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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의 비
비가 오고 있다
여보
움직이는 비를 알고 있느냐
명령하고 결의하고
‘평범하게 되려는 일’ 가운데에
해초처럼 움직이는
바람에 나부껴서 밤을 모르고
언제나 새벽만을 향하고 있는
투명한 움직임의 비를 알고 있느냐
여보
움직이는 비를 알고 있느냐
순간이 순간을 죽이는 것이 현대
현대가 현대를 죽이는 ‘종교’
현대의 종교는 ‘출발’에서 죽는 영예
그 누구의 시처럼
그러나 여보
비오는 날의 마음의 그림자를
사랑하라
너의 벽에 비치는 너의 머리를
사랑하라
비가 오고 있다
움직이는 비여
결의하는 비
변혁하는 비……
현대의 자살
그러나 오늘은 비가 너 대신 움직이고 있다
무수한 너의 ‘종교’를 보라
계사 위에 울리는 곡괭이소리
동물의 교향곡
잠을 자면서 머리를 식히는 사색가
―모든 곳에 너무나 많은 움직임이 있다
여보
비는 움직임을 제(制)하는 결의
움직이는 휴식
여보
그래도 무엇인가가 보이지 않느냐
그래서 비가 오고 있는데!
- 김수영,「비」-
이 시는 불안하고 어두운 밤 다음에는 언제나 새벽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추구하는 삶을 살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시의 전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화자는 비가 오는 저녁에 잠을 자면서 머리를 식히는 사색가이다. 닭장의 지붕을 두두리는 비 소리가 곡괭이가 땅에 부딪치는 소리처럼 들리고 동물들의 교향곡처럼 들인다. 그러면서 모든 곳에 너무나 많은 움직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내는 비가 주는 휴식에 누워 있다.
화자는 비를 자연물로 생각하지 않고 ‘밤을 모르고 언제나 새벽만을 향하고 있는 투명한 움직임의 비’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누워 있는 아내에게 ‘여보. 움직이는 비를 알고 있느냐’고 묻는다. 밤은 우리에게 명령하고 움직임을 억압하는 결의를 하는데 우리가 ‘평범하게 되려는 일’은 밤에 굴하지 않고 바람에 나부껴도 언제나 새벽만을 향하여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느냐고 묻는다.
세상은 순간이 순간을 죽이는 것이 현대의 특징이라고 생각하고 이러한 것이 믿음을 종교처럼 생각하며 추종한다. 순간이 순간을 죽이는 현대이기에 현대의 종교는 ‘출발’하는 순간에 죽을 수밖에 없고 이 죽음을 영예로 생각한다. 화자의 시처럼 태어나는 순간 죽는다.
그러나 언제나 새벽만을 향하여 움직여야하는 마음을 사랑하자. 그 생각을 사랑하자. 결의하고 변혁하고 순간이 순간을 죽이는 현대를 스스로 죽게 하여 영원을 추구하자. 너 대신 새벽을 향하여 움직이며 평범한 삶을 결의하는, 변혁하는 무수한 움직임을 보라. 너의 종교는 새벽을 향하여 움직이는 것이다. 휴식하는 가운데에서도 새벽이 오는 것이 보이지 않느냐? 새벽을 향해서 비가 움직이는데!
이 시를 구절별로 살피면 다음과 같다.
제목 ‘비’는 상징적으로 쓰였다. 관습적인 상징‘과 시인 개인이 창조한 개인적인 상징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이 시는 내용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비’는 관습적으로 ‘시련, 슬픔, 눈물, 암울한 상황’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시에서도 암울한 상황을 나타내는 시간적 배경인 밤에 내리는 비로 ‘암울한 상황에서 느끼는 슬픔’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비’의 원관념을 시에 나타나 있듯이 ‘밤을 모르고 / 언제나 새벽만을 향하고 있는 / 투명한 움직임’이란 의미를 담은 개인적 상징으로 쓰여이다. 이 구절도 관습적 상징으로 쓰인 부분이 있는데 상징을 풀어쓰면 ‘암울한 상황을 아랑곳 하지 않고 언제나 새로운 시대, 희망의 시대를 향하여 가는 보이지 않는 움직임’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상반된 두 가지 원관념을 사용하고 있어서 이를 구별하면서 시를 읽지 않으면 너무나 난해한 시가 된다.
‘비가 오고 있다 / 여보 / 움직이는 비를 알고 있느냐’에서 ‘비가 오고 있다’는 실제로 내리는 비를 말하고 있으면서 관습적 상징인 ‘시련, 슬픔’의 의미를 담고 있다. 화자는 ‘암울한 상황에서 시련을 당해 슬픈 상태’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화자는 ‘여보’에게 ‘움직이는 비’를 알고 있느냐고 묻는다. ‘밤을 모르고 / 언제나 새벽만을 향하고 있는 / 투명한 움직임’인 보이지 않게 움직이는 ‘비’를 아느냐고 묻는 것이다. 화자가 ‘여보’에게 묻는 것은 ‘여보’가 4연에 나타났듯이 ‘비오는 날의 마음의 그림자를’ 지녀 슬픔 속에 있고 ‘너의 벽에 비치는 너의 머리’ 속의 생각은 ‘벽’(관습적 상징으로 장애물)을 맞이하여 절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명령하고 결의하고 / ‘평범하게 되려는 일’ 가운데에’에서 ‘명령하고 결의하고 / ‘평범하게 되려는 일’ 가운데에’는 ‘명령하고 결의하’는 것이 ‘평범하게 되려는 일’ 중에 있는 것임을 알 수는 있다. 그런데 ‘명령’이 ‘무엇’에 대한 ‘명령’인지 알기 어렵다. ‘결의’에 대해서는 이 시 안에 ‘결의하는 비 / 변혁하는 비…… / 현대의 자살’과 ‘비는 움직임을 제(制)하는 결의’이라고 하여 앞의 ‘결의하는 비’는 긍정적으로 쓰인 반면에 뒤의 ‘비는 움직임을 제(制)하는 결의’는 부정적으로 쓰여 혼란을 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명령’과 ‘결의’하는 주체가 누구인가 알아야한다. ‘평범하게 되려는 일’에서 ‘되려는’은 주체가 화자임을 알려준다. 시 속에서 ‘명령’이 있는 부분은 ‘그러나 여보 / 비오는 날의 마음의 그림자를 / 사랑하라 / 너의 벽에 비치는 너의 머리를 / 사랑하라’가 있다. 이 부분도 화자가 명령하는 것이다. 이 명령은 ‘사랑하라’는 긍정적인 명령이다. 그렇다면 뒤이어 나오는 ‘결의’도 긍정적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화자가 말하는 ‘결의’는 ‘결의하는 비 / 변혁하는 비……’의 ‘결의’이라고 보아야한다. 이 ‘결의’는 ‘변혁’하는 ‘결의’인 것이다.
‘평범하게 되’려는 일’의 ‘평범’은 사전적인 의미가 아닌 화자가 생각하는 평범이다. 화자가 생각하는 평범은 시대의 상황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절망적 현실과 절망 속에 있는 마음을 사랑하고 ‘순간이 순간을 죽이는’ ‘현대’에 대한 ‘종교’적인 믿음을 ‘변혁’하는 것이다. .
‘해초처럼 움직이는 / 바람에 나부껴서 밤을 모르고 / 언제나 새벽만을 향하고 있는 / 투명한 움직임의 비를 알고 있느냐 / 여보 / 움직이는 비를 알고 있느냐‘에서 ‘해초처럼 움직이는 / 바람에 나부껴서’는 바람에 나부껴서 해초처럼 바람이 움직이게 하는 대로 움직이는 비의 모습을 말한 것이다. 여기서 ‘바람’은 관습적 상징으로 ‘시련’을 의미한다. 풀어 이야기하면 시련 속에서 시련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안고 힘없이 움직이는 비의 모습을 말한다. 그러나 겉보기와 달리 ‘움직이는 비’는 ‘밤을 모르고 / 언제나 새벽만을 향하고 있’다. ‘밤’은 ‘절망적 상황’을 의미하고 ‘새벽’은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는 시간’으로 ‘절망이 사라지는 희망의 시간’을 의미하는 관습적 상징이다. ‘투명한 움직임의 비’는 모순된 표현이다. ‘비’는 투명하기 때문에 움직임을 볼 수가 없다. 그럼에도 화자는 그 보이지 않지만 새벽을 향해 가는 그 움직임을 느낀다. 화자와 달리 ‘투명한 움직임의 비’를 볼 수 없어 절망의 슬픔 속에 있는 ‘여보’에게 화자는 ‘밤을 모르고 / 언제나 새벽만을 향하고 있는 / 투명한 움직임의 비를 알고 있느냐’고 거듭 묻는 것이다.
‘순간이 순간을 죽이는 것이 현대 / 현대가 현대를 죽이는 ‘종교’ / 현대의 종교는 ‘출발’에서 죽는 영예 / 그 누구의 시처럼’은 화자가 생각하는 현대, 즉 암울한 밤의 상황을 지배하는 관념을 서술한 부분이다. ‘그 누구의 시’에 ‘순간이 순간을 죽이는 것이 현대 / 현대가 현대를 죽이는 ‘종교’ / 현대의 종교는 ‘출발’에서 죽는 영예’라고 써 있고 화자는 이에 동의 한다는 것이다. 현대는 영원한 것이 없다. ‘간이 순간을 죽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스로 죽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순간이 순간을 죽이는 것’을 ‘종교’처럼 믿는다. 그러면서 이렇게 ‘‘출발’에서 죽는’ 것을 ‘영예’로 생각한다. 잘못된 믿음으로 ‘죽이는 것이’ 당연하게 여기고 순간만 사는 것을 영예롭게 여기는 세상인 것이다.
‘ 그러나 여보
비오는 날의 마음의 그림자를
사랑하라
너의 벽에 비치는 너의 머리를
사랑하라’는 다른 연과 달리 들여쓰기를 하여 구분하고 있다. 화자가 말하고 싶은 주제가 여기에 있다고 보여주는 것이다. 화자는 말한다. 순간에 사는 것을 영예롭게 여기는 절망적인 시대이지만 이 시대에서 ‘비오는 날의 마음의 그림자’를 가지고 ‘너의 벽에 비치는 너의 머리’에 절망하고 있지만 ‘그러나 여보’ 현재의 자신을 ‘사랑하라’고 말한다. 절망에 빠져 죽는 것을 ‘영예’로 믿지 말라고 말한다. ‘비오는 날의 마음’은 슬픔을 의미한다. ‘그림자’는 검은 색이다. 검은 색은 절망을 의미하는 관습적 상징으로 ‘마음의 그림자’는 ‘절망에 빠진 마음’을 의한다. 절망적 상황인 밤에 더 절망적인 상황을 의하는 ‘비오는 날’에 절망에 빠진 마음을 ‘사랑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너의 벽에 비치는 너의 머리를 / 사랑하라’에서 주의할 곳은 ‘너의 벽’이다. ‘벽’은 문학에서 ‘장애물’을 의미하는 관습적 상징이다. 그런데 ‘너의 벽’이라 하여 ‘너’인 ‘당신’이 만든 또는 부딪힌 벽이다. 화자와는 달리 ‘움직이는 비’를 보지 못해 극복하지 못하는 장애이다. ‘벽에 비치는 너의 머리’는 머리의 그림자이다. ‘머리’는 생각하는 기관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절망에 빠져 있는 너의 생각, 관념을 의미한다.
화자는 슬픔과 절망에 빠진 ‘여보’에게 현대의 종교를 믿고 죽으려고 하지 말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슬픔과 절망’ 마져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새벽은 오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절망이 지속될 것 같아도 새벽을 향하여 ‘움직이는 비’가 너가 휴식하는 동안에도 움직이고 있으니 이를 믿고 사랑하면 살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비가 오고 있다 / 움직이는 비여’는 ‘움직이는 비’를 강조하고 있다.
‘결의하는 비 / 변혁하는 비…… / 현대의 자살 / 그러나 오늘은 비가 너 대신 움직이고 있다 / 무수한 너의 ‘종교’를 보라’에서 ‘너의 ‘종교’’는 ‘무수한’으로 볼 때 ‘비’이다. ‘결의하는 비 / 변혁하는 비……’이다. 무수하게 내리는 ‘비’이다. 무수하게 ‘변혁’하는 삶이다. ‘......’은 ‘결의’와 ‘변혁’이 끝없이 계속됨을 말한다. 그 결과는 ‘현대의 자살’을 가져올 것이다. 순간에 죽는 것을 ‘영예’로 생각하는 잘못된 ‘현대’가 스스로 죽어 없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움직’여야하는 ‘너’는 절망적인 상황에 슬픔에 빠져 절망하고 있는 것이다.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화자는 ‘너’에게 ‘무수’이 변혁하는 ‘투명한 움직임의 비’를 보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너’가 움직이지 않는 ‘오늘’도 ‘너의 ‘종교’’를 믿고 움직이는 것을 보고 절망에 빠지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계사 위에 울리는 곡괭이소리 / 동물의 교향곡 / 잠을 자면서 머리를 식히는 사색가 / ―모든 곳에 너무나 많은 움직임이 있다’에서 ‘계사 위에 울리는 곡괭이소리’는 비가 ‘계사’(양계장) 지붕에 부딪치며 내는 소리이다. 이 소리를 ‘곡괭이소리’라고 한다. ‘곡괭이 소리’는 무언가를 팔 때만, 움직일 때에만 나는 소리이다. ‘변혁하는’ 소리인 것이다. ‘동물의 교향곡’은 비 소리에 깨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소리를 내는 닭의 울음을 은유하여 표현한 것이다. 화자는 비오는 밤에 깨어 우는 닭소리를 시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교향곡’으로 듣는다. 이것도 움직이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잠을 자면서 머리를 식히는 사색가’인 화자는 계사 안의 닭소리와 계사 천장에서 울리는 비소리를 통해서 ‘잠을 자면서’ 누워 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 ―모든 곳에 너무나 많은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비’의 ‘투명한 움직임’을 생각하는 것이다.
‘여보 / 비는 움직임을 제(制)하는 결의 / 움직이는 휴식’은 부정적으로 쓰였다. 이러한 점은 다음 연에 ‘여보 / 그래도 무엇인가가 보이지 않느냐’의 ‘그래도’에서 알 수 있다. ‘무엇인가가 보이지 않느냐’가 긍정의 답을 요구하는 물음이므로 ‘그래도’의 앞 부분은 부정적인 내용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연에서 사용한 ‘비’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였다고 보는 것이 맞다. ‘움직이는 비’가 아니고 ‘움직임을 제(制)하는 결의’하는 ‘비’이다. ‘제-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상대를 억눌러서 자신의 마음대로 하다.’이다. ‘상대를 억누르는 행동’이다. 그러므로 부정적인 의미를 가진 ‘비’이다. 실제로 내리는 비이면서 ‘시련’이라는 관습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화자는 이 ‘비’로 인하여 밖에 나가지 못하고 누워있다. ‘움직이는 휴식’은 모순 어법으로 쓰인 표현이다. ‘사색가’인 화자는 ‘비’에게 ‘움직임을 제(制)하’여 움직이지 못하고 강제적으로 ‘휴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화자의 생각은 ‘밤을 모르고 / 언제나 새벽만을 향하’여 멈추지 않고 움직인다. 그래서 ‘비’를 ‘움직이는 휴식’을 주는 존재로 표현한 것이다.
‘여보 / 그래도 무엇인가가 보이지 않느냐 / 그래서 비가 오고 있는데!’는 ‘비’가 오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겪는 시련 속에서도 ‘밤을 모르고 / 언제나 새벽만을 향하’여 움직이는 ‘무엇인가가 보이지 않느냐’고 묻는다. ‘희망’을 주는 ‘움직이는 비’가 보이지 않느냐고 묻는 것이다. ‘새벽’이 온다는 ‘희망’을 주기 위해 ‘움직이는 비’가 오고 있는데도 보지 못하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20120530수후1249전한성흐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