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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향 각지에 ‘애기능’ ‘아기능’ 또는 ‘아왕릉(亞王陵)’이라 불리우는 지명이 여기저기에 산재해 있다. 모름지기 ‘능(陵)’이란? 왕 또는 왕비의 무덤에만 쓸 수 있는 말이다.
왕족의 경우도 왕이나 세자를 낳은 후궁 중에서도 일부, 또는 격상된 일부 왕족만이 쓸 수 있는 무덤의 호칭이 ‘원(園)’이다. 보통은 모두 ‘묘(墓)’를 사용하여야만 한다.
어른도 아닌 아이(= 유약함, 채 피우지 못한 바램의 의미)의 무덤에 ‘능(陵)’을 사용하였다는 것은 얼마나 안타까웠으면 호칭이나마 ‘능’으로 불러주어 조금이라도 어린(= 너무 일찍, 이루지 못한 恨) 망자를 위로하고 싶은 우리네 착한 백성들의 마음의 배려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됩니다.
애기능이라 불리는 무덤 속 주인공, 그들은 과연 무슨 맺힌 사연들이 그리 절절 했을까요?
애기능이야기의 서막을 여느 주인공은 역사탐방 02화에 등장했던 정릉의 주인공 신덕왕후의 막내이신 의안대군 방석입니다.
:: 지난 금요일이지요? 지금 쓰고 있는 ‘애기능 사연’을 정리하며, 거의 끝맺음을 해가는 즈음...
갑자기 걸려온 한 통의 전화에 채 마무리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외출했다가 돌아와 보니...
울 ‘또하나’님 하탸슈지님 음악회에 이미 가버렸고, 홀로 밍기적거리는데... 아~차차차....
‘애기능 사연’ 마무리... “휴! 다행이 잘 버팅기고 있네... 글을 등록하기 위하여 줄거리마저 정리해 집어넣고, 문맥 좀 수정하고 나서, 마지막으로 사진자료를 찾아서 편집하면서, ”오케이, 쫑!!!“ 그리고는... ‘등록’ 을 위해 회심의 CLICK !!! ???
으 악~~~ 메야? ‘다음’이 그 옛날 3.0한글 버전도 아니고, 메야, 메야?? 다 어디로 가버리셨나...
흐미~~~ 분명 글 쓰는 중간 중간에도 ‘자동저장’ 계속적으로 떴었는데... 이미 때늦은 후회.
그 맴들 아실 거야?? 노름하다 잃은 돈보다 더 아깝다니깐요.
그렇지만 엎지런 진 물, 죽은 자식 뭐(?) 만지기지... 그 동안 너무 흩어져 있던 자료들을 다시 재정리 해 놓지않으면, 요꼬라지 지속적으로 반복할 것이 불 본 듯 뻔합니다. 아니 되겠다. 이제라도 자료를 좀 정리하자... 유비무환. 고거이가 지난 주말을 꼬박 빼앗고도 내 생각에는 아직도, 아~직도, 아~직~도.
초고 원고의 필요성을 대단히 빨리 느끼게 해준 ‘애기능 사연’이었습니다.
-01.의안대군 방석(1382~ 1398: 17세): 태조와 신덕왕후의 적8남으로 조선 최초의 왕세자가 되었지만, 1차 왕자의 난 때 동복 친형 무안대군과 함께 이복형 이방원에 의해 살해되었는데, 당시 방석은 17세, 형 무안대군은 18세이었다. 세월만 가면 걍~ 조선의 군왕이 될 수 있었는데...
그 점이 착한 민초들의 심금을 울렸나?? 모친도 없었던 딱한 어린 나이를 불쌍하게 느꼈는지 그 마을에서는 비운의 왕세자 방석의 무덤을 오랜 전부터 '애기능'이라 불렀다네요.
위치:: 경기 광주군 중부면 엄미길 172- 147(경기기념물 166호)
-02.소현세자의 부인 세자빈 민회빈 강씨(?~ 1646: 37세): 조선 16대 왕, 인조. 이 분은 왕이 되신 것은 어떨결에, 왕이 되신 후에도 어리버리, 애당초 국왕의 재목이 못되는 인물이었건만, 조선이란 나라가 망하려니까, 당파싸움, 세력다툼 덕분(?)에 국왕이 되셨고, 이후 나라는 전란에 휩쌓여 꼬라지 납니다.
인조 5년, 정묘호란으로 형제의 맹약을 맺어 청(후금)나라의 아우국이 되고, 1636년에는 청나라가 군신관계를 요구하며 전쟁을 일으키니 병자호란이 되겠습니다.
송파 삼전도에서 삼배구 고두례(三拜九 敲頭禮)로 항복한 후 수많은 대신들과 함께 볼모로 청나라에 끌려간 소현세자와 세자비는 9년간의 청나라 볼모생활 끝내고 돌아온다.
귀국 하자마자 2달 만에 ‘국왕’이란 권좌에 위협을 느낀 인조는 큰 아들 소현세자를 독살시키고, 강빈의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총비 조귀인의 무고를 빌미삼아 며느리에게 역모의 누명씌워서 주변의 측근들은 물론, 친정식구들과 함께 1년 뒤에 모두 사사시킨다. 조선 최고의 으뜸 비~ㅇ~신 군왕의 탄생이다.
인조는 친손자인 강빈의 어린 세 아들까지 제주로 귀양 보내 장남과 차남은 풍토병에 죽었고, 막내인 경안군만이 할배가 죽고 나서 삼촌인 효종이 즉위해서 겨우 살아 돌아왔다.
강빈은 고려 명장 강감찬 장군의 19대 손녀이지만, 역모로 죽었기에 무덤도 쓸 수가 없었다.
결국 광명시 노온사동에 있는 금천 강씨 친정선영에 묘를 쓰게 되었다.
폐서인이 되었다가 1718(숙종44년)에 무고함이 판명되어 복위되고, 처음에는 민회묘로 불리다가 1750(영조26년) 격상되어 영회원(永懷園)이 되었다.
에구~ 불쌍타!!! 서방님 보내고, 자신은 물론 친정식구까지 몰살당하고, 어린 자식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어찌 영혼인들 볼 수 있으리오~~ 오호 애재라 통재라.
귀국하면 나랏님의 왕비가 될 줄 알았건만, 황천길이 웬말인가????? 이런 사연이다.
:: 광명시 노온사동 산141- 20(사적357호) -> 금천강씨 선영 내.
※영회원 입구에 ‘애기능 저수지’가 있고, 아카시아 꽃향기가 날릴 때면 그곳 잉어들의 입질 기대만땅.
※참고로 소현세자는 서삼릉 내 소경원에 계시고, 아들들의 사연은 뒤에 16대 인조편에서 “유적답사의 입문코스: 왕가의 계곡(대자리 왕릉골)”편에 나갑니다.
-03.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적장남 의소세손(1750~ 1752); 15세의 세자빈이 세손을 낳았다.
조선 최장수 국왕인 21대 영조의 손자가 태어난 것이다. 어린 핏덩이는 이듬해 세손으로 책봉되었으나, 3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처음 장례는 안현(鞍峴= 서대문 안산)의 남쪽 기슭( 북아현동 중앙여고 정문인근)에 의소묘로 하였다가 이후 의령원으로 승격되었다.
해방 후, 도심개발에 밀려 1949년 서삼릉으로 이장하였다.
:: 경기 고양시 원당 서삼릉 내 의령원.
※북아현동에는 지금도 '능안빌딩', '능안슈퍼' 등 '능안(= 능의 안쪽)'이란 지명이 불리고 있다.
중앙여고 내에도 배구부 숙소 한옥과 방아돌이 흔적으로 남아있다고 하는데...
-04.정조대왕과 의빈성씨의 문효세자(1782~ 1786): 의빈성씨는 궁인출신이어서 처음에는 화빈 윤씨의 시중을 들었으나, 승은을 입으면서, 1782년 원자(문효세자)를 낳아 소용(정3품)이 되고, 이듬해 세자로 책봉되면서 빈(정1품)이 되었다.
1784년 딸을 낳았지만 첫 돌 전에 사망하였고, 이어서 문효세자가 원인모를 병으로 1786년 5세에 사망하자 상심 속에 지내다 몇 개월 후 세 번째 딸을 낳으면서 산후병으로 함께 사망하였다.
(TV 드라마 ‘이산’에서 한지민이 성송연役으로 의빈성씨를 연기했다.)
먼저 문효세자를 현 효창공원자리에 장사 지내며, 효창묘라 불렀고, 고종 때 효창원으로 승격되었다.
모친 의빈성씨가 졸하자 같은 곳에 장사 지내었다. 해방 전인 1944년 모두 서삼릉으로 이장하였다.
:: 경기 고양 원당 서삼릉 내 효창원. -> 서삼릉 내 앞뒤로 사이좋게 있는 의령원과 효창원의 주인공은 모두 어려서 조졸하여 서로 본 적은 없지만 분명히 촌수로는 큰아버지와 조카 사이이다.
의령원의 주인공이 사도세자의 큰 아들로 정조대왕의 친형이 된다.
- 앞이 조카 효창원, 뒤가 큰아바이 의령원이다. 재실도 사이좋게 하나로 사용하고 계신다.
의빈성씨는 서삼릉 내 후궁묘역에 계시고, 옛 효창원 터에는 지금 삼의사(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묘역이 자리하고 있으며, 의빈성씨 묘터에는 임정요인묘역이 들어서 있다... 명당인가벼??
-05.정조 후궁 원빈 홍씨(1766~ 1779,14세): 정조대왕은 불안한 집권초기에 왕권의 안정을 위해 사검 서관(모든 서류의 점검)제도와 초계문신제도(특별 문신: 정예의 직속인물)를 통해 힘을 길렀다.
즉위 이전부터 정조의 반대 세력으로 부터의 정조를 보호한 최고 바람막이는 바로 홍국영이었다.
정조가 즉위하면서 홍국영에게 금위대장과 도승지( 양손에 칼날)를 제수하면서 힘을 실어 주었다.
그 힘을 바탕으로 조선 세도정치의 원조가 되었지만, 홍국영의 욕심은 깊이를 몰랐다.
정조 비 효의왕후가 가례 후 15년이 지났지만 후사가 아직까지 없자, 자기 여동생을 계비로 1778년 혼례 시키면서 후사를 도모하였지만, 속절없이 이듬해 요절하고 말았다.
홍국영 입장에서 기가 막힐 노릇이지만, 인생사 억지로 되는 것 없음을 역사는 이렇게 일깨워 준다.
원빈이 죽자 홍국영의 위세에 처음부터 ‘묘’가 아닌 원호(園号)를 인명원으로 하여 장사지냈다.
초장지는 안암동 고려대학 이공대 애기능생활관 인근으로 본래 있었던 사찰(개운사)까지 다른 곳으로 강제 이주 시키고 그 자리에 묘를 썼다고 한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 이거이 농담이 아닌겨~
국왕의 빈(嬪: 정식부인)이 되었지만, 속절없이 한 해 뒤 14살의 어린 나이로 사망하였다.
민초들은 그 애절함에 이곳을 이후 ‘애기능터’로 불러왔다.
이후, 여동생이 죽었음에도 사욕을 버리지 못하고 다른 왕족을 내세워 죽은 원빈의 양자로 삼았다.
군왕의 후계자로 삼으려는 욕심에서이다. 그런 와중에 왕비의 독살(? 냄새는 나지만...)을 기도하다가 발각되어 강원도로 추방되었고, 1781년 칩거 중에 병을 얻어 34세로 죽고 말았다.
홍국영의 사망하자 ‘인명원’은 ‘원빈묘’로 강등된 채 돌보는이 없이 방치되어 오다가, 1950년 해방 후, 서울의 도시계획에 의해 서삼릉 내 후궁묘역으로 이장되었다.
:: 경기 고양 원당 서삼릉 내 후궁묘역.
-06.고종황제, 영보당 이씨의 서장남 완친왕(=완화군, 완왕: 1868~ 1880,13세):
흥선대원군은 고종에게서 첫 손자 완화군이 태어나자 즉시 세자에 봉하려 하였다.
얼마든지 출산이 가능한 이제 겨우 혼인 2년차인 18세의 명성왕후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 일로 인해 명성왕후와 시아버지 대원군과의 갈등의 골이 깊어지기 시작되었다.
명성왕후에게서 1874년 순종이 태어나자, 완화군은 왕후의 미움을 받게 되었고, 아직 어린 미혼임에도 출궁을 당하였는데, 얼마 후에 홍역으로 그만 13세의 어린나이에 사망하고 말았다.
완화군이 사망하자 월곡산(=다릿골산, 월곡동)에 장사를 지냈다. 이 후 월곡산에는 모친 영보당 이씨(1914년)와 덕혜옹주의 생모 복녕당 양씨(1929년)의 묘도 인근에 같이 모시면서 귀인묘터가 되었다.
해방 후에는 완화군은 물론 모두 서삼릉 내 후궁묘역으로 천묘하였다.
어린 나이에 홀로 궁에 쫒겨나와 외롭게 지내다 병으로 쓰러진 죽음이 애처로워서일까?
이곳 역시 백성들은 ‘애기능’이라 불러 주었다.
:: 경기 고양 원당 서삼릉 내 귀인묘역(영보당, 복녕당) 및 숙의묘역(완화군).
:: 완왕묘터 : 월곡초등학교 후문 -> 월곡 소배수지 -> 오동근린공원 쉼터 옆.
-> 완화군을 장사지냈던 상여를 보관하고 있는 안면도 승언리 상여각.
이외에도 ‘애기능’이라 불리는 곳이 더 있다는데....
-06.덕양구 향동동 ‘애기능골’: 이곳은 조선시대 내시들이 모여 살았던 마을이었는데, 산기슭에 오랜 된 무덤들이 분포되어 있다. 이 부근의 마을이름(애기능, 능골 등)과 도로이름(애기능안길, 애기능 1, 2로 등)에서 흔적들이 아직까지 남아있다. 이곳은 특정인의 무덤이 아니고, 내시가 되기 위해 거세한 후 그 후유증으로 죽은 어린 내시 후보들의 공동묘지이다. 지금은 고양 ‘향동보금자리개발’로 더 옛 자취를 잃어가고 있지만 이곳의 애기능은 먹을 것을 위해 타고 난 성(性) 조차 포기하려다 죽어간 어린 넋을 위하여 ‘능’이라 이름 부친 가장 애절한 ‘애기능’이다.
:: 고양시 덕양구 향동동 120번지 인근(망월산 자락).
-07.수원 사도세자의 현륭원터: 1762(영조 38년) 당쟁의 희생양이 된 사도세자는 처음 양주군 배봉산(현 삼육서울의료원 인근)에 장사를 지내고 수은묘(後 영우원)로 불렀다.
1776년 아들 정조가 임금이 되자 영우원으로 승격한 후 함춘원지(서울대학교병원 본원 뒤) 사당 경모당을 두고, 영우원은 정조13년 화성의 화산으로 이장하면서 현륭원으로 원호를 변경한다.
융릉으로 불리게 된 것은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3년이 지난 1899년 11월, 고종황제가 장헌세자를 장조로 추존하면서부터 능호로 융릉을 쓰게 되었다.
‘국왕의 아들이 쌀뒤주에 갇혀서 목숨을 잃는다.’
상상 조차 되지 않는 일이 현실적으로 정말 일어났다. 오직 10살짜리 아들만이 할배에게 아비의 목숨을 구걸할 뿐 사도세자에 이어 아들 정조까지 평생의 앙숙이 되어 온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세력과
숙의 문씨세력, 처가쪽의 장인 홍봉한은 물론 심지어 부인 혜경궁 홍씨와 누이동생 화완옹주까지 모두 세자의 반대세력 일색이었다. 기득세력인 노론과 극심한 반감에 생명이 위험하게 되었는데...
여기에 결정적으로 생모 영빈이씨가 국왕 영조에게 세자의 대처분을 간언한다.
이로써 이 일은 결국 비극으로 끝을 맺게 되었다. 한 나라의 세자가 생죽음을 당한 것이다.
국왕이 충분히 될 수 있었던 사람이 도중에 억울하게 돌아가셨으니, 무슨 이유든 ’능‘이라 불러주어 넋이라도 위로하려 했던 우리네 조상님들의 마음씀씀이가 보인다.
::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 융건릉 지구 내.
- 함춘원지 영우원 재실 경모궁 석단 (서울대학교 연건동 본원 뒷편, 간호대학 본관 앞)
-08.인조 청백리 김덕함묘 인근 상산김씨묘(애기능= 꽃무덤): 문중에서 퇴수당 큰고모(1655~ 1725)로 구전되어 오는 분으로 반정공신 이귀의 외손녀이다.
봉림대군(효종)이 11세 때 간택령에 외조부의 대립관계인 김류세력에 밀려 삼간택에서 장유의 따님왕에게 탈락한 분이란다. 당시 낙점에 실패한 여인은 곧 수절이나 입궁하여 후궁으로의 삶을 살아야 했던 시절이었으니 애기씨는 평생을 수절로 지내시다 돌아가셨다 한다. 메야~ 이거이 완전히 ‘모’ 아님 ‘도’네...
:: 경기 파주 적성면 감골길 48 (김덕함 묘, 신도비) -> 절골 방향 100m 동북능선.
그리고 경기도 양평군 청운면 비봉리에도 11대 중종의 왕비로 간택되었던 정씨의 딸이 결혼 전에 죽자 문중에서 장사지내며 ‘애기능’ 이라 명명하고 이후 제사를 올리고 있다고 한다.
"낙양성 십리하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은 .. 영웅 호걸이 그 누구냐? 절세가인이 그 누구냐?" .... 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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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열심 쓰신거 홀딱 날라가버린거 알고있었는디요? ㅋ
저두 조선역사중 가장 빙~신 같은 왕이 인조인거같아요
근데요~역사를 보면요~그권력이란게 그리도 좋았나봐요~
아들도 죽이고 ~형제도 죽이고~여편네들은 서로 사약받게 맹길구~!에구구~~
제가 좌측 하단 운영자자료실에..하나님 위해서 게시판지기연습장 맹글어드렸잖아요.
거기 올리시는 글은 게시판지기분들만 볼 수 있으니..연습 글이나 자료들 중간에 쓰시던 글 올려놓아도 아무도 보는 사람 없으니..많은 이용 바랍니다.바쁘면 쓰시다
하나님 애기능이야기 못다핀
자식과 손자까지 능멸한 얘기엔
그나저나..서
올렛님 덕에 야그의 순서를 쪼메 수정해야 겠네요.
오늘 간단히 조선 왕릉( 자칭 저 '하나의' 전공분야)에 대해 간단히 집고 가겠습니다.
애기능의 애절함이 구구절절~~~~~
역사는 흐릅니다.
현세에서도 당파 싸움으로 민생은 뒷전.
좋은글과 자료에 감탄하며, 늘 감사 드립니다...
힘들게 작성하신 글
그날 그때를 상상하면서 천천히 읽어 내려옵니다.
귀한 이야기 감사드리면서
하나님의 다음 글은 나중에 읽어야겠습니다.
아궁 읽다보니 여자팔자 뒤웅박팔자란 말이 절감되네요
불쌍헌 아가들야그도 찡 허구요
복잡히 쭉 봤더니 헷갈리구 짬뽕이네유 머리속이 ㅋㅋ
쪼까 보석이 되나 혔떠만 모래되겄네 ㅎㅎ
(와이리 뚝 허니 떨어져서리 된데유? 지 잘못인가혀서 다시해봐도 역시나 ㅋㅋ)
왕후의 系譜史는 조선왕조뿐만 아니라, 어느 왕조에서도 역사의 한축이기도 합니다...
고 훼손한 것으로 밝혀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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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잘 읽고 갑니당 꾸벅^^
그런데, 하나또하나님께서 언급하셨던 애기능 관련해서 일제가 의도적으로 폄
흔히 애기능 자리도 풍수지리설을 근거로 조정회의를 거쳐 결정하는데, 國運의 향배를 가늠하는 중요한 공간입니당...
하나또하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