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뢰1975카프카CH01
제1장 내용과 표현
in 카프카: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Kafka: Pour une Littérature Mineure, 1975)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 이진경, 동문선, 2001. P. 206
- 카프카(Franz "Anshel" Kafka, 1883-1924) (독일 언어를 쓰고 유대종교를 지닌)체코의 프라하 작가. 변신(Die Verwandlung, La Métamorphose, 1915) In der Strafkolonie, La Colonie pénitentiaire, 1919). 사후 출판, 소송(Der Prozeß, Le Procès, 1925), 성(Das Schloß, Le Château, 1926), 아메리카(L'Amérique, Amerika 1927), 땅굴(Le Terrier, Der Bau, 굴(窟), 1931)
** 카프카: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Kafka: Pour une Littérature Mineure, 1975)***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 이진경, 동문선, 2001. P. 206
제1장 내용과 표현 13-27
{숙인 고개, 쳐든 고개 13 / 사진, 소리}
[ - 왜 들뢰즈/가타리는 샤유/연장, 추리/운동, 영혼/신체라는 전통적인 이원론적 속성들의 문제를 형식/내용, 기표/기의 등의 이항 대립적 구도로 보지 않고, 내용/표현으로 주제를 삼았을까? 이원론이 상층의 원리를 인정하고 이항대립이 상층으로 수렴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보았을 것이다. 그러면 심층에서 솟아나는 방식을 어떻게 기호학적으로 풀어 볼 것인가? 스피노자는 두가지 속성이 우리를 통해서 알려진다고 했지만,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은 관념을 통해서 파악할 때이다. 이 알려지지 않은 속성들도 우리에게 이미(신체라는 기계를 가졌다는 점에서 또는 기억이라는 덩이를 가졌다는 점에서) 욕망(권능)의 생산으로 우리에게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보았다. 벩송은 욕망의 생산과 같은 생명의 약동을 작동하는 권능(puissance d'agir)라고 이미 말해 놓았다. 누구나 이 작동하는(사람들은 정념이 작동한다고 하지만 권능이 더 적당하다) 욕망이 생산하는 것을 느끼고 파악하고 있다. 저자들은 이것을 풀어 보는 방식으로 내용과 표현이라는 했을 것이다. 이 제1장에서는 시각이미지와 청각이미지를 구별하여 계열의 발생을 설명하려고 한 것 같다. 촉각이미지에 대해서는 여기에서 말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50TKI)]
[이런 관점은 앵글로색슨에서 지식을 우선으로(humaniste) 두고 내용형식의 진위를 구별하는 의미론(la sematique)과 달리, 프랑스 철학에서는 삶을 부각시키고(humanitaire) 생명의 표출로서 생성(되기), 욕망의 표현과 과정 등을 주목하는 기호론(la semiotique)인 셈이다. 후자에서 상상(l'imagination)은 이미지(l'image)의 자기 활동성 또는 욕망을 통해 총합하는 작동성이다. 감각들은 이미지로서 우리가 지니고 있는 질료(matiere)이다. 상상은 공상과 허상과 다르다는 점을 간직해야 할 것이다. (50TKI)]
* 숙인 고개, 쳐든 고개 13
[정태적이고 고립화 대(代) 동적이고 새로운 활력]
카프카의 작품 속에 어떻게 들어갈 것인가? 그것은 리좀이고 굴(窟)이다. 성(1926)에는 “수많은 입구들이 있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 그것들이 어떻게 분포되어 있는지 잘 알지 못한다. 아메리카의 호텔은 수위가 지키고 있는 정문과 옆문은 물론 문이 없는 입구를 출구까지 포함하여 무수히 많은 문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굴’은 동일한 제목의 단편 소설에서는 하나의 입구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기껏해야 짐승들은 감시 기능만을 수행하는 제2입구가 있을 가능성을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짐승이, 그리고 카프카 자신이 만들어 놓은 함정이다. 굴에 대한 모든 서술은 적을 속이기 위한 것이다. (13) [동물의 땅굴의 통로는 입구가 하나인 것은 드물다. 여러 입구를 갖는 경우는 한 입구가 막히면 다른 입구를 통해 도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 들뢰즈/가타리가 굴을 예로 들었을 때는, 리좀의 흐름으로, 또는 탈영토와의 작업으로 도주선을 생각한 것이지, 단순히 영토의 경계의 다변화를 생각한 것은 아닐 것이다.(50PLG)]
우리는 여관의 홀에 있는 소박한 입구 ... 거기서 K는 턱이 가슴에 파묻힐 정도로 고개를 숙인 수위의 초상화를 발견한다. (14)
쳐든 고개, 지붕이나 천장을 뚫고 올라가는 고개가 숙인 고개에 대응하는 듯이 보인다. 우리는 이것을 카프카 작품의 모든 곳에서 발견하게 된다. 성에서는 “어떤 주저함도 없이 곧장 치솟아 높은 곳에서 젊음을 과시하는” 고향의 종탑에 대한 언급이 수위의 {고개숙인} 초상화와 대응한다(심지어 성의 탑조차 마치 욕망의 기계처럼, 지붕을 뚫고 일어설 듯한 주민들의 운동을 슬픈 방식으로 상기시킨다). (16)
“‘불 좀 꺼주세요. 전 어둠 속에서만 연주할 수 있습니다’라고 나는 일어서면서 말했다.” 여기에서 두 개의 새로운 형식이 있다고 믿어도 좋을 것이다. 내용의 형식인 쳐든 고개, 표현의 형식인 음악적 소리가 바로 그것이다. (19) [내용은 쳐든 고개(몸의 일어섬)이라면 표현은 음악 소리이다. 그러면 숙인 고개도 내용의 형식이고 사진 또는 초상화는 표현의 형식이다. 시각 이미지와 청각이미지는 표현의 형식이고, 몸의 구부림과 솟구침은 내용의 형식이다. 달리 말하면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오는 관념은 표현에 속하고, 몸체의 운동(활동)은 내용으로 간주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아래 도식에서 보면, 시각 이미지로서 사진은 어린 추억인데 비해, 청각 이미지로서 소리는 블록이다. (50TKI)]
고개 숙인 고정된, 복종적인 혹은 복종하는 욕망, 중립화된 욕망, 접속이
초상화-사진 . 최소화된 욕망, 어린 시절의 추억, 영토성 내지 재영토화
쳐든 고개 치켜든 욕망, 혹은 슬며시 빠져 나가 새로운 접속으로 열리는
음악적-소리 욕망, 유아기의 블록, 혹은 동물적 블록, 탈영토화 (20)
[ pp.173-174 원탑과 장성의 두 분류와 비교해 보라]
카프카가 관심을 가지고 있던 것은 작곡되어 기호적으로 표시된 그런 음악이 아니라 순수한 음향적 질료(maitère)였다. 소리와 관여[련]된 중요한 장면들을 조사해 본다면, 존 케이지(John Cage, 1912-1992)의 음악회와 거의 유사한 무엇을 볼 수 있다. (20)
「어느 투쟁의 기록」에서 1) 기도자(祈禱者)는 피아노를 치고 싶어 한다. 그는 막 행복해지려는 참이기 때문이다. 2) 그는 연주할 줄 모른다. 3) 그는 아무것도 연주하지 않는다(“그때 두 신사가 의자를 잡고는 나를 피아노로부터 멀리 식탁으로 끌고 갔다. 휘파람으로 노래를 부르며, 박자에 맞추어 나를 약간씩 흔들며”). 4) 그러나 마치 훌륭히 연주하기라도 한 양 칭찬을 받는다.(20)
「어느 개 연구」에서 음악가 개들은 아주 큰 소음을 만들어 내지만, 그것을 어떻게 만들어내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은 무(無)로부터 음악을 만들어 내는데, 말하지 않으며 노래하지 않고 짓지도 않기 때문이다. (20-21)
「여가수 요제피네 또는 서(鼠)씨 일족」에서 요제피네는 노래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며, 다만 휘파람을 불 뿐이다. 하지만 오제피네는 다른 생쥐들 보다 휘파람을 잘 불지 못하며, 오히려 더 못 부는 편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방식으로 별 볼일 없는 그녀의 예술의 신비가 더욱더 위대한 것이 된다.(21)
아메리카에서 칼 로스만은 우스울 정도로 너무 빨리 연주하거나 너무 천천히 연주하며, {그 결과} “다른 노래가 그의 내부에서 치밀어 오르는 것을”느낀다. (21)
변신에서 소리는 먼저 삐약대는 소리처럼 끼어들어 그레고어의 목소리를 이끌어 내며 말들의 울림을 뒤섞어 버린다. 그리고 음악가인 그의 누이는 하숙인들의 그림자에 불편해하면서 겨우 삑삑거리는 바이올린 소리를 낼 뿐이다. (21)
이러한 예들은 내용에서 쳐든 고개와 숙인 고개가 대립되는 것처럼 표현에서 소리와 초상화(이미지)가 대립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 주기에 충분하다. 두 가지 내용의 형식[숙인 고개-쳐든 고개] 사이에는 추상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확실히 단순한 형식적 대립, 이항적 관계, 구조적 내지 의미론적 특질이 있는데 이는 우리로 하여금 “기표”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못하게 하며, 리좀적이라기보다 이분법적이다. 그러나 초상화가 그 나름대로 ‘숙인 고개’라는 내용 형식에 대응하는 표현 형식임이 분명하지만, 그것은 소리에 대해서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 카프카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언제나 자기 자신의 붕괴와 관련된 강렬하고(intense) 순수한 음향적 질료로서, 탈영토화된 음악적 소리고, 의미화(signification)ㆍ구성{작곡}ㆍ노래ㆍ발화를 비켜가는 비명소리며, 여전히 지나치게 기표적인{의미화하는} 연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단절된 그런 소리다. 소리에는 오직 강렬도 만이 중요한데, 그것은 대개 단조롭지만 언제나 비의미적{비기표적}이다. (21-22)
요컨대 여기서 소리는 하나의 표현 형식으로 나타나는 게 아니라 표현의 비형식화된 질료로서 나타난다. 이는 다른 항들에 반작용할 것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자신을 드러내는 내용으로 하여금 상대적으로 점점 덜 형식화된 방식으로 표현케 하는데 복무할 것이다. (22-23)
* 사진, 소리 24
[시각 이미지의 고정성과 영토성, 청각 이미지의 개방성과 탈영토화 - 왜 이런 대비가 가능한가? 시각 이미지의 단편성에 비해서 청각 이미지의 연속성 때문일까? ]
우리는 카프카의 상상력이나 역동성ㆍ동물성을 이루는 원형(archétypes)을 찾으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원형은 유사성ㆍ동질성ㆍ주제에 의해 진행되는데, 반대로 우리는 이질적인 작은 선들이 미끄러지고 단절되는데 한해서만 우리의 규칙을 찾아낼 뿐이다). 우리는 이른바 자유연상을 추구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언제나 우리를 어린 시절의 추억으로 인도하거나, 더 나쁘게도 환상으로 이끄는 자유연상의 서글픈 운명은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슬픈 결과는 자연연상이 실패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자유연상의 은폐된 법칙이라는 원리를 이루기 때문이다). 우리는 해석코사 하지 않으며, 이것이 의미하는 건 저것이라는 식으로 말하고자 하지 않는다. (24) [동일성에서 출발하는 주지주의 이미지와 이미지 연결은 자유연상처럼 추억(사진)을 옆으로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상상 또는 역동성은 음악의 구성처럼 앞과 뒤 아래와 위의 지속과 중첩으로 이어진다. 기억의 활동(권능)은 음악구성처럼 두께를 가지는 덩이(블록)이며 강도(강약이라기보다 음색과 같은)를 갖는다. (50TKI)]
따라서 카프카의 기계는 다양한 정도로 형식화된 내용과 표현으로 구성되고, 그런 만큼 그 형식화된 것에서 빠져 나와 모든 상태를 통과하며 그 안으로 흘러들어가는 비형식화 된 질료에 의해 구성된다. 기계 안에 들어가고 거기서 나가는 것, 기계 안에 있는 것, 기계를 따라가는 것, 기계에 접근하는 것, 기계의 일부가 되는 것, 이 모든 것이 어떠한 해석으로 부터도 독립적인 욕망의 상태들이다. 탈주선은 기계의 일부다. 내부에서든 외부에서든 동물은 굴(窟)-기계의 일부다. 문제는 전적으로 자유로워지는 게 아니라 출구 또는 입구를, 혹은 측면이나 복도ㆍ쪽문 등을 찾는 것이다. 아마도 다양한 요인들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즉 기계의 순전히 외견상일 뿐인 통일성, 인간 자신이 기계의 일부가 되는 방식, 기계와 결부된(인간 내재 동물의) 욕망의 위치 등이 그것이다. (25-26)
... 욕망은 분명히 모든 위치, 모든 상태를 통과한다. 아니 차라리 그것은 모든 선을 쫒아간다. 욕망은 형식이 아니라 과정(processus)이자 소송(procès)이다. (27) [그저 욕망 즉 능동성 역동성은 지속하며, 사방으로 길이 없더라도 길을 내며 나아가는 발걸음과 같다. (50RLB)] / [솟아나는 샘과 같고, 퍼져나가는 빛과 같다고 하면 플로티노스를 만나게 될 것이다. (50SKI)]
(4:18, 50S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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