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김씨(慶州金氏)는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敬順王)의 아들들 중
셋째 아들 영분공(永芬公) 김 명종(金 鳴鍾)과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김 은열(金 殷說)의 후손으로 이루어진 성씨다.
여기에 세계(世系)는 알수없는 장군 김순웅(金順雄)의 후손들도 경주(慶州)를 본관으로 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김(金)씨는 크게는 수로왕계(首露王系)의 김씨(金氏)를 제외하고는 모두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이다.
신라에서 김(金)씨 왕계(王系)가 내려오면서 김주원(金周元)의 후손인 강릉김씨(江陵金氏)처럼
도중의 인물을 분관조(分貫祖)의 세계(世系)는 정확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신라 왕실의 후손이었던 경주김씨(慶州金氏)가 신라가 망한 후 고려조에서 어떠한 위치에 있게 되었는 지는 중요한 문제다. 왜냐 하면 처음에 차지하게 된 위치에 의해 고려시대 5백년간,더 멀리는 조선 5백년 간에도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敬順王) 김부(金傅)는 고려 태조 18년(935) 백관(百官)에 손국(遜國), 신라를 넘겨주었다.
이에 왕건(王建)은 김부(金傅)를 관광순화위국공신(觀光順化衛國功臣)ㆍ상주국(上柱國)ㆍ
낙랑왕(樂浪王)ㆍ정승(政丞)에 봉하였다.
이 지위는 태자(太子)의 위에 있었다.
식읍(食邑) 8천호를 주고, 매년 1천석의 녹(祿)을 주며 경주를 식읍(食邑)으로 주었다. 이러한 대우는 전에 없던 것이었다.
이는 물론 신라세력을 회유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왕건(王建)은 큰 딸 낙랑공주(樂浪公州)를 김부(金傅)에게 부인으로 주고,
김부(金傅)는 백부(伯父) 김억렴(金億廉)의 딸을 왕건(王建)의 후비(신성왕후(神成王后))로 들여보낸다.
두 나라 왕실간의 정략결혼으로 서로에게 도움이 되게 하고자 했던 것이다. 고려조에서 경주김씨(慶州金氏)의 세력은 김부(金傅)의 사위인 경종(景宗)과 신성왕후(神成王后)의 소생인 안종(安宗)(욱(郁))의 아들 현종(顯宗)이 왕위를 계승함으로써 더욱 굳게 된다. 경종(景宗)의 비 헌숙왕후(獻肅王后)는 김부(金傅)의 딸이었다.
이에 경종(景宗)은 즉위하자 상부(尙父)ㆍ도성령(都省令)의 호를 더하고 식읍(食邑)을 1만호로 늘린다.
신라의 왕족은 고려조에서도 큰 세력을 형성,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김부(金傅)의 조카딸인 신성왕후(神成王后)는 현종(顯宗)의 할머니다.
이후 고려 왕실이 현종(顯宗)의 후손에서 이어졌으므로 고려왕실은 신라왕실의 외손이라고 한다.
그래서 김부식(金富軾)은 ‘삼국사기’ 사론(史論)에서 “우리 태조(太祖)는 비빈(妃嬪)이 많고
그 자손이 또한 번연하고, 현종이 신라의 외손으로 보위(寶位)에 올랐으며 이 뒤로 왕통의 계승자는 모두 그 자손이니, 어찌 음덕의 갚음이 아니리요”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고려초 고려의 지배세력으로 자리잡은 경주김씨(慶州金氏)는고려전기 최고 문중으로 행세할 수 있었다.
고려 인종조의 김부식(金富軾)대에 이르러 가문의 성세는 절정에 달하였다. 고려 중기에 이르러 정중부, 이의방 등이 중심이 된 무인(武人)정권이 들어서자 종래의 문신(文臣)세력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문신(文臣)의 관을 쓴 자는 남김없이 죽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경주김씨(慶州金氏)도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더구나 무인정권 수립 후인 명종조에 경주지방을 중심으로 해서 일어난 신라 부흥운동이
무인정권에 의해 진압되었으므로 신라계 출신세력들은 큰 피해를 보아 세력이 위축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상당수의 문벌귀족은 무인정권과 혼인관계 등으로 맺어져 그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경주김씨(慶州金氏)는 최충헌일가와의 혼인으로 세력을 유지하였다. 이와같이 하여 경주김씨(慶州金氏)는 몽고의 침입 이후까지도 고려의 대표적인 문벌로 되어 있었다.
충선왕 때에 왕실(王室)과 결혼할 수 있는 재상지종(宰相之宗) 10가문(家門)을 정했는데,
이 때 경주김씨(慶州金氏)는 순경태후(順敬太后)의 집안으로 가장 먼저 언급되고 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경주김씨(慶州金氏)는 대표적 권문(權門)의 지위를 유지했다.
김균(金稛)이 이성계(李成桂)의 혁명에 동참, 개국공신(開國功臣) 52명에 참가하였고
뒤에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이성계(李成桂)의 휘하 출신인 김인찬(金仁贊)도 경주김씨(慶州金氏)의 후손인데,
개국공신(開國功臣) 1등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경주김씨(慶州金氏)는 오늘날에까지 대표적인 문중의 하나로 남아 있다. 경주김씨(慶州金氏)는 영분공(永芬公), 대안군(大安君), 장군공(將軍公)에서부터 따져도
1천년 이상 된 문중이고, 그 숫자도 1백 80만명 이상 이므로 분파도 많다.
크게는 김명종(金鳴鍾)의 후손이 영분공파(永芬公派),
김은열(金殷說)의 후손이 대안군파(大安君派),
김순웅(金順雄)의 후손이 장군공파(將軍公派)로 3분(分)된다.
영분공파(永芬公派)는 영분공(永芬公)의
11세손 김인경(金仁鏡)을 파조(派祖)로 하여 명암공파(明庵公派)라 한다.
김인경(金仁鏡)의 후손에서
김충유(金冲裕)의 후손이 두계공파(杜溪公派),
김충한(金冲漢)의 후손이 수은공파(樹隱公派),
김충보(金冲保)의 후손이 시어사공파(侍御史公派),
김충익(金冲益)의 후손이 참찬공파(參贊公派).
김충원(金冲源)의 후손이 밀직공파(密直公派),
김천서(金天瑞)의 후손이 월성부원군파(月城府院君派),
김생수(金生水)의 후손이 호조참의공파(戶曹參義公派), 김 류(金 鏐)의 후손이 강릉공파(江陵公派),
김상한(金相漢)의 후손이 부사공파(府使公派),
김정심(金正深)의 후손이 현령공파(縣令公派),
김남보(金南寶)의 후손이 병조판서공파(兵曹判書公派),
김남분(金南賁)의 후손이 판삼사사공파(判三司事公派),
김남길(金南吉)의 후손이 평장공파(平章公派),
김남귀(金南貴)의 후손이 밀직부사공파(密直副使公派)이다.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후손은 본파(本派) 외에 몇 개의 분파(分派)가 있다.
김장유(金將有)의 후손이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이고, 거기에서 다시
김황(金黃)의 후손이 참교공파(參校公派),
김적(金赤)의 후손이 사직공파(司直公派),
김광(金光)의 후손이 장암공파(壯菴公派),
김정(金淨)의 후손이 충암공파(冲菴公派)이다.
대안군(大安君)의 증손 김렴(金濂)의 후손에서
김경손(金慶孫)의 후손이 문간공파(文簡公派)
김덕재(金德載)의 후손이 병판공파(兵判公派),
김문기(金文起)의 후손이 백촌공파(白村公派),
김존일(金存一)의 후손이 장사랑공파(將仕郞公派),
김인찬(金仁贊)의 후손이 익화군파(益和君派)로 나누어졌다.
김인관(金仁琯)의 후손은 태사공파(太師公派)이다.
거기에서 다시 김자정(金子汀)의 후손이 전서공파(典書公派),
김자수(金自粹)의 후손이 상촌공파(桑村公派),
김자공(金自恭)의 후손이 우재공파(愚齋公派),
김수량(金遂良)의 후손이 송재공파(松齋公派)이다.
상촌공(桑村公)의 후손은 다시 손자대에서 4개 파로 나누어졌는데
김영년(金永年)의 후손이 판관공파(判官公派),
김영원(金永源)의 후손이 좌랑공파(佐郞公派),
김영전(金永湔)의 후손이 사승공파(司丞公派),
김영유(金永濡)의 후손이 공평공파(恭平公派)다.
장군공(將軍公)의 후손은
조선 개국공신 김균(金稛)의 후손이 계림군파(鷄林君派),
김후성(金後誠)의 후손이 현령공파(縣令公派),
김영로(金榮老)의 후손이 연동공파(蓮洞公派),
김순(金恂)의 후손이 춘고공파(春皐公派)다.
이 외에 고려 국초에 주장(州長)으로 임명된 김위영(金魏英)의 후손으로 이어지는 김부식(金富軾) 계통이 호장공파(戶長公派)다.
영분공(永芬公) 김명종(金鳴鍾)은 경순왕(敬順王)이 손국(遜國)한 후 경주군(慶州君)으로 봉해졌다 하며, 동생 김은열(金殷說)은 공부시랑(工部侍郞)을 지내고 대안군(大安君)에 봉해졌다 한다. 김순웅(金順雄)의 계대(系代)는 분명치 않으며, 장군(將軍)을 지냈다. 한다.
김인위(金因渭)는 고려 현종의 장인인데, 평장사(平章事)로 있다가 1024년(현종 15) 딸이 덕비(德妃)로 책봉되자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참지정사(參知政事), 주국(柱國), 경조현개국남(京兆縣開國男)이 되고 이어 치사(致仕)했다.
김원정(金元鼎)은 덕종 3년 감찰어사(監察御使)가 된 후, 문종조에 어사대부(御史大夫),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使), 중추원사(中樞院使),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상주국(上柱國)을 역임하고 1063년 수태위문하시중(守太尉門下侍中)이 되었다. 김원충(金元冲)은 고려 정종ㆍ문종의 장인이다.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때 딸이 정종비가 되고, 문종 1년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에 오르고, 작은 딸이 문종비가 되었다.
그 후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판상서형부사(判尙書刑部事)를 거쳐 수사도(守司徒)ㆍ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었다. 정종묘정에 배향되었다.
김원황(金元晃)은 문종 때 공부상서(工部尙書), 병부상서(兵部尙書), 중추원사(中樞院使)를 역임했다.
고려시대의 인물로는 김부식(金富軾)과 그의 집안을 빼놓을 수 없다.
김관(金觀)은 주장(州長) 김위영(金魏英)의 손자이며 김부식(金富軾)의 아버지다.
시문(詩文)에 뛰어나 박인량(朴仁亮)과 그가 지은 시문(詩文)을 모은 ‘소화집(小華集)’이
송(宋)나라에서 간행되기도 하였다.
선종 때 예부시랑(禮部侍郞)을 거쳐 국자좨주(國子祭酒)ㆍ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에 이르렀다.
부필(富弼), 부일(富佾), 부식(富軾), 부의(富儀)(부철(富轍))의 다들 4형제가 모두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또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다. 김부필(金富弼)은 선종 5년 문과에 급제, 예종 2년 윤관(尹瓘)의 여진정벌 때 병마판관(兵馬判官)으로 출정하였다.
김부일(金富佾)은 어려서 문과에 급제, 직한림원(直翰林院)으로 추밀원사(樞密院使)를 따라서 송나라에 사행(使行)하여 명문(名文)으로써 송나라 황제 철종의 찬사를 받았고, 예종 때 예부랑중(禮部郞中)이 되었다.
그 때 요(遼)나라가 여진(女眞)을 치려고 고려에 원병을 청하자 모든 대신이 찬성했으나, 아우 부식(富軾)과 함께 윤관(尹瓘)의 여진정벌 직후이므로 출병(出兵)하는 것이 불가(不可)하다고 역설했다.
직학사(直學士)에 올라 왕을 비롯하여 보문각(寶文閣) 유신(儒臣)들에게 경사(經史)를 강론, 이름을 떨쳤다.
1122년 인종이 즉위하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使), 정당문학(政堂文學),한림원학사승지(翰林院學士承旨)가 되고 1127년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로 승진, 뒤에 수태위개부의동삼사비서성사(守太尉開府儀同三司秘書省事), 주국(柱國)에까지 이르렀다. 김부식(金富軾)은 경주김씨(慶州金氏)의 인물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일 뿐만 아니라
고려시기 귀족관료의 전형적인 인물이다. 자(字)는 입지(立之), 호(號)는 뇌천(雷川)이며
사후에 문열(文烈)의 시호가 내렸다.
숙종 때 문과에 급제, 안서대도호부(安西大都護府)의 사록(司錄), 참군사(參軍事)가 되고,
직한림(直翰林), 우사간(右司諫)을 거쳐 중서사인(中書舍人)이 되었다.
1122년(인조 즉위)보문각대제(寶文閣待制)로 있을 때 이자겸(李資謙)이 국구(國舅)로서
군신의 예에 벗어나는 행동을 하자 이를 충고하여 시정케 했다.
박승중(朴昇中), 정극영(鄭克永)과 함께 ‘예종실록(睿宗實錄)’을 수찬, 호부상서(戶部尙書)ㆍ
한림학사(翰林學士), 승지(承旨), 평장사(平章事)를 거쳐 수사공(守司空)에 올랐다. 그는 인종조에 묘청의 난을 진압한 장군으로도 유명하다.
1134년(인종 12년) 묘청이 도참설로써 왕을 설득하여 서경(西京)에 천도하려고 하자 극력 반대하여 중지시켰고, 이듬해 묘청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원수(元帥)로서 중군장(中軍將)이 되었다.
이어 정지상(鄭知常), 백수한(白壽翰), 김안(金安) 등을 반도(叛徒)들과 내통했다고 하여 죽였다.
좌군장 김부의(金富儀)와 우군장 이주연(李周衍)과 함께 출전하여 10여개월 만인 이듬해 2월 성을 함락, 난을 평정했다.
그 공으로 한충정난정국공신(翰忠定難靖國功臣)에 봉해지고, 검교태보수태위문하시중(檢校太保守太尉門下侍中), 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 감수국사(監修國史), 상주국겸태자태보(上柱國兼太子太保)가 되었다.
묘청의 난을 역사상 제일의 큰 사건으로 평가하는 단재 신채호 등은 김부식(金富軾) 등을 사대주의자로 단죄하기도 한다. 그러나 묘청의 난은 개성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 문벌귀족세력과 이에 대항해 새로이 세력확장을 꾀해보려는서경세력과의 정치적 충돌이며, 아울러 김(金)의 압력에 대한 반발에서 초래된 것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사대주의자 운운은 사실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고려시기의 지배사상에 가장 충실했던 한 모습임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김부식(金富軾)은 그 후 집현전태학사(集賢殿太學士), 태자태사(太子太師) 등을 다시 겸했고,
1142년에 벼슬을 물러나자 동덕찬화공신(同德贊化功臣)이 되었다. 의종이 즉위하자 낙랑군개국후(樂浪郡開國侯)에 봉해졌다.
사후 중서령(中書令)에 추증, 인종묘정에 배향되었다. 그는 문장가로서도 이름이 있었다.
송(宋)의 사신 노윤적(路允迪)이 왔을 때 관반(館伴)으로서 이를 맞이 했는데,
같이 왔던 서경(徐競)이 문장과 고금의 음악에 통달한 그를 보고 감탄하여 ‘고려도경(高麗圖經)’에다 그의 집안을 소개, 송황제에게 바침으로써 송나라에도 그 이름이 알려졌다. 그러나 그가 남긴 업적 중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최초의 정사(正史) ‘삼국사기(三國史記)’의 편찬을 주재하여 오늘에 남기고 있는 점이다.
치사(致仕)한 후 왕명(王命)에 의하여 그의 집에 ‘삼국사기’ 편찬실을 설치하고 국사(國史)를 감수(監修)하여 오늘에 전했다. 그는 ‘인종실록(仁宗實錄)’의 편찬을 주재했고 대각국사 의천(義天)의 비문 및 ‘진낙공중수청평산문수원기(眞樂公重修淸平山文殊院記)’ 등을 지었다.
문집(文集) 20여권이 있었으나 전하지 않는다.
김부의(金富儀)는 숙종 2년 문과에 급제 후 직한림원(直翰林院), 감찰어사(監察御使)를 지냈다.
1177년 금나라 사신이 와서 고려와 형제국(兄弟國)이 되기를 청하자 금나라를 회유하기 위해 화의 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문을 올렸으나 재상의 저지로 왕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인종이 세자로 있을 때 첨사부사직(詹事府司直)이 되어 문학(文學)으로써 우대를 받았고,
인종이 즉위하자 어사중승(御史中丞)에 특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송나라에 다녀왔다. 그 후 이(吏)ㆍ호(戶)ㆍ예부상서(禮部尙書)를 거쳐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를 역임했다.
묘청(妙淸)이 서경 천도를 주장하자 형 김부식(金富軾) 등과 함께 극력 반대했고, 이듬해 묘청이 반란을 일으키자 평서(平西)10책(策)을 올리고 좌군수추밀원사(左軍帥樞密院使)가 되어 출정했다. 그 후 지추밀원사지제고(知樞密院事知制誥)에 이르렀다.
김의진(金義珍)은 문종 때에 문신(文臣)이며 영분공(永芬公)의 7세손이다.
사학(私學)을 세워 후진을 양성, 12공도의 하나인 양신공도(良愼公徒)를 육성했다.
문종 초에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이어 지상서이부사(知尙書吏部事), 좌산기상시동지중추원사(左散騎常侍同知中樞院事)를 거쳐 문종 19년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지공거(知貢擧)가 되었다.
판상서병부사(判尙書兵部事) 등을 역임하고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시호(諡號)를 양신공(良愼公)이라 하였다. 김후덕(金侯德)은 김의진(金義珍)의 아들이다.
병부시랑(兵部侍郞) 김양감(金良鑑), 한림(翰林) 이용(李容), 공부시랑(工部侍郞) 박시중(朴時中)과 함께 1073년 (문종(文宗) 27년) 중국에 들어가 태묘태학(太廟太學)을 그려 고려에 돌아왔다.
우리나라에 문묘(文廟)를 처음으로 설치하고 침잠(沈潛)한 성리학(性理學)을 일으켜 유림(儒林)의 종맹(宗盟)이 되었다고 한다. 김돈중(金敦中)은 김부식(金富軾)의 아들로 촛불로 견룡대정(牽龍隊正) 정중부의 수염을 태워
무신(武臣)들의 반란에 한 매개작용을 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1170년(의종 24) 정중부가 보현원(普賢院)에서 난을 일으켰을 때 살해되었고, 그의 동생 상서우승(尙書右丞) 김돈시(金敦時)도 살해되었다.
김인경(金仁鏡)은 김의진(金義珍)의 4대손이다.
명종 때 문과에 급제, 직사관(直史館)을 거쳐 기거사인(起居舍人)이 되었다.
고종 초 조충(趙冲)이 강동성에서 거란군을 토벌할 때 판관(判官)으로 출전하여 큰 공을 세우고,
예부랑중(禮部郞中)을 거쳐 추밀원우승선(樞密院右承宣)이 되었다.
고종 14년 修贊官으로 ‘명종실록(明宗實錄)’을 찬수(撰修)하였다.
그 후 형부상서(刑部尙書)ㆍ한림학사(翰林學士)ㆍ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역임하였다.
고종 19년 개성정부가 강화로 천도하자 왕경유수병마사(王京留守兵馬使)가 되었다.
그 뒤 정당문학(政堂文學), 이부상서(吏部尙書), 감수국사(監修國史)를 지내고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시(詩)에 능하고 예서(隸書)에 뛰어났다. 시호(諡號)를 정숙(貞肅)이라 하였다.
원(元)의 침입 이후 김(金)씨의 후손 중에서 일연(一然)을 빼놓을 수 없다.
처음 이름은 현명(見明)이었고 원래 장산군(章山郡)(경산)에 거주하였다.
9살에 해양(海陽)(안양(安陽)) 무량사(無量寺)에서 출가하여 강석(講席)과 선림(禪林)을 편역(遍歷), 구산사선지도(九山四選之道)란 명(名)을 얻었다.
22세에 선(禪)의 상상과(上上科)에 오른 후 포산(包山)의 보당암(寶幢庵), 묘문암(妙門庵), 무주암(無住庵) 등에서 깨달음을 얻고 다시 남해 정림사(定林寺)에서 살았다.
원종 2년 56살에 조(詔)를 받고 부경(赴京)하여 선월당(禪月堂)에서 개당(開堂)하였으며
목우화상(牧牛和尙)의 법(法)을 이었다.
4년 후에 남환(南還)하기를 청하여 범어사(梵魚寺)에 우거(寓居)하다가 인홍사(仁弘社)를 주(主)하매 학도(學徒)가 운집하였다. 충렬왕 3년 왕명으로 운문사(雲門寺)에서 살았고 2년 후 국존(國尊)의 책명을 받아 원경충조(圓徑冲照)라 하였는데
스스로는 무극노인(無極老人)이라 하였다. 수십년에 걸친 몽고군의 침략 앞에 당시의 백성들은 내버려져 있었고 개성정부는 강화로 피신하여 지배층의 사치한 생활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후에는 몽고에 예속된 정부로 왕실 및 지배층으이 안전을 보장받았다.
그럼에 따라 백성에 대한 수탈은 더해가서 백성들의 마음은 점점 그들에게서 떠나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개성정부는 일연(一然)과 같은 지식층을 그들의 체제에 포섭, 우대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사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연(一然)은 이러한 정부를 떠나 도탄에 빠진 백성들과 함께 하려고 했다.
그가 여러번에 걸친, 승려로서의 최고의 영예인 국존(國尊)에까지 오르게 되어도 굳이 왕경(王京)에서멀리 떨어진 남쪽으로 돌아가고자 한 것은 그러한 사실을 나타내준다. 일연(一然)은 ‘인각사보각국존정조탑비(麟角寺普覺國尊靜照塔碑)’에 의하면 1백여권의 저술을 남겼으나 전하는 것은 거의 없다.
그 중에서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삼국사기’와 더불어 우리나라 삼국(三國)이전의 역사를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삼국사기’에 빠진 고기(古記)의 기록들을 원형대로 전해준다.
고대의 신화, 전설, 민속, 사회, 옛날 말 등등을 금석문(金石文)이나 고적(古籍)에서 인용해 전해준다.
특히 향가(鄕歌) 14수는 다른 문헌에서 찾을 수 없는 귀중한 것이다. 김봉모(金鳳毛)는 음보로 관직에 나아갔다. 외국의 방언(方言), 속어(俗語)에 능하여 금나라 사신이 오면 반드시 관반(館伴)이 되어 접대했고, 나라의 대사에는 항상 전례(典禮)가 되어 일을 보았다.
인진사(引進使)에서 판합문사(判閤文事)에 오르고 중서문하평장사(中書門下平章事), 태자태부(太子太傅)에까지 이르렀다.
시호(諡號)를 정평(靖平)이라 하였다. 김약선(金若先)은 김태서(金台瑞)의 아들이며 권신 최우(崔瑀)의 사위다.
그의 딸이 원종비 순경왕후(順敬王后)가 되었다. 추밀부사(樞密副使)를 지냈다.
최우의 부중(府中) 여자드을 망월루 모란방에 모아놓고 음란한 직을 하다가 처형되었다. 김군수(金君綏)는 비명에 간 김돈중(金敦中)의 아들이다.
명종 때 문과에 급제,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다.
고종 5년 거란병이 침입하자 조충(趙冲)의 후임으로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가 되어 숙주, 영청 등지에서 적을 쳐 4백여명을 죽이고 말 50여필을 빼앗았다. 이듬해 의주에서 한순(韓恂)ㆍ다지(多智)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지중군병마사(知中軍兵馬使)로서 이를 치고, 선무사(宣撫使) 이공로(李公老)와 상의하여 금나라 원수 우가하(亐哥下)에게 서신을 보내 회유, 한순ㆍ다지의 목을 베게 했다.
그러나 앞서 우가하에게 서신을 보낼 때 병마사 김취려에게 알리지 않았다 해서 한남(漢南)(수원(水原))에 유배되었다.
시문에 능하여 보조국사비명(普照國師碑銘)을 찬(撰)하고 그림은 대(죽(竹))을 잘 그렸다. 김숙흥(金叔興)은 은 현종 2년 거란군의 침입 때 전사, 그 공으로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에 추증되었다. 김경용(金景庸)은 숙종, 예종조의 문신(文臣)인데, 문하시중(門下侍中)ㆍ상주국(上柱國)을 지냈으며 협모위사치리공신(協謀衛社致理功臣)이 되었다.
후에 수태사낙랑군개국후(守太師樂浪郡開國侯)에 봉해지고 광국동덕익성공신(匡國同德翊成功臣)이 되었다.
김경손(金慶孫)은 고종 18년 정주분도장군(定州分道將軍)이 되어 몽고군을 대적하여 싸웠다.
고종 24년 광주(光州)등지에서 일어난 이연년(李延年)의 반란을 격퇴시켰고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에 이르렀다.
그러나 민심(民心)을 얻은 화근으로 최항(崔沆)의 시기를 받아 백령도에 유배되었다. 김인관(金仁琯)은 예종 때 위위사경(衛尉寺卿)ㆍ검교태자태사(檢校太子太師)를 역임하였다. 김상기(金上琦)는 선종묘정에 배향된 인물이었다.
수사도문하시랑(守司徒門下侍郞),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를 거쳐 태부(太傅)에 이르렀다.
김혼(金琿)은 왕을 원나라로 호종하여 추성익대공신(推聖翊戴功臣),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지고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이르렀다. 김진양(金震陽)은 고려말의 사대부(士大夫)로 ‘고려사’에 입전(立傳)된 인물이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 검열(檢閱)이 되고,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친 후 서해도안렴사(西海道安廉使)로 부임하였다.
공양왕 2년 이초(彛初)의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그 중대함을 논하다가 이를 경솔히 누설했다 하여 파면되었으나, 다시 기용되었다.
이확(李擴), 이래(李來), 이감(李敢) 등과 함께 조준(趙浚), 정도전(鄭道傳), 남은(南誾), 윤소종(尹紹宗) 등이 변란을 꾸며 민심이 흉흉하다고 상소하여 정도전 일파를 유배시켰다.
그 후 정몽주(鄭夢周), 이색(李穡) 등과 함께 이성계(李成桂)를 제거하려다가 실패, 도리어 귀양가서 죽었다.
김존일(金存一)은 고려말에 장사랑(將仕郞)을 지냈다.
그의 아들 김인찬(金仁贊)이 조선개국공신으로 익화군(益和君)에 봉해지고 양근김씨(楊根金氏)의 시조가 되었는데,
그 후손에서 일부는 경주김씨(慶州金氏)를 이었으므로 후손들이 김존일(金存一)을 파조(派祖)로 하였다.
김장유(金將有)는 고려말에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내다가 정국이 어지러워지자 보은에 은거하였다.
김천서(金天瑞)는 도학지종(道學之宗)이라 불리었다.
관직이 판예빈사사(判禮賓寺事),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에 이르렀다.
고려의 국운이 기우는 것은 인력(人力)으로 붙잡을 수 없다고 하여 관악산에 은거하였다.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는 공민왕 23년 문과에 장원하고 공양왕 때 대사성(大司成)ㆍ세자좌보덕(世子左輔德)이 되었다.
이 때 천변(天變)이 자주 일어나자 숭불(崇佛)의 폐단을 지적하고 연복사탑(演福寺塔)의 중수를 중지하도록 청했다. 뒤에 좌상시(左常侍)ㆍ형조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으나 고려가 망하자 안동에 은거했다. 조선 태종 때 자결했다.
계림군(鷄林君) 김균(金稛)은 고려말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냈고, 조선 개국공신 3등이 되어 숭록대부(崇祿大夫)ㆍ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을 역임했다.
후손이 경주김씨의 대표적인 일문(一門)을 이루고 있다.
김인찬(金仁贊)은 우왕 2년에 북청천호(北靑千戶)였다.
북청(北靑)의 토착세력이었던 듯하며 이성계(李成桂)의 개국 후 중추원사(中樞院使)ㆍ의흥친군위동지절제사(義興親軍衛同知節制事)가 되었다.
죽은 후 개국공신 1등으로 익화군(益和君)에 추봉되었다.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는 세종 8년 문과에 급제, 이조판서(吏曹判書)에까지 이르렀다.
세조 2년 성삼문(成三問) 등과 함께 단종복위(端宗復位)를 꾀하다가 영월현감(寧越縣監)으로 있던 아들 현석(玄錫)과 함께 살해되었다.
자손들은 각 처로 은신하여 김해김씨(金海金氏)로 행세하고, 수백년을 지내다가 수로왕계(首露王系) 김해김씨(金海金氏)와의 혼동을 피하고자 조정의 윤허(允許)로 경주김씨(慶州金氏)로 환원하였다.
그에 앞서 명종(明宗) 때 5세손 희년(禧年)이 비로소 금고(禁錮)가 해제되었고, 숙종 6년 강화유수 이선응의 상소로 1718년 신원(伸寃), 1731년 복관(復官)되었다.
1791년 장릉홍전(長陵紅箭) 앞에 단을 쌓고 매년 한식(寒食)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김영유(金永濡)는 세종 29년 문과에 급제,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를 거쳐 개성부유수, 황해도관찰사,형조참판, 지중추부사를 역임했다.
세조 11년 성절사(聖節使)로, 성종 9년 사은사(謝恩使)로 명(明)에 다녀왔다. 김세민(金世敏)은 한성부윤, 병조판서, 지중추부사를 역임하면서 70여년 동안 관직에 있었는데 7대(代)를 섬겼다.
김정(金淨)은 연산군 10년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중종 2년 문과에 급제하여 부제학, 도승지, 이조참판 겸 홍문관제학을 거쳐 형조판서 겸 예문관제학을 역임했다.
조광조와 더불어 지치주의(至治主義)의 실현을 위해 미신의 타파, 향촌의 상호부조를 위한 향약(鄕約)의 전국적 시행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기묘사화 때 조광조 등과 함께 투옥되었다가 제주에 안치(安置), 후에 사사(賜死)되었다.
시문(詩文)은 물론 그림에도 능하여 새ㆍ짐승 등을 잘 그렸다.
김당(金璫)은 사관(史官)을 지내고, 중종 2년 사간(司諫), 장령(掌令)을 지낸 뒤, 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1514년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호조참판으로 조광조를 숙청하는데 간여했으며,1523년 진향사(進香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형조판서, 한성부판윤, 우참찬 등을 지내고 1531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호조판서를 거쳐
좌찬성(左贊成) 겸 도총관(都摠管)이 되었다.
시호는 공절(恭節)이다.
김광원(金光遠)은 조광조의 문인으로 중종 때 문장(文章), 행의(行誼)로 천거되어 승문원문습독관(承文院文習讀官)이 되었다. 중종 14년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조광조가 죽자 장흥 월봉산에 들어가 학문에만 전념했다. 김명원(金命元)은 이황의 문인이다.
1561년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선조 2년 종성부사(鍾城府使)가 된 후 내외직을 역임하고 1587년 좌참찬(左參贊)으로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겸했다.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수습하는데 공을 세워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에 올라 경림군(慶林君)에 봉해졌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순검사(巡檢使)가 되고, 이어 팔도도원수(八道都元帥)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에는 병조판서로 유도대장(留都大將)을 겸임했다.
좌찬성(左贊成), 이조판서, 우의정을 거쳐 부원군(府院君)에 진봉(進封)되고 좌의정에 이르렀다.
유학에도 전념하여 조예가 깊었다. 김태허(金太虛)는 무과에 급제 후 옥포만호(玉浦萬戶)로 있다가 임진왜란을 만났다.
여러 번 전공을 세웠으며, 경상좌ㆍ우도병마절도사를 거쳐 도총관, 호위대장,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김여로(金汝老)는 인조조의 무신(武臣)이다.
병자호란을 당한 후 소현세자, 봉림대군이 심양에 볼모로 갈 때 용만(龍灣)8장사(壯士)의 한 사람으로 뽑혀 두 왕자를 수행했다.
그 후 금주위(金州衛), 산해관(山海關) 두전투에서 별시위(別侍衛)로 호종, 1644년 청군(淸軍)이 북경에 입성함으로써 이듬해 귀국 허락을 받은 두 왕자의 소식을 앞질러 조정에 전달했다. 후에 別軍職을 지내고 자산, 덕천의 군수를 역임했다. 김주신(金柱臣)은 숙종(肅宗)의 장인이었다.
문장에 뛰어나 ‘거가기문(居家紀問)’, 수사답록(隨事剳錄)‘, ’산언(散言)‘, 수곡집(壽谷集)’ 등을 남겼다.
김사목(金思穆) (순조조(純祖朝)ㆍ우ㆍ좌의정), 김정집(金鼎集)(헌종조(憲宗朝)ㆍ좌찬성(左贊成)ㆍ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등은 그의 후손들이다. 김정집(金鼎集)의 아들이 고종조(高宗朝)에 대사헌ㆍ양관(兩館)대제학 등을 지낸 김창희(金昌熙)다.
저서로 ‘회흔영(會欣穎)’, ‘석릉집(石陵集)’ 등이 있고 편서에 ‘월성가사(月城家史)’, ‘김씨분관록(金氏分貫錄)’ 등이 있다.
한편 좌의정 김사목(金思穆)의 조카 김영작(金永爵)은 철종(哲宗) 때 대사헌ㆍ이좇마판을 지냈으며 시문(詩文)에 능하여 ‘소정집(邵亭集)’이 전한다. 그의 아들이 유명한 한말(韓末)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이다. 효종(孝宗) 때(1654) 황해도(黃海道)관찰사를 지낸 김홍욱(金弘郁)은 김명원(金命元)과 함께
경주김씨(慶州金氏)를 명문(名門)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그의 자손에서 3명의 상신(相臣)(영ㆍ좌ㆍ우의정)과 왕비 1명을 배출, 가문의 세력기반을 다졌다.
그의 증손이 김흥경(金興慶)(영조조(英祖朝)ㆍ영의정)이다.
그는 숙종(肅宗) 때 문과에 급제, 승지ㆍ대사간(大司諫) 등을 지내다.
신임사화(辛壬士禍)(경종조(景宗朝)에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 사이에 벌인 당쟁)때 파직 당했으나 영조(英祖) 때 즉위 후 도승지(都承旨)가 되고 이듬해 우참찬(右參贊)으로 청(淸)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그 후 영조(英祖)의 탕평책에 받대하여 파직되었다가 다시 기용되어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그의 아들 김한신(金漢藎)은 영조(英祖)의 딸 화순(和順)옹주와 결혼, 월성위(月城尉)에 봉해지고 도총관(都摠管)ㆍ제조(提調) 등을 지냈다.
글씨에 뛰어난 팔법(八法)을 다 잘 썼다. 김노경(金魯敬)은 순조(純祖) 때 문과에 급제, 육조(六曹)의 판서를 두루 거친 명신이다.
그는 순조 말엽에 권력을 전횡했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헌종(憲宗) 때 강진(康津)의 고금도(古今島)에 안치되었다가 사사(賜死)당했으나 철종(哲宗) 때 관직이 복구되었다.
그는 글씨로 유명했는데 그의 아들이 바로 조선조의 명필 김정희(金正喜)다. 김정희(金正喜)는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서화가(書畵家)로 이름높은 인물이며,
금석학자(金石學者)로도 일가견이 있었던 인물이다.
자는 원춘(元春)이고 호는 완당(阮堂)ㆍ추사(秋史), 또는 예당(禮堂)이라고도 한다. 순조(純祖) 때 문과에 급제, 암행어사를 거쳐 이조참판 등을 지낸 그는 학문에 있어서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주창했으며,역대 명필의 장점을 연구, 독특한 ‘추사체(秋史體)’를 이루어 예서(隸書)ㆍ행서(行書)에는 전무후무한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헌종 6년(1840) 윤상도(尹尙度)의 옥사(獄事)(당시 부사과(副司果)였던 윤상도가 호조판서 박종훈(朴鍾薰) 등을 탐관 오리라고 논척(論斥)했다가 왕과 신하를 이간시킨 자라 하여 처형당한 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濟州道)에 안치 되었다가 8년만에 석방되는 등, 전후 13년간 유배생왈을 하는 정치적 파란을 겪기도 했다.
그림은 죽란(竹蘭)과 산수(山水)에 능했는데 사실보다 품격을 중시했으며 선미(禪味)가 풍기는 남종화(南宗畵)의 전통을 이었다. 금석학에도 조예가 깊어 순조(純祖) 16년(1816) 그 때까지 무학태사(無學太師)의 비석으로 알려졌던 북한산비(北漢山碑)가 진라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임을 밝혀냈다. 저서로 ‘완당집(阮堂集)’,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 ‘표장재시고(票掌齋詩稿)’ 등과 서화(書畵)로 ‘묵죽도(墨竹圖)’, 묵란도(墨蘭圖)‘ 등 많은 작품이 전한다. 김명희(金命喜)는 추사(秋史)의 아우이다.
순조 10년 진사(進士)가 되었고 벼슬은 현령(縣令)에 그쳤다.
1822년 동지겸사은사(冬至兼謝恩使)의 일행으로 가는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가서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의 저자인 유희해(劉喜海), 진남숙(陳南淑) 등과 교분을 맺고 귀국 후에도 그들과 편지, 글씨를 교환했다. 형과 함께 글씨가 뛰어났다. 김홍집(金弘集)은 구한말 개화파의 한 인물로 갑오년 농민전쟁 후 이루어진 갑오경장의 주역이다.
고종 5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 광양현감을 거쳐 예조참의가 되었다. 예조참의였을 때 (1880년) 수신사(修信使)로 일본에 다녀오면서 중국인 황준헌(黃遵憲)이 쓴 ‘조선책략(朝鮮策略)’을 가지고 와서 왕에게 바쳤다.
이에 개화를 반대하는 보수적인 유학자들의 척사운동(斥邪運動)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책을 소개한 책임을 지고 사직했다. 1882년 구미열강의 통상요구와 임오군란의 뒤처리 등 복잡한 국제문제에 부딪친 정부에 다시 기용되어 한미, 한영, 한독 등 수호조약 체결의 부사(副使), 제물포조약 체결의 부관(副官)으로서 외교수완을 발휘, 경기도 관찰사로 승진되었다.
1884년 예조판서ㆍ한성부판윤을 역임하고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우의정ㆍ좌의정 등으로 전권대신이 되어 한성조약을 체결한 뒤에 사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한직(閑職)에 머물러 있었다.
1894년 양이배척, 보국민안(輔國民安)을 내세우고 농민 전쟁이 발발하고 이어서 일본의 조선 침략이 표면화되었다.
이 때 일본의 힘을 빌어 제 1차 김홍집 내각을 조직, 총리대신이 되었다.
청일전쟁의 결과 일본의 우위가 인정되어 일본의 강요로 강력한 친일파가 입각(入閣)함으로써
제 2차 김홍집 내각이 조직되었다.
이 때 총리대신으로 홍범(洪範) 14조를 발표하는 등 새로운 국가의 체계를 세우고 갑오경장(甲午更張)을 수행했다. 그러나 재정난과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 등 극단적 친일파와의 대립으로 내각은 와해되고 박정양(朴定陽) 내각이 탄생했다. 1895년 일본은 자신들의 세력만회를 위해 을미 사변을 일으켜 명성왕후를 죽인 후 다시 김홍집 내각을 개편하였다.
이때 그들은 일본의 세력을 등에 업고 단발령의 강행 등 과격한 개혁을 실시, 전국에서 봉기한 의병의 규탄을 받았다.
1896(건양 1)에 아관파천으로 친로파 내각이 조직됨으로써 김홍집 내각은 무너지고 많은 대신들이 피살 되었는데,
이 때 그도 성난 민중에 의해 광화문에서 살해되었다. 구한말 제국주의의 세력이 조선에 밀려오는 가운데, 조선의 갈길을 두고 개화파, 수구파 드으이 정치세력이 형성되었다.
김홍집이 개화파의 일원으로 세 차례나 내각을 조각, ‘갑오경장’을 비롯한 근대적 개혁을 시도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추진의 힘을 조선(대한제국) 자체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외세를 끌어들여 성급하게 근대화를 추진하려 함으로써 결국 외국의 식민지로 전락하는데 한 역할을 담당했을 뿐만 아니라 해방 후인 오늘에까지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김춘희(金春熙)는 김영작(金永爵)의 손자이며 김홍집(金弘集)의 조카다.
고종 20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숙부 김홍집이 내각을 조직할 때 개화파로 황해도 관찰사에 임명되었고, 1895년 학부협판(學部協辦), 1907년(융희 1) 특진관(特進官), 뒤에 승녕부대종장(承寧府待從長)이 되었다.
김교신(金敎臣)은 일제시대에 함석헌, 송두용, 정상훈 등과 ‘성서조선(聖書朝鮮)’을 발간, 신앙운동으로 독립사상을 고취 시켰던 종교인 이었다 .
제 2차 대전 때 흥남 질소비료 공장에 끌려가 강제 노동을 하며 동포들에게 신앙 운동과 독립정신을 계몽하다. 전염병으로 죽었다. 김용원(金庸源)은 3ㆍ1운동 후 상해(上海)로 망명, 임시정부 경무원 등을 지냈으며 대동단(大同團)을 창설, 항일운동을 벌이다 붙잡혀 옥사했다. 대종교(大倧敎) (환인(桓因)ㆍ환웅(桓雄)ㆍ단군(檀君) 등 삼신을 받드는 우리나라 고유의 종교) 대주교였던 김교헌(金敎獻)은 1917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서울에 있던 대종교 총본사를 만주(滿洲) 화용현(和龍縣)으로 옮기고 시베리아ㆍ몽고ㆍ중국 각지에 교당을 설립해 민족신앙을 바탕으로 한 독립운동을 폈다.
3ㆍ1운동 후 일본의 대대적인 독립군 공격작전으로 수만의 교도가 학살당하는 변고를 만나 비분과 과로로 병을 얻어 윤세복(尹世復)(제 3대 교주)에게 교통(敎統)을 유서로 전하고 구월산(九月山) 삼신사(三神祠)에서 자결, 순국(殉國)했다.
김준(金準)은 광무(光武) 10년(1906) 나주(羅州)에서 김제율(金弟律) 등과 함께 의병을 모아 광주(光州) 등에서 항일에 앞장섰던 의병장이다.
호남차으이회맹소의 선봉장이 되어 고창, 광주, 동복 등지에서 싸웠다.
그는 한 대 창평을 점령했으나 체포된 동료를 구출하기 위해 일본군을 추격하다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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