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창의적 리더십
세종의 시대 조선은 유달리 창의력이 왕성했다. 세종대에 조선의 세계적인 발명은 29건이었는데
중국은 5건, 일본은 한 건도 없다. 한국과 중국을 제외한 나머지 나라는 모두 합해 28개라고 일본
도쿄대학에서 발행한 과학사사전이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세종대에 나온 새로운 발명은 무려 5천
건에 이른다. 가히 세종 르네상스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세종 르네상스를 이끈 세종의
창의적 리더십은 어디서 나왔을까? 최근에는 그의 불행한 유년 시절을 주목하고 있다.
1397년 조선 건국 5년째에 태어난 그는 피비린내 나는 두 왕자의 난을 온몸으로 겪으며, 정치게임
에서 생존하려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체득했다. 그 결과 어린 시절 이도(세종의 자)
는 아버지 태종에게 외갓집의 불충을 고자질해 민씨 일족을 도륙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또한 술자리
에서 시부를 지어 타인들과 비교하며 잘난 체 하기를 좋아했고 식성은 고기가 아니면 잘 먹지를 않아
몸이 비만해 평생 47가지 질병을 달고 살았다. 셋째 충녕이 두 형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을 제치고
대통(大統)을 이었다는 정통성의 시비도 지병처럼 따라 다녔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세종은 어떻게
영명한 군주가 될 수 있었을까? 먼저 독서를 들 수 있다. 세종은 눈에 안질이 생길 정도로 맹렬히 책
을 읽었다. 어쩌면 독서는 아버지 태종의 눈에 들기 위한 몸부림이자, 형제간 비교우위를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아버지 태종이 공부 잘하는 셋째아
들에 대한 만족감을 피력한 장면이 여러 번 나오기 때문이다. 어쨌든 셋째 충녕은 왕이 됐으나 상왕
태종의 권력은 기세등등했다. 태종과 그 곁을 맴도는 노신하들 때문에 자신의 포부를 마음대로 펼치
지 못했다. 게다가 즉위 이후 흉년이 계속됐고 재위 7년에는 대기근이 들어 민심이 폭발할 정도로
흉흉했다. 오죽했으면 강원도의 이각이 ‘지금 임금 때문에 못 살겠다. 차라리 양녕대군이 왕이 되었더
라면 이러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해 역모죄로 잡혀왔을까. 하지만 세종은 호학의 자세, 겸손과
인덕의 풍모로 평균 20세나 많은 태종의 늙은 대신들의 마음을 얻는데 성공했다.
어릴 때 모순덩어리였던 그가 섬김과 인본주의 리더십의 군주로 바뀐 데에는 독서를 통한 끊임없는
자기수양이 있었고, 한편으로는 임질(淋疾)이라는 극심한 병통이 있었다. 오늘날 세종의 임질은 성병
이 아니라 요로결석이라고 추측되지만 이 병을 통해 자신의 아픔뿐만 아니라 백성의 아픔도 대리체험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번은 재상 허조가 종묘에 제사를 드리러 올라갔다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다.
당시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겼던 종묘제사를 망쳤는데도 세종의 첫 일성은 ‘허조는 다치지 않았나?’
였다.그 다음 말은 ‘사람이 다치지 않도록 계단을 넓혀라.’였다. 허조의 실수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
언급도 없었다. 어느 누가 이런 세종의 배려에 감격하지 않겠는가. 결국 허조는 태종의 노대신 중
최초로 세종의 신하로 돌아섰고, 이후 세종을 위해 죽기 살기로 일을 하다 과로사했다. 비단 허조
뿐만 아니라 6진을 개척한 최윤덕 등 세종시대에 순직과 과로사를 한 신하들이 유달리 많았다.
마음에서 우러나는 감군은(感君恩)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세종의 리더십은 황희·허조·맹사성
와 같은 명재상, 김종서·최윤덕과 같은 명장, 이천·장영실·이순지과 같은 불세출의 과학자, 성삼문·신숙
주와 같은 뛰어난 집현전 학자를 창조의 길로 이끌어 세종 르네상스를 만들고 조선조 500년의 표준을
세웠다. 그 결과 조선의 산업은 풍성했고 국방도 튼튼했다. 조선 건국 당시 국민 1인당 GNP는 불과 80
달러였는데 세종 때 GNP는 200달러로 세 배로 늘어난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1960년 우리나라 GNP가
80달러인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경제수준이 아닐 수 없다. 세종실록에는 세종의 나라가 어땠는지를 다
음 한 구절로 요약하고 있다. “왜인과 야인들도 세종의 위엄을 두려워하고 덕을 사모했고, 세종 30년간
백성은 전쟁을 보지 않고 편히 살면서 생업을 즐겼다(倭野人畏威懷德 三十餘年之間 民不見兵 按堵樂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