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동무 이기주
전교조에서 해직교사들의 수기를 모은다고 해서 흘려듣고 있었는데...
이미 두 권이 나오고 세 권째 편집 중이란다.
책 편집을 맡은 후배가 나더러도 비싸게 굴지 말고 좀 쓰라기에 마지 못해 쓰다 보니 당연히 기주가 생각났다.
후배한테 이미 세상을 떠난 기주가 직접 쓸 수는 없으니 그가 남긴 시라도 몇 편 실어 달라 하였다.
그럼 3편만 알려 달라는데... 아무리 추려도 다섯 편.. 꼭 다 실어 달라고는 했는데... 실어 주겠지.
아직 40도 채 안 된 젊은 이기주.
어린 남매를 두고 떠난 이기주.
보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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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주(1957~1995)
이기주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 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재학 시절 ‘윤동주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1992년 “시와 시학” 제7회 신인작품으로 박두진 시인의 추천을 받았다. 1983년부터 모교인 동북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다가 1989년 여름 전교조 가입으로 해직되었다. 1994년 덕산중학교에 복직하였으나 해직 직후 발병한 골수암이 악화되어 항암치료를 받다가 1995년 7월 15일 영면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직후인 7월 20일, 워낙 세속의 욕망에 초탈하였던 그를 안타까워한 동무들이 이리저리 끌어모아 편집한 첫 시집 “슬픈 날”이 발간되었다.
1. 별
먼 별 하나 흘러와 멎는다.
반짝인다.
내가 있기 전에도 그랬듯
내가 없을 저 어둠 건너에서도
반짝인다.
수십 겹 어둠의 껍질을 벗겨 내고
본래의 추위 속에 떨고 있는,
그 만큼의
눈물로 맺힌 별 하나.
바람이 분다.
멀리 눈내린 산이
그보다 먼 산과 서로 만날 때
두 그루 까칠한 나목(裸木)처럼
늘 먼저 가던 나의 죽음과
나란히 서면
먼 별 하나
젖은 눈동자를 통해
최초의 아름다움으로 뼛속에 스민다.
2. 해직(解職)
동료와 함께 찬 소주로 씻고 삭히다 넘기는 여름 밤. 어느새 희부여니, 칙칙하게 비 뿌리는 어스름이 다가와, 먼지 낀 술집 창이 점점 아프게 눈을 파고 든다. 비척대며 밖을 나선다. 지붕들은 젖은 채 순대처럼 모여 평화롭고, 동료와 헤어져 홀로 가는 귀갓길, 간간이 빗발이 서늘해져 고개 들면, 저, 밥줄처럼 읽기 어려운 성내시장 뒷골목들. …… 꾸불꾸불, 빗속으로 질척대며 이어진! …… 느닷없이, 노여움이 다시 막다른 골목처럼 일어나 취기와 캄캄히 뒤엉킨 채 꿈틀거린다. 휙, 길 모퉁이를 돈다! 스스로 머리 풀어 헤쳐 버린 시대, 휘날려 낮게 깔려오는 어스름 속을 날(刃)끝처럼 취해서 간다.
3. 집으로 가는 길
시내에서 통닭 한 마리 사가지고 나서는 길. 음침한 건물들 사이로 집으로 가는 길. 눈은 밝아, 험악해 가는 구름 안에서도 아내와 아이들이 보이는데, 점점 바람이 심상치 않네. 휴지 날리는 거리는 붉은 신호등들을 겹겹이 숨기고 있고, 실내등을 끈 차들이 빽빽이 굳어 어둠속으로 이어져 있네. 초조해지네. 차를 바꿔 타도, 다른 길을 찾아나서도 제자리를 맴돌 뿐. 집으로 가는 길 보이지 않네. 어느 새 찬 땀이 속옷을 흐르고, 점점 컴컴한 바람이 덮어 오네. 아내와 아이들이 애타게 기다릴 텐데, 길은 자꾸만 갈라져 공중으로 말라 들어가네. 혼자 고개 들고 서 있네. 작은애가 터뜨리는 울음 소리가 들리네. 봉투 안에서 통닭은 싸늘히 식어 가고, 손가락부터 점점 희게 몸이 구부러져 오네. 찬 눈물이 나를 스치네. 먼 안드로메다 성운처럼 어둠속에 놓이네.
4. 새벽창 2
밤샘 뒤에 돌아온 안방.
아내와 막내는 잠 속에 있고
어린 딸이 먼저 일어나
어젯밤의 과자를 혼자 먹고 있었다.
밖에 눈이 왔단다.
정말?
딸애는 화장대 위로 올라가
고사리손으로 창문을 열었다.
소리쳤다.
새하얀
뜰과 나무들, 지붕들.
어스름한 창가에서 함께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5. 우물
우물이 있었네. 영혼의 맨 가장자리, 늘 승냥이들이 가까이 다가와 얼핏대는 눈 덮인 황야, 늘 무성한 바람갈기들 사이로 북극성이 아슬한 곳, 작은 우물 하나 있었네. 나 매일 밤 불 밝혀 더듬어 가는 언덕, 고사목만 몇 그루 서 있는 언덕에, 때로 먼 극광(極光)들이 물줄기처럼 어른대다 가는 언덕에, 외로이 놓인 우물.
(피가 고이는 우물, 퍼내고 또 퍼내도 다음날이면 다시 차 있는 우물, 이미 닳아 형체도 알 수 없어진 손, 이미 내 안에 돌이 된 목마름, 피가 고여 있는 우물, 내 몫인 우물)
나 오늘도 길 떠나네. 승냥이들의 길고 긴 울음이 섞여 들어 등불 어지러운 눈길. 내일도 또 그 다음날도, 고개 수그리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