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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학의 산실(産室)을 찾아 9(마지막회)
김철교(시인, 배재대 교수)
22. 열여덟째날: 버킹엄궁전, 존슨박사, 대영박물관, 헤롯백화점
아침 일찍 버컹엄 궁전(Buckingham Palace)으로 향했다. 빅토리아 여왕이래 역대의 영국 국왕이 살았던 궁전으로 현재 엘리자베스 여왕도, 주말에는 윈저성(Windsor Castle), 여름에는 스코틀랜드 발모랄성(Balmoral Castle)에 가는 것 외에는 여기에 산다고 한다. 11시 30분에 있는 근위병 교대장면을 구경하기에는 시간이 남아, 궁전 남쪽 부속건물에 있는 퀸즈 갤러리(Queen's Gallery)에 들려 여왕님들의 미술 소장품을 구경할 수 있었다. 옛 도자기와 그림들이 관광객들의 호주머니를 기쁘게 털고 있다. 궁전이든 갤러리든 여왕과 관련된 건물들은 아무 때나 개방하는 것이 아니고 날짜와 시간대를 잘 맞추어야 관람할 수 있는 행운이 뒤따른다.
버킹엄 위병 퍼레이드 때에는 세계 각국 관광객이 궁전 앞을 꽉 채워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기마병이 앞뒤로 호위하며, 군악대와 보병들이 멋있는 제복을 입고 퍼레이드를 벌이고 있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궁전 앞 광장에는 금빛 천사를 조각해 얹은 빅토리아 여왕께서 항상 환영인파를 축복하고 계신다.
여왕이 궁전에 있을 때는 정면 중앙에 왕실 깃발인 로열 스텐더드(Royal Standard)가 나부낀다. 왕실 가족만 사용하는 버킹엄 궁은 해마다 여왕이 스코틀랜드를 연례 방문하는 여름에는 일반에게 관람이 허용된다.
이쯤에서 간단하나마 영국여왕을 중심으로 한 영국의 약사를 살펴 봐야할 것 같다. 영국으로 들어온 최초의 이주민은 스톤헨지를 세운 이베리아인이었는데 그 숫자가 많지 않아, 영국의 첫 이주민으로 흔히 켈트족을 말한다. 켈트족이 브리튼 섬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기원전 700년이며 그 이후 브리튼 섬과 아일랜드 전체를 지배하는 종족이 되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도 400년 동안 로마 식민지였다. 율리우스 시저는 기원전 55, 56년 두차례 켈트족을 굴복시켰으며, 서기 43년에 브리튼 섬에 군대를 주둔시킴으로써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다. 로마가 점점 쇠약해졌을 때 앵글로색슨 족이 넘어와 켈트족을 지금의 스코틀랜드와 웨일즈로 밀어내고 잉글랜드를 차지했다. 유명한 아서 왕 이야기도 앵글로색슨 족에 대항해 싸우는 켈트족에 관한 이야기다. 잉글랜드의 조상은 앵글로색슨 족이며, 스코틀랜드, 웨일즈, 아일랜드의 조상은 켈트족인 셈이다.
‘정복자 윌리엄(사자왕 윌리엄, 윌리엄 1세)’이라는 이름으로 영국역사에 유명한 윌리엄공은 프랑스 노르망디 공국(공작이 다스리는 나라)의 지배자였는데 잉글랜드를 평정하고, 1066년 크리스마스에 ‘웨스트민스터 수도원’에서 잉글랜드의 왕으로서 대관식을 치르면서 영국의 중세를 열었다.
봉건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영국의 중세는 노르만-플랜태저넷-랭커스터-요크 왕조에 의해 대략 300년 동안 지속되었는데 이 시기의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바로 ‘장미전쟁’이다. 장미전쟁이란 장미문장을 가진 두 가문과 그들을 따르는 귀족들이 싸운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는 랭커스터 가문(붉은 장미)이 이기게 되었고, 요크가문(흰 장미)을 대표하던 엘리자베스와 결혼함으로써 전쟁은 비로소 끝이 나게 된다. 이 전쟁으로 많은 귀족과 기사 세력이 몰락하고 왕권이 강화되어 영국은 절대주의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영국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인 헨리8세(1509-1547)는 종교개혁을 강력히 억압하고 로마교황청과도 대립한 왕이다. 잉글랜드와 웨일즈를 통합하였고(1536), 강력한 왕권을 과시하며 총6번이나 결혼하였다. 첫 부인은 형수인 ‘아라곤의 캐서린’으로 메리라는 딸을 얻었다. 두 번째 부인 앤 블린(Anne Boleyn)은 사형당했고, 세 번째 부인은 왕자를 낳았지만 산후조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죽었다. 네 번째 부인은 퉁명스럽다고 이혼 당했으며, 다섯 번째 부인은 옛날 애인을 잊지 못해 몰래 만나다 발각되는 바람에 사형당했다.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 부인은 ‘캐서린 파’다.
르네상스적 인간인 헨리8세는 학구적이며 운동에도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였고, 작곡가이자 시인이었다. 그는 마르틴 루터를 비판한 공로로 교황으로부터 <신앙의 옹호자(Defender of Faith)>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 칭호는 계속 이어져 엘리자베스 2세의 칭호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다.
앤과의 결혼문제에서 시작된 교황청과의 대립으로 1534년 법으로 ‘잉글랜드 국왕만이 잉글랜드 교회의 유일한 수장’이라 하여 잉글랜드 교회는 로마교회와 단절한 채 잉글랜드 국왕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영국은 여왕의 나라다. 총8명의 여왕이 있었는데 1553년에 9일동안 여왕 자리에 않았던 제인 그레이가 최초의 여왕이다. 그녀는 ‘피의 여왕(Bloody Mary)'이라고 불리우는 메리 1세(재위기간: 1553-1558)에게 런던탑에서 참수되었다.
메리여왕은 셋 인데 하나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1588-1603)과 대립한 메리 1세이며 헨리8세의 첫 아내인 캐서린의 딸이다. 다른 하나는 스코틀랜드 여왕이었던 메리여왕으로 어려서 스코틀랜드 여왕에 즉위하였으나 6세에 프랑스 황태자와 약혼하여 프랑스 궁정에서 자랐다. 결혼 1년후 남편이 죽자 모국으로 돌아와 사촌과 결혼하였으나 남편이 백작에게 살해당한다. 남편을 살해한 백작과 재혼하자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잉글랜드로 피신했다. 영국의 구교도 귀족들이 신교도인 엘리자베스 1세를 폐위시키고 구교도인 메리를 여왕으로 세우려던 반란이 실패하여 19년동안 감금되었다가 엘리자베스 1세에 의해 처형되었다.
메리 2세(1689-1694)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여왕으로 '권리장전'을 승인함으로써 영국 의회정치의 발전에 한 획을 그은 사건의 주인공이다. 메리2세의 동생인 앤 여왕(1702-1714)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연합법을 제정, '그레이트브리튼(대영제국)'의 최초의 왕이 되었고, 최초의 아일랜드 여왕이기도 하다.
빅토리아 여왕(1837-1901)은 실제 정치에 많은 영향을 끼치진 못했지만, '해가 지지않은 대영제국'이란 이름을 얻게 된 영국의 전성기에 재위한 여왕이다. 자녀들이 유럽 각 왕실과 혼인하여 '유럽의 할머니'란 별명을 얻었을 정도로 오늘날 유럽의 왕족 대부분이 그녀의 후손들이다.
현재의 엘리자베스 2세는 영국 여왕 중 가장 평탄하게 왕위에 올랐다. 1926년 출생하여 1952년 즉위하였으며 지금에 이르고 있다.
<오전에 있는 버킹엄 궁전 앞 퍼레이드> <버킹엄 궁전 앞 빅토리아 여왕>
버킹엄 궁전에서 걸어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들렀으나 일요일에는 입장이 허용되지 않았다. 12시부터 13시 사이에는 계속 성당에서 나오는 종소리가 관광객으로 북적거리는 거리를 가득 메웠다. 웨스트민스터 사원, 성마가렛(St.Magaret)교회, 빅벤, 국회의사당 사이로 종소리들이 가득 가득 흘러가고 있었다.
홀본(Holborn)지역에 있는 플리트가(Fleet Street)의 골목골목을 헤매다 겨우 존슨박사 자택(Dr. Johnson's House)을 찾았다. 집 가까이에 있는 존슨 박사가 자주 찾았던 지올드체셔치즈(Ye Olde Cheshire Cheese)라는 펍에 들려 점심을 먹었다.
자택 정문에는 ‘런던에 싫증난 이는 인생에 싫증난 사람이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는 안내판이 붙어 있으나 일요일에는 공개하지 않고 누군가 나와서 좁은 정원에 있는 나무를 손질하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골목에서는 호지(Hodge)라는 존슨 박사가 기르던 고양이 조각상이 주인을 대신해서 반갑게 맞아 주었다. 몇 골목 더 가면 존슨 박사 시절이후 계속 영업을 하고 있는 지올드체셔치즈가 있는데, 찰스 디킨스 등의 문인들이 자주 찾는 모임장소였다고 한다. 3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펍이다. 일요일이었으나 만원이어서 한참 기다리다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실내에는 존슨 박사의 소유물이었다는 의자도 전시해 놓고 있었다.
사뮤엘 존슨(Samuel Johnson, 1709-84)은 1709년 스태퍼드셔 리치필드에서 서점 주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학비 부족으로 옥스퍼드대학교를 중퇴하였으나, 후에 문학상 업적에 의하여 박사학위가 추증되어 ‘존슨 박사’라 불렸다. 26세 때 자신보다 20세나 연상인 미망인과 결혼하였으며 1737년에 런던으로 나와 <램블러(Rambler, 1750-52)라는 잡지를 발간하였다. 1747년에 시작한 <영어사전>을 자력으로 7년 만에 완성시킴으로써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1762년에는 정부로부터 30파운드의 연금이 수여되었으며, 1763년에는 그를 중심으로 제자들이 문학 그룹 ‘더 클럽’(후에 ‘문학 클럽’으로 개칭)을 조직하였다. <존슨전(The Life of Samuel Johnson, 1791)>의 저자 보즈웰(James Boswell)은 그의 주위에 모여든 문인 및 평론가들의 인생론과 문학에 대한 활발한 토론의 모습은 물론 존슨박사의 훌륭한 인품에 대해서 잘 묘사하고 있다.
존슨박사는 1765년에 셰익스피어 전집을 출판하고, 맨 앞에 훌륭한 셰익스피어론을 실었다. 17세기 이후의 영국 시인 52명의 전기와 작품론을 정리한 10권의 <영국시인전(Lives of the English Poets, 1779-81)은 만년의 대사업으로 특히 유명하다.
그의 집 앞 안내판과 고양이 동상 표지판에 새겨진 ‘런던에 싫증난 자는 인생에 싫증난 자다(Sir, when a man is tired of London, he is tired of Life.)라는 그의 말처럼 그는 진정으로 런던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1995년 <워싱턴 포스트>는 지난 천년의 역사에서 최고의 업적을 남긴 인물 또는 작품 선정에서 그를 최고의 저자로 선정한 바 있다.
<존슨박사가 사랑했던 고양이 동상> <존슨박사가 자주 들렀던 펍>
점심을 먹고 지하철을 타고 러셀 스퀘어 역에 내려 대영박물관을 방문하였다. 자세히 구경하려면 몇일을 잡아야 한다고 하니, 나는 이번 여행에서는 주로 도자기와 비너스 조각을 집중적으로 보기로 하였다.
왕립학사원장을 지낸 의학자 슬론경(Sir Hans Sloane)의 6만여 점에 이르는 고미술, 메달, 동전, 자연과학 표본류 등 방대한 소장품을 1753년 정부가 매입할 것을 의회에서 의결하고, 코튼경(Sir Robert Cotton)의 장서와, 옥스퍼드의 백작 로버트 할리(Robert Harley)의 수집품들을 합하여 1759년에 설립, 일반에게 공개하였다. 특히, 도서관에는 마그타 카르타 원본, ‘베오울프’와 ‘캔터버리 이야기’의 원고, 세익스피어의 원고, 베토벤의 악보, 헨델의 ‘메시아’의 악보 등이 보관되어 있다.
내 눈이 가장 오래 머문 것은 비너스(아프로디테)의 조각이었다. 내셔널 갤러리에서 본 비너스를 주제로 한 그림들보다는 더 정감있게 다가왔다. <Lely's Venus> 조각은 2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목욕하는 비너스를 조각한 것이다. 화가인 Lely가 1649년 찰스1세의 소장품에서 가져온 것이어서 이름을 그렇게 붙인 것이다.
<대영박물과, '목욕하는 비너스 상' 옆에서> <대영박물관, 옛 영웅들의 흉상을 등에 지고>
비너스 " 딴청 부리지 말고 내 예쁜 몸좀 봐주라 "
오후 느지막하게 헤롯백화점에 들렸다. 헤롯백화점은 영국 왕실에서 주로 이용했다는 점과, 차(tea), 다이애나 왕세자비, 일 년에 두 번 있는 명품 세일 행사로 유명하다. 헤롯백화점의 역사는 1849년 차 도매상이었던 헤롯(Charles Henry Harrod)이 식료품가게를 인수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아직도 헤롯백화점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1층 식품부의 차(tea)는 인기가 대단하다.
설립 당시 작은 가게였는데 빅토리아 여왕시절 애프터눈티(Afternoon tea, 오후 3∼4시에 영국인이 마시는 홍차의 블렌딩)로 인해 기반을 굳혔다. 애프터눈티는 당시 귀부인들이 사교를 목적으로 마셨으며 유행처럼 번져나가 하나의 문화로 정착되었던 것이다.
여름과 겨울 두 차례의 세일기간에는 명품을 반값으로 구매할 수 있기 때문에 평소에는 살 수 없던 비싼 물건들을 저렴하게 사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새벽부터 기다린다고 한다.
영국 찰스 왕세자비였던 다이애나는 1996년 8월에 찰스 황태자와 이혼하고, 헤롯백화점 사장의 아들과 사랑을 나누다가 함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 슬픔으로 헤롯백화점 사장인 알 파예드가 백화점 내부에 다이애나와 자신의 아들을 추모하는 추모비를 세웠다.
늦은 오후라 대낮처럼 환한데도 백화점 문이 닫혀 있어 외부 유리 전시실에 전시되어 있는 가방들을 사진기에 담고 돌아 설 수밖에 없었다. 숙소인 얼스코트(Ealrs Court) 유스호스텔로 귀가하는 길에 글로세스터역(Gloucester Rd. Station)에 내려 엘리어트가 20여년 다녔다는 스테판교회(The Parish Church of St. Stephen)도 들렸다.
<헤롯 백화점> <헤롯백화점에 전시된 220만원짜리 명품가방>
1,710파운드짜리를 999파운드에 세일한다는 표시가 붙어 있다.
23. 영국의 마지막 날: 존던, 윌리엄 블레이크, 금융가, 웨스트민스터 사원 시인코너
20여일간의 긴 여행을 마무리하는 날이다. 아침 일찍 얼스코트역에서 지하철을 탔는데, 차량내부 광고판 옆에 워즈워스의 ‘웨스트민스터 다리위에서’(Composed Upon Westminster)라는 시가 나를 반겨 주었다. 지하철역에서는 <지하철시집(Poems on the Undergroud>이라는 소책자를 얻을 수 있다. 런던 시장이 발행하고, 차량내부에 붙여 놓은 시들을 모아 발간한 것이다. 서울시에서 지하철역의 안전차단막에 시를 게시한 것도 런던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는가 싶다.
<지하철객차에 붙어 있는 워즈워스의 시> <웨스트민스터 다리 난간에 기대어>
맨 먼저 아침 8:30분부터 문을 여는 바울성당(St. Paul Cathedral)에 들렸다. 이 성당의 주임신부였다는 시인 존던(Jonne Don, 1572-1631)의 기념부조와, 화가이자 시인이었던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1827)의 기념비도 볼 수 있었다.
섹슨족이 목조성당을 지은 것은 604년이었는데 런던 대화재로 소실된 후 1708년 건축가 크리스토퍼 렌에 의해 현재 건물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성당 지하에는 웰링턴장군과 넬슨제독, 윈스턴처칠 수상 등의 무덤 및 기념비등이 있다.
존던은 런던에서 가톨릭교도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에 들어갔으나 종교적인 문제로 학위를 받지 못하였다. 당시는 성공회가 영국 국교였기 때문에 가톨릭에 대한 박해가 심했던 시절이다. 1592년 링컨스 인(Limcoln’s Inn)에서 법률을 공부하였으며 정계나 법조계에 뜻을 두기도 하였다. 이때부터 시도 쓰기 시작하였다.
1596년과 1597년 2회에 걸쳐 에식스 백작(Earl of Essex)을 따라 에스파냐 원정에 종군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에저튼경(Sir Thomas Egerton)의 비서가 되기도 하였다. 에저튼경의 조카(Anne More)와의 비밀결혼이 발각되어 1602년까지 감옥에 갇혀 있었다. 출옥 후에도 경제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어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1608년 중병에 걸렸을 때에는 끊임없이 자살을 생각했다고 한다. 이때 가톨릭으로부터 영국국교로 개종하게 된다.
1615년 그의 나이 43세에 영국 성공회 사제가 되고 1621년 49세에 런던의 성바울성당(St. Paul Cathedral)의 수석사제가 되어 죽을 때까지 10년동안 훌륭한 설교와 종교시로 유명하다. 이때의 작품은, 젊은 시절 그의 종교가 영국 국교와 다르기 때문에 소외의식과 출세하지 못한 울분을 런던 거리에서 방탕하게 보내며 썼던 시와는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의 종교시의 주제는 ‘신을 향하여 사랑과 은총을 구하려는 자아와, 육체를 가진 인간이기에 본능적 삶을 살려는 분열된 자아 속에서 갈등을 느끼면서도, 신의 은총을 구하고 의탁하려는 의지를 다루고 있다. 그의 시는 겸허하고 회한에 가득 찬 마음으로 신을 마치 사랑하는 연인으로 표현하였다’는 평을 받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에 살았던 그의 시는 젊은 시절의 연애시와 만년의 종교시로 대별할 수 있다. <노래와 소네트(Songs and Sonnets, 1633)>로 대표되는 그의 연애시는 사랑의 온갖 감정과 심리상태를 대담하고 정교한 이미지를 구사한 뛰어난 작품들이다.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류의 상투적인 연애시를 배격하고, 냉철한 논리와 해박한 지식이 녹아 있는 작품을 써서, 17세기 영국의 형이상시인의 대표로서의 위치를 굳혔을 뿐만 아니라, 엘리엇 등 20세기의 현대 시인에게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
<Blake의 기념 표지판옆에서> <존던의 기념 부조(浮彫)>
블레이크 [William Blake, 1757-1827]는 런던출생의 시인 겸 화가로, ‘신비한 분위기가 가득한 삽화 및 판화와 여러 시작품으로 영국 낭만주의의 선구를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창문 밖으로 천사를 보았다는 환상가였고 신비주의자였다. 정규교육은 받지 못하였으나 15세 때부터 판화가 밑에서 일을 배웠으며, 왕립미술원에서 공부한 적도 있다. 1784년 아버지가 죽은 후 판화가게를 열기도 하였다. 단테의 시와 구약성서의 <욥기> 등을 위한 삽화가 남아 있다. 대표적인 시집 <순수의 노래(Songs of Innosence, 1798)>, <경험의 노래 (Songs of Experience, 1794)>는 어린이의 관점에서 쓴 문명 비판적 시들로서 그의 대표작으로 오늘날까지 널리 읽히고 있다.
바울성당에서 존던과 블레이크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고, 오늘은 금융가(City of London)를 여유있게 거닐며 국제금융의 심장소리를 들어보았다. 지하철역(Bank Station) 앞 광장에 우뚝 솟아있는 잉글랜드 은행과 그 옆의 왕립증권거래소 그리고 엘리엇이 다녔다는 로이드 뱅크를 비롯한 로이드 보험사 본관 건물, 잉글랜드은행 박물관 등은 세계 금융의 중심지로서의 옛 영화를 그대로 담고 있었다.
옛 왕립증권거래소(Old Royal Exchange)는 1566년 당시의 상인이었던 토마스 그레샴에 의해서 설립되었으며 1571년에는 엘리자베스 1세의 칙서를 받아 증권거래소로서의 역할을 시작하였다. 지금은 오피스 빌딩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1층은 쇼핑 아케이드, 지하는 레스토랑으로 사용되고 있다. 지하 음식점에서 간단한 점심식사를 마치고 1층에 있는 루비이통 가방 전문매장에 들러 아내를 위한 선물도 큰 맘먹고 구입했다.
현재 운영 중인 증권거래소(Stock Exchange)를 방문하였으나 모든 거래가 컴퓨터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건물 안에는 사무실 밖에 없고 오직 1층에 설치된 시세전광판이 열심히 숫자들을 바꿔가며 거래상황을 보여줄 뿐이었다.
영국중앙은행(Bank of England)은 스코틀랜드인 윌리엄 피터슨에 의해 설립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으로 1694년부터 은행업무를 시작하였다. 영국은행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은행박물관에는 각종 화폐들의 역사를 비롯한 금융과 경제관련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로이드(Llyod's)는 1688년 에드워드 로이드가 주식 매매상들을 위해 시작한 커피하우스가 발단이 되었다. 현재 빌딩은 파리 퐁피두센터를 설계한 리차드 로저스의 작품이라고 한다. 엘리엇도 한 때 로이드 은행에 근무한 적이 있었는데, 그의 사진을 보면 아주 단정한 모습이 전형적인 은행원의 모습이다.
<현재의 증권거래소> <영국 은행 박물관에 전시된 화폐들>
어제는 일요일이라 내부를 보지 못하여 오늘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에 들려 주로 시인코너(Poet's Corner)를 집중적으로 살펴보았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고딕 양식의 거대한 성공회 성당이다. 서쪽으로는 웨스트민스터 궁전과 인접해 있다. 부근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대성당(Westminster Cathderal)은 로마 가톨릭교회 소속으로 이곳 사원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다.
윌리엄 1세부터 현재의 엘리자베스 2세까지 대부분의 왕이 이곳에서 대관식을 올렸다. 왕실의 결혼식장과 무덤이 함께 공존하는 곳이다. 영국인들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가장 최고의 수도원이라고 여긴다. 웨스터민스터 사원에 묻힌 최초의 왕은 에드워드로 교회의 제단 뒤에 묻혀 있다. 최초의 대관식은 1066년 크리스마스 때 있었던 정복왕 윌리암의 대관식이다. 에드워드 5세와 에드워드 8세를 제외한 모든 군주가 이곳에서 왕관을 썼다. 대관식은 전통적으로 캔터베리 대주교가 주관한다. 겨우 9일 동안 통치하였던 제인 그레이는 대관식을 치르지 않아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사원 안에 있는 에드워드 어좌는 영국 왕위 계승자들이 대관식 직후 앉는 나무의자다. 1296년부터 1996년까지 의자 밑에 스코틀랜드의 역대 왕들이 즉위할 때 앉았던 스콘의 돌(The Stone of Scone)을 놓아두었으나, 지금은 대관식이 거행될 때를 제외하고는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 성에 보관되어 있다. 이 돌은 1296년 잉글랜드의 왕 에드워드 1세(Edward I)가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가져왔으나 1996년 스코틀랜드에 다시 반환되었다. 현재 맨스필드 백작 가문의 소유인 스코틀랜드 스콘성에는 모조품이 전시되어 있다.
시인코너(Poet's Corner)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남쪽 트랜셉트(십자형 교회의 좌우 날개 부분)에 있다. 여기에는 시인뿐만 아니라 극작가와 소설가는 물론 음악가 헨델 등도 묻혀 있다. 예술가들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유언 등에 따라 다른 곳에 묻혀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기념 부조나 기념비 등이 전시되어 있다.
내가 이번 여행에서 찾았던 문인들 중 여기에 묻혀있는 사람은 부라우닝(Robert Browning), 초오서(Geoffrey Chaucer), 디킨즈(Charles Dickens), 하디(Thomas Hardy), 존슨박사(Dr Samuel Johnson), 테니슨(Alfred Tennyson) 등이었으며, 기념비나 기념부조가 있는 작가들은 오스틴(Jane Austen), 블레이크(William Blake), 브론테(Brontë) 세 자매, 부룩(Rupert Brooke), 번즈(Robert Burns), 바이런(Lord Byron), 엘리엇(T. S. Eliot), 키츠(John Keats), 밀턴(John Milton), 스콧(Sir Walter Scott),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셸리(Percy Bysshe Shelley), 딜런 토마스(Dylan Thomas),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 등이다. 마침 한꺼번에 작별 인사를 올릴 수 있어 좋았다.
<웨스트민스터 사원 시인코너 바닥에 있는 작가들 비석들>
이들에게 단체로 작별인사를 고하고, 왕립증권거래소의 쇼핑 아케이드에서 아내가 신신당부한 결혼기념선물로 루비이통 가방을 사고는 공항으로 향하였다. 이번 여행에 동행하기로 했으나 외손주를 떼어놓을 수 없는 상황이어서 나 혼자 올 수 밖에 없었는데, 마침 7월 10일 결혼기념일을 빌미로 평생에 가져보지 못했던 명품을 하나 사오라는 엄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비싼 돈을 주고 왜 가방을 사는지 나는 잘 이해가 가질 않는다. 가방은 그저 실용적이면 되지 않겠는가.
영어 '백(bag)'은 '자루'를 뜻하는 스칸디나비아어 baggi에서 유래되었다. 기원전 9세기경 아시리아의 고대 유적에 부조(浮彫)된 날개 달린 신상(神像)의 손에는 네모난 핸드백이 들려 있다고 한다. 현대적 개념의 여행가방은 19세기 중엽 유럽에서 처음 등장했고 루이비통이 그 선구자였다. 목수의 아들인 루이비통은 파리에서 트렁크짐을 꾸리는 견습생으로 일하기 시작하여 1854년 파리 중심가에 첫 번째 매장을 연 뒤, 기차 화물칸에 쉽게 쌓아 올릴 수 있는 평평한 트렁크를 개발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여성들이 애용하는 핸드백은 20세기 들어 대중화되었으며, 상류층 여성이나 영화배우들이 유행을 선도하였다. 우리나라에는 19세기 말엽 양복과 양장이 들어오면서 함께 등장하였다. 1985년 런던에 루이비통 매장이 처음 생겼다고 한다.
영국을 떠나기 싫은 아쉬움에, 아침 지하철에서 본 워즈워스의 시에 나오는 웨스트민스터 다리를 왕복하며 템즈강에 작별인사를 건넸다. ‘웨스트민스터 다리위에서(Composed upon Westminster Bridge)’는 1802년에 워즈워스가 이른 아침 웨스트민스터 다리에서 본 런던을 노래한 소네트다. 워즈워스가 ‘세상에 이보다 아름다운 것을 없으리(Earth has not anything to show more fair)’라고 노래한 런던과, 동시대의 블레이크가 ‘런던(London)’이라는 시에서 묘사한 ‘내가 만나는 모든 얼굴에서/허약한 표정을, 비애의 표정을 본다(And mark in every face I meet/Marks of weakness, marks of woe.)’고 묘사한 런던은 극명하게 대비를 이루고 있다.
나는 블레이크의 시에 찬성표를 던지고 싶다. 각색 인종들의 전시장인 런던은 피정복자의 분노가 골목마다 서려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식민지에서 유입된 가난한 사람들이 런던에 몰려 사는 때문이 아닐까. 시골로 가면 비교적 품위있는 흰둥이들의 삶을 볼 수 있으나 런던은 지저분한 거리, 무질서한 거리 그러면서도 물가가 오지게 비싼 거리라는 인상을 버릴 수 없는 곳이 런던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과거를 먹고사는 런던이여, 다시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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