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에는 유달리 많은 비가 왔고 지루한 장마가 계속되고 있는데도 오늘은 서울 동기들을 만난다고 하니 반가운 햇볕까지 나타나서 환영을 해주었다. 아침 7시, 모교 앞을 출발해서 8시경 대전 톨게이트에서 대전 동기들을 태운 후 목적지인 남한산성을 향했는데 산성 입구 계곡이 깨끗하고 맑은 물에 바위가 좋아서 합천 해인사의 홍류동 계곡보다도 아름다워 보였고 곳곳에 휴식객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산성내 주차장에서 서울 동기들과 반갑게 만나서 산성 답사에 나섰는데, 산성의 기원은 이천여년전 고구려 주몽(동명왕)의 아들인 백제의 시조 온조왕 때부터 토성으로 쌓았는데, 신라 문무왕 12년(662년)에 다시 쌓아 "주장성"이라고 하였으며 그 후에도 계속 고쳐쌓다가 임진왜란후인 조선조 광해군때에 본격적으로 축성을 시작한 후 인조 4년 이서가 완공을 하였는데, 청량산(497m)을 주봉으로 문형산, 금단산, 매지봉 등에 둘러쌓인 해발 350m 정도의 구릉성 분지인데 성첩이 잘 보존되어 왔으며 왕이 거주했다고 하는 행궁은 터만 있었고 온조왕을 기리는 숭열전과 삼학사를 기리는 현절사와 우뚝한 수어장대와 그 옆의 이회를 기리는 사당인 청량당이 눈길을 끌었는데 인조 2∼4년(1624-26년) 사이에 산성 죽조 총책임자는 이서이고 동남편 축조공역책임자는 이회인데, 동남성의 축조는 지세의 험악으로 기일 내에 완성되지 못하자 이회의 명성을 시기하는 무리들의 무고와 참소로 즉결처분으로 참수형을 당했는데 이회는 형장에서 구차스러운 변명을 하지 않고 다만 "사필귀정이니 내가 죽는 순간에 매 한마리가 날아오리라. 매가 오지 않으면 내 죄 죽어 마땅하지만 매가 오면 내 죄는 없으리라."하였다. 이회가 절명하는 순간 과연 하늘에서 매 한 마리가 날아와서 수어장대 옆의 큰 바위(매바위)에 앉아 절명하는 이회를 슬프게 바라보다 날아갔으며 그 곳에는 매의 발톱 자국이 남게 되었다. 이에 비로소 축성 공사의 자취를 자세히 살펴보니 공사가 매우 치밀하고 견고한 것이어서 무고였음이 밝혀졌다. 이회는 난공사의 완벽한 추진을 위하여 처를 삼남지방에 보내 축성 비용을 모금 조달케 하였을만큼 성심을 다하고 있었던 것이다. 처는 축성 자금을 마련하여 돌아오는 길에 남편의 처형소식을 듣고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는데 청량당에 모셔진 이회의 초상화를 보니 늠름한 기상이 전란시에는 큰 공을 세울만한 위인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산봉우리의 정자와 초소에 올라가보니 성남시, 광주시, 하남시와 송파(삼전도)와 한강이 모두 조망되는 천혜의 요새였다. 남한산성 인근에 거주하는 정영수 동기의 설명도 들으면서 다니니 더 이해도 잘되는데 문루와 장대에 오르니 땀이 나다가도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니 다니기에 좋았다.
이 곳에서 저 유명한 1636년(인조 14년)의 병자호란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전임 15대 왕인 광해군의 슬기롭고 절묘한 실리외교와 달리 실속 없는 명분논리에 매달려서 만주를 통일하고 중원까지 넘보려는 신흥세력인 청(원래는 후금)을 배척하는 인조의 "등신외교"로 인하여 청군, 만군, 몽고의 연합 이십만 대군이 12일만에 한양까지 진격하는 파죽지세의 외침에 인조는 강화도로 가는 길이 끊겨서 궁여지책으로 천혜의 요새라고 하는 남한산성인 이 곳에 와서 일만 삼천명의 군사로 45일간이나 항전을 하였으나 근왕병이나 의병들이 겹겹이 포위된 청군들에 모두 패하고 혹한에 군량미도 바닥이 난 지경에다 믿었던 강화도마저 함락되고 왕자, 비빈, 종실들이 포로가 되자 절망적인 상황에서 유사 이래 치욕적인 항복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 때 쯤엔 청나라 장수인 용골대, 마부대도 성 안에 들어오고 해서 11개 조의 항복조문을 만들었는데, 각 조문마다 치욕이고 부담이었다.
청과의 군신관계에다 세자와 왕자, 대신들의 아들을 인질로 데려가고, 명에서 받은 고명과 책인을 불살라 버리고, 명을 칠 때는 3천필의 말과 3만의 병사를 보내고 심지어는 밭이랑까지 남북으로 향하도록 했다고 하며 인조왕 자신도 송파나루 삼전도에 만들어놓은 수항단에서 단 위에 높이 앉아 있는 청태종에게 머리를 3번 조아리고 9번이나 추운 얼음땅에 머리를 찧는 삼배구고두의 예를 행하고 나니 이마에는 피가 흥건했다고 하니, 하늘도 무심할 지경이었다고 하겠다. 그 뿐이 아니라 청군이 철수할 때에는 기개 있는 선비의 표상인 삼학사(홍익한, 윤집, 오달제)와 십만명이 넘는 백성이 포로로 끌려가서 절개를 지키다가 처형당하거나 고국으로 돌아올려고 하면 "속환금"이라고 해서 많은 돈을 주고 풀려나야 했으니 삼천리 강토가 쑥대밭이 된 거나 다름없다고 하겠다.
현재도 송파에 남아 있는 대청황제 공덕비(일명 삼전도비)와 연관지으면서 병자호란이 단순히 역사라고 하기에는 너무 치욕적이어서 오늘날에도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고 나서야 유교 문화의 단점인 공리공론에서 벗어나서 경세치용과 실사구시 그리고 이용후생의 실학이 노도와 같이 밀려오게 되는데 이수광을 비롯한 유형원, 이익, 정약용, 유수원,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등 기라성 같은 수많은 선각자가 나타나서 정조대에는 문화의 르네상스를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병자호란이 비록 367년 전의 과거라고 해도 어제 일과 같은 생각들을 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동기들과 얘기를 하면서 2시간 가까이 답사를 한 후 나상수 동기 조카가 운영하는 산성 내 식당인 아라리오에서 삼겹살과 등심으로 회식을 하였는데, 서울의 한동수 동기가 토마토를 몇 박스나 가져오고 늦게 온 박영노 동기는 양주를 가져와서 모두 얼근하게 취할 정도였다. 김주(올림피아) 동기의 사회와 익살, 유머는 TV에 나가도 될 정도로 많은 박수를 받았으며 윤혜철 서울 동기 회장까지 참석하니 서울 동기생 120여명이 다 모인 것 같았다. 졸업 후 40년 가까이 되어서 만난 동기들이 있는데, 어찌 반갑지 않으랴?
산악회회장단의 숨은 노력과 장준호, 조형원, 이성배 등 서울 산악회임원들이 수고와 후원으로 안윤기 동기가 큰 일을 하였으며, 모든 동기들이 반갑고 흥겨워서 한 마음 한 뜻으로 즐기니 이것보다 큰 잔치는 없었다. 몇 시간을 보내도 아쉬움이 남고 하였지만 경주까지 내려가야 하니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지기 싫은 작별을 하고 김천으로 향했는데, 갈수록 동기들의 뜻이 합쳐지고 굳게 단결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끝으로 다시 한번 안윤기 동기에게 고마움을 전해드리며 동기들의 건강과 행운을 빌고 또 산악회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면서 이만 필을 놓을까 한다.
첫댓글 잘 읽었읍니다....무사히 도착하여 ...감사...
항상 문인다운 글체에 늘 감탄하고 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영규친구,역사학자보다 더 자세하다네,그 혜박한 학식에 다시한번 노랐네.역시 자네는 존경받을 만해.막걸리 한잔 생각난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