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락죽을 끓이며
홍성래
내 생이 시작된 이후로 얼마나 많은 식사를 했을까? 하루 세끼를 다 받아먹는 삼식이 새끼라는 농도 있지만 60년간 하루 세끼만 계산해도 65,700식이니 엄청나다. 태어나서 처음엔 엄마의 젖을 먹다가 이빨이 나고 음식을 씹기 시작하면서부터 밥을 먹었겠지만 그 중에서 내 손으로 차려 먹은 것은 결혼 후 14년을 주말부부로 지낸 기간에 불과하다. 14년의 기간 중 주말을 뺀 주 5일을 3식으로 계산하면 10,962식이니 대략으로 따져 봐도 65,700식에서 10,962식을 빼면 54,738식이 된다.
어린 날에 쑥쑥 크라고 사랑의 밥을 주시던 어머니는 이제 아름답고 고마운 기억으로만 남아있고 지금은 아내가 주는 밥을 잘 먹으며 살고 있다. 그런 아내가 얼마 전에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하여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내를 위한 식사를 준비해 보았다. 조선시대 왕이 특별한 보양식으로 먹던 것을 검색해보니 타락죽이란 것이 있어서 한 번 따라해 본 것이다.
타락죽은 조선시대에 임금님이 보양식으로 먹던 음식인데 귀한 것이라 특별한 명절에나 먹지만 특히 왕이 병이 났을 때 진상하는데 주방 상궁이 아닌 내의원 약국에서 타락죽을 조리하였고, 매년 10월말부터 정월 사이에 내의원에서 타락죽을 끓여 나이든 신하들에게만 나누어 주었다고 하니 어쩌면 음식이 아니라 보약이다.
타락죽은 왕에게 초조반으로 들여 새벽 공복에 드시도록 하는 데 이를 나누어 먹는 특별한 이도 있었다고 한다. 조선 말기 고종때 약방기생을 지내신 분의 이야기로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궁중의 관기들이 매달 두 번 정도 절차를 거치지 않고 임금을 사사로이 뵙기 위하여 침통을 들고 가지만 침을 놓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다행히 임금의 사랑을 받으면 은솥에 담긴 타락죽을 고종이 먼저 먹고 조금 남겨주어 기생이 먹도록 하는데 이처럼 타락죽을 나누어 먹으면 이를 ‘분락(分駱) 사이’나 ‘분락기(分駱妓)’라고 하였으며, 이 은혜를 입은 이들은 아주 큰 영광으로 여겼다.
이야기가 잠시 옆길로 새었는데 어찌 되었든 타락죽은 쉽게 이야기하면 쌀로 죽을 쑤는데 물이 아닌 우유에 끓이는 우유죽이다. 타락죽(駝酪粥)의 타(駝)는 낙타(駱駝)를 말하고, 락(酪)은 낙농업(酪農業)을 말할 때 쓰는 ‘낙’으로 진한 유즙(乳汁)을 말하는 것이니 쉽게 이야기하면 우유죽이다.
한문으로만 해석하면 낙타의 젖이라고 보이지만 우유의 한자 음역으로 보기도 한다. 육당 최남선이 쓴 《조선상식문답》에 따르면 타락의 어원을 돌궐 말 토락(Torak)으로 본다. 원나라의 영향을 받던 돌궐인들이 고려 때에 조선에 들어와 목축을 담당했는데 이때 그들이 우유를 돌궐 말로 타락이라고 부면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스페인의 디저트인 아로스 콘 레체(Arroz con leche)는 스페인 말로 아로즈는 쌀, 콘 레체는 우유로 만들었다는 뜻이니 우유로 끓인 죽이고, 이탈리아의 쌀죽인 부디노 디 리조 또한 우유에 끓인 반액체 음식이며, 아랍과 인도의 피르니, 중앙아시아인들이 먹 소홀라도 모두 우유로 끓인 것이니 모두 타락죽과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우유가 귀한 조선과 달리 말들이 많은 서양쪽에서도 이런 음식을 매우 귀하게 여겼다는 점에서 보면 참 흥미로운 일이다.
우유의 단백질에는 8가지 필수아미노산이 있어 그 자체로도 완전식품에 가깝고 소화도 잘 되는데 이걸로 끓인 타락죽은 안색을 좋게 하고 힘이 넘치게 하며 소화촉진, 수명 연장, 공복감 해소, 대소변의 배출을 원활하게 해 준다고 하여 생초짜가 겁도 없이 한 번 덤벼본 것이다.
쌀을 불려서 믹서기에 갈고 우유를 넣어 끓이기 시작하니 생각보다 많이 끓어오른다. 얼른 찬 우유를 조금 부어도 보고 불을 줄이기도 하는데 20분 이상을 젓는 일이 쉽지 않았다. 사기그릇이나 밥솥에 죽 기능을 활용하면 되었을 것을 경험이 없어 눈에 보이는 스텐냄비로 끓이는데 잠시 딴 생각을 하면 금방 눌어붙기 시작하여 나무젓가락으로 젓는 느낌이 달라진다.
더욱 조심하며 끓여 겨우 완성을 하고 어디서 본 것은 있어서 잣 다섯알을 고명으로 띄워서 아내에게 한 그릇 먹어보라고 올린다. 다행히 아내가 잘 먹어주니 고맙다. 나도 옆에 앉아서 같이 한 그릇을 나누어 먹으니 참 좋다. 바닥이 눌러 붙은 냄비는 따듯한 물을 부어서 밤새 불린 후에 아침에 나무숫가락으로 눌러 붙은 것을 대강 긁어낸 후에 수세미로 깨끗이 씻으니 새그릇처럼 반들반들하다.
처음엔 차가운 우유와 단단한 쌀알이 만나 뜨거운 불꽃이 튀니 영양가 높은 타락죽으로 변하지만 불 조절이나 물 조절에 실패하여 바닥이 눌러 붙기도 하고, 그러면 또 밤새 물에 불려서 깨끗이 씻어내는 것이 인생을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남녀가 만나 불꽃같은 사랑을 하면서 살림도 불리고 아이도 만들어 키우면서 더러는 부부싸움의 묵은 찌꺼기도 절로 풀리면서 뜨거웠던 사랑이 정으로 변하여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부부가 되어가는 것과 같다는 느낌을 가지며 설거지를 마친다.
내 마음을 낮게 하여 타락죽을 끓이며 또 한 수 인생의 지혜를 배운다.
첫댓글 박회장님.
코로나19 때문에 삼척은 더 힘들지요?
이 원고는 3월 원고방 개설되면 그곳으로 옮겨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