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의 상처, 돈 냄새 묻은 손으로 만지지 말라"
[포토] 비바람 속에서도 계속된 제주해군기지 반대 '강정평화대행진'
기사입력 2012-08-03 오후 2:30:12
제주에서 무엇인가를 용서해야 한다면 그것은
풍경의 강제입니다. 제주 풍경은 일방적으로 우리 마음을 평화로 물들여 버립니다.
옥색
바다와 하늘의 묵묵하고 깊은 숨소리, 바람 탄 나무들의 비명 같은 스톱
모션, 한림에서 곽지로 펼쳐지는 여름의 초록빛 아사 치마에 색색 수를 놓다가 활짝 돌아보며 웃어주는
코스모스들까지.
서진 팀이
행군 나흘째인 8월 2일
아침을 기진맥진으로 시작한 까닭은 전날의 뙤약볕 강행군 때문이었습니다. 태풍이 온다는
소식에 해변 야영을 포기하고 30킬로미터를 넘게 걸어 도착한 한림체육관에서는
샤워시설을 내주지 않았습니다. 참 매정하지요?
제대로 씻지 못하고 습한 곳에서 밤새 성난 태풍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선잠을 잔 250여명 그들이 한림 읍내를 빠져나와 수원
초등학교에 이르기 전 완연히 원기를 회복한 건 순전히 제주
자연이 뿜어주는 생명력 때문이었다고 저는 믿습니다.
거기에 한 가지를 더한다면 마땅히 사람의 힘입니다.
행군 길
중간 중간
버스 정류소쯤에는 줄곧 함께 걸으실 수 없는 강정마을 어르신들이
노란 티셔츠를
입고 앉아 계셨습니다. 사열하듯 그 웃음 앞을 지나며 그렇게 반갑고 힘이 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보며 무구하게 웃을 수 있는 순간.
행복의 작고 뽀송한 손을 잡는 기분이 들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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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손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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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손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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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손문상) |
유쾌한 동행은 축지법한림을 거의 벗어나 켄싱턴리조트
이정표가 있는
교차로를 지나며 옆에 걷는 분과
대화를 텄습니다. 유쾌하나 수다스럽지 않은 동행과의 대화, 이건 사실 축지법에 해당합니다. 두 아들 먹을거리를 챙겨주고 아침
비행기로 내려왔다는 엄마였습니다.
정부와 해군이 저지른 불법 요인을 법리적 물리적 폭력 행위로 무마하고 있는 사실을 외면하는 지역 정치인들에 대한 의아함이 우리의 첫 이야기였습니다.
"참 길어진 싸움이죠?"
"네, 그래도 큰 힘을 가진 그들이 조금만 진정을 가지고 일해주면 이 많은 사람들이 이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될 텐데요. 왜곡된 현실이 자명한데 동문서답하는 그들을 보면 이권 개입을 의심하게 되기도 해요."
"
중앙에 있는 정치인들도 주민과 소통하기 전에 일단 동료인 지역 정치인들에게 상황을 묻고 판단하겠지요. 그들이 왜곡된
정보를 전달하면 그렇게 받아들였겠죠."
"지난 총선 때도 모두들 강정에 입을 대고 간을 봤지만
문제 해결 의지는 없고, 강정을 어떻게 이용할까에만 혈안이더라구요.
심지어 새누리 후보들까지도 제주해군기지 공사 중단 입장을 내놓았잖아요. (웃음)"
이렇게 적고 보니 꽤 무거운 내용 같지만 우린 툭툭 내리는 비도 조금 맞으며 사진도 찍히며 웃으며 걸었습니다. 정치권에 몸담은 적 있는 그에게 이런 이야기도 들었고요.
"사실 처음 제주해군기지 예산이 책정될 때 문제 제기를 했어야 하는데요. 국회의원들이 큰 사안을 놓치는
이유가 '쪽예산' 때문이에요. 지역구 이익과 관련된 대한 예산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에 큰 사안을 내주고 마는 거죠."
큰 사안을 내주는 것으로 정치적 기반이 확고해진다면 더욱, 열렬히, 무사통과에 손들지 않겠나 싶기도 했습니다. 작년 겨울 어느
식사자리에서 보니 제주도 국회의원들은 2012년 제주해군기지 예산을 삭감시켰다는 자부심이 대단하더군요. 올해도, 그 다음 해에도, 치열하게 방책을 세워, 모름지기 그 자부심을 이어주기 바랄 뿐입니다.
탄식이 후렴으로 붙던 우리 대화에는 이런 생산적
제안도 있었습니다.
"지역구가 다르지만 제주해군기지 백지화 편에 선 국회의원들이 여럿 있어요. 도종환, 이학영, 유은혜, 장하나 의원 같은 분들요. 그분들이 강정에 힘을 보탤 수 있을까요?"
"음, 민주동행이나 초선의원 모임인 초생달에 속한 분들은 대부분 그렇다고 봐야겠지요."
제주해군기지 백지화 편에 선 국회의원들을 한 그룹으로 묶어 강정마을회가 지속적으로 현장 정보를 서면으로나마 브리핑하고 마을 소식과 문제점들을 알려주는 일이 참 중요하겠다는 데 의견이 일치하였습니다.
갑자기
도움을 청하면 피차 갈피가 잡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국회의원들이 예상치 못한 자리에서 강정에 대해 발언하게 될 경우, 평소에 꾸준히 브리핑해온 강정 상황은 매우 주효할 것이라는 게 그의 예측이었습니다. 그 일을 꾸준히 맡아줄
인력이 강정에 있을까 잠시 걱정했는데, 뭐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요.
평소 제 마음을 심히 답답하게 하던 문제를 이야기할 때 그쳤던 비가 후루루 내려 마음을 식혀 주기도 했습니다.
"제주 도지사가 금과옥조처럼 부르짖는 윈윈정책 말이에요. 강정을 해군기지로 내주면 1조 5천억 민간 투자 유치해준다고 중앙 정부가 약속했다잖아요.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할까요?"
"국고
지원도 아니고 민간 투자요?
기업들이 대통령 말 듣고 무조건 투자하지 않죠."
"그렇죠? 정권 바뀌면 그 약속에 대한 책임
소재도 불분명할 텐데, 제주도민 일부는 그 말에 기대를 걸고 있어요."
"그건 참."
"실제로 면피용 투자를 약간 유치한다 해도 기업들이 자기 이윤 추구를 우선시하지 제주도의 이익을 도모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말이지요."
아,
제주도 투자 유치에 부응한다는 핑계로 특혜를 요구하고, 특히
환경 파괴 부분을 눙치려고 할 행태가 빤하게 보일 때마다 가슴 답답한 이가 한둘이 아니겠지요.
10여 킬로미터를 걸으며 허심탄회 나눈 이야기들, 이만하면 참 잘 걸은 걸음 아닙니까?
곽지 해수욕장, 긴 휴식은 어제에 대한 보상힘 센 자들이 편법과 폭력으로 자꾸 억압하니까, 법보다 우위인 뜻으로 싸울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 끝에 가서야 우리는 수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이름이 뭐 그리 중요한 건 아니니까요. 그러나
점심 식사 지점인 곽지해수욕장이라는 이정표는 썩 중하고 반가웠습니다. 시원하게 탁 트인 해안에 사람도 별로 없었으므로 꽤 너른 햇빛가림막 아래가 모두 우리 차지가 되어도 눈치 볼 일은 없었습니다.
점심
메뉴는
돼지고기양배추 두루치기와 우무를 넣은 오이냉국. 밥 위에 두루치기를 얹어주고 냉국 한 사발이었습니다.
기독교 측이 식사와 집회
인도를 맡은 8월 2일
점심식사 하이라이트는 '쉰다리'라는 후식이었습니다.
통에 가득 담긴 건 분명 막걸린데,
막걸리 아니고 '제주 특산 쉰다리'라는 거예요. 제주 토종 막걸리 이름인가 했더니 알콜이 전혀 들어있지 않은 음료라네요. 급궁금. 제주
어머니들이 여름에 살짝 쉰밥을 버리지 않고 발효시켜 만들기 시작했다는 마실거리에 감탄했습니다. 부러진 갈대를 아주 꺾어버리지 않는 연민은 경에서 새삼 배우는 게 아니고 우리 속에 늘 있어왔던 것입니다. 심지어 멀쩡한 자연을 도륙하고, 온당한 자기주장을 하는 백성을 잡아가두다니, 명백히 범죄입니다.
이튿날 점심식사 지점으로 예상된 지역까지 당겨 걸었기 때문에 행진 나흘째의 점심 휴식은 두 시간 가까이 이어졌습니다. 바다에 뛰어들어 해수욕을 제대로 즐기는 이들이 많았고 일부는 개신교회가 인도하는 집회에 참석하였습니다. 가림막 아래 누워 쉬는 이들도 꽤 되었습니다. 한국작가회의 회원이 사온 아이스크림 250개가 휴식을 마쳐가는 순례자들에게 작은 기쁨이 되기도 했습니다.
결코 무관심하거나 찬성 하는 게 아니라는 제주도민들저도
아이스바 하나를 얻어들고 페이스북을 열었습니다. 점심 이후에 동부해안도로를 걷고 있는
동진 팀 소식을 찾기 위해였습니다. 오전에 비바람이 거세서 종달리에 있는 종달교회에 들어가 잠시 비바람을 피했다는 소식, 그 자리에 김두관 씨가 김재윤 의원과 함께 나타났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제주해군기지 백지화를 위한 선명한 발언도 없이 주민들의 고난 행군을 삐죽 들여다보는 정치인들, 여러 번 등치고 간 빼는 수작에 당하다보니 조금 섬찟해지기까지 합니다. 함부로 부는 정치인 비바람을 피할 교회는 어디일까 하릴없는 질문을 혼자 던져보았습니다.
동진 팀으로 가기 위해 곽지를 떠나기 전에 들은 제주도민 부아무개씨(일도이동 거주)의 말은 제주 도지사와 지도층이 귀담아 들어야 할 내용이었습니다.
"제주 사람들이 관심이 없고 상황을 잘 모른다는 오해를 받는데요, 제주 지역사회가 좁다보니 앞에 나섰다가 자신이나 가까운
가족친지들이 불이익을 받을까 걱정이 돼서 움츠리고 있을 뿐이지요. 물론 민군복합관광미항이 생기면 경제가 조금이라도 좋아질까 기대하는 분들도 있지만 그분들조차도 해군기지의 폐해나 민군복합항의 허구를 올바로 공론화하면
생각이 달라지실 거라고 봐요."
"공론화에 책임을 가진 분이라면 누구일까요?"
"우근민 도지사지요. 국회의원들, 공무원들, 대학
교수들 이런 분들이 평화의 섬 선포할 때와 전혀 다른 입장을 보이는 걸 보면 어이가 없어요. 그때는 그렇게 하는 게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고
지금은 또 입장을 바꾸는 게 이익이 되나 봐요."
서울 향린교회 임아무개 목사는 초등학교 5학년인 딸을 데리고 첫날부터 계속 걷고 있었어요. 장준하
선생과 같은 이름을 가진 아이에게 "와, 이름이 크구나." 했더니 맞장구치듯 활짝 웃은 아이는 땡볕과 비바람 속의 걷기나 거친 잠자리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힘들 때도 있지만 걸으면서 많은 사람들과 얘기하는 것이 재미있어요."
역시 사람이 힘입니다.
곶자왈 평화학교 아이들의 위문 공연제주시를 통과하여 동진팀이 있는 월정리까지는 한 시간 남짓 걸렸습니다. 강정의 몸부림이 아무런 파장도 미치지 않는 것만 같은 제주시, 도심. 눈에 안 보일 따름이겠지요.
동진 팀은 마침 월정해안에서 잠시 휴식 중이었고, 곶자왈 평화학교에 평화 캠프를 온
어린이들이
모래사장에 서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위문공연이라고 했습니다. 어른들은 항상 아이들에게 위안을 받습니다. 갖은 시름과 피로가 휘발되는 효과는
여름바다를
배경으로 한 아이들의 노랫소리를 들을 때가 최고라고 말해도 되겠더군요.
우리 어릴 때는 전쟁 아닌 것이 평화라고 배웠습니다. 그렇게 알고 살았기 때문에 전쟁 상황만 아니면, 굶지만 않으면, 학비만 있으면,
얼마간 인권을 유린당해도, 권력과 돈줄에 억압당해도, 법리적 왜곡에 휘말려도 죽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 여기고 지냈습니다.
저 아이들은 그렇게 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세계가 가진 위험 요인은 전보다 커졌으나, 파괴력이
가공할 지경에 이른 무기들로 인해 전쟁이란 결코 일어나서 안 될 일이 되었습니다. 도발한 나라도 침공 당한 나라도 피차 죽게 되니까요. 더 큰 대안, 더 예민한 외교력이 필요하며, 전 세계 어린이들이 환경과 생명 존중을 최고 가치로 삼는
교육을 받아야 하는 세상이 왔습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전쟁이나 환경오염으로 인한 인류멸망 시나리오가 불현듯 현실화될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강정평화대행진은 어용 언론들이 나발 부는 '강정 주민 사익 챙기기'나 '평화활동가들의 민심 혼란 행위'나 '이념 싸움'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여는 싸움입니다. 더불어 사는 평화의 문. 과거와 현재의 사리사욕에 눈 먼 자들은 그 문을 열지 않습니다.
월정해안에서 김녕까지는 멀지 않았습니다.
구좌 체육관에 도착한 일행이
김치찌개
덮밥을 먹고 수박을 먹고 상처 난 발들을 내보이며 물집을 터뜨릴까 말까하는 무렵에 완연히 저녁이 왔습니다. 손으로 터뜨리지 말고
의료팀에게
치료 받고 약 바르는 게 좋겠다는 말. 당연하고 맞는 말이지요.
강정의 상처, 제주도의 평화도 돈
냄새 묻은 손으로 만지지 말기 바랍니다. 강정 주민들의 삶이 약입니다. 제주 도민들의 오래 된 침묵이 평화의 말로 풀려나오게 해주어야 합니다. 제주해군기지가 백지화되는 날, 그날이 오면, 수년에 걸친 싸움과 미움과 억울함과 원망과 반목이 일거에 사라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 모두가 거름이 되어 역사 이래 처음으로 우리는 더불어 사는 평화를 얻어냈기 때문입니다. 유구하게 이어져 내려온 일상의 평화, 자연의 본래, 그것을 지키는 힘이 잘 익은 과실처럼 우리를 통과하여 우리 자손들에게
전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날까지 강정평화대행진은 계속되겠지요. 그날이 오면, 오늘 함께 걸었던 사람들이 '공구리쳐진' 구럼비에 모여앉아 한바탕 크게 울어도 좋겠습니다.
제주 해군기지 건설 백지화를 위한 '강정평화대행진'이 지난 달 29일 시작돼 8월4일까지 제주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강정마을에서 시작해 제주의 동쪽과 서쪽으로 갈라져 5박 6일 동안 섬 전체를 일주하는 일정입니다. 현지에서 조정 시인과 손문상 화백이 글과 사진을 보내왔습니다.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