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끼는 후배가 있습니다. 72학번입니다. 똑 떨어지지요. 잘 생기고 영리하고 재치있으며 좌중을
사로잡는 유머가 끝내줍니다. 광고전문가인데 모모한 히트작들을 많이 만든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몇년전 샌프란시스코로 연수를 갔더랍니다. 3개월 단기연수라서 미국인 중년부부집에
홈스테이, 말하자면 하숙을 들었는데 영어는 별로 신통치 않으면서도 타고난 재치와 유머로 며칠
안돼서 그집 내외를 사로잡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다가 귀국날짜가 다가왔습니다. 며칠 뒤에 떠난다 생각하니 짧은 연수생활이긴 했지만 섭섭
하기 이를 데 없더라는 거지요. 샌프란시스코의 그 뛰어난 풍광을 두고 떠나는 것도 그렇지만 그
보다는 3개월동안 정이 듬뿍 들어버린 중년부부와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 더욱 아쉬웠답
니다. 그래서 이사람은 미국인 부부에게 자신을 기억할 수 있는 추억거리를 만들어주고 또 자신의
폼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묘안을 생각한 끝에 단골로 출입했던 한국음식점에 찾아가서 주인장께
도움을 요청했더랍니다.
"이러이러해서 저러저러한 상황인데 그러그러한 방법으로 도와주실 수 없겠느냐?"
"거 참 갸륵한 생각이다. 그렇다면 (소곤소곤소곤) 하도록 하자."
"좋다."
"그래? 좋다면 됐다."
이 사람은 하숙으로 돌아가서 부부에게 말했답니다.
" 3개월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그동안 참으로 고마웠다. 나는 평생 샌프란시스코가 떠오를
때마다 당신들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내일은 두 분을 만찬에 초대하겠다. 날 잊지말라는 뜻으로
한국음식으로 모시겠다."
"오우 그렇게까지 우리를 생각하다니 고맙다!"
"고맙긴, 오히려 내가 할 소리다."
약속날 저녁 이 사람은 그 부부를 데리고 약속시간 정확히 한국음식점에 도착했더랍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식당문에는 "CLOSED"라는 표지판이 붙어있고 유리창너머로 희미한 실내등
하나가 켜져 있을 뿐 식당은 정말 문을 닫은 모습이었답니다. 초청자의 입장을 생각한 미국인 부부가
오히려 민망해 하는데, 이 사람은 전혀 개의치 않고 문을 밀고 들어가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이건 또
웬 일입니까? 이들이 문을 밀고 들어서자 희미한 불빛속에서 갑자기 우뢰와 같은 박수와 환호성이
터지고 모든 실내등이 일제히 켜지면서 식당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이 미국인부부를
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부부는 당연히 어리둥절했고 어찌된 영문인지를 묻는 눈으로 이 사람을
바라보는데, 이 사람이 목에 힘을 주면서 더듬거리는 영어로 부부에게 이렇게 말했다는군요.
"오늘 이곳은 당신 부부를 위해서 만든 자리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모두가 나를 따르는 한국의
유학생들이다. 내가 이 사람들에게, 당신부부가 매일매일 정성을 다해서 나를 보살펴준다는 자랑을
여러번 했는데 내가 떠난다는 것을 알고 이들이 당신 부부 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한다며 이렇게
모였다. 이것이 한국인의 살아가는 방식이다. 오늘은 당신들의 날이다. 이들의 마음과 내 마음을
마음껏 받아주기 바란다!"
얼마나 근사합니까? 미국인 부부가 얼마나 감동 먹었겠습니까? 사실 식당에 가득 모인 사람들은
이 식당의 단골 유학생들이었답니다. 이 사람과 알거나 모르거나 말입니다. 그날 둘이서 소곤소곤소곤
할 때의 아이디어대로 식당주인은 오늘 찾아온 유학생들께 '이러이러한 일로 저러저러한 자리가 마련
되게 되었으니 여러분, 이렇게 저렇게 도와주실 수 없겠는가?' 하고 호소했더니 유학생들 또한 흔쾌
하게 '좋다, 도와보자.'해서 이렇게 된 것입니다. 어쨋든 그 미국인 부부 그날 기분 째졌겠죠.
그 다음 날이었답니다. 출국 하루 전이었다지요. 그 집에서 환송의 뜻으로 정성껏 마련한 저녁을
먹은 뒤 부인이, 예쁜 부인이 이 사람에게 드라이브를 청하더라는 거예요.
"야 임마! 너 아까부터 그 부인이야기 하려고 미주알 고주알 질질 끌어온거지?"
"형은 끝까지 들어보지도 않고..."
"마 들으나마나지 뭐..."
"형 언제부터 저질됐우?"
"너 얘긴 맨날 그렇잖아?"
"안 그런 날도 있어 형."
"뻔하잖아? 얼굴 짱이고 애교 만점인 부인이 나에게 추파를 뿌렸다. 그렇지만 난 과감히 뿌리쳤다.
가는 곳마다 여자들은 날 가만두질 못한다. 도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뭐 그런 왕자병이야기
아니겠어? 네 얘긴 우리나라 연속극같이 속이 빤히 들여다보여!"
"드라마에도 특집이 있잖우?"
"빨랑 끝내! 빨랑!"
부인은 이사람을 태우고 샌프란시스코를 드라이브하는데 야경 끝내주는 곳으로만 찾아 가더랍니다.
전망좋은 고지대로, 차량이 드문 호젓한 곳으로, 어느 곳에서는 차에서 같이 내려 영화에서처럼 몸을
바짝 들이대고 이곳저곳을 손가락질하면서 설명해주기도 하고...이 사람, 당시 상황을 얼마나 로맨틱한
표정으로 얘기하는지 흉내조차 낼 수 없어요.
그런 뒤에 이 부인이 차를 세운 곳은 어느 조용한 카페였다는군요. 가볍게 양주도 맥주도 파는 분위기
있는 술집 말입니다. 정말 분위기 있게 한잔씩 마시고 난 뒤 부인은 일어서서 모든 손님이 잘 보이는
바(bar) 앞으로 걸어나가더니 이렇게 연설을 하더랍니다.
"여러분! 나와 우리 남편은 3개월전에 어느 동양인 한사람을 우리집에 들도록 했습니다. 그 동양인은
처음에는 어색해했으나 불과 며칠이 지난 뒤에는 너무도 명랑하게 너무도 재미있게 우리와 가까워
졌으며 이제는 우리가족의 일원이 다 됐습니다. 그런데 그가 내일 우리를 떠난답니다. 나와 우리 남편
을 떠나고 우리 집과 우리 마을을 떠나고 무엇보다 우리 샌프란시스코를 떠난답니다. 저기 앉아 계시는
저 분입니다!"
예고없이 지적을 받은 이 사람은 순간 엉거주춤하게 일어섰지만 카페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져 나왔
답니다.
"우리 부부는 정말 저 분을 보내기 싫습니다. 그래서 나는 저 분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마음의 선물이
무엇일까 며칠동안 생각하다가 이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여러분! 나와 함께 이 선물을 저 분에게 주시
기를 부탁드립니다!"
연설을 마치며 그녀는 한쪽 모서리를 향해 눈짓을 보내더랍니다. 그랬더니 잠시후 그 카페에 있는
Juke Box에서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카페의 모든 사람들이 환호를 지르며 일어서서 이 사람을
바라보며 큰 소리로 그 노래를 합창하더랍니다.
"형! 그 노래가 말이요, 형이 좋아하는 가수 Julie London이 부른 그 노래인 거예요.“
"Fly me to the moon!"
"No!"
"When I fall in love?"
"No!"
"The end of the world?"
"No!"
"No? 너 영어 잘한다.“
“형보다는...”
“빨랑 말하지 못해?”
“I left my heart in SanFrancisco! 그 노래였어요. 솔직히 나 감동먹었습니다. 홀에 있는 사람들이 죄다
일어나 그 노래를 합창하는데 가슴 뭉클합디다. I left my heart in SanFrancisco! 자기 고장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자부심, 그런게 콱 와닿는 거예요. 멋지지 않아요?"
이 사람, 지긋이 눈을 감고 그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데 얄밉게도 끝까지 다 부르는 겁니다. 내가 지금
속으로 얼마나 부러워하는지는 생각하지도 않고, 건방지게 제 선배가 맥주를 세모금이나 마실 때 까지
도 그치질 않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