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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영 교수의 환경이야기
2. 내 고향 행주나루와 대운하 반대운동
초록교육연대 상임대표, 호서대 교육대학원장 이기영
나의 살던 고향은 살구 꽃피는 한강가 작은 어촌이었다. 나는 한강 하류 행주(杏州)나루에서 한 어부의 6남매 중 셋째 장남으로 태어났다. 우리 동네는 한국에서 최초로 건립된 6개 성당중 하나인 100년이 넘은 행주성당이 덕양산 끝자락에 자리잡은 교우촌이었다. 둥근 지붕이 뚫린 네모난 초가였던 우리 집은 성당 바로 옆에 위치해 한강을 향해 있었다. 북서쪽으로 흐르는 한강이 훤히 내려다보여 사시사철 변하는 강의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다. 성당 안에는 오래된 프랑스산 풍금이 있어서 틈만 나면 건반을 눌러댔는데 제대로 배워서 악보대로 화음을 넣어가며 치지는 못했지만 웬만큼 아는 노래는 한손가락으로 가락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성당 앞 마당 모퉁이에는 꽤 큰 향나무가 있었는데 아이들이 하도 원숭이처럼 오르내려서 나무껍질이 죄다 반들반들해졌다. 초등생 때에는 향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서 크레용으로 강 건너 방화산을 그리면서 연습을 해 미술대회에 나가서 상장을 타와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렸다. 중학생이 되어서부터는 친구에게서 줄도 없는 통기타를 30원에 사서 혼자 노래책을 보며 기타치는 법을 배웠다. 그때 처음으로 배운 노래가 양희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아침이슬’로 지금도 나의 애창곡리스트의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늦여름 오후에 만발한 해당화가 특유의 향기를 풍기는 우리 집 문지방에 누이와 함께 걸터앉아 기타치고 노래하다보면 강 전체가 아름다운 붉은 노을에 물들어갔다. 검붉은 강물줄기가 서서히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하늘에서 별이 쏟아져 내려 보석처럼 반짝이는 한강의 신비한 야경을 바라보며 우리는 아름다운 한 여름 밤의 추억을 만들었다.
고향인 한강 행주나루의 옛 추억
행주는 예로부터 한강에서도 덕양산의 기암 절벽인 이마모태를 휘돌아가는 빠른 물살이 근처 이곳저곳에 모래섬을 만들어 경치가 빼어난 곳으로 유명했다. 난 덕양산에 꿩이나 산토끼를 잡으러 다니고 강가에서 미역을 감기도 하며 강과 산을 놀이터 삼아 자랐다. 농사를 지으시면서 동시에 고기잡는 어부이기도 하셨던 아버지는 잉어나 메기 등 텃물고기보다는 봄에 바다에서 알을 낳으러 올라오는 황복과 웅어, 여름에는 참게를 잡아 한 밑천해서 우리의 등록금을 보태셨다. 여름엔 아버지와 함께 배를 타고 일산 입구에 있었던 버드나무가 무성했던 방말섬에 가무락 조개를 잡으러 갔다. 가무스름하고 둥그런 조개껍질에 평행하게 줄무늬가 진 이 조개는 모시조개 또는 재첩이라고 불리는데 조개잡이 긁개로 모래사장을 긁으면 몇 푸대 씩 잡아 정말 배가 가라앉은 정도로 잔뜩 실고 돌아와 국거리가 되었다.
날씨가 좋은 날에 어머님은 한강 돌방구지에서 빨래하시고 난 근처에서 모래무지 낚시질을 하거나 미역을 감았다. 지금도 여든이 넘어 치매기가 있으신 어머님은 가끔 눈물을 그렁거리시면서 낙건정 밑 행주 돌방구지에서 빨래할 때 한강이 얼마나 맑고 아름다웠나를 되뇌어 말씀하신다.
직강하천으로 강변을 모두 둔치로 만들어 폭이 매우 넓은 지금 모습과는 전혀 달리 어린시절 한강은 구불구불하고 강의 폭도 곳에 따라 넓기도 하고 좁기도 했다. 깨끗한 물이 흘러 곳곳에 모래섬이 있었고 가장자리도 은빛 모래로 덮여있어 그야말로 물 반 모래 반이었다. 이 때문에 항상 강변 얕은 물에는 모래무지 들이 헤엄치고 있었다. 남자아이들은 낚시로 잡은 모래무지를 강물을 퍼 담은 양은 냄비에 넣고 솔피를 모아 불을 때 매운탕인 털래기를 해먹었다. 강전체가 삼 사십쎈티메터 두께로 꽁꽁 얼어붙은 겨울엔 썰매를 타거나 곳곳에 뚫린 방구뎅이에서 짜가사리나 쏘가리 낚시를 했다. 강물이 풀리면서 봄이 와 황복이 나면 아버님은 황복의 노란 뱃가죽으로 작은 북을 만들어 주셨다. 난 북을 치면서 누이와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노래를 부르면서 동네를 몇 바퀴나 돌았다. 초여름이 되면 바다에서 웅어가 갈대밭에 알을 낳으러 올라오는데 고소하고 담백해 뼈째 먹는 고급횟감으로 행주의 명물음식으로 곱혔다. 한강은 나에게 싱그러운 생명들과 함께 살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배우게 허락해준 최고의 선생님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한강의 원래모습은 한강의 기적과 함께 이루어진 급속한 강의 개발과 함께 대부분 사라져 버렸다. 특히 웅어는 수백 년을 내려온 행주를 대표하는 지역 문화의 상징이었는데 이젠 이곳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조차 잊혀져가고 있다. 얼마 전 평소에 존경해온 한 어른을 모시고 아직 자연이 살아있는 임진강에서 웅어를 잡아다 파는 집 근처 한 음식점엘 갔다. 그분이 웅어회의 고소한 맛에 반해 감탄사를 연발하시는 동안 난 지금은 잊혀져버린 행주의 웅어문화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드렸다. 웅어는 조선시대엔 임금님 진상품으로 수랏상에 올랐던 최고급 생선으로 행주에는 웅어를 잡는 관청인 사옹원 소속의 위어소와 신선하게 저장하기 위해 석빙고까지 있었다(성호사설 제15권, 人事門). 또한 행주에는 웅어를 먹고 덕양산과 어울어진 강의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기 위해 서울에 사는 많은 세도가들이 강가의 덕양산 곳곳에 낙건정, 귀래정같은 정자를 세웠다고 한다. 특히 커다란 기암괴석이 강을 향해 돌출한 돌방구지는 행주 최고의 절경을 만들어 주었지만 강변도로와 양수장이 생기면서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웅어는 금강하구나 포항 등 우리나라 강하구 여러 곳에서 나오는 어종이지만, 봄철에 산란하러 한강으로 올라온 놈들이 가장 맛있다고 한다. 살이 연하면서도 고소한데 연어와 같은 회귀어로 4, 5월에 바다에서 한강의 하류인 행주로 올라와 갈대밭에 산란한다. 사투리로 우어라고도 불리며 옛날에는 위어(葦魚)라고도 했는데, 갈대밭에 알을 낳는 습성 때문에 갈대 위자를 썼다. 은백색 몸체가 길고 얇은 편인데 주둥이가 짧고 양쪽으로 둥글게 돌출해있다. 옆에서 보면 칼모양으로 생겼고 꼬리 쪽으로 갈수록 가늘어지는 특징이 있고 보통 30cm에서 큰 놈은 길이가 40cm나 되었다. 웅어회는 기름기가 많아 고소하면서도 담백하다는 점이 특징이다. 또한 성질이 급해서 그물에 걸리는 즉시 죽어버리기 때문에 신선도를 잘 유지해야 한다. 비늘이 쉽게 떨어지고 뼈가 약해 회로 먹을 경우 뼈째 먹을 수 있다. 회를 뜨고 남은 머리도 칼등으로 곱게 다져 동그랑땡처럼 튀겨먹었다. 비늘을 제거한 웅어를 잘 다듬어 도막을 낸 다음에 풋고추와 표고버섯을 넣어 고추장과 고춧가루 그리고 갖은 양념을 넣어 끊여 감정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웅어는 보리가 패일 때 쯤에 맛이 가장 좋고 6월이 지나면 가시가 세져서 먹을 수 없게 된다.
웅어는 궁중조달 물품으로서 뿐만 아니고 철에 따라서는 제사상에도 오르는 중요한 품목이었다(澤堂別集제16권, 雜著, 祭饌).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위어소는 5개 읍에 3백여 호가 소속되어 있었고, 어부들은 웅어를 잡아 진상하는 대신 조세와 부역을 면제받았다. 웅어진상 때문에 행주 어민들의 고생도 많았겠지만 봄이 오는 강에서 웅어잡이 하는 모습은 묵객의 눈에는 멋진 광경이리라. 겸재 정선이 그린 행호관어는 한양진경 중 행주산성부근의 웅어와 하돈(황복어)잡이 모습을 23.0×29.0㎝ 크기의 비단에 그린 것으로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1740년 12월 11일 겸재 정선은 조선조 영조의 명을 받아 양천현령(陽川縣令)으로 임명된다. 고양시 행주산성 한강 건너편, 현재의 강서구 가양동에 읍치(邑治)가 있었다. 영조는 당대 최고의 화가인 겸재 정선을 이곳으로 보내 한강 부근의 아름다운 산수를 화폭에 담도록 했다. 겸재 정선은 행호관어를 비롯한 총 19폭의 그림을 그렸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경교명승첩(京校名勝帖)이다. 이 명승첩의 총 19폭의 그림 중에는 목멱(남산)을 비롯하여, 한강과 서울 인근의 아름다운 모습이 그대로 남겨져 한국회화사 및 역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겸재의 친구 사천 이병연은 행호관어 그림에 쓴 글에서 이렇게 읊고 있다(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 ‘겸재의 한양진경’ 303쪽, 동아일보사, 2006).
春晩河豚羹 夏初葦魚膾 桃花作漲來 網逸杏澔外
늦은 봄에는 황복국이요 초여름에는 웅어회라
복숭아꽃이 가득 떠내려 오니 그물이 행호밖으로 달아나네
넓은 행주 강에서 배들이 떼를 지어 웅어를 잡으러 그물을 좁혀나가는 듯한 이 그림은 양천현아 뒷산인 성산에 올라서서 서북쪽으로 행호를 내려다보며 전개되는 고기잡이 모습을 잡아내 그렸다. 현재 행주외동 일대의 강변경치가 한눈에 들어온다. 어린시절 나는 고기잡이 나가셨던 아버지가 탄 배가 돌아오면 강변에서 그물에 걸린 웅어를 뜯어내는 일을 도왔고 비싼 값에 팔린 웅어는 우리의 등록금이 되었다. 금모래가 반짝이는 모래사장에서 은빛 웅어를 대바구니에 담던 기억이 지금도 선연하다.
그러나 1989년 3년여의 독일 유학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와 보니 예전의 아름다웠던 한강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그 사이에 일산입구인 신평리 근처에 신곡 수중보가 생겨 강을 막아버려 웅어나 황복은 바다에서 올라오지도 못하고 산란장소인 모래와 갈대숲도 물에 잠겨버렸다. 어린시절 가무락 조개를 잡으러 드나들던 모래섬인 방말섬은 아예 없어졌고 모래가 없는 행주 한강변엔 모래무지도 사라졌다. 보가 자연스러운 물의 흐름을 막아 곳곳에 있었던 모래섬이 없어지고 강가의 모래도 다 물에 잠겨버렸기 때문이다. 강물도 더 이상 제대로 흐르지 못해 오염이 심한 3급수로 전락해 수영도 할 수 없이 그저 바라보기만 해야 할 큰 저수조가 되어버렸다. 아버지는 배를 헐값에 팔아버리시고 농사로 전업하셨다.
금수강산을 도륙질하는 4대강 사업
임금님의 진상품이 될 정도로 미식가들의 사랑을 받았던 행주의 웅어는 이제 대부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조차 사라져버렸다. 게다가 수도권 한강의 강변을 대부분 콘크리트옹벽으로 쌓아 둔치를 만들거나 아파트 단지로 개발해 모래섬도 여울도 대부분 사라졌다. 우리 한민족의 문화와 역사와 생명이 흐르던 한강이 다리를 놓고 보를 쌓거나 둔치개발로 시멘트구조물로 덮히면서 직강화되고 아예 막혀버리면서 자연하천의 모습을 완전히 잃게 된 것이다.
그런데 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한반도 대운하를 추진하려다 국민의 반대에 부딪히자 4대강 살리기란 미명으로 이름만 바꿔 강압적으로 밀어붙이고 있어 금수강산전체가 공멸의 위기에 처해있다. 사업계획대로 높이 6~7m의 보를 쌓으면 대한민국의 4대강들은 모두 팔당댐 정도 높이의 거대한 저수지로 바뀐다. 더 이상 흐르는 강이 아니므로 BOD를 기준으로 하는 하천법의 적용을 받지 않고 호소법에 따라 수질기준이 COD로 바뀌므로 수질이 더 나빠져도 제재를 받지 못하게 된다. 2011년 대한민국에서 강이 사라지는 것이다.
얼마 전 기차를 타고 가다가 우연히 한 아랍인 관광객과 동석했는데 자기 나라는 사막천지인데 우리나라의 산과 강들은 낙원처럼 아름답고 가는 곳마다 허브 냄새가 난다며 부러워했다. 해상무역이 발달했던 고려시대에는 아랍인들이 아름다운 금수강산에 반해 가족과 함께 집단으로 귀화해 개성에서 멀지 않은 한강근처에 ‘예궁’이란 이슬람 사원을 짓고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 이들이 바로 현재 덕수 장씨의 조상이다.
얼마 전 일본에서는 1950년대 초부터 정부에 의해 추진되어 공사비의 70%나 투입된 얀바 댐공사가 중지되었다. 하나의 댐을 가지고도 수십 년간 자연파괴를 고민하며 공사를 추진하는데 우리나라는 무려 16개의 팔당댐 수준의 보를 만들어 대한민국의 큰 강을 죄다 없애버리는 세계 역사상 초유의 거대국토파괴 공사를 단 2년 만에 끝내려는 것이다. 더구나 강폭이 좁고 얕은 낙동강의 경우 강 전체가 거대한 호수로 변하면서 수량이 현재보다 20~30배나 늘어나 주면의 지하수면이 높아져 습지가 늘면서 기후는 물론 주변생태계가 급변하게 된다. 또한 태풍이 와서 폭우가 내리면 갑자기 그 많은 물의 처리가 어려워 어떤 끔찍한 재앙을 부를지 모르고 운하용 수심유지를 위해 연중 고인 물이 오염되면서 식수원으로서의 기능이 상실돼 식수 대란도 예상된다. 장마 후 쌓인 토사 때문에 매년 거대한 규모의 준설작업이 불가피해 엄청난 국고의 낭비를 초래하는 경제성 없는 사업이다. MB가 찬탄하며 벤치마킹한 독일 MD운하(마인강~도나우강)는 운하가 지나가는 바이에른 지역 주민들이 적극 찬성해 완공됐지만 지금은 관광수입은 커녕 물동량도 저조해 지역의 애물단지로 전락해 다시 자연하천으로 복원을 추진하고 있다. 난 정부로부터 사찰을 당하거나 연구비가 끊길지도 모르는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각종 매체에 대운하를 반대하는 많은 기고문들을 썼고 개인적으로도 큰 지출을 감수하며 대운하 반대음반인 ‘한강은 흐른다’를 제작ㆍ출반했다.
중국고대신화인 ‘산해경(山海經)’에는 고대한국문화와 관련된 내용들 중에서도 특히 동이(東夷)계 문화정보를 많이 담고 있다. “동해(東海)의 안쪽, 북해(北海)의 모퉁이에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는데 하늘이 그 사람들을 길렀고 물가에 살며 남을 아끼고 사랑한다”는 내용인데, 여기서 ‘동해’는 우리나라의 서해를, ‘북해’는 발해(渤海)를 의미한다. 산해경에서의 표현처럼 우리민족은 자연철학의 가치가 바탕이 된 자연스러운 삶을 이어온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었다. ‘한강은 흐른다’ 노래는 이러한 우리 민족의 가치를 노래로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있다.
한강은 흐른다(작시 오세영)
“한강은 흐른다. 산과 들 사이 길로 복숭아 진달래 꽃망울을 터뜨리며 오늘도 무지개로 소리없이 흐른다. 한강은 흐른다 논과 밭 사이 길로 청보리 무배추 파랗게 물들이며 오늘도 비단길로 말없이 흐른다. 눈보라 휘날린들 멈출 수 있으랴 폭풍우 몰아친들 돌아갈 수 있으랴 흐르고 흘러서 영원이리니 대양에 이르러야 우리인 것을. 한강은 흐른다 마을과 도시를 지나 저마다 생의 등불 환하게 밝히면서 오늘도 은하수로 묵묵히 흐른다.”(www.singreen.com 에서 청취가능)
수천만 년을 한반도의 대동맥으로 흐르며 우리민족의 생명과 문화를 지켜온 삼천리 금수강산의 목숨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국토를 훼손시키는 4대강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MB정권과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은 우리 금수강산을 토건회사와 부동산투기꾼들에게 팔아먹은 매국노로 영원히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4대강 사업은 운하의 꿈을 접고 연어가 돌아온 울산의 태화강처럼 기존에 설치된 보마저 없애고 옹벽도 뒤로 물러나게 만들어야 진정한 강 살리기 사업이 될 수 있다. 울산시는 태화강이 맑아지면서 바다에서 연어가 돌아오자 전국적인 연어 축제를 열어 지역경제에도 이바지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내 고향 행주나루의 한강도 신곡수중보를 철거해 웅어가 다시 돌아와 예전처럼 5월이면 다시 웅어축제를 열수 있게 되기를 학수고대해본다.
겸재의 행호관어도
아름다웠던 행주나루의 돌방구지와 낙건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