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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그리스도는 그 몸으로 전파됨(골4:1-6)
1. 바울은 교회에게 그리스도의 비밀이 전파 되도록 기도하기를 바람
가. 그리스도는 교회를 위해 하늘에 쌓아둔(예비 된) 소망임
그리스도는 그 몸으로 전파된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에게 그리스도의 비밀이 전파되도록 기도하기를 바랐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우리(교회)를 위해서 하늘에 쌓아둔 소망이기 때문이다. ‘쌓아둔’이라는 말은 ‘예비된’이라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위해 하늘에 예비된 소망이다. 그러니까 교회의 모든 목표는 그리스도에게 있다.
나. 교회를 위해 하늘에 쌓아둔 그리스도는 유일하고 탁월하심
교회를 위해서 하늘에 쌓아둔 소망인 그리스도는 유일하고도 탁월하시며 모든 것의 모든 것이다.
1) 성도의 분깃
첫 번째로 그리스도는 성도의 분깃이다. ‘분깃’은 그분의 인격이고 그분의 인격으로 조성된 사회다. 우리가 교회생활에서 할당받을 수 있는 몫 첫째는 그리스도의 인격이고 두 번째는 그 인격으로 조성된 사회다. 죽은 후에 천당에 가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성경에 없는 문제다. 성도의 분깃은 그 인격과 그 인격으로 조성된 사회다. 이것만이 분명한 사실이다. 이것은 앞으로 있을 일이 아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그 인격과 그 사회인 것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적든지 크든지 그 인격 안으로 부름받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개인적 목표는 그 인격이고 단체적 목표는 그 사회, 즉 교회인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생활은 곧 분깃을 얻는 생활이고 분깃을 누리는 생활이다. 교회생활을 100% 누려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축복을 누릴 수 있다.
기독교 안에는 개인적으로만 예수를 믿고 누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것이므로 사회를 잃어버린 것이고 한쪽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기독교를 개인적 종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개인적 종교가 아니다. 구약성경 자체가 히브리인들의 역사다. 그래서 야웨도 어느 개인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적 하나님이다. 성경을 읽어 보면 아담을 창조하시고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이 나온다. 그런데 성경은 이스라엘이 민족화 되었을 때 쓰여졌다. 야웨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민족을 모르고는 그 하나님을 알 수 없다. 마찬가지로 예수도 교회를 위해서 오신 분이다. 그러니까 교회가 없이는 그분을 한쪽밖에 알 수 없다. 이스라엘이 없이는 여호와를 알 수 없듯이 교회가 없이는 예수를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성도의 분깃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우리의 시작이고 우리의 마침인 것이다.
2) 교회의 머리
그래서 그분은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신다는 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몸이 자라는 것은 머리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머리가 소였으면 소로 자랐을 텐데 우리의 머리가 사람으로 생겼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의 몸으로 자랐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람의 근본은 그분인 것이다.
그분이 아닌 것으로 자란 것은 그분의 몸이 아니다. 사람의 몸 한 쪽에서 개 발이 나올 수 없다. 지체는 모양은 다르지만 한 머리 안에서 한 생명으로 자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시다. 코끼리 발이 아무리 좋아도 우리 몸에는 코끼리 발이 맞지 않는다. 우리의 머리에 없는 것이니까 우리 몸에는 코끼리 발이 있을 수 없다. 몸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자라고 그리스도가 자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아닌 어떤 것도 자라면 안되는 것이다. 몸은 머리대로 자란다.
개구리가 자라는 것을 보면 신기하다. 하나의 세포인 것 같은데 그것이 둘로 갈라지고 넷으로 갈라지고 점점 갈라져서 머리가 쏙 나온다. 그리고 그 머리에 따라 몸이 결정된다. 우리의 몸도 머리이신 그리스도에 따라서 결정되고 우리의 사회도 결정된다. 이것은 좋고 나쁜 것의 차이가 아니다. 그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닌 것은 암과 같은 것이다. 만일 그런 것이 자란다면 우리는 그것을 늘 제거하고 잘라내야 하는 것이다.
식물 가운데는 돌연변이가 생겨서 다른 것이 자라는 수가 있다. 우리의 인격적인 사회도 그렇게 되기 쉽다. 기독교는 유대 땅을 떠나서 예수님은 희랍 사회로 전파되었다. 그런데 기독교는 희랍 사회로 들어오면서 희랍 사회의 문화와 섞였다. 그 문화를 완전히 비껴가기가 어렵기 때문이었겠지만 문제는 기독교가 희랍화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희랍화 된 것이 다시 로마로 들어오면서 다시 로마화 되었고, 로마화 된 것이 다시 영국과 독일로 건너가서 한쪽은 영국화 되고 한쪽은 독일화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서 미국화 되었고 그것이 우리에게로 넘어왔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전파되어 오는 동안에 문화적인 영향이 굉장히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문화적인 영향을 빼고 원래 오리지날이 무엇인지 알기 어렵게 되고 말았다. 너무 오랫동안 문화적인 영향에 젖어 버렸기 때문에 문화적인 영향을 다 제거하고 나면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르게 되고 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머리이신 그분을 다시 알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것으로 자랄 수 있는 것이다.
가톨릭처럼 크게 자랄 수도 있고 극단적인 보수로 자랄 수도 있고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으로 자랄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도 그러했듯이 우리 교회 안에서도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 지체들이 그리스도를 떠나서 자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쁜 것을 취하려는 사람은 없고 다 좋은 것을 취하려 하지만 좋은 것을 찾다 보면 좋은 면으로 자라겠지만 그리스도가 아닌 것으로 자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경계하기 위해서 바울은 골로새서를 썼던 것이다. 그래서 그 시대에 바울은 유대종교와 헬라의 영지주의적 철학을 대표적으로 언급했던 것이다.
사정은 오늘날도 동일하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와서 쉽게 전파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조상들에게 비도 내려주고 바람도 불게 해 주는 어떤 절대적인 신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쉽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많은 신들이 있는 일본 사람들은 기독교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들에게는 하나님(가미사마)이라고 해도 그것은 여러 신들 가운데 하나일뿐이지만 우리 조상들에게는 하늘님이라는 절대적인 신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도 그와 같은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리고 한국 교회에 기복신앙(祈福信仰)이 발전하게 된 것은 조상 때부터 우리는 기복신앙을 갖지 않으면 안되었던 민족이기 때문이다. 기후가 일정하지 않고 산악지대가 많은 악조건이어서 농사를 지으려면 하늘에서 비를 내려 주셔야 하니까 항상 하늘을 바라 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가 오지 않으면 기우제를 지냈던 것이다. 여기서 샤머니즘적인 기복신앙이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하늘에 빌면 된다는 생각이 항상 있는 것이다. 거기에 기독교가 들어왔다. 기독교가 미국에서 왔어도 미국 기독교는 기복신앙이 없다. 그런데 한국에 와서 기독교가 기복신앙으로 발전했고 그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빌면 잘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다. 왜 사람들이 갓바위로 모이고 구인사로 가는가? 빌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이다.
나도 우리 어머니가 빌어서 났다. 늦게까지 아들이 없자 어머니가 어디 가서 물어 보니까 석 달 열흘 동안 기도를 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매일 찬 물로 목욕을 하고 기도를 했는데 내가 잉태되었다고 한다. 나는 우리 어머니 정성으로 난 것이다. 히브리 사람들이었으면 여호와께서 잉태케 하셨다고 했겠지만 어머니는 무슨 신인지 모르지만 신명께 기도했는데 아들을 주셨던 것이다. 이런 사상이 뿌리 깊게 박혀 있다. 그래서 기독교가 우리나라에서 금방 퍼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 기본적인 의식 바탕에서 받아들이면 우리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 절대적으로 유일한 그분이 변질될 수 있는 것이다. 영국 사람들은 그들의 의식 바탕에서 받아들였고 독일 사람들이나 미국 사람들도 그들의 의식 바탕에서 받아들였다. 한국에서는 장로교가 제일 많기 때문에 장로교가 제일 큰 줄 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장로교가 십분의 일도 안된다. 침례교는 오천 만이나 되지만 장로교는 오백 만도 안된다. 침례교에는 집사 제도밖에 없다. 그것도 일 년에 한 번씩 선거를 해서 선출하는 봉사직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침례교가 잘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장로교는 집사를 지나서 장로가 되는데 장로는 항존직이고 굉장히 영광스러운 직책이다. 그래서 자기 집안에서 장로가 났다고 하면 굉장한 영광으로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서 장로교가 잘되는 것 같다. 우리는 옛날부터 눌려서 살았으니까 출세를 해서 권력을 얻으려는 권력지향적인 의식이 뿌리 깊게 박혀 있다. 그런 사람들의 소원을 장로교가 성취해 준 셈인 것이다. 비록 세상에서는 성공하지 못해도 교회 장로가 되면 대단한 명예를 얻은 것이니까 잘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장로제에서는 목사나 장로나 같다. 목사는 교육장로고 장로는 치리장로로서 직임만 다를뿐이지 명예는 같다. 그런 것뿐만 아니라 많은 것들이 밑바닥에 무의식적으로 박혀 있는 것들이 많다. 그래서 우리는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꼭 붙잡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머리는 몸의 자람의 본이며 몸을 통제한다. 몸이 머리의 통제에서 벗어나거나 머리의 통제를 싫어하면 제대로 자랄 수 없다. 아담이 하나님의 통제에서 벗어나 타락했듯이 우리가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통제에서 떠나면 엉뚱한 길로 갈 수밖에 없다. 머리와 몸은 단지 생명으로만 연결된 것이 아니라 명령으로 연결되어 있다. 머리에서 명령이 나온다.
C.C.C에 있을 때 나는 충주에서 청주로 갈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청주에 있던 간사가 신학대학에 가면서 나를 거기 후임으로 추천했기 때문에 당연히 청주로 갈 줄로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김 목사님이 부르시기에 나는 청주로 가라고 할 줄 알았는데 갑자기 대구로 가야겠다고 하셨다. 그때 나는 “내가 C.C.C에 있는한 목사님이 내 머리이십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셔도 목사님을 통해서 말씀하실 것이니 하나님 말씀으로 알고 가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집이 제천이었기 때문에 대구로 옮긴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때 나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전에 같았으면 나는 내 형편과 사정을 들어서 이의를 제기했을 것이나 그때 나는 권위를 알았기 때문에 전혀 이의가 없었다. 나는 4년 동안 싸웠던 것은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다. 40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도 내가 잘못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옳다는 이유로 내 머리에 도전했고 4년 동안 고생을 했던 것이다. 그 고생의 대가로 깨달은 것이 권위다. 나는 그분과 싸운 것이 아니라 내 머리와, 내 하나님과 싸웠다는 것을 C.C.C에 들어가서 알게 되었던 것이다. 처음 C.C.C에 들어가서 김 목사님에게 들은 말이 그것이다. “우리는 Campus Crusade입니다. 십자군입니다. 여기는 직장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곳입니다. 어디로 가라 해도 가야 하고 언제 그만두라고 해도 그만두어야 합니다.” 그 말이 너무나 권세가 있었다. 그때 나는 뒤통수를 얻어맞는 것 같았다. 나는 4년 동안 권위를 모르고 싸웠던 것이다. 그 다음부터는 어디로 가라 하든지, 내 형편이 어떻든지 따랐다. 내가 그 말씀대로 하겠다고 했을 때 김 목사님이 “이 목사님은 큰 복을 받겠습니다.”라고 하셨다. 나를 대구로 보낸 것은 좋은 데로 보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나에게 머리가 있고 머리에 복종하니까 인생이 평안해졌다. 옳고 그름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머리에 복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다. 이 말은 머리에 복종하는 사람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복종이 없는 사람은 머리가 없는 사람이다.
3) 영광의 소망
그리스도는 영광의 소망이다. 몸이 영광을 받으려면 머리가 영광스러워야 한다. 머리가 잘못되면 몸이 영광을 받을 수 없다. 그래서 몸은 어찌하든지 모든 것을 다 머리로 보내는 것이다. 우리의 몸은 엔진을 갖고 있는 기관과 같아서 온 몸이 일을 해서 다 머리로 보낸다. 우리가 먹는 모든 것의 60%인가 70%가 머리로 간다고 한다. 머리가 잘돼야 몸이 잘되지 머리가 잘못되면 몸이 잘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온 몸의 모든 활동은 전부 머리로 영양분을 보내는 것이다.
4) 하나님의 비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알 수 없는 분이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안다. 그래서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신 것이다. 구약시대에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모세의 하나님, 다윗의 하나님이셨고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비밀은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보여졌다.
5) 모든 것의 실재이신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모든 것의 실재이시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 우리가 만든 모든 것은 형상이다. 그 모든 형상의 실재는 곧 그리스도다. 실재가 없으면 형상은 아무 소용 없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6) 새 사람의 생명이며 연합 안에서 우리와 함께 사는 생명
그리스도는 새 사람, 즉 교회의 생명이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활동의 원천이다. 새 사람은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해서 산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활동의 요소인 것이다. 그래서 그분과 우리는 한 생명, 한 운명이 되어 살아간다. 그리스도는 이 특이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다.
다. 탁월하신 그리스도는 그 몸으로 전파됨으로 교회의 기도가 필요함
위의 일곱 항목이 골로새서의 요점이다. 그러면 이 탁월하신 그리스도는 어떻게 전파되는가? 그리스도는 몸으로 전파된다. 그래서 교회의 기도, 몸의 기도, 몸의 소원이 필요한 것이다.
왜 몸의 소원이 필요한 것인가? 왜 몸이 싫어하면 안되는 것인가? 그것은 그리스도는 철학적인 지식이나 지혜가 아니기 때문이다. 철학적 지식이나 지혜는 몸이 없다. 그것은 지식이니까 사람이 아니라도 누구든지 전할 수 있다. 문서로만 전해도 된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그 몸의 머리니까 몸이 없이는 전파될 수 없다. 내 머리 속에 있는 것을 몸이 표현해 주지 않으면 어떻게 알겠는가?
1) 그리스도는 철학적 지식이나 지혜가 아님
그리스도는 철학적 지식이나 지혜가 아니다. 철학적 지혜 중에는 영적 깨달음도 있다. 영지주의는 영적 깨달음을 추구하여 신의 경지, 신의 충만에 이르려는 주의다. 사람들은 그런 것을 굉장히 바라고 있다. 그래서 초월적 명상을 하고 수양을 하는 것이다. 인간으로서 신적인 경지에 이르고 싶기 때문이다. 불교 TV를 보니까 자신을 수양해야 한다고 했다. 그것이 불교의 골자다. 수양을 하면 무엇이 되는가? 그것은 신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우리는 머리가 있기 때문에 머리를 위해서 있다. 우리가 머리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손이나 발이 머리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손이나 발은 봉사와 역할을 통해서 머리를 머리 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처럼 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표현할 수 있는 지체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절대로 하나님 같이 되는 것도 아니고 신적인 인간이 되는 것도 아니며 초월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인간이다. 마지막까지 우리는 인간이다.
예수님께서 한 때는 물 위를 걷기도 하고 죽은 사람을 살리기도 했으며 사람들로부터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말도 들었다. 산에서 홀연히 변화하심으로 제자들이 그 변화에 놀라서 엎드러진 때도 있었다. 그 변화가 어떤 것인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 변화 앞에 사도들이 고개를 숙이고 엎드렸던 것을 볼 수 있다. 그 변화는 신비로운 어떤 변화였던 것 같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이 십자가에서 증명되었다.
우리는 사람 이상도 될 수 없고 사람 이하도 될 수 없다. 그러니 쉽지 않은가! 사람 이상이 되려면 얼마나 어렵겠는가! 사람 이하가 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냥 사람이면 되니까 중심만 사람이면 된다. 우주의 중심에 사람이 있게 되어 있는 것인데 이 사람을 상실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천사처럼 되려고 하고 그것이 안되니까 짐승처럼 살고 있다. 자기의 본질, 본래 인간의 모습이 없기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천사와 짐승 사이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철학적 지혜나 영적인 깨달음이 아니다. 영적인 지혜를 추구하다가는 빗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몸으로 전파되어야 한다. 몸은 현실이지 어떤 사람의 특수한 깨달음이거나 특수한 지혜가 아니다. 기독교가 그동안에 문제가 되었던 것이 이것이다. 기독교 안에는 놀라운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추앙하다 보니까 교회가 안된 것이다. 기독교 역사에서 빛을 남긴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따라갈 수 없는 훌륭한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교회를 위하고 세웠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 때문에 교회가 되지 않았다. 교회가 되려면 비슷해야 되지 너무 출중하면 안된다. 담을 쌓으려고 해도 비슷한 돌로 쌓아야 되지 큰 바위덩어리가 있으면 담이 안된다. 집을 지어도 마찬가지다. 비슷한 재목이라야 집을 지을 수 있지 너무 큰 나무가 하나 들어오면 집이 안된다. 좋은 길, 좋다고 하는 그 길이 오히려 교회에는 방해가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훌륭하지만 교회가 되는 데는 방해가 되었다. 교회는 출중한 사람이 있으면 안된다. 그리고 사실은 출중할 수도 없다. 머리 아래 있는 지체가 어떻게 출중하겠는가? 발로 차는 것이 손으로 때리는 것보다 몇 배의 파워가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발이 손보다 출중한가? 그렇지 않다. 발은 분명히 손보다 힘이 세지만 손이 하는 일을 못한다. 발로는 피아노를 칠 수 없다. 하나님은 각 지체를 고르게 만들어 놓으셨다. 어느 지체가 전부를 다 할 수 있게 하지 않고 한 부분만 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으셨다. 발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면 손은 필요없을 것이다. 그런데 발은 한 가지는 잘해도 다른 것은 못한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자기가 온전하게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되고 자기에게 주어진 은혜와 은사만큼 할 수 있다고 알아야 한다. 나에게 주어진 것만 하면 나머지는 다른 사람이 한다.
그리스도는 철학적 지식이나 지혜가 아니기 때문에 몸으로 전파돼야 한다. 몸은 머리의 통제 아래 있지만 지체들의 모든 역할은 몸의 통제 아래 있어야 한다. 몸의 통제를 벗어난 것은 지체가 아니다. 요즘은 헬스를 해서 근육을 키운다. 그렇지만 한쪽 팔만 계속 키우면 기형이 되고 만다. 그 팔은 좋을지 몰라도 양복점에 가면 옷이 맞지 않을 것이다.
탁월하신 그리스도는 몸을 통해서, 몸으로 전파된다. 그러므로 몸이 없으면 그리스도는 온전하게 전파될 수 없다. 몸을 통해서 전파되지 않은 그리스도는 변질된 그리스도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 종교적 소망이나 훈련이 아님
그리스도는 종교적 소망이나 훈련이 아니다. ‘종교적 소망’은 기도하고 간구해서 어떤 데 도달하고 성취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종교적인 훈련을 거쳐서 종교적인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과 그리스도는 다르다. 그리스도는 훈련을 통해서 만들어진 인격이 아니다.
3) 문화적 수양이나 개선이 아님
그리스도는 문화적 수양이나 개선도 아니다. 우리가 굉장히 좋은 사람이 된다고 해서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좋은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어야지 못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복음이 전파되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리스도는 그런 수양이나 개선에 의해서 전파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으로 전파해 놓으면 그런 사람만 모인다.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복음을 전하면 다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만 모일 수밖에 없다. 그런 요소들이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고 연합된 몸이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다.
모이면 기도만 하는 교회가 있다. 어느 교회에서는 새벽기도에 수만 명씩 모인다고 한다. 어떻게 새벽에 몇만 명씩 모이는지 궁금해서 물어 보았더니 서원기도를 하게 한다는 것이다. 무슨 서원을 두고 백일기도를 세 번 하다 보면 일 년이 지나간다. 그래서 그렇게 끊임없이 몇만 명이 모여서 기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도만 한다고 교회가 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어떤 것을 특별히 한다고 해서 교회가 되는 것도 아니다. 교회는 독특한 어떤 것이 아니라 사람다운 사람이다.
우리도 옛날에는 그런 독특한 것을 사모했고 그렇게 해 보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나도 그런 것을 전혀 모르다가 임지에 발령을 받고 나가 보니까 당장 그런 것이 필요했다. 병이라도 하나 고치든지 매일 금식을 하고 기도를 하든지 무엇이라도 하나 있어야 되지 평범해 갖고는 도저히 안될 것 같았다. 그래서 꿩 잡는 게 매라는 것을 알고 한참 무엇을 해 보려고 좇아다녔던 것이다. 그러나 기질이 맞지 않는지 능력이 없는지 나는 그런 것이 안됐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나는 그런 기질이 없어서 안되는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하고 말았다. 사실은 기질도 어느 정도 맞아야 하는 것이 맞다. 방언을 한다고 해서 다 방언을 하는 것이 아니다. 한 자리에 있어도 방언을 하는 사람이 있고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나는 하도 안되니까 방언을 하는 사람을 연구해 보았는데 그 사람의 기질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에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알았는데 기질이 많이 작용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기질이 맞지 않아서라며 스스로 위로를 받았다. 나도 정말로 방언을 하고 싶었기 때문에 다 잊어버리고 거기 몰입했으면 될 텐데 나는 무엇이 올 것 같으면 더 냉랭해지니까 안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많은 교회들이 그런 것들로 자라고 있지만 그것은 어떤 이상한 것으로, 이상한 가지로 자라고 있는 것이지 그리스도로 자라는 것이 아니다. 만약 손이 계속 자란다면 어찌 되겠는가? 내 손이 계속 자라면 여러분이 앉아 있는 데까지 자랄 수 있겠지만 내가 그 손을 어떻게 주체하고 돌아다니겠는가? 고무호스처럼 둘둘 말아다닐 수도 없고 어떻게 하겠는가? 이렇게 적당히 자라고 더 자라지 않으니 얼마나 좋은가! 이상하게도 생명은 어느 정도 자라다가 정지한다. 적당한 시기가 되면 성장 호르몬이 끊겨서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 그런데도 억지로 성장 호르몬을 주사해서 막 키워 내니까 비정상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키를 크게 하는 호르몬이 나왔듯이 앞으로는 팔만 키우는 호르몬이나 발만 키우는 호르몬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기형 인간이 나오게 될 것이다. 종교 안에 그런 일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요소들과 그리스도를 구별해야 한다. 골로새서의 요점이 이것이다. 그런 요소들이 골로새서에 기록된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은 문화화 되고 문명화 되고 세계가 넓어졌기 때문에 잡다한 것들이 바울 당시보다 더 많다. 더 많은 것들이 교회 안에 들어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로부터 그리스도를 구별해 내야 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위임을 받은 한 인격이며, 그 위임을 위해 부름 받은 단체적 인격인 교회의 생명이며 실재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그의 몸인 교회를 통해 전파된다. 그리스도는 누군가? 그는 하나님의 위임(기름부음)을 받은 한 인격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한 인격이다.
이것을 모를 때 나는 많이 방황했다. 하나님이 누구에게 기름을 부으시는지 모르니까 복잡했던 것이다. 옛날에는 열심이 있는 사람,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기름을 부으시는 줄 알았고 나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을 보고 나니까 내 인생이 너무나 쉽고 간단해졌다.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기름을 부으시는지 알고 나니까 아주 단순하고 간단해졌다.
하나님의 위임을 받으려면 위임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 있어야 한다. 내가 남에게 돈을 맡기려고 해도 그 사람이 남의 돈을 떼어먹지 않는 사람이라는 조건이 있어야 한다. 구원은 조건이 없지만 위임은 조건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아들이 되는 위치는 조건이 없는 위치다. 아버지에게서 나면 아들이 되는 것이니까, 하나님께서 구속하시면 아들이 되는 것이니까 조건이 없다. 또한 이것은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조건을 붙이지 않으신다. 그래서 은혜와 구원은 전적으로 무조건적인 것이다. 우리의 노력이나 우리가 쌓아 놓은 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다. 오히려 그런 것들은 거추장스럽고 방해되는 것들이다. 그러나 기름부음은 다르다. 기름부음은 위임이기 때문에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위임에는 조건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위임을 받은 한 인격이다. 그 위임을 위해서 부름받은 단체적인 인격이 교회다. 그러므로 이 단체적인 인격의 생명은 곧 그리스도인 것이다. 그리고 그분이 그렇게 위임을 받았으므로 교회도 이 위임 안에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하나님은 위임을 하셨다. 아들로, 당신 자신의 완전한 표현으로 위임하셨다. 그리고 우리도 그 안에서 위임을 받는다. 그러므로 이 위임에는 조건이 있다. 내가 신실한 사람이면 다른 사람이 나를 신임할 수 있고 나에게 무엇인가를 맡길 수 있다. 그렇지만 신실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맡길 수 없다. 아들이라도 신실하지 못하면 맡길 수 없다. 이병철씨가 오죽 생각했으면 큰아들을 제쳐두고 이건희씨에게 기업을 맡겼겠는가! 큰아들에게 맡기면 조용하게 좋겠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큰아들은 그 기업을 맡을 사람이 못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위임이다. 이건희씨는 자기 아버지로부터 삼성경영을 위한 기름부음을 받았던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았다. 십자가를 질 수 있는 그 조건 때문에, “아버지여,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할 수 있는 조건 때문에 위임을 받은 것이다.
그분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마지막 자리에서 아버지라고 부른 것과 하나님이라고 부른 것 두 가지가 나왔다. 그 이전까지는 그분을 알기 어렵다. 어떻게 해서 물 위를 걸었으며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였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런데 마지막 자리에서 두 가지 아버지라고 부르신 것과 하나님으로 부르신 것에서 우리는 그분을 알 수 있다.
그분은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0).”라고 하셨다. 여기서 그분은 아들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아들’이라는 말은 종교적인 말이 아니라 ‘나는 그분에게서 낳아졌다.’는 의미를 가진 말이다. 낳아졌으니까 아들이다. 아들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낳아진 것이다. 나를 낳으신 분은 한 분밖에 없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한 분밖에 없다. 좋은 사람이라고 내 아버지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악한 사람이라고 내 아버지가 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선하든 악하든 상관이 없다. 나를 낳으신 분은 내 아버지다. 그런데 사람이 이것을 시인하기가 쉽지 않다. 내가 옛날에 그 교회에 있을 때 고등학교 2학년 여학생 하나가 찾아와서 자기 어머니가 딸 셋을 데리고 홀로 산다고 하면서 자기 아버지 이야기를 했다. 어머니가 시집을 가서 보니 본부인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딸을 셋이나 낳았는데 그 아버지는 부자집 아들이었지만 평생 마약과 술에 취해서 살다가 교도소에 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어머니는 계속 아버지를 저주했고 아이들은 아버지 얼굴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때도 그 아버지는 교도소에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 여학생에게 “교도소에 있다고 아버지가 아닌 것이 아니다. 너를 낳았기 때문에 아버지지 다른 조건은 전혀 없다.”고 했다. 그런데 그 말을 알아듣고 자기 아버지를 면회하러 갔던 것이다. 그 아버지도 딸 얼굴을 모르고 딸도 아버지 얼굴을 모르지만 이름을 대면서 자기가 누구라고 하니까 교도소에 있는 그 아버지가 울었다고 한다. 그 사실을 자기 어머니에게는 말하지 못하지만 그 뒤로도 몰래 가끔 면회를 다녀왔다고 한다. 나를 낳았기 때문에 아버지지 다른 이유는 없다. 그런데 이것을 시인하려면 나의 선과 악을 부인해야 한다. 나를 부인해야 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자기 아버지라는 것이 부끄러우면 어떻게 면회를 갈 수 있겠는가? 평생 교도소에 있는 그 사람이 자기 아버지라는 말을 누구에게도 못할 것 아닌가! 면회를 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자기에게는 창피한 일이고 죽음이니까 창피한 것이 없어져야 면회를 갈 수 있다. ‘아버지구나. 이 우주 안에서 나를 낳아 주신 분은 저분이구나.’라고 알아야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 아버지를 시인한다는 것은 굉장히 놀라운 일인 것이다. 우리는 육신의 아버지는 다 시인하지만 근원적으로 아버지를 시인하는 것은 자기는 저절로 있는 자가 아니라 낳아진 자, 근원이 있는 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분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셨고 제자들에게는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막14:34).” 하셨다. ‘나는 그분의 아들이다.’ 이것이 그분의 마지막 말이다. ‘아들’이라는 말은 낳아진 자라는 뜻이다. ‘아들’을 그냥 먹고 노는 것이라고만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고 ‘아버지에게서 낳아진 사람’이라고 알아야 한다. 이것은 그냥 아들이니까 좋다는 것만이 아니라 개로 낳아졌어도 할 수 없고 소로 낳아졌어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소에게서 낳아졌으면 나는 소고 개에게서 낳아졌으면 개다. 이것은 내가 어떤 사람이든지간에 나는 아버지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세상을 자세히 보자! 세상은 전부 아버지가 없는 사람들이다. “너는 누구냐?”라고 물으면 무어라고 대답하는가? “나는 이러저러한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하고 “나는 이러저러한 업적을 가진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한다. “나는 이런 행동을 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하고 “나는 이런 양심을 가진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한다. “나는 아들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기가 낳아진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고 자기의 행위와 업적을 내세우면서 그것이 자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버지를 시인하는 것은 자기의 근원을, 자기를 낳으신 분을 시인하는 것이다. 마지막에 그분이 아버지라고 하신 것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닙니다. 나는 낳아져서 있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부가적인 것이지 본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잘했어도 그것이 내가 아니고 못했어도 그것이 내가 아닙니다. 그 어떤 것을 갖고 있어도 그것은 내가 아닙니다. 나는 아버지로 말미암았습니다.’라고 하신 것이다. 이런 사람이니까 그분을 아들이라는 이름을 주신 것이다. 이런 사람이니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마17:5).” 하는 말이 나온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아들이라는 말을 피상적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분이 어떤 존재이든간에 나는 그분으로 인해서 낳아진 존재지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니다.
하나님의 위임에는 조건이 있다. 무엇을 맡길 것인가에 따라 조건이 다르다. 우리가 무엇을 맡을 것인가는 우리의 조건에 달린 것이다. 우리가 조건만 갖추고 있다면 하나님은 언제든지 맡기신다. 하나님은 스스로 못하시는 분이니까 우리에게 맡기시기를 원하신다.
회사나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높은 자리를 탐내거나 좋은 자리만 생각하지 말고 조건을 갖춰야 한다. 조건을 갖추고 있으면 그 사람을 회사에서 들어서 쓴다. 사업을 하는 사람도 그렇다. 조건이 맞으면 업체에서 그 사람을 불러다 쓴다. 조건이 맞아야 쓰지 조건이 맞지 않는 사람에게 무조건 은혜를 베푸는 데는 아무 데도 없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위임을 받은 한 인격이다. 이 위임을 위해서 우리는 단체적으로 부름받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예수님 안에서 양육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분 안에서 양육받아야 우리도 단체적인 위임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그분의 몸을 통해서만 전파된다. 그리스도는 단체적인 몸 안에서만 전파될 수 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교회의 몸인 지체들이다. 몸과 지체는 서로 분리할 수 없다. 지체가 없으면 몸이 안되고 몸이 없으면 지체가 안된다. 그래서 성경에는 몸이 지체를 낳는다고 표현한 데도 있고 지체가 몸이 된다고 표현한 데도 있다. 우리의 몸이 손과 발을 만들기도 하고 우리 몸에서 손과 발이 나오기도 하는 것처럼 몸과 지체는 불가분의 관계다. 그러나 손만 가지고는 몸이라고 할 수 없다. 붙어 있을 때 몸이라고 할 수 있지 붙어 있지 않은 것은 몸이 아니다.
누가 손가락을 잘랐는데 자르기 전에는 자기 몸이었는데 잘라놓고 보니까 자기 몸이 아니라서 징그러웠다고 한다. 그것을 소금물에 담가 두었더니 퉁퉁 불어서 징그럽기만 했던 것이다. 그것을 다시 붙여 보려고 병원에 갔지만 대구에서는 아무 데서도 해 주지 않아서 부산까지 내려갔는데 거기서도 못해주겠다고 해서 돌아오다가 낙동강에 던져 버렸다고 한다. 왜냐하면 손가락을 붙이려면 여덟 시간이나 수술을 해야 하는데 보험수가가 워낙 낮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교회고 교회의 몸은 지체들이다. 그러므로 지체들의 역할이 바로 몸의 역할이다. 지체들의 역할로 그리스도는 전파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역할로 전파된다. 우리의 지체는 어느 지체라도 하나로서는 온전한 지체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한 몸으로 전파해야 하는 것이다. 손 하나만 있어도 안되고 발 하나만 있어도 안된다. 그러므로 한 몸으로 할 때 손도 발도 다 필요하다.
고양이가 네 발로 걸어가는데 두 발씩 걷는지 네 발이 따로 걷는지 궁금해서 주의 깊게 보았더니 네 발이 따로따로 움직이면서 걷는다. 차로 말하면 사륜구동인 셈이다. 만약 왼쪽이 같이 나가고 오른쪽이 같이 나가면 몸이 기우뚱해질 것이나 고양이는 발을 떼는 순간이 다 다르다. 그러니까 몸의 균형이 잡히는 것이다. 우리는 두 발로만 걸어서 몰랐는데 네 발로 다니는 짐승을 보니까 아주 신기하게 걸어간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교회는 네 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교회는 발이 팔백 개나 된다. 그 발들이 다 따로따로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몸의 균형을 위해서 움직이고 있다. 앞발과 뒷발이 같이 움직이는 것 같은데 몸의 균형을 잡기 위해서 뒷발이 앞발보다 조금 뒤에 움직인다. 지체들이 서로 협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전파하려면 지체들이 서로 협력해야 되지 자기 혼자만 가 버리면 잘 될 것 같아도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는 지체들의 역할로 전파된다. 그래야 편협하거나 편중된 그리스도가 아니라 온전한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이다. 그러나 유명한 사람들에 의해서 전파된 그리스도는 편중된 것이었다. 어떤 사람은 기도를 많이 해서 오만 번의 응답을 받았다고 한다. 대단히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전파된 것은 편중된 것이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보충할 수 있는 또 다른 것들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생활의 요점은 자기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각자의 역할이 다르지만 다른 지체가 보조를 해서 한 몸을 이룬다. 그러므로 남의 역할까지 다 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나의 역할은 내가 하고 남의 역할은 남이 해야 한다. 손이 하는 일을 발이 할 수 없고 발이 하는 일을 손이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각자 자기대로 자기의 간증을 가지고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간증이 아닌 것을 가지고 움직이면 부작용이 생긴다. 자기 간증이 아닌 것으로 움직이면 주장을 하기 때문에 부작용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간증으로 움직여야 부작용이 없다. 간증은 자기만의 고유한 체험이니까 다른 사람은 그런 체험을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독특한 체험이 있는 것을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이번에 ‘주의 손에 이끌려’를 쓰면서도 조심스러운 것은 그 독특한 체험이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을 내놓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난다는 말처럼 그런 것을 강조해 버리면 전부 엉덩이에 뿔이 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기이한 일들은 다 그 사람만의 독특한 경험이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것도 나에게 독특한 것이니까 그것이 여러분에게 적용되기를 바라고 ‘주의 손에 이끌려’를 쓰는 것이지 꼭 그대로 하라는 것이 아니다. 나는 빈손이 되었어도 하나님은 나를 먹여 살리셨다. 그렇다고 여러분이 다 빈손이 되라는 것은 아니다. 나는 빈손이 돼야만 하나님이 주셨지 무엇을 가지고 있으면 주시지 않았다. 이것은 그분과 나와의 비밀한 계약인 셈이니까 다른 사람에게도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분명히 엘리야에게 까마귀를 통해서 공급하신 음식을 먹어 보았다. 그렇지만 누구든지 다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 그 사람을 개인적으로 다 아시고 그 사람에게 적합한 은혜를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 베푸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아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런 경우를 일부러 만들어도 안되고 남의 경험을 따라하려고 해서도 안된다. 다만 그분 안에서 신실하게 살다 보면 내게 필요한 것을 주시지 않겠는가! 그러나 억지로 받으려고 하면 안된다. 하나님이 안주시면 그대로 살아야지 억지로 받으려고 하다가는 무리가 생긴다. 교회 안에서도 억지로 다른 사람처럼 되려고 좇아다니다가는 이상하게 되고 마니까 자기에게 주신대로가 최선이라고 알아야 한다.
나도 옛날에는 내가 정해 놓은 대로 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는 않고 갈등만 계속 생겼다.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는 탄식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알고 나서 보니까 그것은 너무나 어이없는 생각이었다. 그분이 무엇을 하실지 모르면서 내가 정해 놓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분이 나보다 더 필요하고 급하기 때문에 그분이 일하신다는 것을 알고 난 후에는 내 생각을 놓게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너무나 간단해졌고 할 일이 없어졌다. 그분이 하실 것이니까 그분만 기다리면 되지 내가 할 일이 아닌 것이다.
스스로 깨끗해지려고 하는 아이는 기형아지 정상적인 아이가 아니다. 바지에 흙이 묻었다고 울고 있는 어린아이는 문제가 있는 아이다. 그 아이는 분명히 집에서 교육을 잘못 받았을 것이다. 부모가 결벽증이 있어서 그렇게 교육을 시켰을 것이다. 그러니까 바지에 흙이 묻으면 엄마가 무서워서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울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부모가 잘못이다. 어린아이는 흙탕에서 재미있게 놀다가 집에 들어가면 그만이다. 청소하고 빨래하는 것은 엄마의 문제지 아이의 문제가 아니다.
교회 안에서 지체들의 은사나 역할도 마찬가지다. 각자 받은 은사나 역할이 다를 수 있고 깨달음이 다를 수 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은사나 역할을 자기도 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그 사람에게는 그 사람만의 이유와 조건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지 기계적으로 아무나 똑같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어떤 일이 생기거나 은사나 빛이 오는 것은 그 사람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온 것이다. 그 사람이 어둠에 있기 때문에 빛이 오는 것이지 어둠에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빛을 주시지 않는다. 어둠이 문제가 되기 때문에 빛이 필요한 것이지 어둠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사람에게는 빛이 필요하지 않다. 하나님은 일률적으로나 기계적으로 일하시는 분이 아니다. 각자 그 사람의 필요를 알아서 그 사람만큼 주신다. 그러므로 억지로 더하려고 하면 안된다. 그분이 더 잘 알아서 주시고 아이들의 문제는 엄마가 더 잘 알아서 해결한다.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가 옷에 흙이 묻었다고 엄마를 걱정하고 있다면 그 아이는 비정상적인 아이다. 하나님이 오죽 알아서 하시겠는가! 필요하시면 부르실 것이고 쓰실 데가 있으면 쓰시지 않겠는가! 사실은 우리의 필요보다 하나님의 필요가 더욱 심각하다. 이것만 알면 걱정할 것이 없다.
교회의 몸인 지체들의 역할은 형형색색이다. 그러므로 그 형형색색을 간섭해도 안되고 그것을 무조건 따라 하려고 해도 안되며 그것을 비난해도 안된다. 이 사람은 이 사람대로의 역할을 해서 몸을 돕고 저 사람은 저 사람대로의 역할을 해서 몸을 돕는다. 다 몸에 유익하도록 주신다. 방언이 교회에 유익하면 방언을 주실 것이고 병 고치는 것이 유익하면 치료하는 능력을 주실 것이다. 무엇이든지 몸을 위해서 필요한 것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니까 자기를 위해서 무엇을 받으려고 하면 안된다. 자기를 위해서 받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2. 바울은 교회의 기도에 힘입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나타내려고 했음
바울은 교회의 기도에 힘입어서 마땅히 할 말로써 그리스도의 비밀을 나타내겠다고 하였다. 교회가 기도를 하면 사도는 마땅히 할 말을 할 수 있다.
‘마땅히(δεω)’라는 말은 ‘묶인다. 제한받는다.’는 말에서 나왔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려면 교회가 나를 마땅하게 해 줘야 하는 것이다. 교회가 마땅하게 하지 않은 것을 내가 하려고 하면 안되고 교회의 제한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바울의 말이 왜 지금까지 제한을 받았던가? 그것은 교회가 제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회가 풀어줘야 하는데 꽉 쥐고 풀어주지 못하니까 제한을 받은 대로밖에 전달되지 않았던 것이다.
말씀은 교회에 묶인다. 몸인 교회는 그리스도의 비밀이기 때문에 몸의 어떠함이 할 말을 묶는 것이다. 그래서 꼭 해야 할 말인데도 몸의 어떠함 때문에 다른 말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몸의 소원(기도)만큼 그리스도의 비밀은 전파된다. 몸의 어떠함만큼 전파되지 몸을 초과해서 전파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비밀은 사실상 몸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몸 안에서 그리스도가 전파되기 때문에 바울은 몸에게 기도를 부탁했던 것이다.
3. 외인을 향하여서는 지혜로 행하고 말에는 은혜가 스며 흘러야 함
골로새서 4장 5-6절에는 “외인을 향하여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르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하였다.
‘외인’은 믿지 않는 자들이다. 외인들과 동행하거나 사업을 하거나 따라다닐 때는 지혜롭게 하여 기회를 사야 한다. 무조건 따라다니기만 해서 자기 인생을 허비하고 기회를 허비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사람으로서 따라다녀야 한다. 그래야 겉으로는 따라다니지만 그 기회를 사게 된다. 같이 놀러가도 놀기만 하지 말고 기회를 사야 한다. 그렇다고 술 먹으러 가는데 같이 가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주변에서도 우리를 대하는 것이지 엉뚱하게 갑자기 술 먹으러 가자고 하는 사람은 없다. 나는 어려서부터 평생 한 번도 술을 먹으러 가자고 하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 친구들이 볼 때 나는 술 먹으러 갈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떡 먹으러 갈 때는 불러도 술 먹으러 갈 때는 부르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자기를 그렇게 대하는 것은 자기가 만든 것이라고 알아야 한다. 그 전까지 술을 잘 먹던 사람이 갑자기 안먹겠다고 하면 절교하자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외인들과 동행하거나 따라다닐 때는 지혜롭게 하여 기회를 사야 한다. 인생을 낭비할 기회를 주지 말고 기회를 사야 한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르게 함같이 하라.” 하였다. 말에는 은혜로 맛을 내야 한다. 모든 음식에는 기본적으로 간이 들어가야 한다. 간이 모든 음식의 맛을 내는 것이다. 빵을 만들 때도 소금을 넣지 않으면 맛이 없다. 달게 만드는 빵에도 소금이 들어가야 맛이 있지 그냥 달게만 만들면 입에 당기지 않는다. 그러니까 짠지 안짠지 모르지만 소금이 조금 들어가야 입에 당긴다. 우리가 말을 할 때는 소금에 절여진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듯 해도 은혜가 깔려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 사람에게 흡수될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흡수되지 않는다. 전혀 소금이 들어가지 않은 빵은 먹기 어렵다. 달기만 하면 금방 질려 버린다. 단팥죽을 해도 소금간이 제대로 돼야 맛이 있지 달기만 하면 못먹는다. 음식은 간을 잘해야 맛이 있다. 그래서 소금으로 맛을 내듯이 하라고 하였다. 내 안에서 감사가 있고 은혜가 있어서 말을 해야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스며들지 교리를 전하거나 자기가 아는 것으로 잘난척하면 다른 사람이 먹으려 하지 않는다. 자기 주장을 하거나 가르치려고 하면 먹으려고 왔다가도 먹지 못하고 만다. 그러므로 말에는 은혜로 맛을 내야 한다.
교회의 소원은 몸의 성장과 확장이다. 우리 교회의 소원은 어찌하든지 몸이 확장되고 커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몸의 성장은 지체들의 성숙한 연합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성숙한 연합’은 나와 다른 사람이 달라도 그 사람과 자기가 하나라고 알 때 이루어진다. 위에서 말한대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내가 아는 것을 다른 사람이 모를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이 아는 것을 내가 모를 수도 있다. 그러니까 피차 서로를 인정해야 연합이 될 수 있다.
아이들이 노는 것을 보면 각자 자기 말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교통이 되는 것 같지만 그것은 교통이 아니라 자기 말을 하면서 노는 것이다. 노인당에 가 보아도 마찬가지로 각자 자기 말만 하지 남의 말은 듣지 않는다. 그것은 교통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몸의 성장은 지체들의 성숙한 연합에 있다. 그러므로 편중해도 안되고 치우쳐도 안된다. 남의 말을 수용하고 인정하며 자기도 간증을 해야 하는 것이다. 제일 쉬운 것은 서로 간증하는 것이다. 기술이 따로 있는 것 아니다. 자기가 정말로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로 받은 것을 간증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 몸이 고르게 되고 온전해져야 복음을 전해도 그 복음이 온전하게 전해진다. 우리나라의 경제력이 높아져서 세계 선교를 한다며 전세계로 선교단을 보내고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 걱정스러운 것은 온전한 몸이 아닌 것을 가지고 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이 온전한 복음이 되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온전한 몸을 전해야 한다. 온전한 몸이 되려면 성숙한 연합이 있어야 한다.
몸은 그리스도의 머리 되심 아래서 자란다(엡4:16). 우리의 몸은 그분의 통제와 명령 아래서 자란다. 그분의 다스림 아래서 자라는 것이 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은 만물을 충만케 하는 자의 충만을,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택함을 받은 자들이다. 우리는 어떤 이유로 택함을 받았다.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택함을 받은 것이지 우리의 목적 안에서 택함을 받은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생각에는 이런 사람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어도 그분의 목적 안에서는 저런 사람도 필요하다고 알아야 한다. 소총을 가진 사람은 소총이 전부라고 생각하겠지만 뒤에서 포가 지원을 해 주지 않으면 소총이 앞으로 나갈 수 없다. 포를 가진 사람도 소총을 가진 사람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은 포가 아무리 위력이 있어도 소총을 가진 사람이 나가지 않으면 전쟁이 안되고 땅을 점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군대에서는 소총도 필요하고 대포도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목적을 위해 택함을 받았다. 그런데 기능은 각자 다르다. 각기 다른 기능들이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를 택해 놓으신 것이다. 왜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기능을 주고 어떤 사람에게는 저런 기능을 주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것이 적합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을 택하신 것은 그에게서 부적격한 요소만 제거하면 그가 이삭을 낳기에 적합한 사람이었기 때문이고 에서 대신 야곱을 택하신 것은 인간성을 처리하는데 있어서 그가 모든 인간의 대표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야곱 안에 우리가 다 들어 있다. 그 안에서 우리가 택함을 받은 것이다. 우리도 야곱 같은 연단을 받는 이유는 우리를 야곱과 같은 사람으로 쓰이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나 다 야곱과 같은 연단을 받는 것이 아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이루어 놓은 것을 누리기만 했지 야곱과 같은 연단이 없었다. 그런데 야곱은 세상을 다스려야 하기 때문에 연단을 받아야 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잘 아시고 누릴 때는 이삭을 택하셨고 전투할 때는 야곱을 택하셨다. 그래서 야곱의 분신인 요셉이 애굽을 통치했던 것이다. 우리는 창세 전에 한 목적 안에서 함께 택함을 받은 자들이다(엡1:4).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안에 함께 참여한 자들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는다고 하였다(롬6:8). 우리를 그분의 죽으심 안으로 다 몰아 넣으셨다. 여러 사람이 죽는 것이 아니다. 야곱을 대표적으로 해서 모든 인류를 다루셨듯이 예수 한 사람을 대표로 해서 그 안에서 모든 인류를 죽은 자로 폭로시키신 것이다. 예수 안에서 폭로되지 않으면 아무리 자기를 폭로하려고 해도 완전하게 폭로된 것이 아니다. 인류 가운데 예수와 같은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폭로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 한 사람을 택하셔서 십자가로 가게 하신 것이다. 그분이 십자가로 가신 것은 온 인류를 포함하고 가셨던 것이다. 다른 사람은 십자가로 가도 안된다. 옆에 있는 강도도 있었고 베드로도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다고 한다. 십자가에 죽은 사람은 많다. 그렇지만 그 안에는 모든 인류가 포함될 수 없다. 예수의 죽음 안에만 모든 인류가 포함될 수 있다. 그의 죽으심과 부활에 함께 참여한 자들이 교회인 것이다. 그 안에 포함된 자들, 거기서 죽고 거기서 나온 자들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함께 올려진 자들이다.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고 하였다(엡2:6). 함께 일으켜진 것도 함께 하늘에 앉히신 것도 그리스도 안에서다. 우리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 하늘에 올라간 것이 아니라 그분 안에 그분과 함께 있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올려진 것이다. ‘올려졌다.’는 것은 높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교회는 주님이 영광 중에 나타나실 때 함께 나타나기를 대망하는 것이다.
교회는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고 죽으심과 부활에 함께 참여한 자들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올려진 사람들이고 주님이 영광 중에 나타나실 때 함께 나타나기를 대망하는 사람들이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3:4).” 하였다. 이 한 소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교회다.
이 한 소망 안에서 각자의 역할이 다르다. 그렇지만 한 소망을 위한 것이고 한 몸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를 통제하는 원칙은 ‘이것이 몸을 위한 것인가 아닌가?’라야 한다. 율법이 우리를 통제하는 이상이 아니라 ‘몸을 위하는 것이냐 아니냐?’, 이것이 우리를 통제하는 이상이다. 쉽고 간단하다. 이 통제를 벗어나려고 하면 몸이 될 수 없다. ‘율법도 없는데 내가 왜 교회의 통제를 받아야 하느냐?’고 하면 몸이 될 수 없다.
몸의 통제 아래 있는 것, 이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몸의 통제 아래 있을 때 율법이 없어진다. 그렇지 않으면 율법은 없어질 수 없다. 만일 몸의 통제를 받지 않으면 율법이 있어야 한다. 사람은 그냥 두면 제멋대로 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무엇인가 통제가 있어야 한다. 전혀 통제가 없는 사람을 생각해서는 안된다. 어느 경지에 오르면 전혀 통제를 받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다. 어느 경지에 가든지 우리의 머리가 있다.
교회 안에서 통제하는 이상은 몸 자체다. 하나님도 그리스도도 보이지 않는데 누구에게 물어 봐야 하겠는가? 이승만 박사처럼 하나님께 물어보겠는가? 누구에게 물어보고 반공포로를 석방했느냐는 추궁에 이승만 박사는 “내가 골방에서 깊이 하나님과 의논했습니다.”라고 지혜롭게 대답해서 덜레스 미 국무장관을 두말도 못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나는 골방에서 깊이 기도했습니다. 나는 하나님과 깊이 관계를 갖고 말씀을 들었습니다.”라고 하면 몸이 안된다. 몸이 우리를 통제하는 이상이니까 그것이 몸을 위한 것인지 아닌지는 몸에게 물어 봐야 하는 것이다.
몸은 지금 나타난바 된 그리스도, 지금 실현된 그리스도다. 그렇기 때문에 몸이 미숙할 수 있고 불완전할 수도 있다. 몸이 온전하지 못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몸 안에 있으면 몸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내 몸이 완전하지 않아도 내 몸에 붙어있는 지체들은 내 몸의 통제를 받아야 하는 것과 같다. 내 몸이 내장이 불안전하고 폐가 한쪽이 없다 해서 손이 제멋대로 하고 발이 제멋대로 하면 되겠는가? 폐 때문에 숨을 쉬기 불편해도 발은 거기 따라야 한다. 발은 뛰고 싶어도 숨이 따르지 못하니까 할 수 없이 숨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옛날에는 걸음이 빨라서 젊은 형제들이 따라오기 어려울 정도로 걸음이 빨랐는데 요즘은 숨이 차서 내가 남을 따라갈 수 없다. 천천히 걸어도 숨이 차니 발은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나는 빨리 걸을 수 있는데 호흡이 안되니 답답하다.’고 할 것이다. 몇 년 전에 김성식 형제와 서울에 갔었는데 내 속도 모르고 혼자서 막 가 버리니까 혼자 서울 한복판에 떨어져서 길을 잃을 뻔했다. 몸 때문에 지체가 불편할 때가 많다. 머리도 그렇다. 머리가 맑으면 보고 싶은 책도 많이 보고 교정도 하면 좋겠는데 조금만 보면 산소부족으로 머리가 아프다. 마음으로는 하고 싶은 것이 많아도 그 마음은 머리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옛날에는 머리가 아프다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었다. 50이 될 때까지도 머리가 아픈 것이 무엇인지 몰랐는데 연탄가스를 마시고 나서 머리 아픈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런데 지금은 과부하가 걸려서 책을 조금만 봐도 머리가 아프다. 그러니까 지체들은 내 머리 때문에 상당히 제한을 받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한 몸 안에서 몸의 어떠함 때문에 통제를 받고 제한을 받는 것이다. 지체는 교회가 미숙하면 미숙한대로 통제를 받고 성숙하면 성숙한대로 통제를 받아야 한다. ‘교회가 불완전하니까 나는 교회의 통제를 받지 않겠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폐가 나빠서 숨이 찬 것을 발이 자기 멋대로 달려가 버리면 어찌 되겠는가? 그러므로 오늘 우리를 통제하는 이상은 몸이다. 이 몸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전파된다. 교회만큼 그리스도는 전파되는 것이 마땅하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이 와서 보고 그때 전한 것과 와서 본 것이 같다고 알게 된다. 그러므로 조금 부족하고 안타깝더라도 몸만큼 전해야 한다. 발은 아직 관절이 괜찮아서 빨리 갈 수 있지만 몸이 그러니까 천천히 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 몸으로 전파된다. 몸을 통해서 전파된 그리스도가 온전한 그리스도다. 특출한 것으로 전파되어서는 안된다. 썬다싱 같은 사람도 있고 죠지 뮬러와 같은 사람도 있지만 그런 식으로 전파되면 팔만 계속 자라는 것과 같고 코만 계속 자라는 것과 같이 되고 만다. 교회만큼 그리스도가 전파되므로 우리는 성숙한 연합에 이를 때까지, 성숙한 연합을 위해서 우리는 온전한 성장이 필요하다. 온전한 성장을 통해서 성숙한 연합에 이르고 성숙한 연합을 통해서 우리의 약점들이 보충된다. 한 사람은 강한데 한 사람이 약하다면 강한 사람은 약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 이것이 몸 안에서 가능하다. 폐가 나쁘면 위장이 돕고 위장이 나쁘면 간이 도와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각 지체가 자기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약한 것을 보충해 주기 때문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몸 안에서 약한 것은 우리의 좋은 것을 통해서 보충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간증은 보약과 같다. 교회에 주어진 좋은 양식을 먹으면 자라지 않겠는가! 우리에게서 좋은 것이 계속 품어져 나와서 몸을 온전하게 성숙시키도록 해야 한다. 혼자만 자랄 수는 없다. 교회는 연합전선이다. 혼자 갈 수도 없고 혼자 잘날 수도 없다. 한 몸 안에서 전파된 그리스도가 온전한 그리스도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를 당신의 영원한 목적 안에서 한 몸으로 부르시고 선택하셔서 당신의 머리 되심 아래 우리를 두시고 양육하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성숙에 이르는 연합에 이르기 위해서 우리가 지체들의 역할을 충분히 감당하도록 인도해 주시고 각 지체에게 주신 은사가 다 순수하게 그대로 발휘될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나를 통해서 다른 사람이 도움을 받고 다른 사람을 통해서 내가 도움을 받아서 서로 연합하는 관계가 되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 안에서 주님으로 말미암은 모든 것이 온전하게 소화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