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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예술에 관한 담론(Discours sur les sciences et les arts, 1750) 해제
끌레르(A. Clair), Les Oeuvres I, Dictionnaire, PUF, 1992, p. 1426-1427. (P.2190.)
끌레르(André Clair, 1939-) 철학교수자격통과, 인문학 박사, 근대철학과 윤리 교수(렌1대학 명예교수) 파스칼(Pascal), 르끼에(Lequier), 키에르케골(Kierkegaard)에 관한 작품이 있다.
#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예순여섯) 약력. pp. 1426-1427.
- 끌레르(André Clair, 1939-)
[루소의 간략한 생애]
시계 공이자 제네바 시민의 아들인, 루소는 종종 방황하는 자이기도 하고 사회적으로 여분의 주변인이도 하였다. 그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슬프지만 위대한 체계”의 작가로서 그는 자기 학습자이도 하다. 그의 [작품]생산적업은 예외적으로 다양하기도 하지만 통상적인 분류를 벗어난다. 즉 자서전적 저술, 드라마 작품과 목가적 작품, 음악학 작품, 백과전서의 협력자로서 작업, 논쟁적 작품, 소설가로서 작품, 사회와 정치 사상가로서 작품, 교육철학의 작품, 또한 서한문학 작품, 심지어는 식물학의 작품도 있다.
계몽기와 철학자의 세기[18세기]에, 루소는 개화되고 교양있는 사회의 타락[퇴폐]을 폭로하였고, 자연에 따른 삶의 찬미를 시도하였다: 단순한 삶, 고독한 삶, 조화로운 삶, 비타협적인 삶에서, 자신과 타인 사이의 연관의 투명함은 자기애(amour de soi, 본성, 인류애, 이타심)에서부터 이기심(amour propre, 자만심)으로 변동에 의한 좌초로 이어지는 것을 물리칠 수 없었다. 사회적 삶의 가치에 관한 의문(l’interrogation)은 에밀(Emile)에서 시작하는 명제 속에서 압축된 학설에 기대고 있다. 즉 명제란, “모든 것은, 사물들의 작자의 손에서 나오면서, 선하다: [그런데] 모든 것은 인간들 손에서 타락되었다(dégénérer).”(OC, IV, 245) 틀림없이 [루소를 제외하곤] 어느 한 철학자도 이런 비판적이고 형이상학적이고 도덕적인 의미를 자연(본성, nature)안에 그만큼 완전하게 인정되지[인식되지] 못했다.
어떠한 분야에서도 루소는 자신의 철학을 철저하게 정돈된 진술을 제시하지 못했다. 필수적이지 않았던 것이 덧붙여져서 사유의 깊이(토대)와 불일치로 되었으리라. 그 사유의 깊이에서 자연의 삶은 모든 사물의 원리이자 목적(la fin)이었다. 조화로운 차이들을 가지고 있는 다양한 저술들에서 말하고자 한 것, 그것은 그의 인간적 생장과 자기 변형과정에 따라 이해되어야 하는 것으로써 사실상 자연이다. 마치 계열([le] paradigme, 표본, 견본)과 같은 자연이란 용어는, 자서전적 저작들 속에 작업 중에, 교육과 개인적인 관계들에 관한 저작들만큼이나 역사와 사회적 삶에 관한 탐구들에도 지배하고 있다. (A. Clair)
* 참조 판본: OC. Paris, Gallimard(La Péiade): t.I(1959): Les Confessions, autres textes autobiogrphies; t.II(1961): La Nouvelle Héloïse. Théâtre. Essais littéraires; t.III(1964): Du contrat social. Ecrits politiques; t.IV(1969): Emile. Education – Morale – Botanique. - Correspondance complète, éd. R.A. Leigh, Genève/Oxford, 40 vol., 1965-1982. - Ecrits sur la musique, préf. C. Kintzler, Paris, Stock, 1979. (p.1437)
[당시 초기 가내 기계공업적 산업화 과정에서 루소는 자연(phusis, nature 자연)을 잃어버리는 인류에 대해 타락의 길을 걷고 있다고 보았다. 8천만이란, 이뭣꼬에서도 우리는 인공지능과 빅데이터에 속고 있는 물신인간들에게, 자신들이 자연에게 소외 당하고 있다는 경종을 알려야 하기 위해서도 “자연”을 화두로 삼아야 한다. 인공지능을 넘어서 인공적인 먹거리를 먹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타락의 길을 가고 있는지를 경고해야 한다. 절기를 모르는 철없는 자들이여. 왜 루소와 비슷한 시기에 그들과 관계없이도 남인 지식인들이 지리, 토지, 절기, 동식물 표본 등에 관심을 갖고 탐구했는가를 되돌이켜(내성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52MKD)]
# 루소가 과학들과 예술들에 관한 담론(Discours sur les sciences et les arts, 1750) 쓰기 전의 과정들 ***
바랑스 남작부인의 목동(Le Verger de Madame la baronne de Warens, 1739)라는 시집을 낼 때 루소는 스물일곱이었다.
「음악에 새로운 표기법에 관한 기획(Projet concernant de nouveaux signes pour la musique, 1741」 루소, 과학아카데미에서 낭독, 1741년 8월 12일.
끼있는 뮤즈들(Les Muses galantes)(1743) 루소의 오페라-발레이다. 1743년 작곡, 1747년 오페라에서 공연, 1751년 꽁띠 공(prince de Conti 1727-1776) 집에서 공연. [* 1727-1776 : Louis François de Bourbon (1717-1776), 6e prince de Conti, fils du précédent.]
루소는 1747년에 두 편의 희곡을 작성했다. 무모한 참여(Engagement Téméraire)와 운문으로된 실비 오솔길(Allée de Silvie)이다.
루소가 시나 희곡에서 다른 길로 가게된 것은 1749년 동종에 감금된 디드로(Diderot, 1713-1784)를 여러 번 만나고 나서이다. 이 당시에(서른일곱) 빛을 보았다고 한다. 학문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디종 아카데미에 글을 쓰고자 마음 먹는다. (52NM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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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들과 예술들에 관한 담론(Discours sur les sciences et les arts, 1750) 해제. p. 1427
- 끌레르(André Clair, 1939-) [스물여덟에 쓴 작품이다.]
“행복한 우연(hasard)”의 결실이자 “갑작스런 영감”의 결실인(I, 1135), 이 작품(Discours)은 디종 학술원(l’Académie de Dijon)에서 주는 도덕 상(賞, un prix)을 받았으며, 그의 전집의 출발을 알린다. 그러나 또한 “학술원의 이 불행한 질문”(I, 828)은 작가에게 모든 고난(toutes les tribulations)의 기원이다.
그 시대의 수사법을 실행하면서 루소는 역설적 주제를 주장하였고, 비판적 철학자로서 계몽주의의 의미를 자문하였다. “과학들과 예술들의 재정립”이 풍습들을 정화하기는커녕, 그것이 풍습들을 더욱더 타락시켰다. 새로운 프로메테우스인 근대인간[계몽기인]은 자연에서 그 비밀을 훔쳐내어, 자기 스스로를 고양시켰고 냈고, 스스로를 감탄하게 하는 동기적 권능들[잠재력들]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문화에 대한 무조건적 찬미라는 것은 그 문화 속에 [이미] 문화의 단죄거리를 옮겨져 있다는 것이다. 교육받고 문명화된 사회의 세련미는 겉보기로 사는 삶 이상의 것이 아니다. 이 구역질(l’affadissement)나는 취향으로 인해 고대의 덕목들은 사라지고, 모든 유혹으로 치장되었지만 도덕성이 빈 정치적 예속[굴종]을 위하여 자기만족(la complaisance)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단순한 몇몇 인민들만이, 생생한 몇몇 개인들 그 자체들이 아직도 양심의 소리를 들을 줄 안다. (A. Clair) - (2:23, 52MMF) (3:10, 52NMH)
* 참조1. *
[인간이 본능으로부터 만든 사회나 문화(제도)가 형성과정에서는 인간 자신을 더욱 고양시키는 측면이 있는데 비해, 고착된 사회 또는 폐쇄적 문화는 운동(변화, 확장, 고양)하지 않는 덕분에 고정적이고 뻣뻣해 진다. 이는 제도가 편리, 유용, 실용에 머물기 때문이다. 인간은 태어나서 새로이 배우면서, 즉 들뢰즈 표현은 이질 반복을 스스로 실천하면서 자기 운동(변화, 확장, 발명, 창발)의 길을 가는 것이다. 더 잘 만드는, 더 잘 실행하기 쉬운 사회는 더욱 이질적 반복을 하는 더 힘든 사회와 역설적으로 반대의 길을 갈 것이다. 현재 기술과 4차산업을 이루고자 하는 사회는 토지와 농업을 통한 지방분권화 사회와 역설적으로 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서울 경기는 11%의 지역으로 50%가 넘는 인구를 가졌다고 하고, 추측이지만 80%가 넘는 경제적 생산을 하고 있다고 한다. - 이런 역설처럼, 아마도 루소는 그 시대(사회)를 단죄하려 했을 것이다. (52MMF)]
* 참조2. [[fr.Wiki(190226), “Discours sur les sciences et les arts” 항목 머리글 **
[과학과 예술에 관한 담론(Discours sur les sciences et les arts, 1750)은 1750년(서른여덟)에 디종 학술원의 학술 공모에서 루소가 쓴 작품이다. 장-자끄 루소는 이 담론에서 열변(la prosopopée, 활유법)으로 로마의 영웅인 파브리키우스(Fabricius, 전282활동)에게 말을 한다. 학술 상 수상자인 루소는 자기 시대의 계몽주의자들의 관념들과는 반대 경향에 속하는 그의 시론이 매우 비판적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서른여덟 나이에, 주저인 사회계약론(Du contrat social. 1762)보다 12년 앞서서 논쟁적 인물이 되었다.]
[파브리키우스(Gaius Fabricius Luscinus, 전성기 전282) 로마 공화국 시대 원로원, 집정관. 그는 가난하였고 무사무편(無私無偏)으로 유명하다. 그는 플루타르크(Plutarque, Πλούταρχος, 46-125)과 쥐베날(Juvénal, Decimus Iunius Iuvenalis, 47/50?-128 )에 의해서 고대 로마에서 덕 있는 인물의 전형으로 꼽힌다. (52MMF)]] (3:10, 52MMF)
*참조3. ***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 연표
[[루소는 몽테스키외(Montesquieu, 1689-1755)보다 23살 아래, 볼테르(Voltaire, 1694-1778)보다 18살 아래, 뷔퐁(Bufffon 1707-1788)보다 5살 아래, 영국 철학 흄(Hume, 1711-1776)보다 1살 아래이며, 디드로(Diderot, 1713-1784)보다 1살 위, 꽁디약(Condillac 1715-1780)보다 3살 위, 달랑베르(d'Alembert, 1717-1783)보다 5살 위, 영국 경제학자 스미스(A. Smith, 1723-1790)보다 11살 위, 올바흐(d'Holbach, 1723-1789)보다 11살 위, 베르나르당(Bernardin de St-Pierre 1737-1814)보다 25살 위이다.]]
1749(37살) 달랑베르(D'Alembert)에 의해 백과사전 속에 음악에 관한 항목을 쓰기로 책임진 루소는 그림(Grimm, 1723-1807)을 알게 된다. 벵센느의 동종에 갇힌 디드로(Diderot)를 면회하다.
디종(Dijon) 아카데미에서 제안한 논문 경시대회에 참여하기로 마음먹다.
1750(38살) 디종 아카데미는 과학과 예술에 관한 담론(Discours sur les sciences et les arts, 1750)를 우수작으로 선정했다.
1752(40살) 오페라-코믹 마을 수호신(Le Devin du village, 1752)이 왕(루이 15세)의 참석 하에 퐁텐느블로(Fontainebleau)에서 성공적으로 상연되다.
루소는 루이 15세가 청한 선발대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젊은이의 코메디 나르시스(Narcisse ou l'Amant de lui-meme, 1752)가 12월에 떼아트르-프랑스(Théâtre- Français)에서 공연되다.
1755(43살) 인간 불평등의 기원과 토대에 관한 담론(Discours sur l'origine et les fondements de l'inégalité parmi les hommes, 1755)을 쓰고, 볼테르와 이 주제에 대하여 편지를 교환하다.
1762(50살) 사회 계약론(Du contrat sociale, 1762), 에밀(Emile, 1762)이 나오고, 경찰은 이것을 압수하고, 소르본느 대학은 고발하고, 의회는 단죄하였다. 루소는 신체구금의 형을 선고받고, 스위스로 달아나서, 이베르동(Yverdon)에 도착하다. / 에밀(Emile)이 파리에서 불타다. 에밀(Emile)과 마찬가지로 사회 계약론(Du contrat sociale)도 봉인되었다. 제네바도 루소를 신체 구금형을 언도하였다.
루소는 이베르동(Yverdon)을 떠나, 모띠에(Motiers)로 가서, 프러시아에 속하는 뇌샤텔(Neuchatel)의 공국으로 피신하였다.
(4:30, 52NMH)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