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시
정 순 란
나에게 특별한 긴 장마
지루한 긴 긴 장마와
연이은 태풍의 영향으로
농작물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닌데
올해 고추 농사가 시원치 않아서 큰일이다
남편의 수고로 빨갛게 주렁주렁 달린 고추가
긴 장마로 인해 말리는 게 제일 큰 난관이었다
건조기도 없이 한달 넘게
장마기간 동안 전기장판위에
신문지 깔고 말렸으니,
어쩌다 볕이 좋은 날이면
태양초 고추 말리려고
쉴 새 없이 뒤척여주는데
일어날 때마다 곡소리가(에~고,에~고)절로 나온다
“삼 년 가뭄에는 살아도 석 달 장마에는 못산다”
라는 속담이 실감난다.
집안 곳곳 벽면 곰팡이가 물감처럼 번지어
시골의 슬픔은 나를 아프게 했다
좀처럼 쉽게 끝나지 않을 모든 것들
밭가 외등처럼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우울한 독백을 쏟아 내고 만다
감염증 확산 등으로
미래를 전망하는 건 어렵지만
어느 것 하나 확신할 수 없는
일상을 살아가는 요즈음은 마치
덫에서 허둥대듯 살아가는 느낌이다
엄마의 여름휴가
창원에 살고 있는 동생이
여름휴가 온다는 소식에
엄마는 열흘 전부터 들떠 계셨다
막내라서 유달리 더 애틋해 하신걸보니
부모라는 책임감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적당한 거리에서 엄마와 떨어져 살다보니
서로 바빠서 못 보는 날이 많다
코로나 19사태로 노인회관도 못 다니시고
벌써 6개월째 집콕하고 계시니 얼마나
삶이 갑갑하실까? 가끔은 측은지심 든다
올여름 휴가는 무조건 엄마랑 보내기로 했다
자가용타고 드라이브로 좋은 기억만 떠올리면서
맛 집만 찾아, 먹고 즐기다보니
하루가 산 넘어 흐르고 있었다
주름진 엄마의 하루도 꽃처럼 활짝 피었고
산 같은 고비도 수없이 넘긴 세월
지금도 분주한 삶을 살고 있는 엄마는
나의 젊은 날 보다 더 부지런하다
오라버님이 살고 있는
하맹방의 늦은 9시
노래방 속에서 엄마의 18번(개나리 처녀)노래가
노랗게 물든다, 막냇동생은 아픈 다리로 엄마의
손목을 부여잡고 빙글빙글 지구처럼 돌며 가무를 즐긴다
타임머신을 탄 엄마는 흥에 겨워서
쿵작 노랫소리에 몸을 흔든다
불빛 같았던 자식들 어느덧 흰머리 보이고
밤은 또 다른 풍경화 되면서
천년만년 엄마의 비뚤어진 미소를 사랑하리라
아카시아꽃 산책길
눈송이처럼 흩날리는
아카시아 꽃이 초록물결 이룬
보리밭 위로 향기를 풀어놓는다
들에는 앵두나무 산에는 찔레꽃
나비가 예쁜 날개 접은 채 졸고
잉잉대는 3色의 꽃들
싱그럽고 풋풋한 생기
시골의 삶을 누린다
사람의 냄새가 살가운 마을
들꽃과 바람이 친구되어
까르르 웃음꽃 피우고
산책길에 들뜬 나는
밭둑 길 따라
옷도 마음도 젖어 돌아오는 길
아카시아 향기가
내 사랑을 흔들어
봉숭아 꽃물처럼
가슴 설레게 하는
행복한 오후 산책길
꽃이 되다
호프집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그곳에서
늘 낮에만 본 사나이의 가슴을
꽃이 되어 마주 한다
술 한 잔의 평화
지친 마음 달래며 머무르다
갈 수 있는 간이역쯤 되는 곳
사나이 가슴은
흔들리는 세상과 이야기하는데
귓속에 갇힌 소리는
꽃 속의 기막힌 울림을 듣고
시장 안 골목길은 깊어만 간다
네가 서성이는 골목이 어디쯤인지
밤새 숨어 지낸 꽃밭
홀로 향기로운 꽃그늘 속을 서성이다
무채색 창가에 피어오른 주황빛 능소화
밤에 본 꽃은 술이 되어
헐벗은 무게로 침묵하고
쾌락의 군상들 깊어만 간다
나쁜 남자
고혹적인 알몸을 노출하는 당신은
붉은 즙을 짜내어 분열하는 광경에
당신과 숨 쉬는 세상이 사막과 같다
길게 누운 돌담 사이로
몸을 던지는 낙엽의 울음소리
삶의 간을 맞추면서 가을을 삼킨다
가을의 화려함과 향기도
모두 지워버리고
아름다움이란 때론 피곤하면서
모두를 아프게 한다
매연으로 얼룩진 슬픈 길에서
바람소리만 떨려오니
누구와 무슨 말을 나눴는지 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나쁜 남자는
관절마다 고열이 찾아와
손톱을 자리고 머리를 자르며 샤워를 한다
또렷한 새소리도 내지 못하면서
비난과 상처투성인 가면을 쓰고
애처롭게 매달려 있는 당신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잠시
영양제라도 맞아야 할 것 같다
정석교시인 추모특집
그대와 영원히
가을빛 물들면
그대와 함께한
함백산 산상 시낭송회날
시와 야생화의 아라리 고갯길 만항재에서
두타시낭송회를 그대와 함께
준비했기에 더욱 그립습니다
강물같이 바람같이 살았을 슬픔도
긴 시간 그대 그늘에
기대어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풀잎마다 반겼던 함백산 기원단
백두대간 만항재에서
돌담위로 작은 돌을 올리면서
소원을 빌던 그대모습
또렷이 생생하답니다
뭉게구름 친구 삼아
나와 같은 길을 걸었던 최고의 파트너
그대를 보내고
그대를 지우려
목젖에 걸려 나오지 않는 울음소리로
소리죽여 흐느꼈다오
봄을 닮은 그대 온기가
수십 권의 작품으로 남아
나의 집 책꽂이에서 마주보고 있으니
참 숨 가쁘게 달렸더군요
잎새 속에 남은 온기
시든 달맞이꽃 하늘로 이르는 길
먼저 가본
그 곳 세상은 어떠한지요?
고단한 삶 잠시 쉬어가는
호적한 오솔길이었음
참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