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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에 대한 바른 해석(마 24장)
안 유 섭 목사 (아르케 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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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예언과 신약의 예언은 분명한 일관성이 존재한다. 구약의 수많은 예언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여호와의 두려운 날 즉 A.D. 70년에 이루어졌던 예루살렘의 멸망 심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신약은 구약 예언의 성취임과 동시에 구약 예언에 대하여 더 깊은 해석을 제공하고 있는 구체적인 예언이기도 하다.
‘신약’이라는 말은 ‘새 언약’으로 번역된 눅 22:20의 카이네 디아떼케(καινή διαθήκη)에서 나온 말이다. 이는 신약에서 처음 나타난 말이 아니라 구약의 렘 31:31에서 이미 예언되어진 ‘새 언약’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베리트 하다솨(ה תי)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다. ‘옛 언약’ 즉 ‘구약’이 아브라함 이후 선민이었던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이었다면, ‘새 언약’ 곧 ‘신약’은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구약이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파기된 반면 신약은 그리스도의 피(마 26:28)를 통하여 영원히 변치 않는 완전한 언약(히 7:22)이 되었다. 구약의 예언 중에서 ‘메시야의 오심’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성취되었으나,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심판하시겠다고 하신 ‘야곱의 환란의 날’은 신약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채 오히려 신약이 그 예언을 계승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에서 ‘여호와의 날(사 13:9)’ 또는 ‘야곱의 환란의 날(렘 30:7)’ 등으로 표현된 사건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심판’하시는 날로 묘사되고 있으며 구약에서는 그 날을 바로 ‘종말(애 4:18, 암 8:2)’로 보고있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 유행하는 잘못된 종말론의 오류를 지적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이므로 잘 기억해두어야 한다. 사람들은 종말이라고 하면 마지막에 있게 될 소위 ‘최후 정점의 종말’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종말에는 다중적(多重的) 의미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또한 이사야서를 비롯하여 모든 예언서는 ‘그 날’에 대하여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에게 가장 두려운 날이 될 것이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가장 기쁜 날이 될 것이라고 이중적으로 예언하고 있는 점에 주목하여야 한다. 이는 육적 이스라엘과 영적 이스라엘에 대하여 각각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오해하여 이스라엘 민족에게 이중적으로 예언하고 있는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게 될 때 잘못된 종말론이 발생하는 것이다.
잘못된 종말론은 종말의 징조(徵兆)에 대한 개념을 잘못 가지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종말과 주의 재림의 징조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부류는 역사적으로 이단들에게서 강력하게 나타났다. 이들은 추종하는 신도들에게 지상 천 년 왕국 같은 내세의 행복한 삶을 위하여 현세의 삶을 전적으로 포기하라고 하는 이념을 주입시켜서 재산과 모든 것을 바치게 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피폐하게 하는 대신 교회를 크게 키우고 세력을 쌓아 가는 무서운 마귀의 집단들이다. 세계적으로 세력을 떨치고 있는 여호와의 증인을 비롯하여 우리나라의 박태선이 만든 천 년 성이라고 하는 신앙촌이나 문선명의 통일교 집단 등이 대표적인 것들이며 이와 비슷한 아류는 수도 없이 많다고 한다.
이들의 특징은 현존하는 하나님 나라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 중에 존재하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성실한 삶에 대해서는 그다지 강조하지 않고 주로 오게 될 세상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이다. 따라서 징조를 해석함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도래할 세상의 임박성에 맞추는 작위적 조작 일색이 되어 버린다.
모든 것의 마지막 때 있게될 최후 정점에서의 주님의 재림과 심판은 불신자들에게는 경악의 사건이 될 것이나 성도들에게는 최상의 기쁜 날이 될 것이다. 그런데 재림과 심판에는 다중적 의미가 있다. 최후 정점의 재림과 심판이 아닌 또 다른 재림과 심판의 의미가 있다는 말이다.
<재림이란>
먼저 재림의 뜻부터 알아보기로 한다. 재림은 헬라어로는 파루시아(παρουσία)라고 하는데 ‘곁에’의 뜻인 전치사 파라(παρά)와 영어의 Be 동사와 같은 에이미(εἰμί)동사의 분사형으로서 존재라는 뜻의 우시아(οὐσία)가 합성된 말로서 ‘곁에 오심’ 또는 ‘곁에 임하심’이라는 뜻이다. 파루시아는 성경에서 ‘재림’이라는 말보다는 ‘강림’이라고 번역하였는데 고전 15:23 등에서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라고 할 때 ‘강림’을 가리키는 말이다.
한편 성경에서 ‘재림’에 대하여 표현하고 있는 것은 히 9:28의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는 말씀과 요 14:3에서 주님이 가서 우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신 후 다시 오셔서 우리를 영접하여 주님 있는 곳에 우리도 있게 하신다는 말씀에 나타난다. 즉 재림은 ‘두 번째 오심’이라고 하거나 ‘다시 오심’이라고 할 수 있으며 원 뜻대로 ‘강림’으로 생각해도 되는 것이다.
파루시아에는 삼중적 의미가 있다. 첫 째는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행 2:3-4)을 시작으로 성도의 마음에 오시는 주님의 임하심이다. 이는 주님께서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고 곧 다시 오신다고 하신 약속(요 14:18-19)대로 우리의 마음에 성령으로 다시 오신 것인데, 베드로 사도는 이를 구약에서 예언(욜 2:28-32)한 성령 강림의 성취(행 2-17-21)라고 가르쳐 주었다. 이는 또한 새 언약(렘 31:31, 눅 22:20)의 성취로 보는 신학적 견해도 다수 있다.
다음은 주님의 영적 강림이다. 이는 선민이었던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못하고 대신에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가 확고하게 세워지는 계기가 되는 심판의 날이다. 이는 A.D.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훼파됨과 동시에 이스라엘이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던 사건을 가리키는데 이에 대해서는 잠시 뒤에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겠다.
재림의 마지막 의미는 최후 정점의 최후 심판을 위한 재림으로서 이것이 바로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종말의 재림이다. 이는 신ּ불신간에 모든 자가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요 5:29)로 주님 앞에 나아와 심판 받는 것(마 25:31-46)을 말한다.
아무튼 주님의 재림은 성도가 가장 소망하여야 할 것 중에 하나이므로 교회가 시작된 이후 모든 시대에 사는 자들은 주님의 재림을 간절히 소망하여 왔다. 그러나 우리가 항상 주의할 것은 주님의 재림과 어떤 징조를 무리하게 결부시키는 행위이다. 주님의 임하심은 징조를 전혀 알 수도 없을 때 이루어지는 것(마 24:38-44)이지 어떤 징조라도 있다면 누구나 대비할 수 있을 것 아니겠는가? 따라서 마 24장과 눅 21장에서 징조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별도의 의미가 있음을 먼저 알아두자.
그렇다면 주님의 파루시아의 목적은 무엇인가? 파루시아의 목적은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의인에 대해서는 구원의 완성(히 9:28)을 이루어 주심’이며 ‘악인에 대해서는 영원한 형벌이 결정되는 순간’이다. 이는 곧 심판(영원한 분리)을 뜻한다.
살후 1:7-8에는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라고 함으로써 의인에게는 안식을 주시고 악인에게는 형벌을 주신다고 하는 심판이 묘사되어 있다.
<심판이란>
신ּ구약 성경에는 두 가지 종류의 심판을 말씀하고 있다. 하나는 구약에서 끝없이 예언되었던 ‘여호와의 두려운 날’이라고도 불리는 이스라엘의 멸망 심판으로서 A.D. 70 년 로마의 티투스 군단에 의한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으로써 이루어졌다. 이는 육적 이스라엘에 대하여는 심판이었지만 동시에 교회가 확고한 기반을 가지는 계기가 됨으로써 영적 이스라엘의 회복(롬 11:11)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다음은 모든 자의 단회적인 심판을 위하여 주님이 임하실 때 이루어지는 최후의 심판이다. 즉 지구상에 존재하던 모든 자가 신앙과 불신앙에 대하여 심판 받고 영생과 영벌의 최종 결정이 이루어지는 심판이다. 이때는 산 자를 포함해서 낙원과 음부에 있던 죽었던 자들이 각각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로 부활하여 심판 받기 위하여 나오게 된다.
그렇다면 심판의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심판하시게 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내시기 위함이다. 즉 무조건 구원하시고 무조건 처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신ּ불신자를 막론하고 선악간에 한 일에 대하여 자기 입으로 직고(롬 14:12)하게 하실 뿐 아니라 생명책과 다른 책에 써 있는 대로 구체적으로 확인(계 20:12)시키심으로 아무도 항변하지 못하게 하신 후에 비로소 영생과 지옥 불못의 형벌에 처하시는 것이 바로 심판인 것이다.
심판주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이는 성부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모든 심판권을 주신 것(요 5:22)이다. 주님은 요 9:39에서 심판을 하러 오셨다고 하셨으며 눅 12:49에서도 불(=심판)을 던지러 왔다고 하셨다. 주님이 성육신하신 목적은 물론 세상의 구원(요 3:17, 요 12:47)이지만 세상의 심판도 그 목적에 포함되는 것이다.
<종말(마 24장)의 성경적 해석>
이제 흔히 주님의 최후의 재림의 징조로 알고 있는 마 24장이 과연 종말 재림을 가르치신 것이지 아니면 다른 뜻이 있는 것인지를 살펴볼 때가 되었다. 마 24장은 성전의 아름다움(눅 21:5)에 감탄한 제자들이 주님께 성전 건물을 가리키는 말로 시작된다. 이때 주님께서는 자신들의 생각에 동조해주기를 기대하였던 제자들에게 충격적인 예언의 말씀(2절)을 하신다.
즉 너희들은 지금 이 성전이 아름답다고 감탄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이 성전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는 것이다. 헤롯 성전은 46 년 동안 지어진 성전(요 2:20)으로서 솔로몬이 7 년에 걸쳐서 지은 최초의 성전의 규모나 장식 면에서 능가했을 것이므로 그 웅장함과 화려함이 대단하였을 것이다. 그러한 성전이 하루아침에 철저하게 무너지리라는 말씀인데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헤롯 성전은 주님께서 그 사역을 마치시기 전까지는 분명 하나님께 제사와 경배를 드리는 하나님의 집(요 2:16)이었으며 거룩한 곳이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주님께서 대속의 죽으심을 통하여 자신의 몸으로써 단번에 영원한 제사(히 10:12)를 드리신 후에는 그 성전은 더 이상 거룩한 장소가 아니라 가증스러운 장소가 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주님의 영원한 제사 후에는 다시는 동물의 희생 제사가 필요없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메시야로 인정치 않는 유대인들은 헤롯 성전에서 계속해서 동물의 희생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인류를 구속하시는 구원의 사역을 이루고자 하실 때 아들을 거부하고 오히려 죽이기까지 했을 뿐 아니라 주님이 구원의 사역을 완성하시고 승천하신 후에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계속해서 성전에서 제사를 드림으로써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하는 가증스러운 행위를 하였다.
이는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할 하나님의 뜻을 막음으로써 결국은 복음의 장애물밖에는 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예루살렘 성전은 구약의 모든 예언의 말씀대로 A.D. 70년에 완전히 훼파되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야 말게 된 것이다.
주님의 예언을 들은 제자들은 언제 이런 일(성전이 훼파됨)이 일어나겠으며 주님의 파루시아와 세상 끝에 무슨 징조가 있을 것인지(3절)를 주님께 묻는다. 이들의 질문을 분석해 보면 구약에서 예언되어진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개념에는 ‘심판’과 ‘종말’과 ‘주님의 강림하심’의 요소가 복합적으로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이스라엘 멸망 심판이 곧 마지막 때이며 주님께서는 그 때 다시 오실 것이라는 생각들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마 24장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종말의 징조들은 곧 A.D. 70년에 있게될 이스라엘 멸망 심판의 징조라는 뜻이 되는 것이다. 물론 예언에는 다중적 의미가 있기 때문에 마 24장의 징조가 세상의 종말을 뜻하는 예언적 요소가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일차적으로는 이스라엘의 멸망 전에 나타날 징조라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차례로 살펴보도록 하자.
4-5절에서 거짓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씀하신 예언은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를 기록한 시점인 A.D. 70년이 임박한 시점에서 이루어졌다. 즉 요일 2:18에서 요한은 이미 적그리스도가 많이 일어났으므로 그 당시가 주님이 말씀하신 마지막 때인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6-10절에 대하여 기독교 역사학자 요세푸스는 당시의 상황을 전승대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스라엘의 멸망 직전에 로마의 정복 전쟁들이 끊이지 않았고 도처에는 기근과 지진이 계속 발생하였기 때문에 본토에 거류하는 유대인뿐 아니라 각지에 흩어져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도 격심한 고통을 당했다고 한다.
11-13절은 4-5절의 말씀을 반복하신 것으로 볼 수 있어서 별 해석이 필요하지 않다.
14절에서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라고 하신 말씀은 오해할 경우 많은 논란이 있을 수 있는 말씀이다. 혹자들은 이 말씀을 오늘날 선교에 대입하여 온 세상에 기독교가 전파되었다고는 하지만 지구 전체로 볼 때는 아직도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오지(奧地)가 있으므로 다른 징조들은 다 나타났지만 이 예언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아서 주님이 아직 오시지 않는 것이며 만일 지구 전역에 빠짐없이 복음이 전파되면 그 때야 비로소 주님이 재림하실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이는 징조를 억지로 해석하려는 편견과 함께 ‘모든 민족’과 ‘온 세상’의 정확한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나온 발상이다. 모든 민족이라고 할 때의 ‘민족’은 헬라어로 에뜨노스 (ἔθνος)다. 이는 이방 민족과 유대 민족 모두에게 사용되는 말인데 여기서는 유대 민족을 뜻하는 것이다. 또한 ‘온 세상’은 유대 민족의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증거로는 롬 1:8의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라는 말씀에서 이미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고 있다고 하였다. 한편 골 1:23에서는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군이 되었노라”라고 하여 복음이 이미 천하 만민에게 전파되었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온 세상과 천하 만민이라 함은 물론 디아스포라의 유대 민족을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천하 만민에게 복음이 전파된 일은 제자들이 성경을 기록할 당시에 이미 이루어진 일이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의 일을 두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음 15절에서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을 해석하려면 단 11:31의 “군대는 그의 편에 서서 성소 곧 견고한 곳을 더럽히며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케 하는 미운 물건을 세울 것이며”라는 말씀과 눅 21:20의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라고 하신 말씀을 참고하여야 한다.
단 11:31의 예언은 B.C. 2세기경 수리아의 안티오쿠스 4세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점령당했을 때 일차적으로 이루어졌었다. 따라서 주님은 이 사건을 상기시키면서 수리아의 군대 보다 훨씬 강력한 어떤 군대에 의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하는 비슷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고 예언하신 것이다. 그것은 바로 A.D. 70년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로마의 티투스 군단을 말하는 것이다.
계속되는 16-22절의 말씀을 보더라도 그러한 상황은 오늘날 현대 문명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도저히 적용할 수 없는 고대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즉 밭에서 일을 하고 있다가 환난을 당할 것이라든지, 환난을 피해서 산으로 도망한다든지, 또는 안식일을 지키는 일이라든지 하는 모든 경고는 당시의 풍습에 걸맞는 일임이 확실하다. 현대 문명이 완전히 파괴되지 않고서야 그러한 일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닥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16절에서 산으로 피하라고 하는 경고의 말씀을 깊이 새기고 있던 당시의 기독교도인 유대인들은 로마의 공격 직전에 모두 ‘펠라’라고 하는 산세가 험한 지역으로 피신하여 몰살을 면할 수 있었는데, 이야말로 교회를 구원하셔서 모든 이방에 복음을 전파하게 하시려는 하나님 아버지의 각별하신 배려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22절에서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셨다고 하신 것도 교회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23-28절은 다시 적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에 대하여 경고하신다. 여기서 유의할 말씀은 27절의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라는 말씀인데, 주님의 강림(Advent)은 부분적이거나 지역적으로 국한해서 이루어지지 않고 일시에 완전하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뜻이다.
다음은 29-31절의 말씀인데 이를 해석함에 있어서는 성경의 표현법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고, 표현법 중에서도 상징(Symbol)에 대한 이해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우선 29절의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라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할 때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들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된다.
즉 과학적인 상식으로 보더라도 지구보다 큰 별들이 수없이 많으므로 지구상에 별이 떨어질 장소도 없을뿐더러 만일 별이 단 한 개라도 지구와 부딪힌다면 지구는 대폭발을 일으키며 완전히 가루가 되고 말 것이다. 그 이후에는 지구가 없어졌는데 무슨 더 이상의 사건이 벌어지겠는가?
설령 별이 떨어진다고 한 것을 우주진(Star Dust)으로 간주한다고 하더라도 해가 어두워지면 지구 표면은 서서히 냉각기로 들어가게 되며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밤만 계속될 것이다. 또한 모든 만물은 서서히 얼어붙기 시작할 뿐 아니라 자연의 모든 생물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아비규환 속에서 먹이를 구하지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처참하게 죽어갈 것이다.
따라서 29절의 말씀의 뜻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는 무모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잘못된 종말론에 근거한 이론들은 이를 터무니없이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29절은 한마디로 상징적 표현이다. ‘해’와 ‘달’과 ‘별’은 사 13:10을 비롯한 구약의 많은 예언에서 ‘심판’ 때마다 등장하는 상징어(Symbolic Expression)이다.
눅 21:22에서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의 날이라고 한 것은 바로 구약의 모든 예언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러한 상징들이 의미하는 것은 심판의 엄위에 대하여 인간이 느끼는 두려움을 표현한 것이다.
다음 30절에 나타난 단어들 역시 상징적 표현으로 해석해야 뜻을 알 수 있는데 ‘하늘’이라 함은 ‘자연계의 하늘’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영계의 하늘’을 뜻하는 것이다. 땅의 모든 족속 역시 지구상의 모든 자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 ‘유대 족속’을 뜻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무너지는 심판의 날 당연히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주님이 구름타고 오신다는 표현에서도 ‘구름’은 수증기로 이루어진 ‘자연계의 구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출 16:10, 왕상 8:10)’를 상징하는 표현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행 1:9-11의 말씀을 보면 주님이 승천하심을 지켜본 제자들이 계속해서 하늘을 쳐다보고 있자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책망하기를 어찌하여 주님이 자연계의 하늘로 올라가신 것으로 생각하여 위를 쳐다보고 있느냐고 하면서 주님께서는 물질 공간인 하늘을 서서히 올라가시다가 저 높은 하늘에 어딘가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순식간에 물질을 초월하여 영계의 하늘로 올라가셨음을 가르친다.
이러한 ‘구름’의 영적 의미를 모르는 자들은 주님이 어느 때에 자연계의 구름 위에 계실 것이라느니 하면서 불교나 도교 등에나 나올 법한 해괴한 신비주의를 조장하여 온 것이다. 자연계 구름은 수증기가 모여서 축축하고 습한 곳일 뿐 전혀 신비로운 데가 아니다. 지금은 비행기가 구름 위로 다니는데 주님이 오셔서 구름 위에 머물러 계시겠는가?
주님의 임재를 본다고 한 표현 역시 영적 해석을 요하는데 여기서 본다고 하는 헬라어 동사는 호라오(ὁράω)로서 눈으로 물질을 보는 것에도 사용하지만 마음의 눈으로 본다고 하는 표현으로 더 많이 사용되는 단어이다. 이는 마 26:64에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라고 대제사장에게 말씀하실 때 똑같이 사용된 말이다.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면 주님을 죽이겠다고 앞장서는 대제사장 같은 자가 하나님을 실제로 본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여기서 본다고 한 것은 주님의 심판의 날에 주님의 심판하시는 행위를 통해서 마음의 눈으로 성부 하나님과 우편에 계신 주님의 권세를 보리라는 뜻이다.
행 7:55-56의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라는 말씀에서도 스데반이 돌로 맞아 죽기 전에 성령의 감동케 하심에 따라 마음의 눈으로 성부 하나님과 주님을 보고 감격하여 외친 것을 알 수 있다.
31절의 ‘큰 나팔 소리’ 역시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상징적 표현이며 ‘그 택하신 자들을 모은다’고 하신 것은 심판 중에서도 주님의 소유된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는 구원해주신다고 하는 말씀인 것이다.
29-31절 말씀을 이상에서 살펴본 바처럼 영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이를 만일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미래에 있게될 예언으로 본다고 하면 하늘의 징조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천사들이 큰 나팔을 불어서 그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주님께서 구름을 타고 서서히 강림하시는 것을 땅의 모든 자들이 보고 통곡을 하여야 한다.
이는 둥그런 지구에서 일정 지점으로 내려오시는 주님을 일시에 보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있을 수 없는 가설이다. 각 족속의 대표가 약속을 하고 한 자리에 모여서 볼 리도 만무한데다 주님이 언제 오시는 지는 아무도 알 수 없으므로 약속을 하고 미리 대기할 수도 없는 것이다.
계속해서 32-33절을 보면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는 말씀이 나온다. 여기서 무화과나무는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를 가리킨다. 즉 교회의 세력이 어느 정도 커져가는 것을 보면 그 때가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무화과나무를 이스라엘 국가로 보고서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의 독립으로 무화과나무가 연해져서 여름이 가까워졌다고 하면서 주님의 재림의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주장하나 벌써 반세기라는 시간이 흐름으로 해서 그 허황됨은 이미 드러났으며, 이를 근거로 주님의 재림의 시기를 계산해 내는 이단들이 속출하였다는 사실도 있었다.
한편 ‘이 모든 일을 보거든’이라는 말씀은 앞에서 예언하신 모든 징조를 총칭하는 것이지 무화과나무의 비유만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아야 하겠다.
다음의 34절 말씀부터는 다시 상징적으로 해석할 수 없는 직설적인(Indicative) 표현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즉 34절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라는 말씀은 분명히 당시의 그 세대가 지나기 전에 주의 재림과 심판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주님의 언명이다.
이는 아무리 살펴보아도 비유적으로나 영적으로 해석할 상징적 표현이 나타나지 않을 뿐 아니라 영적으로 해석할 이유도 전혀 없는 구절이다. 이야말로 완전히 문자적으로 또는 여자적(如字的)으로 해석해야만 뜻이 통한다.
성경의 세대 개념에서 한 세대를 통상 40 년으로 볼 때 주님이 예언하시던 시점은 약간의 오차가 있기는 하지만 대략 A.D. 30 년이 약간 지난 시기로 보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은 이로부터 한 세대가 지나기 전인 A.D. 70 년에 이루어졌으므로 주님은 정확하게 그 시기를 말씀해 주신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로 계 1:7에서는 주님을 찌른 자들도 주님이 구름타고 오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하였고 마 16:28에서는 여기 섰는 자들 중에서 죽기 전에 주님이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보게 될 자들이 있으리라고 하였다. 이는 모두 당시의 한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루어진다고 하신 말씀과 일맥상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한 것은 계속해서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던 문자주의자들이 여기서는 갑자기 영적으로 해석을 시도하거나 아니면 한 세대를 해석하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32절의 무화과나무와 결부시키기도 한다는 것이다.
한편 35절에서 주님의 말씀이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신 것은 예언의 정확성을 확인시키신 말씀이다.
이제까지 마 24장의 종말의 징조를 살펴보았는데 35절 이상의 징조들을 현재의 우리들이 사는 세상에 무리하게 적용함으로써 혹세무민하기보다는 앞에서 자세하게 살펴본 것처럼 이미 이루어진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교훈을 찾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살후 2:2에서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동심하지 말라고 하였고 마 24:44과 살전 5:2에서는 분명히 주님이 오시는 것을 인간이 예측할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마 24장의 징조는 현재의 우리에게만 특별히 해당되는 징조가 아니라 기독교 이천 년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어느 때에도 있어온 징조라는 말씀이다.
이로 볼 때 마 24장의 마지막 36-51절의 말씀이야말로 이스라엘 심판 뿐 아니라 현재에도 적용할 말씀으로 받아야 한다. 즉 주님의 재림은 어떤 징조와도 관계없이 그 누구도 전혀 예측할 수 없을 때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깨어있어야 하며, 주님의 임하시는 그 순간까지 우리는 현존하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을 성실히 살아감으로써 하나님 아버지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