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역사
하동정씨(河東鄭氏)는 《조선씨족통보》에 의하면 연원을 알 수 없는 여섯 계통으로 분류하고 있으나, 현존하는 하동정씨의 후손들은 본관을 같이 하면서 계통을 달리하는 3파가 있다.
첫째 계통(密直公 國龍派)의 시조 정도정(鄭道正)은 신라 진성왕 때 하동지방의 호족출신으로 923년(경명왕 7) 후백제군이 신라를 침범할 때 하동호장(河東戶長)이 되어 향병(鄕兵)을 단련하여 하동성(河東城)을 지켰다. 그 뒤 고려로 통합될 때는 경순왕을 개성까지 호위하여 내의성상시(內議省常侍)에 제수되었고 이어 광평성평장사(廣評省平章事)에 올랐다.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알 수가 없다. 다만 고려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정석숭(鄭碩崇)을 일세조로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둘째 계통(政丞公 膺派)의 시조 정응(鄭膺)은 고려 덕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도첨의좌정승(都僉議左政丞)을 지냈으며 한때 태자관(太子官)의 첨사(詹事)를 맡기도 했다.
셋째 계통(知部事公 遜位派)의 시조 정손위(鄭遜位)는 고려 숙종(肅宗), 예종(睿宗), 인종(仁宗), 의종(毅宗), 명종(明宗) 등 5왕조에서 벼슬을 하였다. 정헌대부(正憲大夫) 지예부사(知禮部事), 응양대장군(鷹揚大將軍),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으며 하동백(河東伯)에 봉해졌다. 그 후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삼고 하동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그의 아들 정세유(鄭世裕)는 명종 때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를 거쳐 형부상서(刑部尙書)에 이르렀다.
분적종 및 분파
파명(派名)을 살펴보면, 정도정(鄭道正) 후손 분파는 9세손인 정난(鄭難)의 후손이 산원공파(散員公派), 정침(鄭{王+冗})의 후손이 흥의공파(興義公派)이고, 하성부원군 정흥인(鄭興仁)의 아들 정인지(鄭麟趾)의 후손이 문성공파(文成公派)이다. 이 파는 그 아들 대에서 다시 익위공파(翊衛公派), 하성위공파(河城尉公派), 장정공파(莊靖公派), 대사헌공파(大司憲公派), 찬성공파(贊成公派)로 나누어진다. 정흥안(鄭興安)의 후손이 진사공파(進士公派), 정흥도(鄭興道)의 후손이 현감공파(縣監公派)로 나누어졌다. 8세손 정을진(鄭乙珍)의 후손이 소윤공파(少尹公派)로 나누어졌다. 정난연(鄭蘭衍)의 후손은 증손 정지(鄭地)와 정전(鄭㙉)의 대에 경열공파(景熱公派)와 병사공파(兵使公派)로 나누어졌다. 또한 정국교(鄭國僑)의 후손은 진사공파(進士公派)로 분리되었다.
정승공 정응(鄭膺)의 후손은 6세 휘 희(熙)까지 단일 계통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그 아들 셋 (휘 抱; 휘 招; 휘 提)과 그의 증손들을 파조(派祖)로 하여 여러 파로 분리되었다. 곧 휘 포의 장손 휘 서생(鄭瑞生 9세)의 후손이 한림공파(翰林公派)로, 휘 초의 장손 휘 맹손(鄭孟孫 9세)의 후손이 주부공파(主簿公派)로 된 것이다. 그리고 3남 휘 제의 아들 하원군, 문절공 휘 수충(河原君, 文節公 諱 수충(鄭守忠, 1401-1469; 8세)의 아들 아홉(和 稷 穩 穆 積 稠 稑 稅 稛) 을 중심으로 다음과 같이 나누어졌다.
1.보성공파(寶城公派)
문절공의 장자로 휘는 화(和)이시며 1434(세종 16)-1505(연산 11) 조세에 성균생원시(成均生員試)에 급제하시어 원주판관(原州判官 종 5품)을 거쳐 성종 3년(1472) 3월 10일에 편전대기(便殿待期) 보성군수에 제수(際授)(왕조실록 16권 642면 참조 성종 3년 임진(1472, 성화 8) 3월 10일) 되시어 만 5년간 수령칠사를 실천하시고 선정을 베푸시어 보성유림과 군민에 의해 그공을 기리기 위하여 유애비(遺愛碑)를 세웠는데 병화로 비가 없어진 것을, 1997년에 보성 향교에 재건하여 2000년 6월에 제막식을 가졌다.
보성 군수(寶城郡守) 정화(鄭和)와 상주 판관(尙州判官) 박원창(朴元昌)이 하직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정화에게 이르기를,
“네가 그 고을에 가면 어떻게 다스리겠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민생(民生)을 사랑하고, 칠사(七事)를 닦아 밝힐 뿐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박원창에게 이르기를,
“민생을 사랑하면 폐사(弊事)를 일으킴이 없으니, 목사(牧使)가 착오(錯誤)하는 일이 있어도 마땅히 규찰(糾察)하여 바로잡도록 하라.”
하니, 박원창이 대답하기를, “신은 마땅히 마음을 다하겠습니다”하였다.
守令七事란
지방 수령의 준수사항- 성종 3년에 보성공을 상께서 보성군수를 특명제수할때 하문하시기를 네가 보성고을에 내려가면 어떻게 다스리겠느냐 하문 하시니 "수령칠사(守令七事)하겠나이다"라고 답변한 내용
1.농상성(農桑盛)-농사와 잠업(누에치기)를 성하게 하고)
2.호구증(戶口增-백성의 호구를 늘리게 하며)
3.학교흥(學敎興-학교(향교)를 크게 지원하여 공부에 힘쓰게 하며)
4.부역균(賦役均-부역(군민의 노역)을 골고루 배당하며)
5.군정수(軍政修-군정에 관한 일은 바르게 고쳐 수행하며)
6.사송간(詞訟簡-백성의 송사은 신속 명료하게 처결하고
7.간활식(奸猾息-간사하고 요망스런 일은 단호하게 막는다.)
보성군수에서 과만되어 광주로 오셔 군분(현 화정동)을 개기(開基)하셨으며 보성보를 막으시고 보성교를 가교하셨는데(광주시사) 현재의 농성동명 또한 보성공을 기리기 위하여 성자에 붙어있다. (광주시 마을 유래지). 만년에는 황해도 금천으로 이거하시고 고종하셨으며, 묘소는 경기도 봉동면 발송리 송곡촌 후 개산능 (현재 휴전선 남방분계선내 철책지구)에 있어 출입이 통제되어 제사를 받들지 못하므로 화순군 남면에 있는 추선문중의 세장산의 맨위에 제배단을 설단하여 세일제를 모신다.
* 전 군수 정화를 모함한 박맹·박구·영정을 벌주다(성종 8년 정유(1477, 성화 13) 4월 19일)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보성(寶城) 기관(記官) 박맹(朴萌)·박구(朴耉)가 군수(郡守) 조충손(趙衷孫)을 해하고자 하여 통인(通引) 영정(永貞)으로 하여금 발병부(發兵符)를 훔치게 한 죄는, 율(律)이 박맹은 수범(首犯)이니 참대시(斬待時)에 해당하고, 박구·영정은 종범(從犯)이니 장(杖) 1백 대에, 유(流) 3천 리에 해당하는데, 일이 사유(赦宥)전에 있었습니다. 그 관계 없는 일로 전 군수(郡守) 정화(鄭和)를 무함한 죄는 율이 장(杖) 1백 대에 유(流) 3천 리에 해당하니, 수교(受敎)에 의하여 다른 도(道)의 잔역리(殘驛吏)로 영속(永屬)시키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발병부(發兵符) : 조선조 때 군사를 동원할 때 쓰던 신부(信符). 표면에 ‘발병(發兵)’ 이라 썼으며, 좌부(左符)는 궁내에 두고 우부(右符)는 절도사(節度使) 등에게 주었음.
참대시(斬待時) : 사형을 할 때 가벼운 죄는 춘분(春分)에서 추분(秋分)까지 만물이 생장하는 시기를 피하여 형을 집행하던 일. 곧 추분까지 기다려서 처형하던 참형(斬刑) - (조선왕조실록 9 집 450 면).
* 장령 이경동이 군사·공물·선군·권농·재상의 답험·한재 등에 관해 차자를 올리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임금이 말하기를,
“한재(旱災)가 이와 같으니, 어찌 감소(感召)한 것이 없겠는가? 유체(留滯)된 옥사(獄事)가 있는가 두렵다” 하니, 영사(領事) 정창손(鄭昌孫)이 대답하기를,
“한재가 비록 심하나 농사를 해하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지금은 비록 가물지마는, 만일 5월에 비만 온다면 오히려 풍년들 희망이 있다’고 합니다. 옥(獄)이라는 것은 악한 자를 징계하는 것인데, 악한 짓을 한 자가 요행으로 면하면 또한 하늘의 뜻이 아닙니다”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어디 면한다고 말하는 것인가? 유체된 옥과 지나친 형벌이 있는가 염려된다는 말일 뿐이다”하였다. 영사(領事) 김국광(金國光)이 말하기를,
“근일 정화(鄭和)의 옥(獄)은 헛된 일로 여러 번 고문[拷訊]을 받았으니, 참으로 불쌍합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정화의 옥사(獄辭)가 처음에는 그 범한 것이 의심이 없었는데, 지금 끝까지 추궁하고 보니 전의 죄안(罪案)이 모두 그릇되었다. 만일 이와 같은 자가 많으면 어찌 화기를 상하고 재앙을 부르지 않겠는가?”하였다.
조선왕조실록 9 집 447 면 성종 8년 정유(1477, 성화 13) 4월 13일 (경술)
배위는 숙부인 영천이씨와 후배 숙부인 의성 김씨가 같은 묘소에 모셔져있다.
아들은 휘 광원(光元) 광형(光亨) 광리(光利) 광정(光貞) 광상(光常)이시다.
(전남 화순 남면 사수리 추선제 내: 묘소는 경기도 개풍군(지금은 휴전선안)에 있어 향화를 드리지 못하므로 단을 세워 모심)
2.판관공파(判官公派)
휘는 직(稷)으로 문절공의 二자이시며 음사(陰仕)로 상서원 판관(尙瑞院 判官-종5품)에 서용되시었다. 풍덕군수, 부사에까지 누진하였다. 후손이 황해도 금천과 고흥 도양읍에 거주한다.
3.직장공파(直長公派)
문절공의 三자로 휘는 온(穩)이시고 음사로 직장(直長-종7품)을 역임하셨는데 어느 부서의 직장인지는 실전이다. 후손이 순천, 낙안에 거주하는데 손세가 적다.
4.유수공파(留守公派)
문절공의 四자로 휘는 목(穆)이시고 진사시에 급제후 보은군수, 광주유수(廣州溜守-정2품)에 이르시다. 후손이 영동, 금산,광주, 청원에 거주한다.
5.장령공파(掌令公派)
문절공의 五子로 휘는 적(積) 자는 덕구(德久)이시고 성종 을미(1475)의 친시(親試)에 등과하여 첨정(僉正) 자정(資正) 사헌부 장령(司憲府 掌令 정4품) 이천부사(利川府使 종3품)을 역임하셨다. 후사가 없으시어 보성공의 二子 휘 광형(光亨)께서 출계(出系)하셨으며 후손이 김포, 연천, 파주, 강화등 에 거주한다.
* 박숭질·황사효·정적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 조선왕조실록 (12 집 565 면) 성종 25년 갑인(1494, 홍치 7) 7월 23일(기유)
박숭질(朴崇質)을 자헌 대부(資憲大夫)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황사효(黃事孝)를 가선 대부(嘉善大夫)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정적(鄭積)을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으로, 민휘(閔暉)를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으로, 윤장(尹璋)을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황형(黃衡)을 절충 장군(折衝將軍) 훈련원 도정(訓鍊院都正)으로, 이열(李烈)을 절충 장군 경상우도 수군 절도사(慶尙右道水軍節度使)로, 이집(李諿)을 가선 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삼았다.
사신이 논평하기를, “이집(李諿)은 위인(爲人)이 노둔(駑鈍)하고 용렬(庸劣)한데다 대체(大體)에 어두워서 쇠모(衰耗)함이 심하지 않은데도 수빈(鬚鬢)이 세어 희니, 호사자(好事者)가 이르기를, ‘예전에는 검은 머리의 삼공(三公)이 있더니, 지금은 수염이 새하얀 어사(御史)를 보겠다.’고 하였으니, 대저 그 서로 맞지 아니한 것을 기롱한 것이다.” 하고, 또 논평하기를, “황사효(黃事孝)는 일찍이 황해도(黃海道)를 안무(按撫)하였을 적에 그 아들을 데리고서 갔고, 또 평양(平壤)의 기생[妓]을 데리고 이르는 곳마다 춤을 추었으며, 혹 관기(官妓)로 하여금 그네[鞦韆]놀이를 하게 하였으니, 그 부랑(浮浪)하고 절조가 없음이 이와 같은데, 이제 이 직임[職]을 삼았으니, 듣는 자가 깜짝 놀랐다.” 하였다.
6.사직공파(司直公派)
문절공의 六子이시며 휘는 륙(稑)으로 음사로 오위 사직(五衛 司直-정5품)을 역임하셨다. 후손이 남평,보성에 거주하며 손세가 적다.
7.선무랑공파(宣務郞公派)
문절공의 七子이시며 휘는 조/ 주(稠)요 자는 자개(子槪)이시다. 음사로 선무랑(宣務郞-종6품)에 서용되시고 부서는 주부(主簿를 거쳐 서반(西班-무관)의 어모장군(御姆將軍-정3품)에 이르셨다. 후손이 천원군 목천면 일대에 거주한다.
8.호군공파(護軍公派, 일명 生員公派)
문절공의 八子 휘 세(稅)로 보성공을 따라 보성에서 수학하시다 생원시에 급제하시어 음사로 오위 호군(護軍)에 서용되셨음이 요즈음에 판명되었다. 왕조실록에 판관공과 같은 날에 서용되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후손이 보성군내와 광주의 오치,양지등에 거주한다.
참조: 조선왕조실록 11 집 474 면(성종 20년 기유, 1489, 홍치 2)
이조(吏曹)에 전교하기를,
“공신의 적장자(嫡長子)인 윤성인(尹成仁)·심광필(沈光弼)·정주함(鄭奏咸)·유백손(柳伯孫)·유중손(柳仲孫)·박욱(朴頊)·조헌(曹獻)·정윤증(鄭胤曾)·이장윤(李長潤)·권헌(權憲)·양원(梁瑗)·홍지(洪祉)·이희(李熙)·유방(柳房) 및 중자(衆子)인 윤준민(尹俊民)·이구령(李九齡)·권칭(權偁)·권위(權偉)·정직(鄭稷)·정세(鄭稅)·이세걸(李世傑)·이호(李浩)·이세정(李世貞)을 재품(才品)에 따라 서용하라”하였다.
* 휘 균(稛): 문절공의 九子이다. 일찍 세상을 하직하신 것으로 보인다.
* 본인은 이 가운데 다섯째 휘 적(積 - 掌令公)의 후손으로 정승공파 문절공 후 장령공파 26세손이다. 돌림자(行列)는 현(顯)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