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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화평케 함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몀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생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오직 위로부너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야고보서 3장 13~18)>
온전하고 구비하여 부족함이 전혀 없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겐 지혜가 필요하다. 이런 지혜의 여러 가지 항목들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 있다. 오늘은 '화평케 하는 것이 바로 지혜'라는 말씀을 드리려한다.
마태복음 5장 9절에 보면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라는 말씀이 있다. 에베소서 2장 14절에 보면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라는 말씀이 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한 마디로 하면 화평케 하시려고 오셨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원수 진 것을 화평하게 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막혀 있는 것을 뚫어서 화평케 하고 궁극적으로 하나되게 하려고 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런 목적을 위해서 그는 십자가로 가신 것이다. 그러니까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대로 예수님은 참으로 화평케 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분이시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과 사람간의 막힘이 인생의 첫 번째 문제이다. 지으신 자와 지음을 받은 자가 막혀 있으면 지은신 이는 지으신 이애로 저주할 수밖에 없게 되고, 지음을 받은 자는 지음을 받은 자대로 불만과 원망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내가 자동차를 만들었는데 자동차와 나 사이에 막혀져 있어서 내가 원하는 대로 자동차가 가지 않는다고 하자. 매일 고장만 나고 동으로 가자고 하면 서로만 간다면 그 자동차와 자동차를 만든 자 사이에 원수가 질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매일 그 자동차 때문에 속섞다가 화병이 날 수도 있고 화병이 안 난 사람은 결국은 자동차를 때려부숴버릴 것이다.
속으로 골병든 사람은 화병이 걸리고 밖으로 표출하는 사람은 자동차를 때려부수게 된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가 막혔다는 말은 이런 문제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목적을 가지고 만드셨는데 사람의 목적은 다른 데 있어서 하나님은 동으로 가는데 사람은 서로 가서 서로 원수지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원수지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축복이 없어지고 만다. 그렇지 않겠는가?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주신 축복이 정상적인 관계에서 이루어져야 하는데 비정상적인 관계가 되니까 축복이 이루어질 수 없다. 남은 것은 저주밖에 없다. 아담에게 말씀하시기를 '땅이 너를 버렸다. 엉겅퀴를 낼 것이다. 가시덤풀을 낼 것이다. 너는 이마에 땀이 흘러야 먹고 살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것은 축복으로 주신 것이 전부 저주로 바꿔졌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사람을 축복하시려고 모든 것을 만들어놓으셨지만 사람들이 길을 거꾸로 갔기 때문에 그것이 모두 저주가 되고 말았다.
배를 타고 바다를 다니면 편리하고 좋다. 비행기로 실어나를 수 없는 것을 배로 실어나를 수도 있고 차로 실어나를 수 없는 것을 배로 실어나를 수 있어서 참 좋다. 그러나 헤엄을 쳐서 태평양을 건너가려고 하면 저주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순리가 있으면 모든 것이 축복이 되지만 역리가 되면 모든 것이 다 저주가 되고 만다. 더 좋게 하기 위해서 준 것이 더 나쁘게 되고 만다. 하나님의 말씀도 그러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 우리를 축복하시려고, 어둠을 밝게 해주시려고 무지한 것을 깨닫게 해주시려고 주신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저주가 되고 만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것은 하나님과 사람이 화목케 하려고 오신 것이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과 화목케 하려고 오셨다. 그런데 오히려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아주 괴로운 사람들도 생기게 되었다. 불행한 사람, 영원히 저주 받을 사람이 생겨나게 되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실 때 사람을 저주하시려고 보냈겠는가? 축복하시려고 보냈는데 사람이 그 순리를 따르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축복이 저주로 변했다. 신명기에 보면 '내가 너를 축복하기로 맹세했을지라도 네가 내게서 돌아서면 내가 다시 너를 저주할 것이고, 내가 너를 저주하리라고 맹세했을지라도 네가 내게로 다시 돌아오면 내가 너를 축복하리라'는 말씀이 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랬다, 저랬다 하시는 분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이 말을 자세히 들어보면 우리가 순리를 따르는 경우와 역리를 따르는 경우에 축복과 저주가 바꿔져 버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바꿔져 버린다.
빛도 도둑질을 하는 사람에게는 저주가 되지 않는가? 캄캄한 밤만 있었으면 매일 도둑질을 해도 되는데...전기불만 없더라면 일할 필요 없이 자기 것처럼 가져다 쓸텐데 전기불이 생겨서 자기 얼굴이 비취니까 그렇게 하지 못한다.
요즘에 은행강도들은 CCTV에 얼굴이 찍혀서 꼼짝없이 잡힌다. 그 카메라가 없었더라면 해먹고 달아나도 될 텐데... 그러면 공사판에 가서 일하지 않아도 되고 땀흘려 일하지 않아도 쉽게 먹고 살텐데 누가 카메라란 놈을 만들어서 자기 얼굴이 비치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좋은 것도 길을 잘못 가는 사람에게는 저주가 되고 만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화목이 깨져버렸다는 것은 위로부터 내리는 축복이 없다는 말이다. 메마른 땅에서 아무리 농사를 지으려고 애를 써도 비가 오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사막이 원래 있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고 한다. 우리 지구가 하도 크다보니까 어떤 집에는 비가 오고 어떤 집에는 비가 오지 않는다고 한다. 비가 안 오는 집은 사막이 되어버린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한국 땅도 산천이 푸르고 좋지만 어느 시대에 가서 비가 오지 않는 지대가 되면 금방 사막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러니까 그 곳은 아무리 물을 대려고 해도 저주의 땅밖에 안 된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은혜와 축복이 없으면 인생이 메말라진다. 인생이 메말라지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싸우는 것밖에 없게 된다. 없으면 싸우게 된다. 넉넉하고 부유하고 평화로우면 싸우지 않는다. 그런데 강팍하고 괴롭고 척박하면 싸우게 된다.
우리 애가 남도 초등학교에 처음 들어갔을 때 교장선생님께서 '우리 아이들은 장난은 많이 치지만 잘 싸우지는 않습니다'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대명동이 그런대로 환경이 괜찮아서 괜찮게 사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살기 각박한 지역에 있는 초등학교에 가보면 아이들이 매일 싸워서 터진다고 한다.
각박하니까 죽자 사자 싸우는 것이다. 위로부터 내리는 은혜가 없으면 사람이 각박해진다. 각박해지면 서로 싸우게 마련이다. 율법 안에서 왜 사람들이 서로 저주하고 미워하는가? 율법을 지키느라고 각박해서 자기 자신을 지키느라고 피곤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도저히 사랑할 수 없다.
여러분도 감기만 들어도 짜증이 나고 머리가 아프지 않는가? 그러면 옆에 있는 사람도 귀찮고 누가 말 걸어도 귀찮고 찾아 오는 사람도 귀찮고 자식도 귀찮지 않은가? 그러니까 은혜가 없으면, 위로부터 내리는 단비가 없으면 사람이 메말라지고 메말라지면 자연히 싸우게 마련이다.
그러니까 첫째 문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화목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화목을 이루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기에 하나님과 사람이 화목이 될까? 예수님께서 한 번 화목하게 하셨으니까 우리는 저절로 되는 것일까? 그것이 아니다. 예수 안에서 화목이 된다는 뜻이다. 지금 예수님이 오신 지 2000년이 되었는데도 하나님과 인류 사이에 화목이 없다. 왜냐하면 예수 안에서 화목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예수 믿는다는 것만으로 화목이 되는가? 그렇지 않다. 예수 안에서, 그 인격 안에서 화목이 된다는 말이다. 그 분 안에는 하나님과 하나이다. 막힌 것이 전혀 없다. 왜냐하면 피조물이 피조물의 자리에, 아들이 아들의 자리에, 사람이 사람의 자리에 왔기 때문에 하나님과 순리가 되었다는 말이다. 역리로 흐르던 것이 순리로 바꾸어졌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사람 사이가 화목이 될 것이 아니겠는가?
예수님이 오셨다고 해서 저절로 모든 사람이 화평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 안에서 화평이 된다. 그 길이 새롭고도 산 길이고 참된 길이기 때문에 그 안에 들어오면 하나님과 저절로 다 화목이 된다는 뜻이다.
이 말을 더 쉽게 하면 '순종 안에 들어오면 저절로 다 화목이 된다'는 말과 같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 안에 내가 들어오면 하나님과 나는 화평이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내가 아들의 위치에 오면 화목이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내가 피조물의 위치에 오면 화목이 된다는 말이다.
지금까지는 왜 화목이 없었는가? 피조물이면서도 피조물의 위치에 있지 않았고, 아들이면서도 아들의 위치에 있지 않고, 인생이면서도 인생의 위치에 있지 않으니까 화목이 깨지게 되었다. 그래서 예수 안에서 화목을 이루었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화목의 한 본이 되셨기 때문에 그 안에 들어오면 누구든지 다 화목이 되게 되어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다 자기 안에 모아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화평하도록 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다. 하나님과 우리가 화목이 되면 사람과 사람 사이엔 자연히 화목이 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원수진 것의 대표적인 예가 유태인과 이방인이다. 유태인들은 절대로 이방인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지금도 그러하다. 이방인들은 유태인 회당에 들어가지 못한다. 우리가 가서 유태인 회당에 구경을 가려고 했다. 여호와를 믿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유태인들이 어떤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우리 조상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려고 찾아가 보려고 했다. 그런데 진짜 자기들이 유태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말하기를 자기들 예배드리는 회당에 이방인들은 들어오지 못한다고 했다. 그래서 겨우 간 곳이 어중이 떠중이 유태인들이 모인 그곳에 겨우 갔다 왔다. 3류에 속하는 곳이었다. 자기들 생각으로는 정통이 아닌, 세상에 돌아다니다 보니까 이것 저것 섞인 사람들은 우리를 오라고 해서 갈 수 있었다.
그러니까 유태인들은 지금도 이방인들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기지 않는다. 하나님의 축복밖에 있는 외인으로 생각한다. 이렇게 되어있는 것이 유태인과 이방인의 관계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되었는가? 교리, 성경의 문자, 역사에 매여서 그들은 그렇게 강팍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 사람들도 넉넉해진다면, 성경보다 더 넉넉해진다면, 교리보다 더 넉넉해진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위로부터 내려온다면, 이슬과 단비가 땅에 촉촉히 내려온다면, 그 사람들이 이방인을 흡수하게 될 것이다.
은혜가 없는 곳에서는 싸움밖에 없다. 이방인들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유태인들이 그러니까 이방인들도 그들을 좋아할 리 없다. 이와 같은 일은 지구상에서 똑같이 일어나고 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서로 원수처럼 생각한다. 대립적으로 생각한다. 있는 자는 없는 자를, 없는 자는 있는 자를, 잘난 자는 못난 자를, 못난 자는 잘난 자를, 이런 자는 저런 자를, 저런 자는 이런 자를, 서로 다르기만 하면 원수가 되고 만다. 서로 적이 되고 화목이 될 수 없다.
이것은 모두 자기가 각박하다는 뜻이다. 넉넉하면 그렇게 될 리가 없다. 각박하다보니까 그렇다. 어떤 사람은 율법을 지키느라고 자기가 너무너무 각박하다 보니까 율법주의자들은 그 율법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사람을 보면 죽이려고 한다. 자기가 너무 너무 힘든 길을 가니까 '나는 이렇게 힘든데 너는 왜 그렇게 편하냐?'하는 것이다. 자기가 힘든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 관용할 수 없다.
교회에 다니는 것도 어쩔 수 없이 힘들게 다니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해 도저히 사랑을 베풀 수가 없다. 그런데 교회에 나오는 것이 너무 너무 즐거운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 수가 있다. 우리가 넉넉해지면 사랑도 되고 용서도 된다. 그런데 넉넉하지 못하고 각박해지고 말았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화평케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하나 안에, 화평 안에 있다는 것을 알면 그것이 지혜이다. 하나님도 화평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면 행복하다. 그래서 '그 날에는 아버지가 내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알 것이다. 그 날이 올 것이다. 내가 죽고 다시 난 날이 올 텐데, 다시 오는 날이 올텐데, 이 세상이 끝나고 다시 오는 날이 올텐데, 일차적인 창조의 세계가 끝나고 다시 오는 날이 올텐데,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 하나인 것을 알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왜 지금은 모르는가? 여러 가지 것들이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육신, 역사, 교리, 제도에 속한 여러 가지 것들과 관념에 있는 것들이 다 가려져 있어서 지금은 아버지가 내 안에 있는 것도 모르고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도 모르고 너희가 내 안에 있는 것도 모르지만 그 날엔 그것을 다 알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 날에는 그 모든 것이 없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교리도, 제도도, 우리의 관념도, 생각도, 육신도 끝나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 날에는 다 알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하나이신 분이시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라고 하셨다. '어떻게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과 자기가 하나라고 할 수 있는가? 어떻게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하는가?'라고 들었다. 하나라는 말을 동등하다는 말로 들었다.
이것은 동등하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라는 말이다. 창조자와 피조물은 순리적인 세계 안에서는 하나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다. 하나님과 사람은 그 관계 안에서는 하나이다. 그러니까 동질, 동등하다는 말이 아니라 그 관계 안에서 하나라는 말이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을 때, 유태인들은 '네가 사람이 되어서 어떻게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하느냐? 건방지다'라고 생각했다. '건방지다'는 말은 보통 말이지만 '불경하다. 참람하다. 그래서 저런 자는 죽여야 한다'고 결론을 짓게 되었다.
예수님은 자기와 하나님이 동등하다는 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한 것은 아들이기 때문이며, 피조물이니까, 사람이니까 나는 하나님과 하나다'라는 뜻이다. 우리가 만일 그 위치에 있으면 하나님과 우리는 하나이다. 남편과 아내가 똑같아서 하나인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은가? 남녀가 똑 같기 때문에, 동등하기 때문에 하나가 되는 것은 아니다.
관계 안에서 정상적인 관계로 있으면 그것이 하나이다. 비 정상적인 관계로 있을 때는 둘이 된다. 하나님과 사람도 마찬가지로 본질이 동등하다는 말이 아니라, 정상적인 관계에서 하나라는 뜻이다. 예수님과 우리도 그러하다.
우리는 그 분을 만나기 위해서 많은 방법을 써왔다. 예수를 만난다, 예수를 믿는다는 여러 가지 개념들이 있다. 예수를 만나려고 많은 사람들이 쫓아다니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쫓아다녀도 예수를 만날 수 없다.
당시 살아계실 때도 만나지 못했는데 돌아가신 지금 어떻게 그를 만나겠는가? 그래서 사람들은 성령을 받는다든지, 증거를 받는다든지 하는 방법으로 예수를 만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예수를 만난 것이 아니다.
예수를 만날 수 있는 곳은 한 군데 뿐이다. 다른 곳에서는 만날 수 없다. 그 분의 운명이 피조물의 운명과 인생의 운명인 것이 우리에게 보여졌을 때 그 운명 안에서만 우리는 만날 수 있다. 그 이외에서는 전혀 만날 데가 없다.
그가 병자를 고친 자리에서 나도 병자를 고친다고 해서 하나인가? 그렇지 않다. 지금 사람끼리도 병자를 고친 사람들끼리도 서로 하나가 아니다. 밖에 나가보면 은사를 받아서 병고치는 사람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런데 방언하는 사람들끼리도 하나가 아니고 병자 고친 사람들끼리도 하나가 아니다. 똑 같은 업을 하는 사람들이지만 하나가 아니다. 서로 만나지지 않는다.
그런데 하물며 우리가 예수님과 어떻게 만나지겠는가? 다 생각일 뿐이다. 불덩어리가 떨어졌다면 그것은 불덩어리일 뿐이지 예수는 아니다. 내가 꿈을 꾸었다면 그것은 꿈이지 예수는 아니다. 어떤 사람은 등에 불이 나서 예수를 만났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등의 불이지 예수는 아니다. 그렇지 않은가? 어떤 사람이 예수님한테서 능력을 받았다면 능력을 받은 것이지 예수는 아니다.
그 무엇도 예수 자신은 아니다. 그 분으로부터 그 어떤 것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것일 뿐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을 나와서 광야를 지나가면서 많은 것을 보았다.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보았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는 것을 보았고,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고, 반석에서 물이 나는 것을 보았다. 많은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여호와 자신은 아니었다. 반석이 깨진 것이지 여호와 자신은 아니다. 메추라기가 내려온 것이지 여호와는 아니다. 만나가 40년간 내렸지만 그것이 하나님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 분 자신은 아니라는 말이다 .
마찬가지로 예수님한테 가서 무엇을 만났다 하더라도 예수 자신은 아니다. 그러니까 언제든지 공허하다. 예수를 만났다는 사람들을 만나보면 공허할 뿐만 아니라 예수와 같지 않다. 예수를 만났는데 직업은 같을 수 있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셨다면 나도 같은 직업에 조사할 수는 있다. 같이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동업자는 될 지 모르지만 하나는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님이 병 고치는 분이셨기 때문에 나도 병을 고친다면 예수와 나는 동업자이다. 그러나 동업자일 뿐이지 절대로 하나는 아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그 분을 만날 수 있는가? 그 분의 운명에서 밖에는 만날 장소가 없다. 우리 서로도 똑같다. 여기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우린 어디서 만나지는가? 얼굴과 얼굴, 성격과 성격, 직업으로도 만나지지 않는다. 이런 만남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다. 우리가 진정으로 만날 수 있는 것은 한 운명 안에서이다.
이 안에도 천차만별이다. 다 이렇게 한 자리에 앉아있지만 생각도 다르고 다 다르다. 생각이 똑같아도 만나지지 않는다. 생각이란 언제 바꿔질지 모르는 것이다. '인심은 조석변'이라고 사람의 생각은 아침 저녁으로 바꿔진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오늘은 저 사람과 내 생각이 같아서 너와 내가 하나라고 했지만 내일 보면 너와 나는 다르다고 하지 않겠는가? 그런 데서 만나는 것은 하나가 되지 않는다.
진정으로 만나지는 곳은 운명 안에서 밖에 없다. 예수님과 나도, 우리와 우리도 거기서 밖에 만나지지 않는다. 여러분이 나를 만나는 것도 똑같다. 나와 여러분도 똑같지 않다. 생각, 마음, 행동이 같을 수는 있지만 그것은 늘 변한다. 여러분과 내가 만나는 유일한 장소도 운명이다. 그러니까 이 운명은 선과 악이 있기 전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선과 선이 만나도 만난 것이 아니고 악과 악이 만나도 만난 것이 아니다. 선끼리, 혹은 악끼리 만나면 서로 동지라고 할 것이고, 선과 악이 만나면 원수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다 참된 만남이 아니다. 적합하지 못한 만남이다. 표면적인 만남에 불과하다.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
선과 선이 만나서 서로 하나라고 하다가 어느 날 가면 서로 원수가 질 수도 있다. 너와 내가 성질이 같다고 하다가도 마음이 같다고 하다가도 어느 날 가면 바꿔질 수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합당하고 유일한 만남이 아니다.
오직 한 운명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지는 것만이 영원한 만남이다. 이것은 내가 잠을 자나 깨나 선에 있으나 악에 있으나 산에 있으나 바다에 있으나 변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아니라고 해도 아닌 것이 아니고 맞다고 해도 맞는 것이 아니다.
변할 수 없는 자리에서만 우리는 하나로 만날 수가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자리에서 보면, 그가 장대에 매달린 자리를 보면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처럼 저희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들로 하여금 영생을 얻게 하려한다고 했다. 장대에 매달린 예수를 보고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 장대에 매달린 예수 안에서 한 운명을 보면 영생을 얻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에게 막힌 담이 없어진다. 선, 악, 역사, 관념 등 여러 가지 것들이 막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 일본에 갔다 왔다. 한국 사람이나 일본 사람이나 다 똑 같은데 어떤 연유에서인지 일본 사람들은 씨가 작다. 오끼나와여서 그런지는 잘 모르겠는데 대체적으로 작다. 공항에서 일보는 사람들을 보니까 다 작다. 공항에서 근무하는 사람이라면 그래도 우리 나라로 치면 법무부에서 나온 사람들 아닌가? 보니까 다 왜소하고 작았다. 옷을 입었는데 우리 나라 사람들처럼 팽팽하게 입은 사람들이 없고 다 헐렁하게 입어서 옷 속에 사람이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옛날 우리 기성복 입은 것 같았다. 한국에서는 그런 사람을 보기가 드물다. 그들이 작은 것이 아마 기후적 조건이든지, 음식 조건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런 조건들이 그 사람들과 우리를 다르게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그 사람과 내 운몀은 하나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 운명은 하나이다. 키가 크고 작은 것 뿐이지 사람이 아닌 것은 아니다. 일본 사람들은 잘 안 먹어서 그런지 얼굴이 창백했다. 가난한 것도 아닐텐데... 어떤 것도 모두 다 역사 이후에 만들어 진 것이다. 기후조건으로 만들어졌든지, 식량조건으로 만들어졌든지, 역사적 조건으로 만들졌든지 다 만들어진 것이다.
그 사람들은 모두들 친절했다. 우리가 공항에서 전화를 해야하는데 엔화 동전도 없고 전화 거는 방법도 모르고 전화카드도 없어서 할 수없이 공항 직원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랬더니 한 여자가 나와서 이리 저리 뛰어다니더니 카드를 구해주었다. 우리 나라에서도 공항 직원들이 그렇게 하는 지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들은 친절했다. 일본에 다녀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일본 사람들이 친절하다고 말한다. 친절한 것도 어느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 나라 사람들도 오랫동안 훈련을 시키면 그렇게 된다.
이런 것들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다. 유일한 것은 하나밖에 없다. 유일한 것은 예수 안에서 보여지는 인생의 운명밖에 없다. 여기서밖에 우리는 만날 수 없다. 예수를 만났다는 사람이 많이 있지만 왜 예수와 같은 사람이 나오지 않는가? 그 운명 안에서 만나지 않고 다른 곳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왜 내게서 예수와 같은 삶이 나오지 않는가? 그것은 그 운명 안에서 만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운명 안에서 만났으면 한 삶이 나오지 않겠는가? 한 운명 안에서는 막힌 담이 없다. 키가 작고 큰 담도 없고 선악의 담도 없다.
담이 없으니까 하나로 만나진다. 하나님과 자신사이에 막힘이 없으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막힘이 없다. 그러니까 내가 인생의 자리, 운명적인 그 자리에 있으면 하나님과 내 사이가 순리가 된다. 그러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순리가 되고 화목하게 된다.
시기하고 다투는 것을 보면 대개 표면적인 것을 가지고 그런다. 싸우는 사람을 봐도 표면적인 것으로 싸우지 운명을 가지고 싸우는 사람은 없다. 다 없어질 것을 가지고 싸운다. 개가 뼈다귀를 가지고 싸우는 것처럼 사람도 역시 그런 것을 가지고 싸운다. 아주 고상한 것 때문에 싸우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개한테는 뼈다귀가 가장 고상하다. 인간에게 가장 고상한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개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뼈다귀나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은 개들이 뼈다귀 가지고 싸우는 것을 보고 유치하다고 하지만 개들이 사람들을 볼 때도 역시 유치하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먹을 것도 없는 데 왜 싸우냐고 생각할 것이다. 뼈다구는 깨면 먹을 것이라도 나오지만 인간이 싸우는 것을 보면 그 보다 더 유치하다. 돈도 안 되는 것 가지고 싸우고, 입안에 들어오는 것도 없는데 싸우고 자존심 때문에 싸우기도 한다. 개들이 볼 때 정말 어처구니 없는 것이다. ‘밥이 되나, 옷이 되나, 왜 저런 것을 가지고 싸울까? 우리들 같으면 저런 것 가지고 안 싸워.’라고 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자랑할 것이 전혀 없다. 우리가 인생이라는 운명을 지킬 때, 그것을 보고 ‘이것이 내 자리구나!’라고 할 때 하나님과 저절로 화목이 된다. 내가 하나님과 화목하고 싶다고 하지 않아도 화목이 된다. 형제와도 친하게 지내자고 악수하지 않아도 친하게 된다. 사랑을 해주니까 친해지고 사랑을 안 해주어서 안 친한 것도 아니다. 저절로 하나가 된다. 어디 가보니까 사랑이 넘치더라고 해도 그것도 아니다. 어디 가보니까 사랑이 없어서 못 살겠더라고 하는 이것도 아니다.
사랑이 있었으면 없는 데가 있을 것이고 없었으면 있는 곳이 있을 것이다. 산이 높으면 골짜기가 깊어질 것이고 골짜기가 깊으면 산이 높아지는 것이다. 이것은 다 있다가 없다가 하는 것이다. 잠시 있을 것에 불과하다. 어떤 사람이 사랑한다고 해서 영원히 사랑할 사람도 없다. 어떤 사람이 미워한다고 해서 영원히 미워할 사람도 없다. 어떤 사람이 사랑한다고 해서 100% 사랑할 수도 없고, 100% 증오할 수도 없다.
교회에 오는 사람들이 그런 것을 바라고 오면 실망하게 된다. 바다가 한정 없이 커서 아무리 돌을 던져도 배가 차지 않는 것처럼 사람이 원하는 그것도 차지 않는다. 사람이 원하는 사랑도 채워질 수 없다. 채우고 채워도 결국은 또 모자라게 된다. 돈도 사랑도 용서도 회개도 그렇다. 어떤 것도 온전한 것이 없다.
사람이 아무리 회개하고 참회한다하더라도 100%일 수 없다. 사람이 하고 있는 모든 것이 다 지나간다. 어떤 사람이 ‘내가 정말 잘못했다. 100번 생각해도 잘못했다’고 한다고 하자. 그런데 그 사람에게 계속 잘못했다고 말하면 그 사람이 화가 난다. 100% 잘못한 사람이 왜 화가 나겠는가? 자신은 100% 잘못했고 또 100% 참회했다고 생각했지만 그 사실을 누가 계속 얘기하면 분노가 난다. 분노가 난다는 말은 100% 참회가 안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내가 완전히 회개했다고 자랑할 것도 없다. 사람은 완전히 회개가 되지 않는다. 자기가 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안 된다.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용서도 마찬가지이다. 100% 용서를 했다면 용서한 후에 그 사람이 아무리 부애를 질러도 부애가 나지 않을 것이 아닌가? 그런데 용서했는데 그 사람이 한 두 번 감사하다고 했다가 뒤로 가서 딴 전을 피우면 그 사람이 미워진다. 내가 용서해주었는데 저럴 수 있나하고 생각하게 된다. 이것은 100% 용서가 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사람이 하는 일은 다 그러하다. 완전할 수 없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찾아다니게 되면 실망할 수 밖에 없다. 어떤 사람이 사랑이 많다고 해서 찾아가지만 100%가 되지 않는다. 어차피 사람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달라고 하다 보면 결국 바닥이 난다.
오병이어를 오천명을 먹였더니 사람들이 쫓아왔다. 예수님이 그것을 아시고 사람들을 피해서 배를 타고 건넌편으로 가셨던 모양이다. 그런데 배를 타고 쫓아 와서 한다는 말이 ‘선생님! 우리가 밤이 맞도록 찾았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찾고 있는데 어찌 혼자 이 곳에 계셨습니까?’했다. ‘뭐하러 찾아왔는가?’라고 했더니 그들이 하는 말이 ‘모세는 광야에서 만나를 주었는데 선생은 우리에게 무엇을 더 주려고 하느냐?’하였다. 결국 뭘 좀 더 내놓으라는 말이다.
멍청한 사람 같았으면 더 주었을 것이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인 것을 가지고 이만명을 먹인다든지, 십만명을 먹인다든지, 모택동 처럼 10억을 먹여살리든지 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미련하신 분이 아니셨다. 그래서 ‘너희가 나를 찾아온 것은 이적을 본 까닭이 아니고, 먹고 배부른 까닭이구나. 내 살이 참된 양식이니 그것은 양식이 아니다’라고 하셨다. 그런 것을 찾으려면 다시는 오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 사람들은 그 말을 알아듣고 다 가버렸다. 요한복음에 보면 ‘많이 가버리고 다시는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고 했다. 예수님은 사람의 속을 다 아시니까 ‘저건 한강에 돌 던지기다. 아무리 줘봐야 태평양에 바위 던지기지 먹히겠느냐?’하신 것이다.
사람은 자기 운명을 버리고 인간이 무엇인지 모르고 사랑하느니, 미워하느니 한다. 사랑할수도, 미워할 수도, 용서할 수도, 용서를 받을 수도 없다. 내가 용서를 받았다고 해도 100% 용서를 받았으면 그 이상이 없을텐데 그렇지 않다. 용서하는 사람도 용서 하는 사람도 100%가 안 된다. 회개를 하는 사람도, 회개를 받은 사람도 100%가 안 된다.
사람은 결국 한 운명 안에서 밖에는 진실이 없다. 다른 것은 진실할 수가 없다. 100% 진실하다고 해봐야 소용이 없다. 베드로만큼 누가 진실할 수 있겠는가? ‘내가 죽을지라도 주를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옥에도 같이 가고 죽는 데도 같이 가고, 남은 다 실족할지라도 나는 실족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 때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열 두 제자가 있는데 누구 누구는 다 실족할지 모르지만 나만은 실족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그것은 베드로의 진실이었다. 그의 진실이었지만 결국 모른다하고 말지 않았는가? 에수님은 그것을 아시고 ‘네가 닭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모른다고 할 것이다.’하셨다.
우리는 그것이 진실이라고 하고, 그것이 흠이 없는 순수한 것이라 하고, 깨끗한 것이라고 하지만 예수님은 아신다. ‘네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라고...이 운명 안에서 밖에는 진실이 없다. 어떤 것도 그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한 운명 나타나는 그것 만이 진실이다. 이것은 내가 어떻게 속일 수가 없는 것이다. 내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도 미움도 내 의지로 해야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언젠가 바꿔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운명은 내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다. 내 의지와 상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진실한 것이다. 하나님이 완전히 보장하신 것이니까 진실하다.
이 자리에서만 우리가 예수와 형제와 하나일 수 있다. 이 외에 어떤 것에서도 우린 도저히 하나가 될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미워하는 사람이 생긴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미움도 생긴다. 또 미움이 극해지면 사랑도 생긴다. 동양철학이 그러하다. 우리 태극기가 그렇다. 태극기를 그려보면 뱅뱅 돈다. 음이 극해지면 양이 되고 양이 극해지면 음이 된다고 한다. 태극기의 원리가 바로 그 원리이다.
뜨거운 것이 계속 뜨거워지면 찬 것이 오고 찬 것이 계속 차지면 뜨거운 것이 온단다. 그러니까 태극기를 자세히 보면 인생은 뱅뱅 도는 것이다. 선한 것은 악한 것이 되고 악한 것은 선한 것이 되는 것이라고 알면 된다.
알고 보면 태극기가 국기로써는 너무 거창한 것이다. 캐나다처럼 단풍잎 하나 그려놓든지 미국처럼 별을 50개 그려놓든지 해야할텐데 태극기를 그려두었으니 우주를 그려놓은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국가인지 종교인지 잘 모른다. 종교나 철학 깃발 같으면 어울릴텐데 국가를 상징하는 깃발로는 격에 맞지 않는다.
인생이 만든 것은 다 태극기 처럼 돌고 돈다. 뜨거워지면 차지고 차지면 뜨거워진다. 해가 오랫동안 중천에 떠 있으면 기울어져서 저녁이 되지 않는가? 달이 오래 떠 있으면 새벽이 돌어오지 않는가? 이런 것을 보면서 생각한 것이다. 인생도 그렇다는 것이다.
만날 수 있는 곳은 영원히 한 자리 뿐이다. 예수님께 찾아갔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밀물이 몰려올 때 몰려왔다가 썰물이 내려갈 때 내려가버리는 것 처럼 다 내려가 버리고 혼자 십자가에 달려있을 때는 아무도 없었다. 완전히 썰물이었다. 부활 하신 후에 다시 밀물이 되었다. 그러니까 밀물과 썰물이 계속 될 것이다. 심고 거둠이 계속 될 것이다.
이런 것은 우리를 하나되게 할 수가 없다. 영원한 자리밖에는 우리를 하나되게 할 수 없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영원한 자리로 우리를 인도하셨다. 하나님과 화목할 자리로, 사람과 사람이 화목할 자리로 우리를 인도했다. 하나될 수 밖에 없는 자리로 우리를 이끌어 갔다. 이것이 바로 그 날이다. 그 날이 오면 북을 칠 것이 아니고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 날이 오면 가죽을 벗겨서 세종로에서 북을 만들어 칠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그 날이 오면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을 알 것이고, 너희가 내 안에 있는 것을,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알 것이라는 것이다.
그 날이 언제인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있는 그 날, 예수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 날이 돌아오면, 우리의 모든 것이 다 벗어질 것이라는 말이다. 선도, 악도, 아는 것도, 모르는 것도, 무언가 막혀있던 그 어떤 것도 다 벗어지고 나면 오직 하나만 남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에게는 왜 화평이 없는가? 왜 시기와 다툼이 나는가? 그것은 자기가 더 높아지고 나아지기 위해서이다. 시기라는 말은 소극적인 말이고, 다툼이라는 말은 적극적인 A라이다. 성격에 따라서 소극적인 사람은 시기를 잘 하고 적극적인 사람은 다투기를 잘 한다. 더 높아지고 더 강해지려고 하는 근원은 같은 것인데 성격이 소극적이다 보면 다투어 싸우지 못하니까 시기한다. 성격이 적극적인 사람은 그것을 뺏기 위해서 전투적이다.
결국 자리 다툼이다. 땅뺏기나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모두 일차적인 세계 안에 있는 것들이다. 그러니까 이 일차적인 세계 안에서는 화평이 있을 수가 없다. 높아지기도 하고 낮아지기도 하는 세계에서는 화평이 있을 수 없다.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한 세계에서는 화평이 있을 수 없다. 아무리 그것을 제도상 어떻게 만든다 해도 공평해질 수가 없다.
공산주의를 보라. 그렇게 공평하게 만든다고 했지만 공평하지 않다. 당원과 비당원과 공평할 수 없었을 테고,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끼리 공평할 수도 없었겠지만 좌우간 재산에 있어서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면 공평하다고 생각할 지라도 그 안에 사유 재산 아닌 권력에 있어서 얼마나 불공평한가?
김정일 동지와 구청 직원과 어떻게 평등할 수 있겠는가? 김일성 장군과 동사무소 직원과 동등하겠는가? 절대로 동등할 수 없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절대로 동등도, 평등도 없다. 일차적인 세계 안에서는 시기와 다툼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연약한 사람은 시기하게 되고 강한 사람은 다투게 될 수밖에 없다. 높아지고 강해지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의 한 운명 안에서 만났으니까 높은 것도 없고, 낮은 것도 없다. 그 운명 안에 와서 보면 높은 것도 낮은 것도 없다. 선한 것과 악한 것이 따로 없다. 그러니까 다툴 일이 없다. 다툴 일이 있어야 다투지...
지금 학생들에게 입학시험이 없다고 생각해보라. 그러면 눈을 붉히고 싸우겠는가? 내신 성적 때문에 눈을 붉히겠는가? 내신 등급에 따라 입학여부가 달라지니까 눈을 부릅뜨고 서로 감시를 하고 있다. 혹시 선생님이 뒷돈 받아먹고 써주지는 않는지 감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도 저것도 없다면 이렇게 쓰나 저렇게 쓰나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우리는 모두 이 한 운명 안에서 만나질 때만 비로소 하나이다. 뚝배기나 항아리나 흙 안에서 만나면 모두 하나이다. 그릇 점이나 식당에 가면 다르겠지만 흙 안에서 만나면 모두 하나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 안에 가면 하나다. 근원으로 가면 하나이다. 세상적으로는 더 높은 것도 있고, 낮은 것도 있고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으니까 거기서는 절대로 하나될 수 없다.
그러나 예수께서 보여주신 이 한 운명 안에는 그런 것이 없다. 우린 이 한 운명, 한 인 격 안에서 출생했다. 우리가 교회에 들어올 때, 그리스도 안에 들어올 때 이 운명을 보고 들어왔다. 그리고 이 운명을 보기 전까지는 내가 교회밖에 있게 된다. 아무리 들어오려고 해도 들어와지지를 않는다.
그러나 이 운명 안에 있으면 저절로 하나가 된다. 한 몸이 된다. 지혜는 하나임을 아는 것인데 그 운명을 알아야 하나임을 알 수 있다. 하나를 알면 온전해 지게 된다. 온전해지는 것이 무슨 수양을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아, 이것이 하나구나. 뚝배기나 항아리나 다 흙이구나’그렇게 아는 것이 지혜이다.
높고 낮음이 없음을 알아야 지혜로울 수 있다. 높고 낮음이 있다고 알면 도저히 지혜로울 수가 없다. 선과 악을 보면서 도저히 지혜로울 수 없다. 내가 선과 악을 안다면 당연히 선의 편에 서지 않겠는가? 그런데 어느 날 그 선과 악이 바꿔지는 날이 오면 나는 미련한 사람이 된다. 그러니까 결국 한 운명 안에서 만날 때만 우린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 한 운명, 한 인격을 알 때만 지혜로울 수 있다.
이 하나라는 것은 어디서 왔는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라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나라에서는 하나님과 하느님이 싸운다. 천주교에서는 하느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에서는 하나님이라고 한다. 요즘에 와서 국어학적으로 말하면 하느님이 옳다고 하던가? 이것 때문에 또 시끄럽다.
하느님이라는 뜻은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 그런데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근원’이라는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다. 확실히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뜻으로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좋겠다. 모든 하나의 근원, 한 운명의 근원이고, 한 인격의 근원, 한 몸의 근원, 한 믿음의 근원, 한 성령의 근원이다. 그래서 하나라고 하고 ‘님’이라고 붙인 것은 인격적인 표현이고 존경하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그 분은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지혜는 어디서 오는가? 십자가로부터 온다. 십자가가 없으면 우리가 십자가라는 것을 알 수 없다. 한 운명, 한 인격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라는 것을 알 수가 없다.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니 말에 지혜로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함이다’라고 했다.
그러니까 자기를 보내신 것은 세례나 주고 이런 것을 하라고 보내신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고 하신 것이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라고 했다.
내가 지혜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있는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십자가가 없는 것은 지혜가 아니요, 총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구하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으신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다.
왜 그것이 지혜가 되겠는가? 한 운명이요, 한 인격이기 때문이다. 그 한 운명 안에 지혜가 있다는 말이다. 지혜를 따로 배우려고 할 것이 아니다. 내가 십자가에 있는 한 사람, 한 인격, 한 운명을 알면 저절로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
내가 선한 것을 알아도, 악한 것을 알아도 지혜로워질 수가 없다. 그런데 이 한 운명을 알면 지혜로워진다. 내가 선한 것을 알았다가 다음에 그것이 악한 것이 될 수 있다. 악한 것을 알았다가 다음에 그것이 선한 것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흘러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높은 것을 알았다가 낮은 데에 갈 수도 있고 낮은 데에 있다가 높은 데에 갈 수도 있기 때문에 내가 미련한 사람이 된다.
그런데 변치 않는 한 인격을 알 때 우리는 저절로 요동치 않는 사람이 된다. 요동치 않는 사람이니까 항상 똑같은 말을 하게 된다. 항상 똑같은 말을 하니까 지혜롭게 된다. 이 시대에 옳다고 했던 사람이 다음 시대에 가면 잘못된 사람일 수도 있고 이 시대에 나쁘다고 했던 사람이 다음 시대에 가면 나쁘다고 할 수도 있다.
요즘 신문에 보면 국파 공작원들이 불을 던지면서 대모를 한다고 한다. 그 시절에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쪽에서 간첩을 보내니까 우리도 간첩을 보내야 하지 않는가? 그래서 그 때 간첩으로 갔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지금은 시대가 바뀌어서 남북 화해시대니, 햇빛 정책이니 하는 시대가 돌아오니까 이 사람들이 억울하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왜 보장을 해주지 않느냐?’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와서는 말이 되지만 그 때는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때는 말이 되던 것이 지금은 말이 안 되게도 된다.
그러니까 이런 것에 매여 산다면 아무리 지혜로우려고 해도 지혜로울 수 없다. 세상일은 다 이런 일들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이다. 2장에 보면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느니라.’고 했다. 세상의 많은 지혜와 능력이 있지만 다 지나갈 것들이다.
그래서 한 가지만 알기로 작정했다는 것이다. 십자가에 못박힌 이것만 알기로 작정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비밀한 가운데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노니 곧 감추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다. 이 지혜는 세상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으니 만일, 알았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우리에게 이것을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니...라고 했다.
세상의 관원이라는 것은 유대교 종교의 지도자들을 말한다. 공회원이다. 그러니까 종교적인 지도자들, 그 관원들이 하나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만일 그것을 알았더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지혜롭고 백성을 인도하는 자들이었다. 공부도, 수양도 제일 많이 한 사람들이었고 지도자급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십자가의 지혜를 전혀 몰랐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지혜와 능력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고 한다.
이것을 볼 때 그것은 세상의 지혜와 전혀 다른 것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지혜와 다른 것이다. 종교가 생각하는 지혜와 다른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바울이 말하기를 성령으로 이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우리가 성령을 본 일이 없지만 사람의 생각으로 온 것이 아니라 성령이 이것을 알게 했다는 것이다.
12장에 가면 ‘우리가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한 성령을 마신다’고 했다.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침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양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다. 그러니까 다 하나를 먹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모세에게부터 오면서 한 반석으로부터 한 양식, 한 음료를 먹었다는 것이다. 이 반석은 곧 그리스도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한 분에게서 마시는 것, 이것이 우리를 하나되게 한다는 것이다.
내가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에게서, 거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서 마시고 먹으면 그것이 곧 하나라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니까 그것을 먹으면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하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에베소 2장에 보면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입고...’라고 한다. 이것은 이방인과 유대인을 말한다. 아까 말한대로 이방인과 유대인은 이 세상의 모든 특성을 이분화해놓은 것이다. 원수질 수밖에 없는, 대립될 수밖에 없는 특성들이 대립되어있는 상태가 유태인과 이방인이의 상태이다.
이것들이 한 영 안에서,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가면 이 한 영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말이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영 안에서 우리가 영 안에서 나가면...거기서 밖에는 우리가 아버지께 나갈 길이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에베소 4장 3절에는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껏 지키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하나인 것을 힘써 지켜야 한다. 이 하나인 것을 지키려면 이 하나 아닌 것은 모두 배격해야한다. 모두 내려놓아야 한다. 좋은 것이든, 좋지 않은 것이든지 다 내려놓아야 한다. ‘이것은 좋은 것인데...’하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아간의 사건에서 나왔다. 다 진멸하라고 했는데 가다보니까 좋은 양털도 있고 좋은 양도 있어서 나쁜 것은 다 불살라버리고 좋은 것은 다 가지고 왔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왜 네가 이것을 가지고 왔냐?’라고 하시니 그가 변명하는 말이 ‘이것은 너무 좋아서 하나님께 드리려고 남겨두었습니다’라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악한 놈아!’하고 저주하셨다.
그러니까 좋은 것이라고 해서 하나되지 않는 것을 가지면 안 된다. 하나되는 것 아닌 모든 것은 우리가 내려놓아야 한다. 그것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하나되지 않는 것은 모두 내려놓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원래 우리는 하나인데 하나되게하지 않는 것은 뭔가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만들어졌으니까 하나가 아니다. 만들어지지 않은 것은 다 하나인데 만들어졌으니까 하나가 아니다.
뚝배기와 항아리가 왜 달라졌는가? 만들기를 다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뚝배기가 좋은지 항아리가 좋은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지만 좌우간 만들었기 때문에 다르다. 그러니까 나와 저 사람이 다르다고 생각이 되면 그것은 만들어진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것은 다른 것이 없다. 그런데 만들어진 것은 분명히 다르다.
만들어진 것을 가지고 있으면 어쩐지 다른 사람과 내가 다르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동참도 되지 않는다. 내가 다른 것을 가지고 있으면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이 이상해 보인다. 내가 다른 것을 가지고 있으면 내 것과 틀리면 옳게 여겨지지 않는다.
이것이 모두 교회를 분열케 하는 것이다. 교회는 나쁜 것이 분열시키지 않는다. 그렇게 좋은 것이 분열시킨다. 아간의 물건은 다 좋은 것들이었다. 우리 생각엔 ‘양털을 왜 불지르나? 하나님 성전에 드리면 되지. 그 좋은 양들을 왜 없애는가? 하나님 성전의 제물로 드리면 되지’하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너의 마음이 악하다’고 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 이외에는 그것이 뭐라고 하더라도 버려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것은 하나밖에 없다. 우리를 사람으로 만드신 것, 그것 하나밖에 없다. 그 이외의 것은 다 우리가 만들었다. 흙으로 사람을 만들어놓은 것 이외에는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없다. 다 우리가 만들었다. 역사도, 교리도, 사랑도, 미움도, 시기도, 다툼도, 다 사람이 만들었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다 사람이 만들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가 되려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다 내려놓아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가 하나로 만나진다. 좋은 것이니까 놔두면 좋지 않겠나 생각하지만 그 좋은 것 때문에 하나가 안 된다. 결국은 내가 좋다는 것이 남에게 꼭 좋을 리 없다. 내가 된장국 좋아한다고 다 된장국을 좋아하겠는가? 내가 김치 좋아한다고 다른 사람들이 다 김치를 좋아하겠는가? 그렇지 않다.
내가 좋다고 하는 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설사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내가 주장할 수 없다. 내게는 그것이 없으면 안 될 사람이니까 주신 것이지 내가 잘 나서 주신 것이 아니다. 없어서 안 되니까 주신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자랑할 것이 못 된다. 그것은 내가 가지고 있다할지라도 주장할 것이 못 된다. 나는 그것 없이는 안 될 사람이니까 주신 것이고, 다른 사람은 그것이 없어도 될 사람이니까 안 주신 것이다.
나에게 하나님께서 어떤 은사를 주셨다면 난 그 은사 없이는 못 살 사람이니까 주신 것이다.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한 은사를 주셨다면 나는 그 은사 없이는 못 살 사람이니까 주신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자랑할 것이 전혀 없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서 받은 것, 그것 이외에는 우리를 하나되게 할 것이 없다. 그것 이외에 다른 것을 주장하게 되면 화평이 깨지게 된다. 그 하나 안에서만 예수님과 내가, 하나님과 내가, 형제와 내가 다 하나로 만나지게 될 것이다.
기도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잡다한 많은 것들을 높고 낮은 것들, 크고 작은 것들, 선하고 악한 것들, 이런 것들이 섞여 있고 뒤범벅이 되어있는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가 시기와 다툼 밖에 가질 수 없는 그런 인생들을 당신이 영원한 자리로 이끄시고 당신이 죽기까지 우리를 이끄셔서 우리가 이제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당신의 한 인격, 한 운명을 보게 해 주시고, 거기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발견하도록 인도하여 주셨음을 감사합니다.
당신 안에서 만유가 다 하나이고 당신 안에서 하나님과 사람이 통일되는 놀라운 축복의 자리로 저희를 인도하여주셨음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제는 더 이상 좋은 것도 없고, 더 이상 나쁜 것도 없고, 더 이상 옳은 것도 없고, 더 이상 그른 것도 없고 오직 영원한 것은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해주시기를 원합니다.
이 하나를 아는 안에서 우리가 화목을 이루고 화평을 이루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