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앞서 간 사람들 <10>
가나안 농군학교와 김용기(金容基) 장로
김용기 장로님 / 1967년 봄(내가 대학 1학년때) / 아들 김범일님도 함께(경기도 광주)
김용기(金容基, 1909~1988) 장로는 경기도 양주(현 하남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1930년 광동(廣東)학교를 졸업하고 중국으로 건너가지만 기독교 농민운동의 뜻을 품고 귀국한다.
1938년 고향인 양주 능내리(陵內里)에 ‘봉안(奉安) 이상촌(理想村)’을 만드는데 공동생활 형태를 취하며 가축 기르기를 장려하고 협동조합, 소비 공매조합 등을 결성하여 농민의 권익을 도모하는 한 편, 금주, 금연, 각종 의식의 간소화 운동 등을 전개하며 농촌개혁운동에 앞장선다.
1954년에 ‘가나안 농장(農場)’을 1962년에는 ‘가나안 농군학교(農軍學校)’를 설립하여 정신개혁과 농촌개혁운동에 앞장서는데 그 공로로 같은 해 ‘향토 봉사상’을 수상한다. 이 때 내 건 슬로건이 ‘한손에는 성서를, 한손에는 괭이를’ 이었다.
5·16 혁명(1961) 직후인 1962년 박정희(朴正熙)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경기도 광주(지금의 하남시 풍산동)의 가나안농군학교를 찾았다. 농촌개혁에 관심이 많던 박의장은 새 바람을 일으키는 현장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간식으로 감자와 빵이 나오자 박의장은 무심코 빵 한 조각을 입으로 가져가는데 김용기교장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여기서는 식사 전에 반드시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자'고 외쳐야 합니다.’
박의장은 입에 물었던 빵을 내려놓고 일행과 함께 구호를 외친 후 먹었다고 한다.
크게 감명을 받은 박의장은 1960년대 중반, 한 달간 총리실 사람들을 농군학교에 파견하여 교육을 받게 한다. 1970년에 박정희 대통령이 전국적으로 실시한 새마을 운동은 이곳에서 싹텄다고 할 수 있는데 ‘하면 된다.’, ‘가난을 싸워 이겨야 한다.’ 등 농군학교에서 쓰던 말이 그대로 새마을 운동의 구호가 되었다.
또 새벽 5시에 김 교장이 직접 울리는 농군학교의 ‘개척종(鐘/ 빈 산소통)’ 소리는 후일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작곡했다고 알려진 새마을운동 노래 ‘새벽종이 울렸네’ 가 되었다.
‘일하기 위해 먹자!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자!’ (식사기도) ‘효도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자!’ 가 당시 김용기 교장이 내건 구호였고, 지금도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다. 현재의 교장인 김범일(원주농군학교/둘째 아들)과 김평일(하남농군학교/셋째 아들)은 요즘 입교하는 젊은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고 한다.
‘너희 할아버지 아버지가 이곳에서 공부하고 일해서 오늘을 일구었다. 너희들은 다 똑똑하고 많이 배웠다. 우리 강사들이 더 가르쳐 줄 것은 없다. 여기서는 자신을 돌아보면 된다. 이 좋은 시대에 살면서 국가와 사회, 가정, 직장을 위해서 나는 무엇을 했느냐 생각해 보라’
또 교육생들은 초창기부터 지켜져 온 규칙 ‘치약은 3mm만 짜고 비누는 남자는 3번, 여자는 4번, 화장지는 3마디 이상 쓰지 말 것’을 지금도 지키도록 한다.
1962년 가나안 농군학교가 개설된 이래, 기업체 임직원, 공무원, 농촌지도자, 종교인, 군인, 언론인, 학생 등 사회 각계각층의 사람들 30여 만 명이 이곳에서 농촌실습과 정신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미주, 유럽은 물론 아프리카에서도 수많은 지도자급 인사들이 이곳에 입교하여 교육을 받고 갔다고 한다.
또 이들 나라에 ‘가나안 농군학교’를 설립하는데 돕고 있는데 현재 9개 국가 11지역에 설립하였고 5개 국가에서 추진 중이라고 한다.
고(故) 김용기 장로는 막사이사이상(사회공익 부문/1966), 인촌문화상, 새마을 훈장(협동장) 등을 수상하였고, 1980년에는 영국 케임브리지대 ‘국제인명 대사전’에 수록되었다. 1988년 사망 후 정부에서는 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했다.
저서로는 ‘가나안으로 가는 길’(1968년), ‘심은 대로 거두리라.’(1973년), ‘그분의 말씀 따라’(1978년) 등을 남겼다. 김용기 장로님은 한국 근대사에서 진정으로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첫째 아들 김종일은 가나안 농군학교 이사장으로, 둘째 아들 김범일은 원주 제2 가나안 농군학교 교장으로, 셋째 아들 김평일은 하남시 제1 가나안 농군학교 교장으로 아버지의 유지(遺志)를 이어가고 있다.
나는 대학 1학년 때인 1967년에 입교했었으니 초창기에 입교했던 셈으로 이 농군학교의 졸업생으로는 대선배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