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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강 변질의 결과 1 : 교회분열 시대구분
인류역사를 고대와 중세, 근대와 현대로 구분한다.
학자들은 고대와 중세를 가르는 분기점으로 게르만민족에 의해 서로마제국이 멸망되었던 476년을 든다.
중세와 근대를 가르는 분기점으로 학자들은 가톨릭과 개신교가 분열되었던 1521년으로 본다.
근대와 현대를 가르는 분기점으로 학자들은 1914년-1918년까지 일어났던 제1차 세계대전으로 본다. 그 이후를 현대로 구분한다.
가톨릭교회는 로마제국의 혹독한 박해를 거치면서도 빠르게 제국으로 전파되어 마침내 313년 자유를 얻게 되었다. 자유는 좋은 것이었지만 교회의 순수성을 변질시켰다.
변질은 두 가지, 첫째 외적으로 가톨릭교회가 정치와 혼합되면서 '권위주의'에 빠지고, 둘째 내적으로 신앙생활이 '형식주의'로 빠진 것이 교회변질의 핵심이었다.
교회는 마치 교황이 다스리는 교황제국과 같이 되고, 성직자들은 권력자가 되었다. 그러다보니 권위주의라는 유전자가 성직자들의 피 속에 유전되게 되었다.
신앙생활도 기쁨과 행복이 넘치는 신바람이 아니라 국민이 국법을 지키는 것처럼 법을 철저히 지키고 순명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신앙생활이 형식으로 흐르기 쉬웠다. 미사와 기도는 열심하지만 미움과 질투는 여전했다.
성예로니모의 적절한 표현대로... 가톨릭교회는 권세와 부가 커졌지만, 덕은 작아졌다...
변질된 가톨릭교회에 점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교회는 거듭 스스로를 반성하고 회개와 쇄신이 필요하였다. 다행스럽게도 그때마다 뛰어난 개혁가들이 나타나 개혁을 추진하기도 하였지만, 교회전체의 개혁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부분적인 개혁으로 그쳤다.
이러한 변질의 극단적인 결과 중의 하나가 교회분열이었다.
일반적으로 교회분열을 종교개혁이라고 하지만...
'종교개혁'이라는 말은 적절한 용어가 아니다.
마르틴 루터가 다른 종교도 개혁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개혁이라는 말은 루터나 개신교 입장에서 보는 말이다. 가톨릭입장에서 보면 개혁이 아니라 배반이다. 가톨릭이나 개신교가 아닌 제3자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였던 가톨릭교회가 분열된 것이다. 그렇다면 '종교개혁'이라는 말보다 '교회분열'이라는 말이 더 객관적인 용어라고 생각된다.
사실 인간이 있는 곳 어디에나 분열이 있다. 가정에서도 부부사이에 미운 마음이 들고, 다투고, 마침내는 갈라서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분열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나약하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그렇기에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개혁이 필요한 것이다. 처음처럼...
종교의 분열은 일반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사실 타종교들도 여러 종파로 분열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가톨릭교회는 2천년 역사 안에서 두 번에 걸쳐 분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교회분열은 가톨릭교회의 가장 뼈아픈 실패라고 볼 수 있다.
1. 가톨릭교회와 정교회의 분열(1054년)
1) 분열의 경과
첫 번째로 가톨릭교회는 정교회와 분열되었다. 분열의 원인은 다음과 같다.
313년, 종교의 자유가 주어지고, 380년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었다.
395년, 로마제국이 동서로마제국으로 분열되면서 교회도 동서방교회로 나뉘어 지게 되었다. 서로마제국의 수도는 로마, 동로마제국 수도는 콘스탄티노플, 양제국은 서로 대립하게 된다. 그러면서 양국 교회의 수장들도 주도권을 놓고 대립하게 되었다.
로마를 중심으로 했던 '가톨릭교회'는 교황이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전체교회를 통제하는 최고의 권한인 '수위권'을 가진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했던 '정교회'는 교황이 전체교회를 대표하기는 하지만 다른 교회를 통제하는 권한은 없고, 양 교회는 서로 동등하고 자율적으로 운영된다고 맞섰다.
로마 교황은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종속을 요구한 반면,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로마교황의 독주를 거부하였다. 이러한 불화 속에 500년이 흘렀다. 이 불화의 골이 깊어지면서 점차 동서방 교회의 거리가 멀어지다가 드디어 양교회대표가 만나 담판을 짓게 되었다.
1054년, 로마 교황을 대표한 훔베르트 추기경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미카엘 케룰라리오스는 격렬한 대립 끝에 감정이 격화되었고, 마침내 서로를 단죄하고 파문하기에 이른다.
양 교회가 서로를 파문하였으니 실질적으로 유럽 전체가 파문상태였다. 이론적으로는 그때부터 가톨릭이든 정교회든 아무도 천국에 갈 수 없게 되었다.
1965년 12월 7일,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끝내면서 양 교회는 서로의 파문을 철회하고 화해하였다. 이론적으로는 성프란치스코, 소화데레사와 같은 분들이 대기상태로 있다가 그 날 부로 천국으로 오르게 된 것이다.
2) 양교회의 비교
(1) 용어
가톨릭교회를 서방교회, 라틴교회라고도 부르는 반면 정교회를 동방교회, 비잔틴교회라고도 부른다.
(2) 교회생활
정교회는 전통중시, 가톨릭교회는 세상변화에 적응, 교리는 거의 같다. 7성사도 꼭 같고 크게 다른 점은 없지만, 미사, 양형성체, 사제독신제 등 교회생활의 차이.
(3) 교회조직
가톨릭교회는 로마교황을 중심으로 중앙집권적으로 운영된다. 오늘날 신자 11억5천만.
정교회는 나라별로 독립적으로 운영된다. 그리스정교회, 러시아정교회, 루마니아정교회, 불가리아정교회 등. 오늘날 신자 2억5천만.
(4) 선교역사
정교회는 군사, 경제적으로 약해, 선교에 나서지 못해 동방지역으로 고정되었다.
가톨릭교회는 막강한 군사, 경제력을 앞세워 세계 식민지 건설과 함께 선교에 주력.
(5) 일치운동
1965년 12월 7일,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종료에 맞추어,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과 콘스탄티노플의 총 주교좌 대성당에서 1054년의 상호 파문을 폐기하였다.
그 이후 양 교회대표의 만남은 오늘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2001년, 교황 요한바오로2세는 그리스를 방문하여 역사 안에서 가톨릭교회가 정교회에 가했던 모든 잘못을 용서청하고, 두 교회가 서로 화해하고 협력할 것을 요청하였다. 교황은 나아가 시리아를 방문, 가톨릭교회가 이슬람에게 가했던 모든 잘못에 대해 용서를 청했다.
우리나라 정교회는 현재 서울마포구 아현동을 비롯, 부산, 인천, 전주, 양구, 춘천 등에 성당이 있고, 신자 2500명, 성직자 10여명 수도자 약간명으로 파악되고 있다.
2. 가톨릭과 개신교의 분열(1521년)
500년-1500년, 중세시기에 변질된 가톨릭교회의 폐해가 교회를 황폐화시켰다.
교회지도부는 권위주의에 물들어 있었고 무능했다. 곳곳에서 교회에 대한 원성이 높았다.
부도덕한 교황들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였고, 일부 수도자들은 종을 부리면서 수도생활을 하였다.
세상이 바뀌고 있었다. 중세가 무너지고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근대가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무조건적인 복종보다 인간의 삶을 중시하는 눈을 뜨게 되었다. 소위 인문주의...
교회는 변화되는 세상을 제대로 보고 세상의 요구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권위주의와 권력정신을 버리고 순수한 복음정신으로 돌아갈 것이 필요했다. 불행하게도 시급한 변화에 대처하기에는 교회가 노쇠한 공룡과 같이 너무나 무기력하였다.
특히 1500년대 유럽에는 교회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개혁을 요구했다. 하지만 수많은 개혁의 요구에 교회지도부는 안일하게 대처했고, 오히려 처벌과 단죄로 개혁을 제한했다. 나아가 더욱 강력한 복종과 순명을 강조하였고, 여차하면 종교재판으로 마녀로 몰아 화형시켰다. 마녀화형식은 당시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수백년간 계속된 마녀화형식으로 200여만명이 처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의 개혁가들
오랫동안 가톨릭교회는 꾸준히 개혁을 해왔지만 거듭 개혁이 필요했다. 다행히 많은 개혁가들이 꾸준히 교회개혁을 추진하였는데, 이들은 대부분 수도회를 창설하거나 여러 가지 방식으로 지리멸렬했던 가톨릭교회에 복음정신을 불러일으켰다.
안젤라 메리치(Angela Merici, +1540)는 우르술라회를 창설하였다.
천주의 요한(Johannes von Gott, +1550)은 자비의 우회라는 병자간호를 위한 공동체를 창설하였다.
가롤로 보로메오(Karl Borromäus, +1584)는 재속신부수도회인 헌신회를 설립하였다.
아빌라의 대데레사(Theresia von Avila, +1582)는 까르멜회수도자로 깊은 신비사상으로 수도회를 쇄신시켰고 특히 스페인과 프랑스 의 신심에 영향을 미쳤다.
십자가의 요한(Johannes vom Kreuz, +1591)도 까르멜수도자로 수도회의 쇄신과 신심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필립보 네리(Filippo Neri, 1515-1595)는 오라토리오회의 창설자로 로마에서 활약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영적인 활력을 불러일으켰다.
가밀로(Kamillus von Lelli, +1614)는 중환자와 임종자를위한 가밀로회를 창설하였다.
샹탈의 요안나(Johanna von Chantal, +1641)는 마리아 방문수도회를 창설하였다.
베드로 베륄(Peter von Berulle, +1629)은 프랑스의 오라토리오회를 창설하여 성직자교육에 헌신하였다.
장 자크 올리에(Jean Jacques Olier, +1657)는 파리의 쌩슐피스 본당신부로서 재속신부 수도회인 슐피스회를 창설하였다. 오늘날까지 파리의 쌩슐피스신학교는 프랑스의 가장 중요한 신학교육기관의 하나로서 프랑스의 모든 신학교의 전형이요 본보기가 되었고, 영국과 미국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
빈첸시오(Vinzenz von Paul, +1660)는 이웃사랑의 실천에 헌신하였다. 자비수도회를 창설하여 빈민구호와 병자간호에 봉사하도록 했다.
드 랑세(de Rance, +1700)는 트라피스트수도회를 창설했다.
요한 드 라 살(Jean Baptist de la Salle, +1719)은 그리스도교 교직회를 창설하였다.
이런 분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분이 바로 예수회를 창설한 이냐시오 로욜라(Ignatius von Loyola, 1491-1556)일 것이다. 예수회는 교회 내에 강력한 개혁정신을 불러일으켰다.
이들은 교회 곳곳에서 자선사업, 교육사업 등 세상을 위해 지칠 줄 모르게 헌신하였다.
마르틴 루터(1483-1546)도 개혁을 간절히 바랬던 신부였다. 하지만 루터는 급진적이었다. 다른 개혁가들처럼 교회 내에서 개혁하지 못하고 교회를 뛰쳐나가 새로운 교회를 세움으로써 가톨릭교회와 개신교로 분열되기에 이른다.
1) 마르틴 루터(1483-1546)
마르틴 루터는 독일북부 아이스레벤에서 태어나 아오스딩 수도회의 수사신부가 되었다. 공부를 계속한 루터는 성서신학박사가 되어 뷔텐베르그 신학대학 교수가 되었다.
루터는 열정이 강한 사람이었고, 당시의 많은 개혁가들처럼 가톨릭교회가 개혁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루터는 가톨릭교회 안에서 개혁하지 못하고 가톨릭교회 자체를 부정하고 새로운 교회를 세웠다.
이 교회가 루터교이고 이때가 1521년이었다.
루터교는 독일북부지역,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에 전파되었고, 우리나라에도 '한국기독교 루터교'라는 이름으로 들어와 있다.
루터가 세운 루터교의 본을 보고 가톨릭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너도 나도 새로운 교를 세우게 되었으니, 루터교는 개신교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렇게 되어 저마다 자기의 '주관적인 확신'으로 너도 나도 새로운 교회를 세우는 불행한 상황이 되었다. 저마다 자신의 교회가 진리라고 확신하는 반면, 상대교회에 대해 배타적이고 공격적이니 한 나라 안에서 종파가 다른 사람들이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또 나라끼리도 종파가 다르다는 이유로 대립하고 심지어 전쟁까지 하게 되니... 사람의 행복을 추구해야 하는 종교가 오히려 사람에게 불행을 가져오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2) 요한 칼빈(1509-1564)
비슷한 시기, 프랑스에서 태어나 법학과 신학을 공부한 평신도 요한 칼빈도 가톨릭교회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독일에서 새로운 교회를 세운 루터의 본을 본 칼빈은 교회를 세우기로 결심하고 스위스 제네바로 와서 새로운 교회를 세웠다. 이때가 1536년이었고, 이 교회가 장로교다.
장로교는 다른 종교에 대해 루터교보다 더욱 배타적이고 공격적이 되었다. 장로교는 네덜란드와 영국 등으로 전파되었고, 후에 미국으로 전파되어 세계화에 성공하게 되었다.
미국에서 장로교를 비롯한 개신교는 또 여러 종파로 분열되었다. 또 많은 신흥종파들도 생겨나게 되었다. 여호와의 증인, 안식일교, 몰몬교...
미국 장로교의 언더우드목사가 1884년 한국에 들어와 선교를 하면서 한국 장로교가 시작되었다. 언더우드목사는 연세대학교, 세브란스 병원을 세우면서 한국선교에 크게 성공하게 된다. 한국의 장로교도 여러 종파로 분열되었고, 통일교나 신앙촌과 같은 많은 신흥종파들도 파생되었다.
3) 헨리8세(1509-1547)
영국의 교회분열은 종교적인 이유가 아니라 당시 영국왕이었던 헨리8세의 개인적인 문제로부터 출발된 것이었다.
헨리8세는 스페인공주 가타리나와 결혼했지만 아들이 없었고, 젊고 아름다운 시녀인 앤 볼랜을 사랑한 나머지 왕비 가타리나와 이혼하려 하였다.
헨리8세는 교황에게 이혼을 허락해달라고 하였으나 교황은 거절하였다. 시녀를 너무나 사랑했던 헨리8세는 교황과의 관계를 끊고, 영국에서 가톨릭교회를 금지시켰다.
그리고 1533년, 독일의 루터를 본받아 영국에 독창적인 교회를 세웠는데, 이것이 성공회다. 헨리8세는 그의 처사에 저항하던 토마스 모어 총리대신과 같은 당시의 대신들 200여명을 처형했다. 성공회에서 침례교, 감리교가 갈라져 나왔다. 영국의 가톨릭은 13%로 파악되고 있다.
3. 평가
교회분열은 인류역사에 천추의 한으로 남을 뼈아픈 실패다.
당시 가톨릭교회지도부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변화의 트렌드를 읽지 못하고 중세의 낡은 시스템을 고집함으로써 사람들로부터 지탄을 받았다.
독일북부에서 일어난 조그만 불씨를 제대로 잡지 못하고 오만과 독선으로 안일하게 대처하다가 인류를 갈라놓는 거대한 폭풍이 되었던 것이다. 인류역사에 이보다 더 큰 손실이 어디 있겠나. 전쟁은 한때 지나가는 손실이지만, 교회분열은 아마도 종말까지 계속될 손실이 아니겠나.
교회의 부패는 교회지도부의 부패와 잘못된 제도를 말한다.
그러니 교회의 개혁은 지도부가 먼저 회개하고 잘못된 제도를 고쳐야 하는 것이다... 교회자체가 부패했다면 예수님이 세운 교회를 처음부터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당시의 가톨릭교회가 정치와의 혼합 속에서 많이 변질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교회의 부족함과 잘못을 반성해야 하는 것이지, 교회를 부정하고 새교회를 세울수는 없는것이다. 그렇게되면 그때마다 분열들이 줄을 이을 것이다.
교회가 부패할 때마다 새로운 교회를 세운다는 것, 비극이다.
1500년 된 가톨릭교회를 전부다 부정하고 새로운 교회를 세운다고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다. 루터가 개혁을 기치로 새로운 교회를 세웠고, 루터를 따라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세웠지만, 그 교회들도 여전히 크고 작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또 여기저기 신흥종파들이 계속해서 생겨나고 있지 않나.
당시 무능하고 개혁을 외면했던 가톨릭교회의 지도부가 원망스럽다.
또 35살의 젊은 혈기에 너무나 극단적인 방법으로 교회를 분열시킨 루터도 원망스럽다.
새로운 교회를 세울 것이 아니라 가톨릭교회 안에서 개혁했더라면 분열은 없었을 것을... 부패할 때마다 너도나도 새로 교회를 세운다면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나...
따라서 루터는 새로운 교회를 만들 것이 아니라 교회안에서 개혁을 했어야 했다.
힘이 부치면 다음 세대에 맡기고, 하느님의 섭리에 맡겨야 했다. 분열의 결과로 죄없는 후손들이 얼마나 더 큰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분열은 모두에게 큰 고통이다.
갈라진 교회 모두가 분열의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당시의 가톨릭지도부에도 책임이 있고, 교회 안에서 개혁하지 못하고 새로운 교회를 세움으로써 결국 수많은 분열이라는 결과를 낳은 루터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할 것이다.
어느 쪽이 더 책임이 있는지 정확히 헤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갈라진 교회 모두 상대방에 대해서 선의를 가지고 서로 함께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정교회와 개신교를 '갈라진 형제들'이라고 부르면서 화해의 정신을 가지자고 호소하였다. 가톨릭신자인 우리도 선조들의 잘못을 반성하고 그리스도교 전체의 일치를 위해 기도해야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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