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니
;새끼를 날[經]로 하고 짚을 씨[緯]로 하여 돗자리 치듯이 쳐서 울을 깊게 만들어 곡식 등을 담는 용기
가마니는 곡식이나 소금 등을 담기 위해서 짚으로 쳐서 섬처럼 만든 용기이다. 곡물을 거래하는 단위로도 사용되었다.볏짚 1~2탄으로 꼰 가는 새끼줄을 씨줄로하고, 1낱을 날줄로 하여 베처럼 짜서 자루로 만든것이다. 볏짚의 길이가 가마니 폭으로 용적은 100리터로 쌀은 80kg, 보리는 76.5kg을 담을 수 있었다. 가마니는 새끼를 날줄로 하고 그 사이를 짚으로 촘촘하게 엮어 짠 일 종의 자루로서 섬과는 달리 틈새가 조밀하여 곡식이 샐 염려가 없다. 이러한 이점 때문에 1900년대 초에 일본에서 도입되면서 섬을 대신했다
이전에 쓰이던 섬의 180리터보다 작았으나 두께도 두꺼울 뿐 아니라 날 사이가 촘촘하여 낱알이 작거나 도정된 곡물도 흘리지 않고 담을 수 있어서 많이 쓰이게 되었다.[1] 특히,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식민지인 한국에서 식량을 착취하여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한 수단으로 쓰였다.
가마니는 1900년대 초에 일본에서 들어왔으며, ‘가마니’라는 이름도 일본말 ‘가마스(かます)’에서 비롯되었다
1909년에 당시 조선통감부에서 펴낸 제3차 『한국시정연보(韓國施政年報)』에 따르면, 한 해 앞서 일본의 이른바 개량 농구로서 우리나라에 그네·풍구·낫·괭이 따위와 더불어 새끼틀 19대, 보통 가마니틀[普通製筵器] 495대, 마키노식 가마니틀[眞野式製筵器] 50대가 들어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이 가마니 제작의 시초가 되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 뒤 가마니틀의 도입량은 부쩍 늘어나서 1916년에는 7만916대, 그 이듬해에는 10만2244대에 이르렀으며, 그 무렵부터 가마니 생산은 본격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가마니가 들어오기 전 우리나라에서는 섬을 썼으나, 섬은 날 사이가 성기어서 낱알이 작거나 도정(搗精:곡식을 찧거나 쓿는 일)된 곡물은 담지 못하고 오직 벼·보리·콩 등만 담았다. 가마니에 비해 담기는 양은 많으나, 그만큼 무거워서 한 사람이 들어 옮기기도 어려웠다.
그에 비하여 가마니는 한 사람이 나르기에 적당하고 높이 쌓기에 편리하며 날과 날 사이가 잘 다져져서 어떤 곡물도 담을 수 있다. 그뿐 아니라 빈 가마니는 차곡차곡 재어놓기도 좋으며, 더욱이 반으로 접을 수 있어 보관에도 편리하였다.
1960년대 들어서면서 마대와 지대가 보급되기 시작하여 폴리프로필렌으로 만든 PP마대가 40kg 단위로 생산되어 추곡수매 등에 널리 쓰이게 되어 가마니는 많이 쓰이지 않게 되었다
가마니는 1970년대 말까지 정부에서 매입하였으며, 농가에서는 농한기에 부업삼아 이를 많이 짰다. 기계를 이용하므로 두 사람이 하루 20장까지 짤 수 있다. 가마니는 사용 용도에 따라 비료가마·볏가마·쌀가마로 나누며, 날 수도 각기 달라서 비료가마는 17날, 볏가마는 20날, 쌀가마는 22날로 짰는데, 날 수가 많을수록 든든하다. 크기도 조금씩 달라서 비료가마의 너비는 75.75㎝(2자 반)이나 나머지 두 종류는 84.84㎝(2자8치)였다.가마니는 용도에 따라 비료가마·볏가마·쌀가마로 나뉜다. 현재는 가마니가 무겁고 만들기 어려워 가마니의 용량을 말하는 ‘가마’란 말만 남았다. 한 가마는 10말[180ℓ]로, 쌀의 경우에는 80㎏이다.
근래에 마대·비닐포대·종이부대 등이 대량생산됨에 따라 정부에 의한 가마니 매입이 중지되고, 한편으로는 벼의 다수확 품종 보급으로 인해 짚 자체도 새끼나 가마니용으로는 부적합하여 가마니 생산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