습의 주된 내용이었다. 『四書集注』 『性理大全』 등의 이학자들의 저서가 서원장서의 주된 내용이 되었다. 청대 乾嘉之學이 흥기하면서 각종 고증학파의 자료와 저서가 서원장서의 주가 되었다. 근대에 이르러 新學(서양의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이 중국에 전해오면서 서원은 대량으로 신학과 관련된 서적을 소장하기 시작하였다. 光緖24년(1896) 유신사상를 고취하고자 한 態希齡 등의 사람들은 『電學』 『數學理』 『東方時局論略』 『鐵甲叢談』 『工程致富』 『美國水師考』 등 서학 관련서적 400여권을 악록서원에 기증하였다. 이로보건데 서원장서의 내용과 서원의 교학 및 학술연구의 발전 및 변화는 긴밀하게 하나로 연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특징으로 서원장서는 일련의 보관과 대여제도를 제정하였다. 서원장서는 주로 서원내외 교사와 학생이 대여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서원은 편목정리 대여 보관에 관련된 일련의 제도를 제정하였다. 『嶽麓書院詳議條款』은 바로 도서입고등록, 서적대여, 서적보관 등을 일련의 상세한 규정을 제정하여 서적 보호의 필요뿐만 아니라 이용을 더욱 편리하게 하여 그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게 하였다. 예로 『条款』규정에 따르면 학생은 서적을 대여한 후 매10일에 한번씩 확인을 받아야 했다 만약 계속 대여를 하려고 하면 반드시 재대여 절차를 밟아야 했다. 만약 분실 혹은 파손이 되면 책임지고 배상을 해야 했다. 서적의 보관과 대여와 관련한 규정은 서원의 장서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서원장서의 발전과 교학 그리고 학술연구의 필요에 따라 출판 역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顧炎武는 『日知錄』에서 '송 원대의 출판은 모두 서원에서 산장이 이를 주관하였다.'라고 기재하고 있다. 서원 출판은 서원 자체의 교육사업과 학술사업의 발전을 촉진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 출판사 도서사 문화사의 발전도 반영하고 있다. 본래 고대의 장서와 출판은 하나로 연계되어 있어 장서는 출판에 底本을 제공하였고 출판은 또한 장서를 넉넉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역사적으로 장서가는 출판업을 겸하였다. 서원이 풍부한 장서를 보유하면서도 좋은 선본을 가지고 있어 자체적으로 서적을 출판하기가 매우 편리하였다. 이것이 서원 출판이 출현하게된 첫 번째 원인이다. 둘째로 서원 출판은 서원이 담당하고 있는 교학과 학술 연구의 기능과 관계가 있다. 교학중에 서원 교수의 강의와 학생의 우수한 문장 그리고 학자들의 연구성과물의 출판발행은 모두 출판 기능을 구비할 필요가 있었다. 이 때문에 서원의 출판기능의 출현으로 장서는 더욱 풍부해지고 교학과 학술연구 또한 발전하면서 서원의 다기능화가 구현되었다. 셋째로 서원 출판은 중국고대 학교의 서적출판의 전통적인 풍조와 관련이 있다. 당대 이후, 최고학부인 국자감은 종종 국가출판 부분을 대체하는 기능을 지니고 있어 국가의 학자들을 위하여 서적을 출판하였다. 지방관학 역시 대량으로 서적을 출판하였다. 이러한 기풍의 영향아래 고급형태의 사학인 서원 역시 자체의 출판전통을 형성하였다.
서원의 주된 임무는 교학과 학술 연구였다. 이 때문에 서원출판의 내용은 이러한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서원 출판은 주로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교재류는 주로 서원 학생이 연구하고 공부하는 용도를 만족시켰다. 예로 宋의 泳澤書院에서 주희의 『四書集注』를, 麗澤書院에서 司馬光의 『切韻指掌圖』를 출간한 것이 이러한 유형에 속한다. 2. 학생문집회편류는 서원 학생들의 課藝, 經史論文, 독서를 하면서 체득한 筆記 등이다. 특이할 만한 것은 출판발행을 하여 학문을 교류할 수 있었다. 이러한 유형의 서적은 대체적으로 서원의 이름으로 명명되었다. 예로 『詁經精舍文集』 『經訓書院文集』 『嶽麓書院課藝』 등이다. 3.학술저서류는 서원에서 주강을 맡고 있는 학자들이 평시에 전심하여 연구한 학문을 저술로 남겨놓았다. 또한 서원은 학술전통을 존숭하여 이와 관련된 학술저서 출판이 요구되었다. 예로 宋 龍溪書院에서 출간한 陳淳의 『北溪集』을 출간하고 淸 正誼書院은 『正誼堂全書』에 송대 이학자들의 이학전문 저서 10여종을 집록하여 편찬하였는데 모두 이러한 유형에 속한다. 이외에 서원의 판각본이 우수하여 정부가 위탁한 출판임무를 맡았고 서원의 출판에는 조정에서 위임한 출판 서적이 포함되어 있었다.
서원이 출판 기능을 구비한 후, 아주 빠른 발전을 이루어 청대에는 이미 사회적 기풍을 이루었다. 서원출판의 생성과 발전에 중대한 의의를 지니고 있음을 충분히 긍정해야 할 것이다.
첫째, 서원출판은 서원 자체의 발전과 정비를 촉진하였다. 서원 스스로 교학 학술연구 장서 등의 다양한 기능을 구비하면서 서원출판의 발전은 상술한 기능의 촉진 작용을 하였다. 먼저 서원교육에 직접적으로 교재와 참고서를 제공하고 동시에 학생의 습작 문집(課藝 라고 부름)과 교사의 강의록을 출판할 수 있게 되면서 서원의 교육을 촉진하였다. 다음으로 대량으로 학술적 가치가 있는 저서를 출판할 수 있었다. 예로 阮元은 詁經精舍와 學海堂을 주관하면서 『詁經精舍文集』8집, 『學海堂文集』4집, 『學海堂經解』1400권을 발간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 학술연구의 발전을 촉진하였다. 다음으로 서원의 서적간행은 서원의 장서의 원천중의 하나가 되어, 장서발전을 위한 조건을 제공하였다.
둘째 서원의 서적간행은 문헌의 보고를 풍부하게 하고 출판사업을 촉진시켜 문화사업을 발전시켰다. 역대로 서원의 서적간행은 서원본이라는 고적판본을 형성하였다. 顧炎武는 ‘서원의 판본에는 세 가지 좋은 점이 있다. 山長이 관직에 있지 않은 즉 校勘에 열심히 한 것이 하나요 시간을 들임에 애석해하지 않아 精巧함이 둘이요 관청의 필요에 의해 유지한 것이 아니라 發行이 쉬운 것이 셋이다.’라고 서원의 판본에 대해 칭찬하였다. 서원판본은 내용, 교감, 조판, 인쇄, 장정을 균일하게 신경을 썼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장서가와 장서기구의 중시를 받아왔다. 예로 송대에는 江西 白鷺洲書院의 『漢書集注』 福建 環溪書院의 『醫學眞經』, 원대에는 湖南 東山書院의 『夢溪筆談』, 명대에는 江西 白鹿洞書院의 『史記』, 청대에는 福建 南菁書院의 『續皇淸經解』 『南菁書院叢書』 등등이다. 모두 중요한 학술저서이자 가치있는 판본으로 學術史와 出版史에 있어서 동등하게 일정한 지위를 지니고 있다.
서원의 제사
서원이 사당을 세우고 제례를 행하는 것은 서원의 주요 활동의 하나로 서원의 교사와 학생의 중시를 받았다.
중국고대학교에서 先賢과 先師를 기리는 예의활동의 유래는 깊다. 西周의 학교에는 이미 제사활동이 있었다. 『周禮・春官』의 기록을 보면 ‘먼저 입학하면 반드시 釋菜의 예로 先師에게 제를 지냈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漢唐의 학교는 공자에게 제사를 올리는 제도가 있었다. 서원이 생성된 후, 점차적으로 제사제도가 형성되면서 서원교육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그것은 도덕교육과 예의교육의 수단이자 또한 서원 학술 전통과 학풍의 중요한 상징이었다. 이어서 서원제사제도에 대해 대략적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一)제사의 대상
a. 先聖孔子에 대한 제례. 당송 관학 대부분이 공자를 제사하고 문묘를 세웠다. 북송시기 서원이 초창기에 흥할 무렵 대다수의 서원은 禮殿을 세우고 孔子와 十哲에게 제사를 지냈다. 이는 관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예로 송 咸平2년(999) 潭州 太守 李允則이 악록서원을 중수하고 禮殿을 세우면서 先師十哲의 상을 세우고 72현자의 초상화를 그렸다. 성대한 제사 설비는 관학을 모방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명대에 이르러 악록서원은 비교적 큰 문묘를 따로 세워 공자를 제사하는 규모는 일반적인 지방 관학을 월등하게 초월하였다. 공자를 기리는 제사는 서원의 제도와 다기능화의 특징을 반영하였다.
b. 학통추향. 서원은 고대 사상가와 교육가들이 자유강학을 실현한 교육의 근거지였다. 서원의 학통을 추향하고 서원의 학풍을 명시하기 위하여 서원은 학통과 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에게도 제사를 지냈다. 이것은 서원제사중에서 가장 특색이 있는 부분이다. 남송 주희는 복건에서 竹林精舍를 창건하고 先聖과 先師외에도 周敦頤, 二程, 邵雍, 司馬光, 羅從彦, 李桐 등 ‘七先生’에게 제사를 지냄으로서 도학학통과 본학파 선사에게 제를 지내는 효시를 열었다. 다른 예로 象山書院은 본학파 대사인 陸九淵에게, 악록서원은 張栻등에게 제사를 모시는 것을 들 수 있다. 명대 사상가 담약수는 도처에 서원을 세우고 강학을 하면서 그가 세운 서원에서는 그의 스승인 陳獻章에게 제사를 지냈다. 왕수인 사후에 그 제자들 역시 도처에 서원을 세우고 강학을 하면서 왕수인의 제사를 모셨다. 청 乾隆과 嘉慶시기에 한학이 크게 부흥하면서 한학을 전문으로 강학하는 서원에서는 학통을 밝히기 위하여 許愼, 鄭玄, 司馬遷, 班固등의 한학자와 역사학자 등에게 제사를 지냈으나 이학자들을 높이지는 않았다. 상술한 바에 의하면, 학통과 학파를 추향하는 제사는 학생들에게 서원의 학통을 존숭하고 학파의 전통적 사상을 계승하는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
c. 서원과 관계있는 先儒, 先賢에 대한 제사. 매 서원마다 설립과 부흥에 공이 있는 인물이 있었다. 그들의 숭유중교의 정신과 서원에 대한 공헌을 표창하기 위하여 서원은 사당을 지어 이러한 인물들과 서원강학을 주관하는 산장 혹은 명사에게 제사를 지냈다. 唐의 李涉, 李渤, 顔翊, 李善道, 朱弼, 송대의 明起, 劉元亨, 劉漁, 劉恕, 陳璀, 黃異 등의 사람들을 포함하였다. 악록서원은 명대에 '六君子堂'을 지어 송대와 명대에 서원을 세우는데 큰 공헌을 한 朱洞, 李允則, 朱式, 劉珙, 陳鋼, 楊茂元 여섯사람의 제사를 모셨다. 先儒와 先賢에게 제사하는 목적은 후대가 숭유중교의 정신을 계승하여 발양하도록 격려하기 위함이었다. 이로 서원의 교육은 끊임없이 이어져 발전하였다.
d. 공명을 주재하는 文昌帝, 奎星등에 대한 제사. 이학자와 많은 학자들 대부분이 서원교육이 공명과 관록 추구를 유일한 목적으로 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그렇지만 서원은 변화하는 과정에서 종종 그들의 초심에 위배되었다. 특히 후대에 이르면서 많은 서원이 과거에 종속물로 전락하여 학생들의 공명추구가 학문을 하는 유일한 목적이 되었다. 제사제도에서 文昌閣과 奎星樓 등을 대대적으로 重修하는 것은 공명을 주관하는 신령인 文昌帝君과 奎星의 보살핌을 간구하는 것으로 반영되고 있다. 이러한 제사는 과거에 경도되면서 학술대가의 학문하는 정신을 잃고 귀신에 빌붙어 복을 구하는 짙은 미신의 색채를 띠고 있다.
(二) 제사의식
일반적으로 서원은 전문으로 제사를 지내는 祠堂(예로 濂溪祠)과 樓閣(예 文昌閣), 廟宇(예 文廟)를 세웠다. 주희의 견해에 다르면 서원에서의 제사의 대상은 인물상을 세우지 않고 '木主'로 대체하여 木片으로 神主를 만들었다. 이렇게함으로써 불교의 우상 숭배와 구별할 수 있었다.
『禮記』에서 정한 바에 의하면 서원의 사당과 제사의식은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釋尊'과 '釋菜'이다. 석존의 예는 고대 학교에서 선성과 선사에게 추도하는 의식에서 생겨났다. 비교적 성대하였다. 일반적으로 매년 봄 가을 仲月 丁日에 거행되었다 그래서 丁祭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석존의 예를 행할 시에는 돼지, 소, 양, 모든 희생을 제사에 받치도록 하였다. 석채의 예는 祭菜 혹은 舍菜라고도 부른다. 원래 고대학교에서 선성과 선사를 추도하고 숭상하는 禮儀였다. 그렇지만 선존의 예보다 간소하였고 주로 대추 밤 箐菹 등의 소채로 제사를 지냈다. 청대 동림서원의 규정에는 매년 正月 上甲日에 석채의 예를 거행하고 백록동서원은 매년 정월 군수가 학생을 서원에 보내거나 혹은 提學憲臣과 主洞敎官이 가장 먼저 서원에 와서 석채의 예를 거행하도록 규정하였다.
석존을 거행한 당일 서원의 교사와 학생 모두 예복을 입고 文廟 혹은 禮聖殿으로 갔다. 師長이 학생들을 이끌고 선성과 선현의 여러 상과 신위에 참배를 하였다. 서원제사의 구체적인 예의는 香案設置, 祭品과 祭器의 진열, 迎神, 奏樂, 行三獻禮, 焚告文, 送神 등 아주 복잡하였다. 매 의식마다 엄격하고 구체적인 규정이 있었다. 구체적인 의식을 하나하나 소개하기에는 번거로워 여기에서는 생략하고자 한다.
(三) 서원제사에 대한 평가
서원은 줄곧 사당에서 제사의례를 행하는 것이 보편적으로 성행하였다. 후에 연구자들이 제사, 강학, 장서를 열거하고서 서원의 삼대 기능중의 하나로 보았다. 그렇지만 서원의 제사활동의 역할과 영향은 이중성을 띠고 있다. 먼저 서원은 제사활동을 통하여 학생들에게 도덕과 예의 분야의 교육을 진행하였다. 선성, 선사, 선현, 선유에 대한 추모와 숭상은 교사와 학생사이에 모범인물 형상을 세워 유가윤리의 사상과 품성을 배양하고 서원의 학술전통과 학풍을 계승하게 하였다. 이로보건데 서원의 제사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서원의 제사활동에도 부작용이 있었다. 주로 서원의 종교적인 기능으로 나타났다. 제사는 종교적 성향을 지닌 의례활동이다. 성대한 제사의식은 언제나 종교의 신령관념과 연계되어 있었다. 예로 서원에 세운 문창각, 규성루와 같은 제사건축과 이와 관련이 있는 제사활동은 학통을 숭상하고 선현을 존경하는 함의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주로 신령에게 자신이 과거에 합격하여 관료가 될수 있도록 간구하기 위함으로 종교미신활동이 되었다. 게다가 서원의 이러한 제사의식은 공허한 형식으로 흘러가 완전히 학생에 대한 도덕교육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서원의 경비관리
경비는 서원의 경제적 기초였다. 서원의 모든 교육활동 학술활동과 기타 문화활동 모두 반드시 일정한 경제 조건에 의지하여 비로소 유지할 수 있었다. 이로 서원의 경비관리는 서원의 조직제도 행정관리에 있어서 특징을 반영하였다.
(1) 서원경비의 출처
중국고대는 농업사회였기 때문에 서원경비의 주된 형태는 ‘學田’이었다. 소작료를 경비의 자금원으로 삼았다. 후기에 이르러 일부 서원(특히 도시에 있는 서원)은 은행의 이자를 서원의 경비로 삼은 것은 당시 사회와 경제의 발전과 변화를 반영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서원의 경비는 학전에 의존하였다. 서원학전의 출처는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 개인기증이다. 서원은 ‘향당지학’으로 서원의 발전은 주로 지방사신과 학자들의 지원에 의존하였다. 지원 형식중의 하나가 전답을 기증하는 것이었다. 주희가 知南康軍을 맡고 있을 때, 백록동서원을 후원하기 위하여 친히 돈을 내어 전답을 사들였다. 명 嘉靖시기에 長沙의 몇몇 知府 역시 악록서원에 전답을 연이어 기능하였다. 예로 王兼良은 18畝, 孫存은 68畝 , 季本은 102畝, 林華는 50畝를 기증하였다. 당연히 이처럼 유명한 서원은 관부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개인의 전답 기증의 비율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지방서원은 경비의 내원이 주로 혹은 완전히 개인이 기증한 학전 혹은 은퇴관원과 대가족의 독자적인 출원에 의존하였다. 예로 원 湘潭의 主一書院, 祁陽의 浯溪書院이다. 혹은 지방각계 인사가 공동출자하여 세운 衡州의 淸溪書院이다. 개인의 전답기증은 많은 지방서원이 서원을 설립하고 유지하는데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다음으로 조정 관부가 정식으로 학전을 하사하였다. 역사적으로 서원이 통치자의 엄격한 금령의 기간이 그다지 길지는 않았다. 상당히 긴 기간동안 관부는 서원을 지원하였다. 서원교육은 결국에 봉건사회와 일치하였기 때문있었다. 관부가 서원을 지원하는 가장 직접적인 조치는 學田拂下였다. 북송초 몇 곳의 유명한 서원은 예로 湖南 衡陽의 石鼓書院의 경우를 보면, 조정에서 하사한 전답에는 한계가 있었다. 수량이 많은 것은 바로 지방관부에서 불하한 학전이었다. 백록동서원지의 기재에 따르면 당말에서 청초에 이르기까지 관부에서 서원에 30여차례에 걸쳐 학전을 불하하였다. 남송 淳熙10년(1183) 知南康軍 朱端章이 전답700畝를 불하 하였다. 청대에 이르러서 관부가 정식으로 경비를 불하하는 상황은 보편화되었다. 擁正년간 조정은 각성의 성회에 서원을 건립하라는 명을 내렸고 이러한 서원의 경비는 기본적으로 정부가 지원하였다. 성회의 서원은 정부가 불하한 학전의 소작료를 사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직접 조정의 보조금을 받고 장부를 만들어 보고하였다. 각부주현의 서원은 개인의 기부금과 관부에서 지급하는 공금을 겸유하였다.
(二) 서원경비의 사용
서원경비의 용도는 아주 많았다. 산장과 교직원의 월급, 학생의 학자금(장학금) 서원의 유지보수비, 제사비, 도서구입비 그리고 일상적인 지출비등을 포함하고 있다. 서원경비의 지출은 서원 내부의 각종 인원의 경제적인 대우와 교학활동이 서원경비중에서의 비례등의 정황을 반영하여 우리들이 서원내부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악록서원을 예로 들도록 하겠다.
악록서원의 경비지출 정황을 아래 자료를 열거하여 대략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乾隆28년(1763) 陳宏謀가 하사금과 차용금 은4천냥, 명절의 여분액 2천5백냥을 漢津(漢口)의 鹽商과 湘潭의 典當商에게 二分과 一分五厘의 이률로 이자를 놓아 연 1410량의 이자를 받았다. 이를 嶽麓書院과 城南書院 두 곳의 경비로 삼았다. 또 두곳의 서원은 매년 학전 소작료 521석 4두와 매 일석에 곡전미4두4승을 받았다 모두 백미431석 2두였다. 진굉모는 경지지출 조규를 만들었고 그중 악록서원은 매년 지출을 아래와 같은 표로 공시하였다.
악록서원건융28년 경비지출표
항목 |
인원수 |
총액(은량) |
비주 |
掌敎 |
1 |
465량 또는 백미22석 |
사례금:360량, 월급:매월7량으로11개월 총77량, 생일과 명절휴가비등28량 |
董理敎官 |
1 |
36 |
|
正課生 |
60 |
660 또는 백미198석 |
년11개월정산. 향시년증액20인 은220량 백미66석,시험지:9.6량 두항목은 매년지출항목에 넣지 않음 |
副課生 |
15 |
82.5 |
11개월 정산 |
看守人員 |
8 |
57.6 |
門夫, 堂夫 각1인 |
學書 |
1 |
6 |
|
驛道書辦 |
1 |
6 |
|
祭祀 |
28.4 |
文廟 朱張祠 道鄕祠 六賢祠 文昌閣등 다섯곳 | |
합계 |
87 |
1341.5량 또는 백미220석 |
(주:陳宏謀 『培遠堂偶存稿』 권48에 근거,『申明書院條規以勵實學示』 제작)
이상 열거한 악록서원의 경비지출 도표는 대체적으로 고대서원의 경지지출상황과 그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서원경비의 지출이 주로 교학과 학술활동, 산장과 교사의 월급, 학생의 장학금, 기타 교학과 관련된 경비로 사용되었다. 서원관리인원의 월급과 기타 경비는 아주 적음을 알 수 있다. 한 학생의 장학금이 서원일반 관리원의 월급보다 많았고, 산장과 교사의 월급은 관리에 종사하는 監院, 書辦등보다 몇 배 혹은 수십배로 많았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서원 경영의 일반적인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제4장】
중국서원의 정신
고대서원이 당대에 생성된 이래로 충만한 생명력을 보여주었다. 송원명청을 거치면서도 서원설립이 쇠퇴하지 않았다. 장기간 동안 중요한 문화교육기구가 되었다. 청말 서원철폐의 여론이 무성한 가운데 서원은 폐기되었다. 겨우 20년이 채 지나지 않아, 서원폐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가장 먼저 이의를 제기한 사람은 현대중국의 혁명가인 마오쩌둥과 54신문화운동의 창도자인 후스이다. 마오쩌둥은 1923년 4월 『湖南自修大學創立宣言』에서 ‘서원의 교육내용은 부정되어야 하지만 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는 형식은 신식학교를 초월한다.’라고 제의하면서 ‘고대서원의 형식을 취하되 현대학교의 내용을 넣자’라고 주장하였다. 湖南自修大學을 설립하고 바로 그의 주장을 실천하였다. 같은 해 12월 후스가 계속해서 문장을 발표하면서 ‘서원의 폐지는 사실 우리 중국의 일대 불행한 일이다.’라고 여겼다. 동시에 특별히 서원정신의 의의와 가치를 긍정하면서 그가 말한 서원정신은 ‘시대정신의 대표’ ‘강학과 의정’ ‘자수와 연구’등을 포함하였다.
중국서원이 천년동안 성행하면서 쇠퇴하지 않고 동시에 당대 학자와 교육가의 추향을 받은 원인은 서원자체에 기인한다. 특히 서원의 내재적인 정신은 서원문화의 정수였다. 우리들은 서원정신에 대한 분석과 논술을 전개하기 위하여 유가문화의 역사적 현상 속으로 보다 깊이 들어가 역사문화의 현대적 의의를 모색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서원정신과 유가의 도
서원의 문화특질과 정신전통은 유가의 도로부터 비롯된다. 만약 寺廟가 불교문화의 상징이고 宮觀이 도교문화의 상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서원은 바로 유가문화의 대표라고 말할 수 있다. 서원의 정신적 특징을 이해하려고 하면 먼저 유가의 도를 이해해야 한다. 유가의 도를 이해하는 것이 비로소 유가 선비의 가치관념과 생활이상, 심미관을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이 세운 서원은 바로 그들의 가치관념과 생활이상 그리고 심미관의 체현이기 때문이다.
선비는 고대서원의 설립자이자 주관자였다. 유가의 사상에 따르면 선비의 문화적 사명은 도에 뜻을 두는 것이었다. 도에 뜻을 둔다(志于道)는 것은 두 가지 의의를 포함하고 있다. 첫째 유가의 문화적 이상(도)으로 사회를 개조하고, 나라를 다스리고, 세상을 평안하게 하는데 있다. 둘째로 유가의 문화사상(도)으로 자신을 바꾸고, 자아도덕을 온전하게 갖추는 것이다. 이것은 맹자가 주장한 ‘곤궁하면 홀로 자신을 선하게 한 다음 잘 된 후에 겸하여 천하를 선하게 한다“의 기본가치관념과 인생이상이다. 이 때문에 선비는 서원을 세우면서 언제나 전도와 구도를 위함이라고 성명하였다. 도는 실질적으로 이중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선비가 관료가 되면서 ’천하와 더불어 선한 일을 행한다(兼善天下)‘는 치국의 근본과 선비가 벼슬에서 물러나 ’홀로 자신의 도덕성을 고양한다(獨善其身)‘는 수신의 근본을 의미한다. 이렇듯 도는 이중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한편으로 도는 세속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어 사회정치와 일상윤리과 뗄수 없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도는 초탈의 성격을 지지고 있어 사대부들이 말하는 獨善其愼의 정신을 초월하고자 하는 필요를 만족시킬 수 있었다. 남송시기 가장 이르게 서원을 설립한 胡宏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현자의 행실과 지자의 견해는 언제나 속인보다 뛰어나, 속인과 다른 의견이나 이론을 세웠다. 어리석은 자의 행실과 우매한 자의 견해는 언제나 속인보다 못하거나 속인과 동배이다. 도를 밝지 않은니, 도를 행하지 않은 바라.’
만약 도가 단지 초월적이기만 하다면 언제나 속인보다 뛰어나, 속인과 다른 의견이나 이론을 세웠을 것이다. 만약 도가 세속적이기만 하다면 언제나 속인보다 못하거나 동배가 될 것이다. 이것은 유가의 학자들이 추구하는 도가 아니었다. 오직 속인과 다르지 않고, 속인과 같지도 않은초월성이 있으면서도 세속성이 있어 비로소 서원이 추구하는 도라고 할 수 있었다. 胡宏이 서원을 세우고 강학하는 것이 이러한 도의 정신을 창조하는 것이었다. 그는 분명하게 도는 바로 중국고대문화의 핵심이자 서원의 정신적 생명이 있는 곳이라고 여겼다. 이 때문에 서원은 유가 선비의 정신적 고향이 될 수 있었고 온전히 유가 선비의 수도의 장이 되었다. 선비들이 언제나 서원을 문화활동 장소로 삼고 이곳에서 學術硏究, 學文傳授, 經書校勘, 학문을 통한 교우, 先師에 대한 祭祀, 圖書收藏, 修身養生 등을 행하였다. 이러한 의의에서 서원을 유가 선비의 문화교육 조직으로 보았다. 그렇지만 선비문화의 핵심은 그들이 관심을 두고 있는 도였다. 서원을 선비문화교육 조직의 본거지로 삼아 유가 수도의 장소로서 구체적인 문화활동의 중심을 이곳에 두고 전개하였다.
도를 정신의 본질로 삼는 유가문화는 서원의 건축물의 배치, 규제, 학술, 학규 등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여기에서는 서원의 외재적 물질문화인 건축과 환경, 내재적 정신문화인 서원의 설립종지 두 가지로부터 유가문화로서의 서원에 대해 상세히 분석하고자 한다.
서원의 건축과 자연환경은 가장 직접적인 물질적 실체이자 형식이었다. 유가의 모든 문화교육활동은 반드시 이러한 것들의 도움을 받아야 비로서 전개할 수 있었다. 서원건축과 환경은 서원의 물질문화로서의 의의를 갖추고 있다. 서원의 기와재료와 건축공예에 있지 않고 유가의 가치관념, 심미관, 인생이상 등의 문화관념 즉 유가적 도의 관념이 융합된 것이다.
선비들이 서원을 창건한 목적중의 하나는 세속을 초탈하는 정신적 추구를 위함이었다. 이 때문에 서원 설립자는 언제나 서원을 외지고 조용하며 경치가 아름다운 명소에 세웠다. 백록동서원은 江西 盧山 五老峰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당대 대시인 이백이 이곳에 이르러 일찍이 ‘내가 천하를 주유하면서 유람했던 산수가 지극히 많으나, 아름답고 독특함이 이곳을 뛰어넘을 수 있는 곳이 드물지니, 진정 천하의 장관이로다.’ 라고 찬탄하였다. 악록서원은 湖南 長沙 嶽麓山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평소에 ‘嶽麓의 명소로 湘楚에서 으뜸이다’라는 미칭이 있었다. 숭양서원은 오악중의 하나인 河南 嵩山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석고서원은 湖南 衡陽 石鼓山 回雁峰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산봉우리가 독특하게 솟아있고 산세가 고아하고 수려‘奇崛耸拔,中高而外秀’하여 은거하여 학문을 닦는데 적합한 곳이었다. 선비들은 서원의 외부 자연환경에 대한 선택을 중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서원의 내부환경 역시 매우 중시하였다. 그들은 항상 서원건물 주위에 대나무, 계수나무, 소나무, 매화, 난 등의 식물을 심어 亭子와 樓臺 그리고 작은 다리와 흐르는 물을 배치하여 ‘비록 사람이 만들었으나 마치 저절로 하늘이 열어놓은’것 같은 서원원림의 조경을 구축하였다. 청대에 악록서원은 바람에 실려오는 저녁의 연꽃향기(풍하만향 風荷晩香), 버들 연못에 안개 낀 새벽(유당연효 柳塘烟曉), 도화꽃 언덕의 붉은 노을(도오홍하 桃塢烘霞), 오동나무 그늘이 있는 샛길(동음별경 桐蔭別徑), 대나무 숲의 비취빛 겨울(죽림동취 竹林冬翠), 꽃 핀 축대에 앉아 달 구경(화돈좌월 花墩坐月), 시내 굽이 냇가소리(곡간명천 曲澗鳴泉), 푸른 못에서 물고기 보기(벽소관어 碧沼觀魚)와 같은 嶽麓八景을 만들었다. 선비들이 이렇게 마음을 다하여 서원의 자연환경을 추구하면서 그들의 생활이상과 심미관을 충분히 나타내었다. 그들이 세속을 초탈하는 정신과 자아도덕을 힘써 추구하면서 자신을 조용하고 한적한 대자연에 두었다. 자연의 청담한 심경과 조용하고 아름다운 산수가 유연하게 하나가 되었다. 또한 사람과 도의 유연한 합일은 도의 초월성의 한 단면을 구현하였다.
다른한편으로 유가가 서원을 세우는 것은 세속성을 추구하는 한 단면이기도 한다. 유가의 도는 지금까지 세속의 사회정치질서와 하나로 연계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은 서원건축에서 반영되어졌다. 유가 선비들이 서원을 산에 설립한 것은 도의 초월성을 구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질서가 근엄한 서원 건축 역시 분명히 도의 세속성을 나타내고 있고 서원을 세운 선비들이 늘 ‘몸은 비록 산중에 있으나, 마음은 신성한 묘당에 있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라는 것을 반영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매 서원마다 講堂, 齋舍, 書樓, 祠堂을 포함하고 있는 내부 건축들의 전체적인 배치는 綱常禮敎의 엄격한 질서를 따랐다. 서원을 관통하는 中軸線, 殿堂廳房과 같은 건물의 위치 그리고 건축의 체적과 장식 등의 모두가 강상예교의 질서에 부합하여야 했다. 다행히 조정의 사액과 어서를 받은 서원은 ‘帝王御書’의 편액을 서원에서 가장 잘 보이는 위치에 배치하였고 어서를 보존하기 위한 御書樓는 서원건축물 중에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는 누각건축으로 황권의 위엄을 나타내었다. 서원 내부의 문주와 사방의 벽에는 ‘忠孝廉節’ ‘整齊嚴肅’등의 각종 원훈과 학규를 새겨 넣거나 걸어 놓아 서원의 교사와 학생이 강한 정치윤리의 관념과 질서 속에 자신을 놓도록 하였다. 이 모든 것이 바로 도의 세속성의 단면이다.
서원 건축과 환경이 서원의 물질문화로서 유가적 도의 이중적 의의와 특성을 나타내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경치가 수려하고 아름다운 산속에 엄격한 예교질서의 서원 건축을 세우는 것은 바로 유가문화의 생동감과 형상의 구체적 표현으로 유가적 도의 상징이었다.
다음으로 우리들은 서원의 설립종지로부터 즉 내재적 사상 관념으로부터 서원이 djejg게 유가문화의 특징을 구현하고 있는지 보도록 하자. 유가의 선비들이 서원을 세울 때면 언제나 求道와 傳道를 표방하면서 과거의 영리를 설립목적으로 삼는 것에 반대하였다. 이로 독립적인 학술연구와 학술전파를 진행하며 정신적 추구를 지향하였다. 張栻이 『潭州重建嶽麓書院記』에서 傳道와 과거의 영리를 대립시켰다. 왜냐하면 그가 서원에서 탐구하고자 하는 도는 ‘천지와 더불어 덕을 합하고, 귀신과 함께 베푸니, 유구무공하다.与天地合德,鬼神同用,悠久无穷’라는 초월성을 지니고 있었고, 그 초월성은 선비들이 현실의 공명과 영리의 유혹을 벗어나 세속을 초탈하는 독립정신을 나타내었기 때문이었다. 선비들은 언제나 서원을 구도와 전도 그리고 독립적으로 학문을 닦고 마음의 안정을 얻는 곳으로 보았다. 일찍이 당오대 서원의 생성시기에 일부 문인과 학사들은 전란이 빈번하여 벼슬길이 어려워지거나 관료사회의 알력과 정치적 부패로 산중에 은신하여 홀로 학문을 익히면서 자신이 은신하여 학문을 하는 곳을 서원이라 불렀다. 서원은 생성한 날부터 선비의 獨善其身의 생활과 함께 연계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이후 서원은 문화교육기구로 발전하면서 산중에 은신한 학자와 선비들은 스스로 학문을 하면서 전도와 교육으로 신진선비들을 배양하였다. 그렇지만 이러한 것들은 결코 선비들이 서원을 세우는 ‘독선기신’을 인생의 길로 선택하는 초심을 바꾸지 못하였다. 그래서 역대 서원을 설립하고 강학을 하던 사대부들은 관료사회의 부패로 절개를 잃은 은거자나 여러 가지 원인으로 벼슬길의 어려움으로 실의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항상 서원을 현실 정치를 도피하는 장소로 보았다 그리고 공자의 ‘無道則隱’ 맹자의 ‘窮則獨善其身’의 인생관을 실천하였다. 송원명청의 많은 서원들이 이러한 사대부들이 은신하며 학문을 닦는 장소가 되었다.
그렇지만 도 자체가 또한 세속성의 단면을 포함하고 있었다. 장식은 악록서원을 설립하며 행한 기록 중에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잡고 발로 걷는, 이같은 일상생활과 언행으로 이르는 경지目视而耳听,手持而足行,以至于饮食起居言动之际’’인 도를 구현하였다. 바로 선비가 승려와 다른 점이 여기에 있었다. 그들은 세속을 완전히 초탈하여서는 만족을 결코 얻을 수 없었다. 그들의 정신적 추구는 최종적으로 반드시 사회정치와 일상의 윤리적 세속생활과 연계되어졌다. 그래서 선비들은 과거시험을 정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거시험은 그들이 정계입문과 치국평천하의 이상을 실현하는 유일한 경로였기 때문이었다. 이로 서원문화의 가장 독특한 현상이 생겨났다. 언제나 과거를 위한 학문을 반대하는 기치를 높이 들어올리면서도 여태껏 진정으로 과거의 영향과 통제를 떨쳐버리지 못하였다. 서원이 천년의 설립 역사 속에서 과거를 위한 학문은 서원에서 자취를 감추지 못하였다. 이와는 전혀 반대로 서원의 발전을 따라 과거를 위한 학문의 영향은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이학의 대학자 역시 학생이 과거시험에 참가하여 관료가 되는 기회를 얻는 것을 절대적으로 저지하지는 않았다. 송대 이학자 육구연이 백록당서원에서 ‘義利之辨’을 강학할 때 그 역시 ‘과거로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이 오래 되었다. 명망높은 儒生이나 大臣은 이곳으로부터 나왔으니 오늘날 선비되는 자도 변함없이 이를 면할 수 없다.라고 생각하였다. 선비는 오직 과거시험을 통과하여야 만이 비로소 관리가 될 수 있는 자격을 얻어 그들이 ’도‘로 천하를 다스리고자 하는 문화적 이상을 실현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선비들은 서원을 관료사회로 나아가고 벼슬길에 오르는 디딤돌로 보았다. 이러한 것이 없었으면 서원문화는 마찬가지로 완전하게 구현될 수 없었다. 사실상 예전부터 선비는 관직에 올라 공명을 떨치는 것을 인생의 최고이상으로 보았다. 즉 산속에 은거하여 학문을 연마하는 것 역시 출사의 기회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조정의 냉대를 받거나 부패정치세력과 어울리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다시 조정의 재기용을 받기만 하면 혹은 조정의 ‘聖明’이 있으면 그들은 여전히 출사하여 벼슬을 하였다. 서원을 세워 강학을 하면서 求道와 傳道를 표방하는 것 역시 유가의 兼善天下의 치평의 길과 함께 연계되어 있었다.
천여년이 지나면서 서원은 끊임없이 유가 사대부의 추향을 받았고 후세 학자들이 열렬한 동경을 받았다. 근본원인은 서원정신과 유가적 도가 내재적 연계되어 있어, 유가적 도가 서원문화와 서원정신에서 충분히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서원정신과 유가교육전통
서원정신의 역사의의와 현대적 가치는 유가의 인문교육적 이념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어 유가의 교육사상과 교육실천의 전범이 되었다.
(1) 인격배양
중국고대의 각종 학술유파중에서 유가처럼 교육을 중심으로 사상체계를 세운 어떠한 학파도 없었다. 세계 각종 문화에서도 유가문화처럼 교육을 나라를 세우는 근본으로 삼는 어떠한 문화도 없었다. 유가의 교육에 대한 중시는 이미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문화현상이 되었다. 유가학설 자체가 당시 세계에서 가장 성숙한 교육학설을 포함하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다.
앞에서 말한 바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주목을 끌고 있는 것은 유가교육이 본질적으로 일종의 인문교육이라는 점이다. 유가는 시종일관 도를 목표로 하였다. 유가가 추구하고자 하는 도는 사실 人道로서 소위 ‘하늘의 도도 아니요, 땅의 도도 아니며, 사람의 도인 것이며, 군자가 이르는 것이다라고 할 수 있다.
유가가 강렬한 인문정신에 바탕한 관심과 애호는 주로 두가지 과정으로 실현된다. 도로 천하를 바꾸고 도로 천하를 교화하는 것이다. 전자는 치국평천하이고 후자는 학문연마와 강학이다. 그래서 학문연마와 강학의 문화교육활동은 도로서 천하를 교화하는 것을 실현하였고 줄곧 유생의 가장 중요한 본분이 되었다. 게다가 이것 역시 유가교육으로 강렬한 인문정신을 표현하게 하였다.
유가의 인문교육은 교육가치를 人道化에 두는 사회집단을 견지하였다. 개인마다 도덕적 이상에 부합하는 조화로운 집단을 만들기 위하여서는 반드시 사회성원간에 선량한 품격과 도덕적 소질을 구비하고 있는 개인이 되어야 했다. 특히 자각적으로 사회질서를 지키고 사회이상을 담당하는 주체적 인격을 배양할 수 있어야 했다. 유가교육의 목표는 시종 도덕적으로 온전한 개체였다. 이러한 의의에서 유가의 인문교육이 주시하는 것은 ‘인간적 사회’와 ‘사회적 인간’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유가교육의 분명한 특색은 도덕적 인격에 대한 중시이다. 유가교육의 이념 중에 주체적 인격을 추향하는 인문정신이 충만하고 있다. 유가교육이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어떻게 사람을 응대하는 예의중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여도 법도를 어기지 않는 자유로운 주체로 자신을 키우는 것이다. 어떻게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 내재하는 잠재된 능력을 하늘과 땅과 더불어 덕이 합하는 우주정신으로 발전시키는데 있었다. 요컨대 유가의 인문교육은 어떻게 주체적인 도덕적 인격을 배양할 것인가라는 목표에 힘을 썼다.
당송이래로 관학의 두드러진 특징은 학교교육과 과거로 관료가 되는 것을 결부하였다. 학교가 사람을 교육하고 인재를 만드는 최종 목표는 학생이 과거시험을 잘 대처하여 벼슬길에 오느게 하는 것이었다. 관학교육이 이 때문에 과거의 종속물로 되면서 많은 심각한 폐단이 나타났다. 송대 유생들은 관학교육의 일반적인 폐단을 보았고, 이에 주희는 ‘태학은 단지 명예와 이익의 장소가 되었다太学者但为声利之场。’라고 비평하였다. 가르치는 자는 과거시험을 위하여 가르쳤고, 배우는 자는 과거시험을 위하여 배울 뿐이었다. 풍속은 날이 갈수록 피폐해지고 인재는 날이 갈수록 감소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관학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하여 송대의 유생들은 서원으로 새로운 교육 종지를 제기하였다. 즉, 선진 유가의 교육전통을 회복할 것을 요구하면서 도덕적 인격을 서원교육의 목표로 삼았다.
주희가 제정한 『白鹿洞書院提示』는 서원사에 있어서 널리 영향을 끼쳤다. 먼저 서원의 교학목적을 ‘희는 마음속으로 고대 성현이 사람을 가르치고 배우게 하는 본의를 생각해보니, 사실 사람으로 하여금 도의와 진리를 알게하여 자신을 수련하고 자신이 배운 바를 다른 사람에게 미치게 하는 것이지, 사람들이 무턱대고 중 염불하듯이 외워 좋은 글을 쓰고, 이로 명예를 탐내고 개인의 이익을 얻는 것만이 결코 아니다.라고 분명히 말하였다.
그는 서원의 교육목적이 개인의 명리를 얻기 위함이 아니고 도의와 진리를 교육하여 도덕수신을 이루어 나가기 위함이고 유가도덕 표준에 적합한 이상적 인격을 배양하는 데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남송의 다른 이학자들 역시 서원교육의 목적에 있어서 일치하는 견해를 내놓았다. 예로 장식이 악록서원의 주교를 맡으면서, 그는 『潭州重建嶽麓書院記』에서 서원은 ‘무리를 지어 불평을 하는 것과 과거를 통한 개인의 영리를 취하고자’ 하는 나쁜 기습을 반대면서 ‘재덕을 겸비한 인재를 이루어, 이로써 전도하여 백성을 이롭게 한다.’는 교육목표를 주장하였다. 남송 시기의 이학자들이 이학과 서원을 결합하면서 동시에 서원이 유가의 인격적 이상을 종지로 삼는 교육목적을 확고히 하였다.
남송후기 특히 원명청 시기에 이학은 이미 통치적 위치를 점유한 국가철학이 되었다. 자체적으로 또한 관학교육과 과거시험의 주요 내용이 되면서, 서원교육은 과거시험과 더욱 밀접한 연계를 가지게 되었다. 밀접한 연계에도 불구하고 이름있는 유생이 주관하는 대부분의 서원은 여전히 자체적인 교육종지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있었다. 예로 명대 왕수인은 서원을 세우면서 과거를 목적으로 하는 교학을 명확하게 반대하였다. 그는 ‘읽고 외울뿐 이해와 실천과는 거리가 있는 학문으로 공명과 영리를 탐하고 잃고, 마음에 번뇌를 주는’관학의 교육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서원의 교육은 양지를 계발하고 성인을 배양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성인지학은 치양지라고 생각한다.’라고 제기하였다. 이와같은 이학자들에게 있어 서원의 교육은 자신의 독립적인 창립종지를 지킴으로써 이상적인 도덕적 인격배양을 서원교육의 목표로 삼을 것을 요구하였다.
서원교육사상이 인격교육의 인문학적 특징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자각적으로 공자의 ‘成人之敎’와 ‘爲人由己’ 맹자의 ‘自得之學’과 ‘盡心, 知性, 知天’을 실현하여 주체적 인격을 지닌 인문학적 교육의 특색을 나타낼 수 있었다. 서원의 이러한 교육관념과 특색은 농후한 인문학적 교육의 정취를 표현하였다. 주목할만한 것은 서원의 인격교육방법은 언제나 행위실천과 도덕이성의 일치를 견지하는 것이었다.
먼저 도덕행위훈련을 보도록 하자. 유가가 추향하는 주체적 인격은 항상 외재적 윤리규범과 행위양식과 함께 연계되어 있었다. 공자는 ‘從心所欲不逾矩’라는 최고의 인생경지를 말하였다. '從心所欲'의 자유의지와 '不逾矩'의 규범을 따르는 것 역시 하나로 연계되어 있다. 주체적 인격을 배양하는데 있어서 먼저 학생에게 좋은 도덕적 습관과 행위양식의 훈련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인격교육의 시작은 바로 행위양식의 훈련이었다. 서원교육은 언제나 학생이 일상생활 중에서도 자신을 禮儀 중에 두어, 주체적으로 내재된 性情과 意志 그리고 외재적인 禮儀가 융화되어 일체가 되게 하였다. 서원을 주관하는 교육가들은 모두 이점을 중시하였고, 명대 교육가 왕수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학생의 禮儀 학습 지도는 儀容을 엄숙하게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揖과 辭讓으로 교제하는 중에 혈맥을 원활하게 하고, 叩拜를 하면서 근육과 뼈를 강건하게 한다. 讀書 지도 역시 지력을 개발할 뿐만 아니라 또한 반복적인 연구를 하면서 修身養性하게 하고,抑揚있는 誦讀으로 지향을 알리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지향의 발전 추세에 따라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고 性情을 조양하여 비속함을 없애고, 우매하고 완고함을 은연중에 감화시키는 것이다. 날이 갈수록 그들의 행위가 예의에 부합하여 괴로움을 느끼지 않고 정도에 알맞게 이르렀으나 그 이유를 모르게 하여야 한다.이것이 바로 왕양명 선생이 세운 교육의 깊은 핵심이다.
손님을 맞이하고 읍과 사양으로 교제하는 예절은 일종의 외재적인 약속이면서 강제된 것이다. 그리고 心智筋骸와 지의성정의 활동은 바로 내재된 몸과 마음이다. 그렇지만 목적을 지닌 교육과 훈련을 통하여 양자는 유기적으로 하나가 되어 ‘그 익히는 바가 지혜와 더불어 자라고, 교화(敎化)가 마음과 더불어 이루어져 날이 갈수록 그들의 행위가 예의에 부합하여 괴로움을 느끼지 않고 정도에 알맞게 이르렀으나 그 이유를 모르게 되는’ 경지에 달하게 된다.
다음으로 도덕적 이성의 배양의 보도록 하자. 주체성을 지닌 인격은 도덕적 이성의 기초위에 세워진다. 서원의 교육은 도덕적 이성의 배양을 아주 중시하였다. 도덕적 이성의 획득은 먼저 窮理와 致知의 지식의 학습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그래서 서원의 교육은 지금까지 讀書明理와 格物致知를 주된 방향으로 삼았다. 주희는 이러한 도덕적 이성 교육의 적극적인 선도자로 학자는 格物窮理의 방도로 외재적인 萬里와 내재적인 心知를 결합하면서 “이른바 ‘지식을 지극히 함이 사물의 이치를 궁구함에 있다.’ 는 것은 나의 지식을 지극히 하고자 한다면 사물에 나아가 그 이치를 궁구함에 있음을 말한 것이다. 人心의 영특함은 앎이 있지 않음이 없고 천하의 사물은 이치가 있지 않음이 없건마는 다만 이치에 대하여 궁구하지 않음이 있기 때문에 그 앎이 다하지 못함이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大學에서 처음 가르칠 때에 반드시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모든 천하의 사물에 나아가서 이미 알고 있는 이치를 인하여 더욱 궁구해서 그 極에 이름을 구하지 않음이 없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힘쓰기를 오래하여 하루 아침에 豁然히 관통함에 이르면 모든 사물의 表裏와 精粗가 이르지 않음이 없을 것이요, 내 마음의 全體와 大用이 밝지 않음이 없을 것이니,이를 格物이라 이르며 이것을 知之至라 이른다.”라고 말하였다.
여기에서의 '天下之理'는 유가가 창도하는 윤리 규범과 지식체제이다. '人心之知' 역시 유가교육에서 배양하고자 하는 도덕이성이다. 모든 선비와 군자가 이러한 도덕적 이성을 갖추고 仁道의 가치를 자각적으로 감당한다면 윤리주체정신을 갖춘 자유인격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二)자유강학
자유강학은 본래 중국고대사학교육의 전통이었다. 선진제가가 사학을 세운 후, 한대에 이르러 유학자들은 정사를 세우고 위진의 이름있는 선비들은 청담을 강학하였다. 고대 사학의 자유경학의 전통은 줄곧 끊이지 않고 지속되었다. 서원 출현이후, 서원은 아주 빠르게 유학자들이 자유강학을 실현하는 근거지가 되었다. 서원과 이학이 동시에 흥기하였지만, 이학은 초기에 신흥한 학술사조 일뿐, 결코 관방의 추향을 받지는 못하였다. 이학자들이 주로 서원을 이용하여 자유강학,연구와 학습, 토론, 자신의 학술사상 전파를 진행하였다. 이 때문에 자유강학은 서원교학형식의 큰 특징이 되었다.
서원이 자유강학을 실현하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로 학자들이 학술전수식의 강학을 진행하였다. 송명 시기 저명한 이학자들은 서원을 이용하여 자신의 학술견해를 전수하였다. 예로 남송의 朱熹, 張栻, 陸九淵 呂祖謙, 眞德秀, 魏了翁 등을 들 수 있다. 서원이 각 학파학자들의 학술근거지가 되면서 명대에 이르러서는 심학사조의 흥기와 더불어 심학파는 자신의 새로운 학술 관점을 전수하기 위하여 서원을 빌어 자유강학을 전개하였다. 서원은 송명이후 다양한 학파의 학자들이 자신의 학술사상을 널리 알리는 근거지가 되었다.
강학의 두 번째 방식은 會講 혹은 講會였다. 회강은 서로 다른 학술적 관점을 지닌 학자들이 모여서 강학하는 것으로 서로의 차이를 변별하고 분석하여 시비를 쟁론하였다. 강회는 바로 상술한 회강을 일종의 학술조직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즉 학자들이 정기적으로 회합하여 강학을 하는 조직이었다. 회강과 강회는 다른 학파 간의 동시 자유강학을 허락하였다. 오늘날의 학술토론회와 유사하였고 이로 백가쟁명의 정신을 구현할 수 있었다. 학술전수식의 자유강학은 고대 사학의 교학전통만 아니라, 회강과 강회 역시 마찬가지이다. 일찍이 전국시기 제나라의 稷下學宮에 일종의 정기모임(期會)의 강학방식이 있었다. 서로 다른 학술적 관점을 지니고 있는 교사간에 혹은 교사와 학생간에 정기적으로 學宮에서 공개적으로 변론을 하면서 자유롭게 학술적 논쟁을 행하였다. 위진시기에 다양한 학파의 명사들 역시 자주 회합하여 서로 함께 모여 주객으로 나누어 학술적 논쟁을 벌렸다. 송대 서원이 형성된 후, 회강과 같은 교학방식은 직하학궁의 정기모임(期會)와 위진 명사청담과 같았다. 회강 역시 서로 다른 학술 관점의 학자들이 서원내에서 자유로운 학술 논쟁을 전개할 수 있어, 서원은 그들이 자유강학과 자유로운 학술논쟁을 하는 근거지가 되었다. 송대 유명한 회강으로는 주희와 장식이 악록서원에서 ‘『中庸』之義’를 연구 토론한 嶽麓之會와 주희와 육구연 여조염이 江西 鉛山 鵝湖寺에서 ‘爲學之方’으로 자유로운 학술 논쟁을 전개한 鵝湖之會가 있었다. 두 차례의 회강은 학술사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명청대에 이르러 상술한 회강은 일종의 정기적으로 실시되는 조직과 제도가 되어 ‘강회’라 불리워졌다. 일반적으로 강회를 열면 원내 교사와 학생이 모두 참석하고 원외 인사 역시 참가할 수 있었다. 강회참가자들은 토론의제와 유가경전의 이해에 대해 각자 자신의 견해를 토로하거나 학문적 이해를 교류하였다. 명청 시기의 강회제도는 비교적 완전하게 발전하였다. 각 서원은 강회를 위하여 규약을 제정하였고 강회의 종지 조직 일시 의식 경비등에 대해 상세한 규정을 정해놓았다. 강회를 통해 학자들은 교학활동과 학술활동을 하나로 합쳐 서원의 자유강학과 백가쟁명의 정신을 구현하였다. 명대의 학자 吕柟에게 서원강학자의 관점과 서로 다를 때 어떻게 처리해야하는지 물었을 때 吕柟은 ‘그대와 같지 않음으로 강학을 하는 바라, 같다면 또 어찌 강학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대답하였다. 서로 다른 관점의 사람디 회강에서 논변하는 것을 허락하였고 이것은 서원이 자유강학을 실행하는 전형적인 방식이었다.
자유강학과 학술연구는 내재적 관계를 지니고 있다. 학자들이 자유강학을 요구하는 것은 그들이 독립적인 학술연구중에서 서로 다른 학술적 관점이 생겨나기 때문이었다. 동양 학술연구는 언제나 자유강학을 빌어서야 깊이 탐구하고 광범위하게 전파할 수 있었다. 이렇듯 고대서원의 자유강학은 계속해서 학술사조의 변화 발전과 밀접한 연계를 맺어왔다. 다양한 학파의 사상가는 모두 서원을 세워 강학을 하면서 동시에 학술연구를 펼쳤다. 그래서 서원이 생성된 후, 송대이후 학술연구의 본거지가 되어 이 시기의 학술사조의 발전을 촉진하였다. 남송의 楊時, 胡安國, 胡宏, 朱熹, 張栻, 呂祖謙, 陸九淵, 黃干, 眞德秀, 魏了翁 등과 같은 대부분의 이학자들은 서원을 창설하거나 주관하면서 이학을 전파하는 동시에 독립적인 학술연구활동를 진행하였다. 이로보아 서원은 교육활동의 중심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학술연구의 중심이 되었다. 명대 왕양명과 담약수 그리고 그의 제자들이 그들 학설의 연구와 전파를 촉진하기 위하여 자유강학을 실행하는 서원을 발전시켜 서원 역시 심학 학술사조의 근거지가 되었다. 명청시기에 왕학말류의 空疎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하여 학술사상계는 경세치용의 실학사조를 중시하기 시작하였다. 실학을 창도한 사상가들 역시 똑같이 자유강학의 근거지로 서원을 이용하였다. 예로 顧憲成, 顧攀龍이 강학하는 東林書院, 黃宗羲가 강학하던 証人書院, 李二曲이 주강으로 있던 關中書院, 阮元이 세운 漳南書院이 모두 이러하다. 이러한 서원은 실학을 전파하는 유명한 학부와 실학을 연구하는 학술의 거점이 되어 중국 고대의 실학사조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청대 乾隆과 嘉靖시기 한학이 흥기하면서 청대의 유명한 한학자들이 서원 설립과 강학을 맡았다. 예로 惠棟이 주강을 맡은 紫陽書院, 戴震이 주강을 맡은 金華書院, 錢大昕이 주강을 맡은 鍾山書院, 紫陽書院 등이다. 이러한 서원들은 한학의 발전과 인재배양에 중요한 촉진 작용을 하였다.
서원이 학술연구와 교학활동을 합칠 수 있었던 다양한 원인 중에서, 자유강학은 비교적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였다. 당시 서원의 주관자들은 모두 학술계에 영향력이 있는 인물들로 서원에서 자신이 연구 중에 있는 학술적 문제를 강술하면서 학생들과 토론을 벌였다. 다른 한편으로 학술의 대가들간에 그리고 학생들간에 역시 적극적으로 학술토론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형식은 교실토론과 같은 교학활동에 속하면서도 학술토론의 연구활동에도 속하였다.
(삼) 배움을 본위로 하다
서원교육 방법은 현저한 특색을 지니고 있다. 서원 교육은 교학과정에서 주체적 지위를 견지하였고 그들이 창조한 교학방법은 언제나 학생이 본위였다. 충분히 학생의 적극성과 주동성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 학생들의 학습흥미 유발과 내재된 잠재력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교학과정을 학자 본위의 독립된 인식과 자아찾기, 지식발견의 과정으로 보았다. 서원교육이 창도하는 이러한 배움을 본위로 하는 교육방법 역시 서원정신의 중요한 구성의 한 부분을 형성하였다.
서원이 배움을 본위로 하는 교학방법을 창도하면서 결코 교학과정에서의 교사의 역할을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가르침과 배움의 관계에서 응당 배움이 본위이고 가르침의 목적이 최종적으로는 여전히 학생의 배움에 있음을 강조하였다. 서원이 배움을 본위로 하는 교학방법은 주로 아래 형식으로 구체화 되었다.
a. 자학을 중시함. 자학을 중시하는 것은 유가 교육의 우수한 전통이다. 선진유가학파인 공자와 맹자는 제자들에게 전수할 때 학생들의 자학을 아주 중시하였다. 공자는 가장 일찍 계발교육의 교학방법을 제의하면서 ‘스스로 배우려고 분발하지 않으면 깨우쳐주지 않고, 모르는 것을 묻고 표현하려고 애쓰지 않으면 깨닫도록 알려주지 않는다.’라고 주장하였다. 학생이 알고자 하나 이해되지 않고(憤) 말하고 싶으나 표현할 수 없을(悱)때 교사는 비로소 그를 계교하고 도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계발교육방법은 유가 교육이 자학의 전통을 중시하도록 촉진하였다 맹자는 제자들에게 전수하면서 그들이 자학을 위주로 하도록 요구하였다. 그는 학생들에게 ‘군자가 올바른 도로써 학문에 깊이 나아가는 방법은 스스로 진리를 체득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소위 스스로 진리를 체득하는 것(自得之) 역시 자학을 중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공자와 맹자가 제의한 계발교육인 자학학습법은 그들이 교학을 실천하는 과정중의 경험의 총화였다. 서원의 교학이 자학을 중시하는 정신으로 발전하면서 주희가 서원을 세우면서 심혈을 기울인 교학활동 역시 학생의 자학이 주가 되도록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는 학생들에게 ‘책은 그대 스스로 학문할 때 쓰는 것이며, 도리는 그대 스스로 궁구할 때 쓰는 것이다. 설령 도리를 인도하는 사람을 얻을지라도, 깨달은 사람을 얻을지라도 난제가 있으면 함께 상의할 뿐이다.’라고 말하였다. 주희는 학생들이 교학과정 중에서의 주체적 위치를 더욱 명확히 하여 서원교학이 배움을 본위로 하고 자학을 중시하는 사상적 기초를 다졌다.
서원교학이 일반적으로 학생 개인이 배우고 연구하는 것을 요구하였고 선생님의 강학은 자학의 기초위에 진행하였다. 이 때문에 서원의 교사가 典籍을 가르칠 때 그중의 大義를 해명하는 것을 중시하였다. 학생의 자학과 연구를 지도하는데 있어서 한글자 한구절씩 차례대로 읽고 강술하는 것이 아니었다. 예로 육구연은 백록동서원에서 『論語』를 강학할 때 주로 ‘義利之辨’을 중심에 놓고 그 뜻을 분명히 하였다. 많은 교사들은 학생이 먼저 스스로 공부하면서 깨달은 것을 강술하도록 하였다. 연후 학생의 이해정도와 적부에 맞추어 다시 강술하였다. 예로 주희가 湖南安撫使로 있으면서도 직접 악록서원에서 강학하였다. 그는 제비뽑기 방식으로 학생에게 『大學』을 강술하게 한 후, 학생이 유가경전의 이해정도에 맞추어 자신의 견해를 강술하였다. 비로소 교학과정 중에 학생은 교학의 주체가 되고 교사는 보조자의 위치에 놓여졌다. 서원 교사는 배움으로 근본을 삼는 이치를 잘 알고 있었다.
b. 질의와 변론
서원교학의 중요한 특징중의 하나로 교사와 학생간 그리고 학생과 학생간의 질의와 변론을 선도함으로써 서원의 학술분위기는 더욱 짙어졌고 교육의 분위기는 더욱 활기가 넘쳤다. 이학자들은 학문을 하는 과정중에 문제제기의 중요성을 인식하였다. 주희는 질의가 학문을 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거쳐야할 절차이며 ‘群疑幷興’해야 비로소 학문을 끌어 올릴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육구연 역시 ‘학문을 하는데 있어서 의문이 없음을 염려하고 의문이 있은 즉 진보가 있다.’라고 제의하면서 학자는 질의에 대한 사고와 논변을 통해 融会贯通하여 의문나는 바가 없는 정도에 도달하여야 더 높은 학문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학자들은 서원의 교학에 있어서 질의와 변론의 교학방법을 보편적으로 선도하고 실행하였다. 그들의 어록과 문집 중에서 서원의 교사와 학생이 질의와 논변에 관한 많은 강학 기록을 기재하고 있다. 그들이 질의와 논변의 교학방법을 어떻게 운용했는지 이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아래 남송 이학가 胡宏과 그의 제자 彪居正이 碧泉書院에서 나누었던 대화를 보면 서원이 추구하고 있는 질의와 변론에 대한 교학의 특징을 이해할 수 있다.
彪居正问:“心无穷际者,孟子何以言尽其心? " (胡宏)曰"为惟仁者能\尽其心。"居正问为仁,曰"仁之道,宏大而亲切,知
者可以一言尽,不知者虽设千万言,不知也仁者可以一事举,不能
者虽指千万事,亦能也。"曰:"万物与我为一,可以为仁之体乎? "
曰:"子以六尺之躯,若何而能与万物为一? "曰:"身不能与万物为
一,心则能矣。"曰:"人心有百病一死, 天下之物有一变万生,子若
何而能与之为一? ((宋元学案· 五峰学案)))
여기에서 학생이 질의를 하고 교사가 답을 할 뿐만 아니라 교사 또한 반문을 하여 학생이 답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교학 방법은 학생의 사상을 활발하게하고 강학이 학술 논쟁과 토론의 분위기를 충만하게 하였다. 학생이 교학과정 중에서 질의하고 답하면서 적극적으로 학문을 탐구하여 충분한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이로 서원의 교학제도의 특징이 될 수 있었다.
c. 학습지도법
학생의 자학능력을 배양하고 학생의 학문연구를 인도하기 위하여 서원의 교사는 학생의 학습지도를 교학의 중점으로 삼았다. 오랜 기간동안 축적된 그들 자신의 학문연구와 교학경험에 근거하여 학습의 범위 , 필독서와 참고도서, 프로그램과 방법등을 계획하고 원칙을 만들어 학생의 학습을 지도하였다. 원대 이학자 程端禮는 일찍이 建康路 江東書院의 山長을 맡으면서 제정한 『程氏家塾讀書分年日程』은 학습의 내용과 순서 그리고 필독서와 참고도서에 관한 교학계획이었다. 이러한 독서일정은 학습의 범위와 순서를 확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연령에 따라 학습내용과 수준이 다른 책을 편성하여 학문연마와 교학경험을 전면적으로 귀납하였다. 이는 서원의 교육에 광범위한 영향을 주면서 전국 각지의 서원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였다. 학생의 학습과 자학을 지도하기 위하여 서원의 교사는 자신의 경험에 의거하여 학습방법과 원칙을 제의 하였다. 주희가 학생의 학습을 지도하는 원칙과 방법은 6가지 항목으로 되어 있었다.
첫째, 居敬持志 : 정신을 집중하여 한결 같은 마음을 지닌다.
둘째, 循序漸進 : 순서에 따라 차근차근히 나아간다.
셋째, 熟讀情思 : 정독하면서 깊이 사색한다.
넷째, 虛心涵泳 : 잡된 생각에서 벗어나서 텅 빈 마음으로 정신을 노닐게 한다.
다섯째, 切已體察 : 깊은 체험 속에서 울어나는 것이어야 한다.
여섯째, 着緊用力 : 요점을 잡아 힘쓴다.
청대 악록서원 원장이자 한학자인 王文淸 역시 자신의 독서경험에 의거하여 『王九溪先生手定讀書法』을 제정하여 서원의 강당에 새겨놓았다. 그 내용은 두 가지 항목으로 되어 있는데 첫째 讀經六法으로 :正义、通义、余义、疑义、异义、辩义를 포함한다. 둘째로 讀史六法으로 记事实、玩书法、原治乱、考时势、论心术、取议论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학습방법은 학문을 연구하는 경험을 담고 있어서 교육가와 교육심리학의 규율을 반영하고 있어 현대고등교육에서 여전히 참고할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서원정신과 유가학술전통
서원은 고대의 교육중심일 뿐만 아니라 학술연구의 중심이었다. 그래서 서원정신의 역사적 의의와 현대적 가치를 학술연구의 선도와 실시분야에서도 구현하고 있었다. 서원은 주로 아래 형식으로 학술연구활동을 실시하였고, 서원의 학술정신 역시 아래 학술연구의 실천과정에서 구현하였다.
(一) 저술
저술은 학술연구 성과의 표식(상징)이다. 학자들이 서원에서 강학하는 기간이 그들의 저술이 가장 풍부한 시기였다. 먼저 서원의 교사들은 학생에게 강학하기 위하여 자신의 연구결과를 모아 강의록과 강의원고로 편집하였다. 이러한 강의록은 후에 중요한 이학 저작이 되었다. 남송 이학자를 예로 들면 장식은 악록서원의 주교로 있으면서 『論語解』와 『孟子說』을 저술하여 서원강학의 강의록으로 삼았다. 두 편의 강의록은 그의 대표저작이 되었다. 주희가 福建에서 精舍를 세워 강학할 때 더욱 많은 저서를 저술하였고 그중 대부분이 서원의 강의록이었다. 그가 후에 백록동 서원에서 강학하면서도 『白鹿洞書堂講義』를 남겨놓았다. 그의 대표저서인 『四書集注』가 바로 서원교학의 주된 강의록이었다. 呂祖謙이 麗澤書院을 세우면서 많은 강의 원고와 강의록을 집필하였다. 예로 『麗澤論說』과 『麗澤講義』 로 당시와 후대에 영향을 주었다. 대표저서인 『東菜左氏博議』 25권으로 자신의 학술사상을 전하였고 이것 역시 서원의 중요한 교재가 되어 서원학생들의 습작이 되는 모범문장이 되었다.
다음으로 서원교사가 강학할 때 기록으로 역시 이학의 대표적인 저서가 되었다. 송 명이래로 이학자들이 모두 서원에서 講道論學을 선호하였고, 제자들은 이것을 기록하여 어록류의 저서로 편찬하였다. 송명이학자들의 어록이 성행하게 된 것은 이와 관련이 있다. 자유로운 講道論學 형식은 교사와 학생 양자가 문제에 깊이 생각하도록 하여 교사의 학술사상을 전반적으로 반영할 수 있게 하였다. 그래서 朱熹의 『朱子語類』 陸九淵의 『語錄』 張栻의 『南軒答問』 王陽明의 『傳習錄』과 『大學問』 王艮의 『心齋語錄』 羅汝芳의 『近溪語錄』 王棟의 『一庵語錄』 모두가 이학사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학술저서였다.
셋째로 서원 대부분이 경치가 아름다운 외지고 조용한 곳에 세워졌다. 이학자들이 학문을 연마하는데 있어서 양호한 환경과 도서자료를 제공하였다. 그들은 강학외의 시간에 마음을 다하여 학문을 연구하고 학술서적을 저술하였다. 그래서 서원에서 강학하는 시기에 그들의 저술이 특히 많았다. 이러한 저술이 비록 직접적으로 강의 되지는 않았지만 교사들 역시 드러한 것을 학생에게 전수하였다. 남송초 이학자 胡安國이 南岳 碧泉書堂에서 강학할 때 그의 대표작인 『春秋傳』 저술을 마쳤다 동시에 서원의 제자들과 『春秋傳』중의 학술사상을 강술하였다. 胡宏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 碧泉書院에서 계속해서 강학하면서 그의 대표저서인 『知言』6권을 서원에서 강학을 하던 시기에 완성하였다. 청대 많은 유명한 한학자들이 서원에서 주강하면서 그곳의 자료와 시간 등의 조건을 이용하여 대량의 저서를 저술하였다. 钱大昕은 ‘無經不通’의 한학자로 鐘山書院, 婁東書院, 紫陽書院 등 몇 곳의 서원에서 주강을 하면서 동시에 많은 저작을 완성하였다. 그의 『二十二史考異』는 江寧 鐘山書院에서 山長을 맡고 있는 동안 완성한 것이다. 劉熙載 역시 청대의 중요한 학자로 일찌기 上海 龍門書院에서 14년간 주강을 하면서 대량의 저작을 저술하였다. 예로 『四音定切』 『說文雙聲』 『藝槪』 『昨非集』 등이다.
넷째로 학생이 저술한 논문과 저작이다. 서원은 교사가 학술연구에 종사하면서 학생 역시 교사의 지도아래 학술논문과 저서저술을 할 수있도록 하였다. 남송 시기 이학의 대가인 朱熹, 呂祖謙, 張栻, 陸九淵의 많은 제자들이 저서를 저술하면서 자신의 독특한 학술적 관점을 제의할 수 있었다. 청대 서원에서 考課制度가 성행하면서 학술대가들은 考課의 학술적 가치를 중시하여 많은 考課答案 자체가 수준이 높은 학술논문이었다. 교사는 학술가치가 있는 논문을 문집으로 편찬하여 출판함으로써 학술저서가 되었다. 예로 阮元이 편집한 『詁經精舍文集』 『學海堂集』은 우수한 논문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집의 내용은 經史, 天文, 地理, 算學 등의 분야를 포함하고 있었고 이후 저자들 중에서 많은 사람이 학술적 명가가 되었다.
(二) 학술토론과 변론
학술토론과 변론은 중요한 학술연구의 형식으로 학술적 토론과 변론의 상황과 수준은 학술사조발전의 중요한 표식이었다.
서원의 학술토론에는 다양한 형식이 있었다. 여기에서는 두 가지 형식만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 이학의 대가간의 학술강좌는 앞에 언급한 회강이다. 이학자들이 서원에서 강학하는 동안 상호간에 초청으로 訪學과 講學을 하거나 학술적 관점의 다름으로 피차간에 토론과 변별이 필요하였다. 회강 과정 중에 쌍방은 어떠한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 자신의 학술적 관점을 상세히 논술하면서 변론을 전개하였다. 변론의 결과는 일치하거나 각자 자기 의견을 주장할 수도 있었다. 이러한 모든 것은 학술토론의 정상적인 현상이었다. 남송 乾道3년(1167) 장식과 주희는 악록서원에서의 회강을 통하여 中和說, 太極說, 知行說, 仁說 등에서의 견해 차이를 한달동안의 토론과 변론을 거치면서, 주요관점에 있어서 점진적인 일치를 보았다. 이에 주희는 ‘서로 더불어 깨닫지 못한 바를 분명히 밝히니, 날이 갈수록 학문에 향상이 있어 더할 수 없이 다행이로다!’ 라고 감탄하였다. 淳熙2년(1175) 朱熹와 陸九淵, 呂祖謙 등 학자들이 江西 鉛山 鵝湖寺에서 세 파가 회강하여 ’爲學之方‘으로 토론을 전개하였다 朱熹와 陸九淵의 학술적 종지는 각각 상이하여 쟁론이 매우 격렬하였다. 쌍방이 각자 자기 의견을 고집하여 일치를 보지 못하고 헤어졌다. 두 차례의 유명한 회강의 결과는 서로 달랐지만, 이학사에서 중대한 영향을 주었고 이학을 연구하고 이학사조의 발전을 촉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둘째로 서원내의 교사와 학생 그리고 학생사이에 전개된 학술토론 이었다. 서원은 고대 고등학교로서 학생의 학술 수준은 이미 높은 수준에 달해 있었다. 심지어 어떤 학생은 명망이 있는 학자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서원에서 학습하는 기간에 점차적으로 자신의 학술견해를 형성하였다. 이 때문에 교사와 학생간에 그리고 학생들간에 자주 학술토론이 전개되었고, 이러한 토론은 사회상의 학술사조와 매우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어, 동시에 학술사조의 발전을 촉진하였다. 송 명 이학자들의 ‘語錄’중에서는 교사와 학생 사이의 질의가 다량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학생들이 결코 소극적인 자세로 교사의 해답을 기다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교사와 학생은 상호간에 질문을 하면서 학술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발표하고 쌍방이 문제를 깊이 생각하도록 격발하여 학술문제의 심도있는 연구에 도움이 되었다.
명대서원은 전문적으로 강회를 세우고 서원의 교사와 학생 그리고 동학간의 학술 토론활동을 조직화 하고 제도화 하면서 강회의 宗旨, 日時, 儀式, 組織 등 각종 사항을 규정하고 會約을 정하였다. 강회가 열릴 때면, 교사 혹은 학생 중의 한사람이 먼저 자신의 관점과 견해를 강술하고 다른 회원이 이에 질의 및 토론을 하였다.
명대 無錫 東林書院 역시 강회를 설치하고 『東林會約』 이라는 규정을 만들었다. 매회 한 사람을 주강으로 추천하여 『四書』 중의 한 장을 강설하고 한 후, 이외 질의가 있으면 질문을 하고 상의할 것이 있으면 상의를 하였다. 이러한 강회는 일종의 전형적인 학술토론회였다. 명대 심학사조의 발흥과 흥성은 실제로 서원과 강회의 보급에 도움이 되었다.
(三)독창적인 사상
중국고대의 학교의 주요 교학내용은 유가경전이었다. 관학이 되었든 서원이 되었든 간에 이점에 있어서는 별반 구별이 없었다. 그렇지만 서원은 학술적 독창적인 견해를 더욱 중시하여 유가경전에 대해 대담하게 새로운 견해를 내어 놓았다. 관학교육에서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 원인으로 관학은 봉건관료기구의 조직으로 관학의 교학내용과 교과기준은 모두 관방에서 규정하였다. 학생은 단지 교재만 배우고 章句를 묵송하는 일정범주의 한계를 지켜야했다. 그렇지만 서원은 직접적으로 관부의 통제를 받지 않았고 서원을 주관하는 학자들은 자신의 유가 경전에 대한 남다른 이해에 따라 자신의 학술사상을 명백히 밝히었다. 서원이 송이후 각종 신흥 학술사조의 본진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대사상가들과 학자들이 관학에서의 강학을 하지 않으려 했고 서원을 세워 강학하는 것을 좋아했던 데에서 원인이 있다.
송명 이학사조의 흥기는 서원교육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 이시기 학술의 중요한 특징은 바로 이학자들이 漢唐시기 經師의 유가경전에 대한 독단을 타파하고 다시 새롭게 유가 경전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대담하게 행하였다는 점이다. 이로서 중국 유학사는 새로운 단계인 이학단계로 발전하였다. 그렇지만 이학자들은 漢 唐代의 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유가경전의 연구도 중시하였다. 서원의 교학에서도 유가경전을 주요교재로 채택하였지만, 유가경전을 강의에 있어서 서원만의 독특한 특징이 있었다. 첫째 경전채택의 중점이 달랐다. 한당의 유학은 『詩』, 『書』, 『藝』, 『易』, 『春秋』등 ‘五經’을 주요 교재로 삼았다. 이학자들은 오경을 중시하는 것 외에 특히 『論語』 『孟子』 『中庸』 『大學』를 중시하고 합쳐서 ‘四書’라고 칭하였다. 그리고 사서의 위치는 오경위에 있어 더욱 중요한 교재가 되었다. 둘째 경전에 대한 이해와 의견이 달랐다. 한당 유학은 유가경전중에 나타난 名物制度의 고증과 훈고를 중시하였으나 이학자들은 유가경전의 도덕교화적 의의를 강조하여 ‘성인의 뜻을 구하여 性命道德의 정수를 밝히는 ’것을 요구하였다. 이렇듯 서원이 유가경전을 전습하는 것은 인륜을 밝히고(明人倫) 심성을 수양하기 위함이었다. 게다가 이학의 각 학파는 경전에 대한 이해와 의견 역시 서로 달랐다. 주희는 자신의 학술적 견해에 입장과 의견을 해명하기 위하여 대담하게 『大學』에 대해 집록하여 보충하였다. 이 모든 것은 서원이 학술에 대한 독창적 견해를 중시하는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程朱이학이 명대에 국가철학이 되면서, 각급 관학에서는 황제가 정한 교재와 과거시험의 표준답안이 되었다. 이때부터 독창적인 견해가 풍부한 학술사상에서 경직된 교의와 굳어버린 장구로 변화하였다. 명 중엽이후, 서원이 근거지로 하여 새로운 학술사조가 형성되었다. 바로 王陽明과 湛若水의 심학사조는 관학의 정주이학이 章句와 敎條를 고집스럽게 지키는 것과 반대로 서원에서는 대담하게 정주이학에 도전하였다. 왕양명과 그 제자들은 ‘언론이 너무 상세하고, 분석이 너무 세밀하다.’라고 대담하게 국가철학을 비판하고 질책하였다. 이로써 학자들에게 다시 한번 記誦辭章의 악습이 형성되었다. 그는 ‘知行合一’과 ‘致良知’의 학술종지를 제의하면서 이러한 관점으로 『大學』중의 格物致知를 다시 새롭게 해석하였다. 서원은 이러한 학술의 독창적인 학풍을 중시하면서 명대 심학사조의 흥기를 초래하였다.
(四) 兼容并蓄 (이질적인 것을 수용 역자번역)
고대 서원은 개방식 설립 방식을 채택하였다. 서원의 개방식 설립은 이중의 함의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강학을 하는 교사에 대해서 말하자면 서로 다른 학술적 관점과 학파의 학자들이 동일한 서원에서 강학을 할 수 있었다. 둘째로 강학을 듣는 학생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들의 들고 남은 자유롭고 제한이 없었다. 이렇듯 서원은 학술연구 문화교육 분야에서 兼容并蓄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서원은 고급형태의 사학으로 교사와 학생의 들고 남이 결코 관부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지는 않았다. 즉 관학화가 비교적 두드러진 청대에 이르러서도 서원의 산장은 대부분이 초빙되었지 임명되지 않았다. 그래서 서원의 체제가 관학과 현저히 다른 특징은 서로 다른 학파의 학자들이 강학하면서 백가쟁명의 학술적 분위기가 형성되었다는 점에 있었다. 남송 乾道3년(1167) 閩學一派의 대가인 주희가 악록서원에서 강학을 하였다. 악록서원은 본래 장식으로 대표되는 湖湘學派의 학술근거지였다. 이후 事功(사공)을 숭상하는 永嘉學派의 대표인물인 陳傅良 역시 악록서원에서 강학하면서 악록서원의 학생의 환영을 받았다. 남송시기에 악록서원은 호상학파, 민학파, 영가학파등 서로 다른 학파의 강학장소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명대에 이르러 陽明學派와 東林學派의 대표인물 역시 악록서원에서 강학하였다. 백록동서원 역시 이와 같았다. 남송 淳熙8년(1181)주희가 백록동서원을 주관하면서 그는 오히려 심학학파의 대가인 육구연을 초빙하여 강학을 하게 하였다. 오랫동안 쟁론을 해 왔던 두 학파가 백록동서원에서 강학을 하면서 서원이 개방적인 설립의 학풍적 특징을 구비하고 있음을 충분히 반영하였다. 송 명시기 서원에 회강과 강회제도가 형성되고, 공개적으로 운영하는 학풍이 발전하면서 제도화의 결과를 낳았다.
서원의 개방적인 운영과 兼容并蓄는 학생에 대해 제제를 가하지 않아, 서로 다른 학파와 서로 다른 지역의 학생이 와서 강의를 듣고 가르침을 구함으로서 관학의 폐쇄적인 운영의 기풍을 타파하고 학술교류와 발전을 촉진하였다. 주희가 악록서원에서 강학을 할 때, 강의를 들었던 사람이 천명이나 되어 학생들이 타고 온 말이 서원 앞에 있는 연못물을 다 마셨다는 말이 전해온다. 泰州學派 王艮이 서원에서 강학하면 강한 흡인력이 있어 유가의 선비뿐만 아니라 나무꾼, 도자기공도 흥미진진하게 들었다고 한다. 당시에 전하는 말에 따르면 강의를 듣고자 온 사농공상 각계 인사들이 천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顧憲成이 東林書院에서 강학할 때, 역시 원근명현이 同聲相應하며, 천하의 학자들 모두가 동림서원으로 모여들었다. 이처럼 많은 서원들은 개방적으로 운영하는 학풍을 제도화 하였다. 청 順治年間 백록동서원은 외래학자 접대를 위한 특별비용을 책정하면서 ‘서원에 천하의 뛰어난 인재가 모이니, 단지 인재를 한 곳에서만 받아들여서는 아니된다. 혹 먼 곳의 벗이 있어 소식을 전해 듣고 도를 흠모하여 이곳에서 문업을 하고자 하니, 우의를 거절할 수 없다.’라고 명확한 규정을 내어 놓았다.
상술한 개방적인 운영과 兼容并蓄의 학풍은 서원 학술연구의 두드러진 특징이 되었다. 이로 각 학파의 학술적 장점을 취하여 인재의 배양과 학술사업의 번영을 촉진하는데 큰 이로움이 되었다.
(五) 학파창설
학파의 형성은 두 가지 요건을 필요로 한다. 첫째로 독립된 체계의 학술사상이다. 둘째는 학술적 관점과 사상경향이 비교적 일치하는 학자 그룹이다. 서원은 이러한 두 가지 조건을 구비하고 있어서 송대 이후 각 학파의 학술적 근거지가 되었다. 송원명청 시기의 서원은 학식이 깊고 덕이 높아 명망이 있는 학자와 유명한 대가를 주강으로 초빙하였다. 이때 학자들은 서원의 각종 조건(도서, 자료, 학술분위기, 강학)을 이용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학술연구를 심화하여 서원을 자유강학의 근거지로 자신의 학설을 전파할 수 있어 학술적 종지가 비슷한 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어 독자적인 사상적 특징을 갖춘 학술유파를 형성하였다.
남송이학 학술사상이 크게 성하면서 이시기의 명문학파는 모두 서원을 본거지로 하여 세워졌다. 朱熹로 대표되는 閩學派는 福建의 寒泉精舍와 武夷精舍, 竹林精舍 그리고 江西의 白鹿洞 書院이 본거지였다. 胡宏과 張栻의 湖湘學派는 湖南의 碧泉書院, 嶽麓書院이 근거지였다. 陸九淵의 象山學派는 江西의 象山精舍를 학술적 기지로 삼았고 呂祖謙의 婺源學派는 浙江 麗澤書院이 근거지였다.
명대의 명문학파 역시 서원을 근거지로 하여 형성되고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예로 湛若水의 甘泉學派는 명대에 영향이 가장 컸다. 그의 학술적 영향과 더불어 서원의 성공적인 창설과 강학의 주관은 학파의 본거지를 세우는 것과 분리 될 수 없었다. 王守仁의 陽明學派는 명대에 신흥한 심학사조를 대표하였다. 왕수인과 그의 제자들은 중국 동남지역의 각지에 서원을 세우고 강학을 하면서 서원을 학파의 거점으로 삼고, 명대 심학의 전파와 발전을 촉진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東林學派는 東林書院에서의 강학에 기인하여 학파의 명칭이 형성되었다.
청대에 이르러 乾嘉漢學이 크게 부흥하면서 서원은 또한 고증학파의 학술적 기지가 되었다. 청대 한학이 順治, 康熙 연간에 흥기하고 乾隆, 嘉慶연간에 발전하여 크게 번성하였다. 이로 인하여 학술사상 청대 한학을 乾嘉學派라고 불렀다. 건가한학이 가장 번성한 시기에 가장 유명한 학파로 吳派와 皖派가 가장 유명하였다. 吳派는 惠棟이 대표인물로 江聲, 余蕭客, 王鳴盛, 錢大昕, 江藩 등의 사람을 포함하였다. 皖派는 載震으로 대표되며 段玉裁, 王念孫, 王引之 ,任大椿, 盧文弨 등을 포함하였다. 학술사에 있어서 두파는 각각 師承과 特徵이 있었지만 그들은 서원의 강학을 매우 중시하였다. 때문에 南京의 鍾山書院과 惜陰書院, 蘇州의 紫陽書院, 揚州의 梅花書院과 安定書院은 그들이 오랫동안 강학을 하면서 자신들의 학술사상을 전파하는 곳이 되었다. 阮元이 杭州에 창건한 詁經精舍, 廣州에 창건한 學海堂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고증학파의 학술기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