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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말씀] 새 생명 안에서 행함
2020. 2. 2. (이현래)
아쉽게도 그때 정숙희 자매를 못 만나보았다. 무슨 사정이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데 참 아쉽다. 그때 소식만
듣고 감을 잡았지만 보진 못했다.
너무나 아름다운 간증이 들려오고 했는데 소천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그 생각이 났다. 우리나라에는 그런 일이 별로 없는데 외국에 가보니까 기념 홀이라는 것이 있다. 계명대학교에도 가면 있다. 우리는 그런 것을 안 좋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무슨 이름을 내느냐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름을 내는 것이 아니고
아름다운 것이다. 미국에서는 기부문화가 아주 발달되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숨어서 해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숨어서 해야 할 일도 있지만 드러나게 해야 할 일도 있다.
나는 간증하는 것을 들으면서 너무 감동이 되었다. 그것은 죽음을 앞에 두고 하는 것이니까 살아있는 말씀을 듣는 것이다. 그리고 들은 이야기인데 옥현 형제도 그 모임에 같이 갔었다고 한다. 간증할 때 어떤 형제가 영상을 찍어 놓았다고 하는데 같이 있었다고 한다.
감기만 전염되는 것이 아니고, 좋은 것도 전염이 된다.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들이 미친 듯이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보고 세상 사람들은 염병에 걸렸다고 했다. 염병이라는 뜻은 전염병이라는 뜻이라고 말했다.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었으니까 염병이라도 좋은 것이었다.
우리도 좋은 것이 자꾸 전파되길 바란다. 좋지 않은 것은 전파가 안 되어야 하는데, 안 좋은 것이 더 빨리 전파된다. 사람이 참 이상하다. 한국 사람만 그런지 다른 데도 그런지 모르겠다. 안 좋은 것은 덮어 놓아야 되고, 좋은 것은 전파해야 된다.
그런데 그것이 거꾸로 되면 아주 불미스럽게 된다. 좋은 것이 전파되길 바라서 기념관을 하기로 생각했다. 얼굴도 보진 못했지만 더 기리고 싶은 마음이다. 우리 교회가 오래도록 기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아름다운 일이 계속 교회에서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저렇게 순전한 눈으로 교회를 보고 있었다. 저 눈에는 우리 교회의 결점은 아무 것도 안 보인다. 100% 좋은 것만 보이는 것이다. 그것을 들으면서 교회 안에도 사람이 사는 곳이니까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할 수만 있다면 그런 결점들이 없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혹시라도 지금도 안 풀리는 분들이 계시는가? 교회의 일이니까 안 풀릴 일이 없다. 나는 오늘 뿐이라는 그 말씀이 아주 충격적이다. 그 말은 아무나 할 수 없는 말이다. 오늘 뿐일지 모른다. 오늘 내가 ‘미안하다. 잘못했다.’는 말을 안 했다가 오늘 밤에 죽어버렸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오늘 대구교회를 나가기 전에 섭섭한 사람이 있으면 이야기하고 풀어버리고 가면 좋겠다. 그것을 짊어지고 다니려면 얼마나 힘든가? 내가 옛날에 있던 교회에서 나올 때 나가라 해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있으려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다. 아무도 손을 댈 수 없었다. 상황이 그랬다. 그런데 내가 괴로워서 나왔다. 한 4년을 그렇게 버텼다. 교회가 완전하게 뒷받침을 해주었기 때문에 교단에서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자기들도 포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못 견뎠다. 영혼은 자꾸 피폐해져 가고 강단에 서서 말씀을 해야 되는데 중압감이 생겼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내가 자퇴를 했다. 아무 대책도 없었다. 돈 한 푼이 없었다. 무조건 나가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내일 어떻게 될 것인가는 생각하지 않고 나가야 되겠다고만 생각했다. 계속 있으면 교회에 피해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주일날 광고하고 월요일에 나왔다. 그때 어떻게 나오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돈이 한 푼도 없었다. 누가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결정한 것도 아니었다. 누가 방 값을 마련해주지 않았으면 못 나왔을 것이다. 갈 데가 없는데 어떻게 나오겠는가? 일단 말은 해놓았는데 생각해 보니까 돈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집사님들이 돈을 10만원 마련해왔다. 한 분이 번호 계를 하고 있었다. 끝번을 하면 이자가 많다. 적게 내고 그 액수를 받는 것이다. 먼저 쓴 사람은 이자를 많이 주고 쓰는 것이다. 그분은 끝번을 들고 있었으니까 놓아두면 이자가 많다. 그런데 그것을 깨서 자기가 먼저 타고 그 이자를 다 포기하고 오히려 이자를 물고 반을 댔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이 반을 대고 해서 10만원을 가져왔던 것이다. 그것이 연희동 산꼭대기에서 세 사람이 누우면 딱 맞는 방이었다. 그것이 있었으니까 나왔지 없었으면 어떻게 나왔겠는가? 더 있는 것이 너무너무 괴로워서 나왔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누구에게 부담이 되면 그냥 내놓는 것이 좋다. 내일 죽을지 오늘 갈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것도 교회에 흠이 되니까 그렇다. 저렇게 깨끗하고 아름답게 보는 사람도 있다. 그냥 말 한마디 하면 될 것인데 그것을 못해서 그럴 필요는 없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부탁하고 싶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느니.”(눅12:20) 그것이 언제 올지 모른다. 옛날에 박*민 할머니가 있었다. 박*석 형제의 고모다. 그분이 젊었을 때, 딸 하나를 낳아놓고 있을 때였으니까 신혼 중이었다. 동경에 살았는데 남편이 아침에 옷을 입고 출근했다. 갈 때 잘 다녀오라고 빠이빠이 하고 보냈는데 안 돌아오고 말았다. 그때 동경에 무슨 화재사건이 있었다. B-29에 휘발유를 싣고 와서 동경에 쫙 뿌렸다. 비 오듯 뿌려서 불을 질러 버렸으니까 어떻게 되겠는가? 그런 일이 있었다. 아마 그때지 싶은데 나가서 안 들어왔다고 한다. 그래도 이분이 노인이 되어서도 매일같이 일기장에 편지를 쓰는 것이다. 하늘나라에 있는 젊은 남편을 생각하면서 편지를 쓰는 것이다. 우리 교회에 오기 전까지 수십 권의 책을 써놓았다. 그러다 우리 교회에 와서 그것을 다 불 살라 버리고 말았다. 사람의 일은 모르겠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 있을 줄은 아무도 모른다. 우리 친구들도 거의 다 죽고 없다. 그런데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이상하다. 내가 제일 먼저 죽을 사람인데, 지금까지 살아있고 생생하던 사람들은 다 먼저 가버리고 없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 밤이라도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짐을 지고 살 필요가 없다. 죽음 앞에 선 사람이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오늘 말씀은 이다. 로마서 6장에 있는 말씀이다. 성경을 많이 보신 분들은 그냥 아는데 안 본 분도 많은 것 같아서 할 수 없이 읽게 되는데, 이것이 에너지 낭비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롬6:1~5)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를 받았다는 말은 함께 죽었다는 말이다. 세례는 침례인데 물에 푹 담가서 죽은 것을 표시하고 다시 나오는 것이 침례다. 지금은 물방울만 몇 개 떨어뜨려서 약례로 하는 것인데, 역사적인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했다고 한다. 편리하기도 하다.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는 말은 합하여 죽었다는 말이다. 이것은 참 어려운 말이다. 옛날에 제일 어려운 것이 이것이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말이 참 그럴 듯하고 좋은 말인데, 내가 언제 죽었냐는 말이다. 내가 언제 죽었는가? 여러분은 예수와 함께 죽은 일이 있는가? 모를 것이다. 우리 교회를 나오면 다 알아야 된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람은 손들어 보라. 아직도 모르는 사람이 많은 모양이다. 옛날에는 이것이 너무 어려운 것이다. 함께 죽었다는데 언제 죽었는지 기억이 없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을 때도 내가 같이 먹은 적이 없다. 그런데 우리가 다 같이 먹었다고 한다. 이것이 참 이상한 말이다. 우리 교회를 나오시는 분들은 손을 안 들어도 다 아신다. 진짜로 모르는 것 같으면 또 이야기를 해야 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우리도 같이 죽었다는 말이다. 그래도 잘 모르겠고 어렵다.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같이 죽은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려오지 못하고 죽었다고 하면 좀 가까워진다.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아놓으면 내려오지 못할 것이 아닌가? 그래서 좀 알아듣기가 쉽다. 그래서 내가 그 말을 한 것이다. 뛰어내리지 못했다는 말도 그래서 나온 말이다. 나도 참 안 되었는데 내려오지 못하고 죽으신 분을 보니까 아주 가까운 것이다. 가까운 것이 아니고 내 자신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그 자리에 있다. 우리는 다른 자리에 있는 줄 알았다. 나는 구경꾼인줄 알았는데 구경꾼이 아니었다. 내가 그 사람이다. ‘합하여 세례를 받는다.’는 말이 그냥 넘어갈 말이 아니다. ‘합하여 죽었다.’는 말인데, 수많은 사람들이 그냥 넘어 가는 것이다. 내가 그랬는데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겠는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내가 그러면 다른 사람도 그렇다. ‘그와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십자가에서 함께 죽고’라고 했는데, 함께 죽었으면 함께 살지 않겠는가? 그분이 죽었으면 나도 죽은 것이고, 그분이 살았으면 함께 산 것이다. 함께 살았다는 것을 부활이라는 어떤 기적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좀 더 쉽게 지금도 예수님은 살아 계신다. 우리 앞에, 우리 안에 살아 계신다. 우리도 죽은 것이다. 그분이 죽은 자리에서 우리도 함께 죽은 것이다. 선악과를 먹은 자리에서 우리도 함께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같은 사람이니까 안 먹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똑 같은 것이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나는 안 먹은 것 같지만 모든 사람 속에 선악과가 함께 들어 있다. 요즘 정치판에서 보니 서로 막 죽일 놈, 살릴 놈하고 싸운다. 그런데 알고 보면 피차가 똑 같은 것이다. 자기는 남을 욕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자기를 욕한다. 똑 같다. 싸우더라도 좀 점잖게 싸우면 좋겠는데, 페이스 북에 보니까 쌍소리를 해 가면서 정말 더럽게 싸운다. 깡패들 싸우는 것보다 더 더럽게 아주 추잡하게 싸운다. 선악과가 그때 먹은 것인가? 지금에도 있다. 똑같은 이치다. 예수님이 죽을 때 우리도 죽었다. 그분이 죽었는데 나는 안 죽고 살겠는가? 그런 분도 죽는데 내가 어떻게 안 죽고 살겠는가? 사람들이 생각할 때는 저런 분이면 안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우리는 지금 모르지만 제자들의 경우에는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저 분이 죽는단 말인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속에 있다는 말이다. 그럴 정도의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죽었다. 그러면 우리 같은 사람이야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꽥 소리도 못하고 죽는 것이지 거기에 무슨 이의가 있겠는가? 생각해 보라. 그런 분도 죽는데 우리가 어떻게 안 죽겠는가? 하나님이라고 불림을 받아도 될 사람인데 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같은 일을 했기 때문이다. 남은 살리고 자신은 왜 못 살리느냐고 말했다. 밑에 있는 사람들이 상소하면 하는 말이 남은 살린다 하더니 너는 왜 못 살리느냐고 했다. 그 점을 생각해 보라. 죽을 사람을 살린 사람이니까 안 죽어도 될 사람이 아닌가? 그래도 죽었다. 나는 빠져 나올 수가 없다. 내가 무슨 변명을 해도 안 되고 꾀를 부려도 안 되고 아무 소용이 없다. 거기에 다 포함되어 있다. 또 함께 장사되었다고 했다. 장사되었다는 말은 장례식을 했다는 말이다. 그냥 혼자 죽어서 몰래 그냥 가버렸으면 그것은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장사되었다는 말은 다 아는 바가 되었다는 말이다. 모든 사람이 다 알도록 광고가 되어버렸다는 뜻이다. 우리는 여기서 확실하게 알아야 된다. 그분도 죽는데 내가 무슨 수로 안 죽겠는가? 신과 같은 분도 죽었는데 우리 같은 사람은 거기에 비하면 돼지나 마찬가지지 뭐가 된다고 하겠는가? 우리도 확실히 죽은 것이다. 선악과도 우리는 확실히 먹었다. 아담이 멍청해서 먹은 것이 아니다. 아담은 모든 사람보다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다. 우리는 당연히 먹은 것이다. 당연히 먹는다. 전부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한다. 안 그런 사람이 있는가? 기회를 못 얻어 그렇지 기회만 있으면 자기가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한다. 우리 인생은 누구나 다 그렇다. 우리가 죽었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그 다음 진도가 나간다. 이것을 모르면 진도가 안 나간다. 하나님 말씀의 진도가 안 나간다. 더하기도 할 줄 모르는데 빼기를 어떻게 하겠는가? 나는 그래도 더하기는 할 수 있으니까 빼기도 할 줄 안다. 더하기를 할 줄 알기 때문이다. 더하기를 할 줄 모르면 빼기도 못한다. 죽은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된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있다고 한다. 이것도 참 어렵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렸다. 그런데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살렸다고 한다. 알고 보면 아버지의 영광 안에서 산 것이다.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살았으니까 그 아버지의 영광이 아니면 예수는 그냥 죽은 사람이다. 아버지의 영광 그 안에서 산 사람이다. 그냥 아무데서나 산 사람이 아니다. 십자가에서 죽었는데, 아버지의 영광 안에서 산 사람이다. 어떤 것이 밤에는 안 보이다가 낮에는 보인다. 낮에 보인다. 밤에는 안 보였다. 밤에 안 보이면 없는 것이다. 캄캄한 밤이니까 없다. 그런데 해가 딱 뜨면 보이는 것이 있다. 마찬가지로 이 사람은 아버지의 영광 안에서 산 사람이다. 아버지의 영광이 없으면 이 사람은 죽은 사람이 분명하다. 감이 잡히는가? 새 사람이라는 말은 그 영광 안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우리도 이렇게 보면 똑같다. 다른 것이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우리는 그 영광 안에서 새로 태어난 사람이다. 교회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막 나온다. 전에는 분명 저 사람이 죽은 사람이었는데, 요즘에는 살아서 펄펄 뛴다. 전에는 분명히 죽었다. 이*영이는 분명 죽었었다. 죽었으니까 내가 가서 말을 못했다. 죽은 사람에게 가서 말을 해보았자 소용도 없고, 송장에게 가서 침을 놓아보았자 소용이 없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래서 내가 이*영이를 참 좋아 하지만 안 갔다. 전화도 안 번 안 해 봤다. 죽었으니까 아무리 해도 안 된다. 하나님이 살려 주기 전에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요즘에는 살아서 팔팔 뛰고 있다. 참 신기하다. 그 영광 안에서 살아난 것이다. 우리도 지금 그 영광 때문에 살고 있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도 그분의 영광 때문에 그 배짱으로 내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분의 영광이 없으면 나는 말을 못 한다. 여러분도 그분의 영광 안에서 나타난 사람이 있다. 오늘 정숙희 자매 이야기를 했다. 그 생명이 한치 한치 죽어간다. 촛불이 꺼지듯 꺼져간다. 그것을 환하게 알고 있는 것이다. 어떤 병은 죽을 때 혼돈이 되어서 모르는 사람도 있다. 죽는지 사는지 모르고 죽는 사람도 있는데, 어떤 병은 정신이 말짱하다. 죽을 때까지 숨이 넘어갈 때까지 확실히 알고 죽는 사람이 있다. 병이 그런 병이다. 차라리 혼수상태에서 흐리멍텅하게 죽어 버리면 모른다. 그런데 정신이 말짱하니까 환히 보고 저승사자가 오는 것을 보는 것처럼 죽는다. 아까 영혼과 육신이 분리되고 있다고 말했다. 지금 육체가 분리되어 나가고 있다고 한다. 내 육체가 내 육체가 아니었구나, 그렇게 이야기를 한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니라고 해보고, 절에 가서 공들이고 수양을 해봐도 그것이 그렇게 실감이 나지 않는다. 정숙희 자매만큼 실감나지 않는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니구나. 왜냐하면 지금 분리되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올 때는 세트로 왔는데, 갈 때는 분리되어 가는 것을 느끼는 것은 정신이 말똥말똥하다는 말이다. 나는 죽었지만 혼수상태에서 죽었기 때문에 그것을 모른다. 나는 혼수상태에서 죽어버렸기 때문에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 것이다. 그런데 저렇게 죽는 사람들은 자기가 환히 아주 분명하게 알고 죽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안에서 저런 평안을 누린다는 것은 주의 영광이 아니면 저렇게 되겠는가? 그 영광이 아니면 절대로 저렇게 할 수 없다. 저기서 거짓말을 하겠는가? 미쳤다고 거짓말 하고 있겠는가? 예수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고 하는데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보지 않으면 산 사람이 아니다. 그 영광 안에서 보니까 안보이던 것이 확 보이는 것이다. 새로운 세계가 보이는 것이다. 현미경으로 보면 안 보이는 것이 보이듯이 그 영광 안에서 새로운 세계가 보인다. 죄도 마찬가지다. 밝은데 가면 보이는데, 어두운데 가면 안 보인다. 눈이 있으니 다 볼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빛이 있어야 보인다. 그래서 하나님이 맨 처음에 한 것이 빛이 있으라고 했다. 그분의 빛이 없으면 아무것도 안 보인다. 삼라만상이 다 보이는데, 그것이 하나님이 지으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론적으로 아는 것과 다르다. 다른 빛이 오니까 이것이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구나 하고 다른 것이 보인다. X-ray가 오니까 보이지 않던 뼈가 보인다. 투시하는 것을 보았다. 예전에는 고무 가운을 입고 눈에 방사선 방지 안경을 쓰고 의사들이 실제로 폐와 심장이 움직이는 것을 뒤에서 보면 뼈가 환히 보인다. 그 빛이 아니면 안보이고 그 빛에서만 보인다. 성경에는 우리가 모르는 말이 많이 써 있는데, 왜 이렇게 모르는 말이 많이 써 있는가? 그것은 다른 빛으로 보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시 난 것도 그 영광 안에서 태어난 것이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선한 분이라는 것은 알고 왔다. 하지만 그 영광은 보지 못했으니까 거듭나야 한다는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그 영광 안에서 봤으면 ‘당신은 나와 같이 다시 나야 합니다. 내 안에서 다시 나야 합니다.’하면 알아들었을 것인데 영광이 없으니까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 이것은 내가 말하기 그렇지만 내가 춘천에 갔다. 오라고 해서 가서 3일간 집회를 했다. 나는 별말 하지 않고 대구에서 늘 하던 말이었다. 그런데 형제들이 무엇을 보고 여기까지 쫒아내려 왔다. 그냥 오겠는가? 생각해보라. 춘천에서 대구가 어디인가? 그런데 무엇을 보았는지 하여간 미친 듯이 내려왔다. 모든 것을 버리고 내려왔다. 나도 그것을 잘 모르겠다. 왜 내려왔는지 모르겠다. 그때는 나에게 짐이었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없고 돈도 없고 먹을 것도 없이 맨 입으로 내려왔는데 어쩌겠는가? 이재승 형제가 새벽에 나가 영어 학원 강의한 것과 나중에 우리 집사람이 재봉을 해서 벌은 것밖에 없는데 맨손으로 떼로 몰려 왔으니 어찌하겠는가? 부담이 되었는데, 그 사람들이 뭘 봤기 때문에 밀고 내려오는데 어찌하겠는가? 더군다나 강원도 임상가공학과를 나와서는 취직할 데가 없다. 취직할 곳이 없는 학과인데 교수가 영창피아노에 가서 사정사정해서 취직을 시켰다. 영창피아노에 가서 말을 하니까 우리는 그런 고급인력을 쓸 수 없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가져와서 그대로 모방하여 만드는 회사여서 대학을 졸업한 사람을 쓸 수 없다는 것을 사정사정해서 취직을 시켰다. 그런데 그것을 팽개치고 내려왔다. 뭐가 많이 있어서 한 것이 아니다. 그 직장이 아니면 다른 것을 할 것이 없고, 아예 갈 데가 없는데 왔다. 무엇을 봤으니까 왔지 그냥 오겠는가? 나는 몰랐지만 형제들은 뭘 본 모앙이다. 나는 대구에서 날마다 그렇게 살았으니까 거기 가서 특별한 말을 한 것이 아니다. 내가 대구에서 늘 하던 말을 했다. 우리가 새로 태어난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다. 그 세계에 가면 아주 평범한 것이다.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도 그와 함께 살리셨다. 우리도 그와 같은 것이다. 우리가 예수와 남이 아니고 우리가 하나다. ‘우리가 넘이가?’ 하는 대구 말이 있다. 남이 아니다. 그래서 거기서 태어난 사람들이니까 이것을 보고 새 사람이라고 한다.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6:4) 이렇게 하신 이유는 뭐 하라고 이렇게 하느냐 하면 새로운 생명 안에서 살게 하려고 행하게 하려고 하신 것이다. 여기서 태아난 사람은 새로운 삶을 살 수밖에 없다. 태어나기를 다른데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다. 새 생명이라고 하면 또 어렵다. 새 생명이라는 것은 어떻게 생긴 것인가? 이 새 생명은 연합된 생명이다. 예수와 연합된 생명이다. 그것이 새 생명이다. 십자가 안에서 우리가 연합이 되었으면 그때부터 우리가 새 생명을 산다. 새 생명이 이상한 것이 아니다. 하늘에서 번쩍 내려온 것이 아니다. 예수와 연합된 생명이 새 생명이다.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니까 행하는 것을 율법적으로 생각할지 모르니까 그냥 산다고 하면 된다. 사는 것이 행하는 것이다. 내가 살면 가만히 있지 않고 행한다. 새 생명가운 데서 살게 하는 것이다. 새 생명은 연합된 생명이다. 아주 간단하다. 옛 생명은 무엇인가?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따로 나와 버린 것이 옛 생명이다. 우리가 예수와 연합되었으면 새 생명이다. 결혼한 사람과 하지 않은 사람과 마찬가지이다. 결혼한 사람은 사람이고 결혼하지 않은 사람도 사람이다. 그런데 결혼하고 나면 옛 사람이 아니고 그것이 새 사람이다. 결혼했으면 옛 사람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요즘 젊은이들이 결혼을 해놓고도 자기를 옛 사람으로 생각한다. 결혼해놓고 총각인줄 생각한다. 심지어는 자매들도 결혼 해놓고 결혼을 했는지 안했는지 감각이 없다. 그래서 처녀 행세를 하고 다닌다. 그래놓고 신장개업이라고 한다. 새로 단장해서 개업했다고 한다. 결혼을 해놓고도 하지 않은 사람처럼 밖에 나가면 처녀처럼 행세를 한다. 결혼을 하면 이미 새 사람이다. 다른 사람이다. 세상에서 말하면 헌 사람이 되었지만 헌 사람이 아니고, 그것이 새 사람이다. 결혼을 하면 그때부터 사람이다. 둘이 연합한 것이 한 사람이다. 사람을 지으실 때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다고 했다. 그 말은 남자와 여자가 한 세트라는 말이다. 남자만 있어도 안 되고, 여자만 있어도 안 되니까 둘이 합하여 사람이다. 둘이 합해서 사람이니까 결혼한 사람은 자부심을 갖고 살아라. 엊그제까지 처녀였는데, 내가 결혼했다고 하면 고물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고물이 된 것이 아니고 새 사람 된 것이다. 요즘 여자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결혼하면 나는 헌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헌 사람이 된 것이 아니고, 새 사람 된 것이다. 이상한 이야기인데 결혼하면 새 사람이다. 왜 새 사람인가? 아기를 낳을 수 있으니까 새 사람이다.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똑똑해도 아기를 못 낳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이니까 새 사람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 연합된 생명이다. 우리가 항상 살아도 연합 안에서 살아야 된다. 처녀인체 하고 돌아다녀도 안 되고, 총각인체 하고 돌아다녀도 안 된다. 나는 결혼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살아야 한다. 그것이 정상적이다. 그런데 결혼한 것을 정상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엉뚱한 생활을 하는 것이다. 결혼한 사람들은 자부심을 갖고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은 소망을 가지고 새 사람이 될 소망을 가지고 살아라. 성경 안에서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많다. 거듭났다. 접붙여 졌다. 한 몸이다. 새로운 피조물이다. 새 생명이다. 이런 말이 많다. 이것이 전부 이 말이다. 연합한 사람이다. 접붙이기는 어떻게 접붙이겠는가? 접붙이려면 둘 다 잘라져서 접붙여야 한다. 밑에 나무도 잘라지고 위의 가지도 잘라지고 잘라진 것끼리 합해야 한다. 그래서 꽁꽁 묶어 바람이 들어가지 않게 싸매서 놔두면 서로 붙어 한 나무가 된다. 그리스도는 잘렸다. 잘린 자리에 우리도 잘린 것을 가지고 가서 붙여야 되지 안 잘린 것은 붙지 않는다. 시골에 살지 않았으면 접붙이는 것을 못 본 사람도 많이 있을 것이다. 지금 과일 나무들은 100% 접붙인 나무들이다. 접붙이지 않으면 과일이 좋게 열리지 않는다. 좋은 가지를 갖다 붙여야 좋은 열매를 맺게 된다. 자세히 보라. 과일나무마다 밑둥치에 가보면 흔적이 있다. 상처가 있다. 그것이 다 접붙인 자리다. 우리는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고 했는데 그것이 접붙인 자리이다.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이 전부 한 말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생명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하면 이것이 아주 신기한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에게 다 주었다. 생명과 그 모든 풍성을 다 아들에게 주었다. 예수 안에는 모든 것이 다 있다는 말인데 그 예수하고 내가 접붙였으니까 그 모든 것이 다 내 것이 된다는 말이다. 접붙이면 공유하게 된다. 이제는 끊을 수 없게 되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롬8:35) 접붙여졌기 때문에 그래서 못 끊는다. 몰라서 그렇지 알기만 알면 연합된 것도 끊을 수 없다. 그와 내가 운명적으로 하나인데 어떻게 끊겠는가? 잊어버리려고 해도 안 된다. 하나님께 속한 일은 우리가 마음으로 생각하거나 눈으로 보는 것과 다르다. 안 봐도 안다. 정숙희 자매가 하는 말이 형제는 바람만 스쳐가도 안다고 했다. 신기하다. 자기 자식들이 오면 바람만 스쳐도 안다. 마찬가지로 우리 형제들이 오면 자기는 바람만 스쳐가도 그 사람 이름도 모르고 생전 처음 본 사람이지만 다 안다는 말이다. 어떤 한 운명을 보기 때문에 그렇다. 교회 안에서 이러니 저리니 할 것이 뭐가 있는가? 마음이 안 맞으면 좀 어떤가? 안 맞으면 안 맞는 대로 그냥 살면 된다. 누가 나를 위해 세상에 있는 사람이 있는가? 다 자기위해 사는데 좀 안 맞을 수 있지 어떻게 딱 맞겠는가? 좀 안 맞는 줄 알고 살면 된다. 그것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라. 인생을 너무 어렵게 생각할 것이 없다. 안 맞으면 안 맞는 대로 살면 된다. 이 접붙인 것도 잘못 붙여 놓으면 삐딱하게 이상해진다. 결혼도 어찌하다보면 삐딱할 수도 있으니까 그런 줄 알고 살아야지 그것을 너무 잘하려고 할 것이 없다. 더 잘하려고 하다 더 안 된다. 거기서 무슨 큰 보화가 나오지 않으니까 그런 것은 그런 것대로 살면 된다. 예배소서 1장을 보면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엡1:3)라고 했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으로 아들들이 되게 한다는 것도 신령한 복이다. 육신의 아들들이 되는 것과 다르다. 하나님의 영광을 은혜를 찬송하게 한다. 그 은혜를 찬송한다는 것도 이것이 정말 은혜이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 교회에 와서 보고 저 사람들은 사람을 찬송하네, 자기들끼리 찬송한다고 하는데 자기들이 해보면 되는가? 자기들보고 하라고 되겠는가? 너희 친구들을 찬양해보라고 하면 자기 친구들을 찬양할 놈이 누가 있겠는가? 아무도 없다. 다 자기가 더 낫다. 교회 와서 서로 찬양하는 것을 보면 신기하다고 해야 하는데, 사람을 찬양한다고 잘못 배워놓으면 이것이 큰일이다. 자기들은 나가면 못한다. 되겠는가? 생각해보라. 우리 교회나 되니까 형제들을 찬양하지 다른데 가면 친형님 친동생 사이도 안 된다. 제삿날이면 맨날 잘했니 못했니 싸우는데 편할 집이 별로 없다. 조상 제사에 와서 아주 희희낙락하고 가는 집이 별로 없다. 대부분 술 한잔 먹으면 푸념이 터져 나오는 것이 우리나라 풍습이다. 우리는 별것이 아닌 것을 보고도 찬양한다. 객관적으로 보면 별것도 아닌데 좋다고 한다. 하라고 한다고 되겠는가? 아무나 못한다. 그렇게 된다면 세상이 이렇게 시끄럽지 않다. 다 자기가 제일 똑똑하다고 생각하니 못한다. 대통령도 되지 않을 사람들이 나와서 자기는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세상이 시끄럽다. 나는 안 되겠다고 양보하고 나가면 되는데, 양보하고 나가지 않는다. 교회니까 이런 광경을 우리가 보는 것이다. 나도 어떤데 보면 별것도 아닌데 저렇게까지 찬양하는 것으로 보일 때가 있는데, 깊이 생각해보면 저것이 세상에 없는 것이니까 귀한 것이다. “영광을 찬송(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1:6)는 것은 너무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엡1:7)는 이 말은 그 연합 안에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었다. 성경대로 그냥 읽으면 독생자를 영접하면 영생이라고 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라고 했는데, 영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잘 몰랐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했는데 그것이 잘 안 된다. 영접했는데 어떻게 하면 또 날아가 버리고 없다. 정숙희 자매도 그 말을 했다. 선반에 올려놓았다가도 필요하면 꺼내 쓰고, 할 일 다 하면 올려놓았다는 것이나 똑같다. 잘 안 되고, 쉽게 안 된다. 영접한다고 해서 항상 영접하고 있는 상태가 안 된다. 내가 그리스도와 연합되면 내가 생각하고 안 하고 할 문제가 아니다. 내가 생각한다고 더 연합되고, 내가 생각하지 않는다고 덜 연합되고 하는 것이 아니다. 운명적인 문제이다. 외국에 가서 한국 사람을 만나면 친하든 친하지 않든 한국사람 같으면 친하다. 영어 못하는 사람은 더 그렇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까 공항에서 한국말 통역하는 사람을 만나면 너무 반갑다. 한국도 이제 위상이 높아져서 큰 공항에 가면 한국말 통역관을 있다. 우리가 말을 못하면 대신 와서 해주니까 영어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영어 못한다고 하면 그냥 사람을 불러준다. 그러면 그냥 되는 것이다. 우리 한국도 지금은 상당히 알아주는 나라가 되었는데, 왜 그리 불평을 하는지 모르겠다. 옛날에 알아주지도 않은 나라였는데, 지금은 나가면 상당히 알아준다. 대한민국은 몰라도 삼성은 안다. 그 정도니까 굉장한 나라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다. 그리고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엡1:8,9)라고 했다. 천기가 누설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뜻을 내가 이해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알면 쉽다. 하나님의 뜻을 알면 헛일, 쓸데없는 일을 하지 않는다. 이것은 너무 축복이 많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10) 우리가 경험해보면 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낮은 것이나 높은 것이나, 귀한 것이나 천한 것이나, 다 내 안에서 통일된다. 이것은 구별이 안 되고 구별할 필요도 없다. 다 그것이 그것이다. 내가 광주에 있는 어떤 교수가 있다. 우리 교회 형제 지도교수였는데 해마다 온다. 내가 한번은 ‘다 그놈이 그놈이지 뭐가 다릅니까?’ 그랬더니 ‘그놈이 그놈이요?’ 하더니 그 다음부터 안 온다. 내가 말을 잘못해서 안 오는데, 내가 다시 전화를 좀 해볼까 생각하고 있다. 내가 볼 때는 그놈이 다 그놈인데, 자기는 아닌가보다. 그놈이 그놈이라고 했더니 그것 때문에 그런지 그 다음부터는 오지 않는다. 해마다 방학 때면 오는데 오지 않는다. 이것이 통일이 되지 않아서 그렇지 통일이 되면 그것이 다 그것이다. 여당이나 야당이나 그것이 그것이고 다 똑같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10)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면 이것저것이 없이 다 통일된다.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는 계급장도 다르고, 가진 것도 다르고, 아는 것도 다르고, 위상도 다르고, 다 다르다. 그런데 못 박히면 다 똑같다. 한 개도 다른 것이 없다. 통일된다는 말이 그 말이다. 다 하나 되어 버린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외모로 보면 다 다르다. 생긴 것부터 다르고, 직업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다른 것이 많다. 그런데 연합 안에서 보면 다른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자기가 스스로 남보다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 나는 저런 사람이야, 하는 것은 착각이다. 그것이 십자가에 못 박으면 다 없어질 것들이다. 예수님이 가지고 있는 그 좋은 것도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였더니 부스러기만 해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고 한다.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렇게 된다면 오늘 우리 교회 점심도 간단하게 해결된다. 김밥 한 다섯줄만 가지고 오면 다 해결된다. 김밥은 쓰레기가 남지 않는다. 놀라운 일인데 그런 것도 다 없어져 버린다. 그런 것도 다 소용이 없고, 그냥 사람으로 남는다. 우리가 뭐가 남겠는가? 내 성질이 남겠는가? 내 꼬라지가 남겠는가? 뭐가 남겠는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아주 간단하다. 정숙희 자매 말도 다 없어지는데 편하다고 한다. 열심히 산 사람이니까 그런 것 같다. 추** 형제는 열심히 공무원 생활해서 뇌물도 안 받을 사람이고, 아주 고진한 사람인데, 재태크를 잘해서 재산을 불렸다고 했다. 순전히 부동산을 잘해서 재산을 불린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고 손발로 뛰고 열심히 산 사람이다. 그래서 재산을 불렸다. 대단한 사람이다. 할 만큼 다 해보고 교회에서 여전도 회장도 해보고 다 해보았다. 다 해보고 지금 우리교회에 오니까 너무 좋다. 혹시 잘 안 되는 사람이 있으면 다른 교회에 가서 다 해보고 오면 좋겠다. 여전도회장 남전도회장 할 것 다 해보고 오면 좋겠다. 목사까지 다 해보고 오면 좋겠다. 다 해봤으니까 여러 말 할 필요 없다. 다 해보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그래도, 그래도, 이렇고 있다. 자꾸 ‘그래도’가 남아있다. 나이가 젊은데 ‘그래도’ 그렇지, 당신은 나이가 들어서 갈 때가 다 되었으니까 그런 소리를 하는 거지, 나는 지금 아직 젊은데 ‘그래도’, 항상 ‘그래도’가 따라다닌다. 그래서 결단을 못한다. 그러다보니까 다 늙어버린다. 다 늙은 다음에 하면 뭐하겠는가? 젊었을 때 해야 쓸모도 있지 다 늙어지면 아무것도 안 된다. 생선을 먹을 줄 알면 수족관에 있는 활어는 먹으면 안 된다. 거기 들어오면 항생제 먹이고 죽지 못해 사는 것이다. 그것을 활어라고 먹으면 죽지 못해 사는 고기를 먹는 것이다. 진짜로 좋은 것을 먹으려면 물론 물에서 막 올라온 것을 먹으면 제일 좋지만 그렇게 못할 때는 물에서 막 올라올 때 탁 죽여야 한다. 그러면 그 자리에 그대로 된다. 옛날에 냉동기계가 발달하지 않았을 때는 바다에서 돔을 잡으면 갈고리로 머리 어디를 찍으면 색깔이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야 더 생생하다. 붉은 돔을 일본 사람들이 굉장히 좋아하는데 그것을 일본으로 수출했다. 수족관에 넣어놓고 굴리면 그것은 병든 것을 먹는 것과 똑같다. 차라리 아침에 잡아서 번개시장에 오는 것을 회로 먹는 것이 더 낫다. 알고 보면 그것이 더 생생하다. 수족관에 넣어서 마산에서 여기까지 출렁거리면서 오면 반 죽음이 되어서 온다. 사람도 젊었을 때, 싱싱할 때, 하나님께 쓰여져야 된다. 젊었을 때, 피가 끓을 때, 사용되어야 된다. 나는 나가지도 못하고, 들어가지도 못하고 이러고 있다. 내가 젊어서 이랬더라면 뛰어다닐 텐데 잠자는 사람을 가만히 두겠는가? 가서 흔들어 깨우고 어떻게 할 텐데 지금은 헤매고 있어도 보고 있어야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여러분, 젊었을 때가 참 귀중한 때이다. 한 시간 한 시간이 참 귀중한 때이다. 늙으면 못할 일이 너무 많다. 늙으면 못할 일이 너무 많으니까 젊었을 때 할 일을 해야 한다. 너무 중요한 일이다.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엡1:11)라고 한다. 우리가 그의 기업이라는 이 말은 그의 텃밭이라는 말이다. 거기서 모든 것이 생산되어 주인에게 주는 것이다. 고추도 나오고, 가지도 나오고, 상추도 나오고, 모든 것이 난다. 텃밭이라는 것이 귀중하다. 조금만 한두 포기만 해 놓아도 한집 식구가 여름 내내 먹는다. 뜯으면 또 나고 뜯으면 또 난다. 그런데 요즘은 기업이라고 하면 큰 것이다. 오만 것이 다 나온다.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12)고 한다. 우리가 영광의 찬송이 된다. 하나님의 찬송이 된다.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1:13) 이것이 성령의 인침을 받으려고 부흥회에서 얼마나 난리인지 아는가? 부흥사들에 하는데 이 인침이 어디서 오는지 모르니까 어렵다. 나는 그 일이 어찌 그리 어려운지 몰랐다. 인침을 받으라고 해도 어렵지, 회개 하려고 해도 어렵지, 거듭나라고 해도 어렵지, 이상하게 다 어렵다. 이렇게 쉬운 것이 있는지를 몰랐다. 멍청한 선생님에게 배우면 나도 멍청해진다. 말 잘못하는 사람에게 말을 배우면 자기도 말 잘못하는 사람이 된다. 경상도에 태어나면 경상도 말을 하고, 전라도에 태어나면 전라도 말을 하고, 사람은 배운 대로 한다. 충청도에 태어나면 충청도 말을 한다. 우리나라의 제일 좋은 말이 충청도 말이다. 들어보면 구수하고 여유 있고 아주 좋다. 나도 어려서 충청도에 태어났더라면 말을 좀 천천히 하면서 알아듣게 할 텐데, 전라도에 태어나서 말이 이렇게 빠르다. 또 경상도에 태어난 사람은 사투리가 많으니까 잘 배워야 한다. 어리석은 사람에게 배우면 나도 그렇데 된다. 바보가 따로 없다. 배우기 따라 다르다. 어찌 그렇게 어렵기만 하든지 나도 모르겠다. 부흥회를 가면 왜 그리 어려운지 모르겠다. 통곡하고 울어야 하는데 눈물이 안 나오니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첫째 날부터 통곡을 해야 은혜가 되는데, 첫째 날부터 말똥말똥하고 안 되니까 참 고생이었다. 경험해보신 분들은 알 것이다. 잘되신 분들은 잘되겠지만 안 되는 분들은 정말 안 된다. 나는 어지간해서 눈물이 잘 안 난다.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엡1:14) 그분이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된다고 한다. 기업도 되고, 기업의 보증도 되고,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엡1:3) 세상에 있는 복은 아닌데,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복이 다 온다. 왜? 그와 내가 연합했기 때문이다. 내가 부잣집에 시집가면 부자 되는 것이지 부자가 따로 있는가? 여자들은 참 쉽다. 시집만 잘 가면 간단하게 다 해결된다. 부잣집에 시집가면 부자다. 남편 것이 다 자기 것이다. 시집가도 따로 인가? 시집을 갔는데도 남편 것 따로 부인 것 따로 인 집이 있다. 각자 살림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도 경제학에서는 어떤지 모르겠다. 권*열 형제가 경제학을 전공했으니 경제학적으로는 어떤지 모르겠는데, 남편이 주식을 잘못하여 홀랑 망하면 그것도 문제는 문제다. 갈라서 있는 것도 문제, 합해서 있는 것도 문제, 문제가 많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합한 것은 합하면 합할수록 좋다. 왜냐하면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이 무진장 많은데, 합하면 합할수록 내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하늘에 올라가서 따오겠는가? 그분 안에 있는 것이 내 것이니까 모든 것이 다 내 것이다. 아까 정숙희 자매가 말했다. 나는 이미 집이 마련되어 있었다. 집을 사려고 애를 썼는데, 아버지가 이미 마련해 놓았다는 것이다. 완전히 부처님 수준과는 비교가 안 된다. 10년 공부 해보았자 안 된다. 참선을 해보았자 그렇게 안 된다. 환란도 축복이라고 한다. 환란이 오지 않았으면 자기가 문경을 왔겠느냐는 것이다. 환란이 안 왔으면 왔겠는가? 정말 오지 않았다. 또 잘나가는 사람이니까 올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환란이 와서 왔다. 겉으로 보기는 불행인데, 사람은 언제 죽어도 다 죽는 것이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는 것인데, 복 받을 데 와서 죽으면 얼마나 좋은가. 환란도 복이라고 한다. 환란이 아니었으면 언제 자기가 문경 와서 살겠느냐는 것이다. 어떻게 이 형제들을 만나겠는가? 어떻게 이렇게 좋은 교회를 만나겠는가? 나는 내 병 고치는 것이 급한 것이 아니고, 이 복음이 빨리 전파되기를 소원하고, 이 교회가 잘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것이 기도를 해서 되겠는가? 모든 것을 다 초월하고 모든 것을 다 통일시켜 버린다. 완전히 정복한다. 정복하고 지배하고 다스리고 간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 그대로 다 환란 속에서 온다. 어차피 사람은 한번 죽는다. 좀 오래 사나 좀 짧게 사나 어차피 죽는다. 죽으면 다 똑같다. 더 많이 살았다고 해서 잘 죽는 것도 아니고, 더 많이 살았다고 해서 가져가는 것도 아니고, 다 똑같다. 새 생명! 예수와 합한 생명!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한 하나님 아들의 생명과 내가 연합되면 그분의 모든 것이 다 내 것이다. 우리가 하늘에 올라가서 그것을 가져 오겠는가? 우리가 기도한다고 하나님이 주겠는가? 나는 뭘 달라고 기도해 본적이 없다. 그런데 다 준다. 주는 것도 아니다. 예수 안에 있는 것이니까 다 내 것이다. 나는 기도해도 별로 응답 못 받는다. 기도해서 이루어진 일은 지금까지 나는 별로 없다. 목사가 되어서 이렇게 말하면 교회가 안 될 일이지만 나는 기도해서 받아본 일이 별로 없다. 그래도 다 주었다. 다 주는데 어쩌겠는가? 다 주는데 달라고 할 필요가 뭐가 있는가? 부모가 학비 주지, 간식비 주지, 다 주는데 뭐를 또 따로 달라고 할 시간이 어디 있는가? 내가 주님과 연합한 삶을 살게 되면 맨 마지막에 하는 말이 아버지가 다 준비를 해놓았다. 아버지가 다 준비해 놓았다. 우리 모든 것은 다 준비하신 이가 있다. 나를 사람으로 준비한 것처럼, 사람으로 준비해 놓았으면 다른 것도 다 준비해 놓았다. 그냥 사람으로만 만들어 놓겠는가? 식물을 주노라, 뭐를 주노라, 다 미리 만들어놓는다. 나는 젊었을 때, 필요가 없이 나를 왜 불렀겠는가? 이 생각이 들었다. 필요 없으면 왜 불렀겠는가? 필요 있으니 불렀을 것이다. 다른 사람은 다 걱정을 하는데, 나는 필요가 있으니 불렀지, 필요 없으면 뭐 하러 불렀겠는가? 그 생각이 들었다. 책임을 그분이 지시니까 내가 너무 쉽다. 걱정도 한 번도 안 해보았다. 그런데 길이 형통케 되었다. 그렇게 믿고 있는데 다 잘해준다. 누가 해주는지 모르지만 하여간 잘된다. 염려하지 않았는데도 다 잘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이 없다고 할 수도 없고, 안 봤으니 있다 할 수도 없다. 누가 하나님이 있느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지 모르겠다. 어떤 사람에게는 있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없다고 말한다. 있다고 해보았자 안될 사람에게는 없다고 말한다. 그것이 더 좋다. 있다고 하면 믿을 사람에게는 있다고 한다. 왜? 나에게는 있다고 해도 상관이 없고, 없다고 해도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 안에 놀라운 축복이 있다. 십자가에 매달려서 못 뛰어 내린 분 같은데, 놀라운 축복을 가지고 있는 분이다. 그분만 내게 있으면 모든 것이 다 있다. 그가 내게 있으면 다 있다. 그런데 그가 어찌 내게 오겠는가? 내가 그분과 연합되니까 나한테 온다는 말이지 그분을 내가 어디 가서 가져오겠는가? 끌어내리겠는가? 하늘에 계신 분을 내가 끌어내린다고 내려오겠는가? 지옥에 내려간 분을 내가 끌어올린다고 올라오겠는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시는 분인데, 천당에 올라가면 올라가고, 지옥에 내려가면 내려가는 분인데, 내 마음대로 하겠는가? 내가 그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 안에 있는 것이다. 원래부터 그 안에 있었다. 고린도전서 1장 30절이 너무 좋은 말이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고전1:30) 앞으로 있을 것이라는 말이 아니고, 이미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구속함)이 되셨으니.”(고전1:30)라고 한다. 이런 것을 모르고 우리는 엉뚱한 것을 찾고 돌아다녔다 . 다 있는 것을 가지고, 산도 있고 바다도 다 있는 것을 가지고, 우리는 산을 찾고 바다를 찾고 다닌 것이나 마찬가지다. 눈을 떠보니 다 있다. 여러분이 산을 만들었는가? 물을 만들었는가? 나무를 만들었는가? 기도해서 누가 그것을 가져왔는가? 눈을 뜨니까 있다. 예수 안에 오면 다 있다. 그분과 연합하면 쉽다. 간단하고 쉽다. 저것이 내 운명임을 알면 쉽다. 루다도 와 있다. 나는 루다 간증하는 것을 듣고 놀랬다. 할머니를 간증하게 한 사람이다. 자매가 간증하는 것을 그때 처음 들었다. 루다 때문에 일어나서 간증하는데 보통 일이 아니다. 내가 요즘에 못나가서 못 보는데, 내가 교회를 나가면 와서 ‘안녕하셨어요? 잘 계셨어요?’ 한다. 어른처럼 와서 그런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이 들렸다니 신기한 일이다. 스마트폰을 가지고 장난을 하려고 하는 데도 계속 말씀이 막 들어오더라는 것이다. 정말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은 신기한 분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주님이 하여간 신기한 분이다. 하여간 놀라운 분이다. 할머니 입을 열어 놓은 손녀가 있으니 신기한 분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평생 말 안할 것이다. 교회 와서도 한 번도 좋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옆에 아이들은 못 알아들으니까 다른 것을 보고 있지만 루다는 알아들으니 딴 짓을 하지 않는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으로 복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새 생명 안에서 살게 했다. 우리 것으로 받아야지 그냥 가면 내 것이 안 된다. 하나님이 주었어도 내가 안 받아들이면 안 된다. 밥을 아무리 차려 놓아도 뭐 하는가? 먹지 않으면 헛일이다. 아무리 좋은 음식을 만들어 놓아도 안 먹으면 할 수 없다. 그런데 지금도 내가 해보겠다고, 내가 뭘 할 수 있다고, 왜 이런 멍청한 짓을 하겠는가? 다 해주었는데, 뭘 또 내가 어떻게 하는가? 새 생명 안에서 행하게 하려고 그분과 연합하면 그와 함께 세례를 받았으면 그와 함께 장사되었으면 그러면 거기서 내가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심 같이 나도 함께 살리신다. 이것이 다른 세계다. 그분의 영광의 빛 가운데서 하는 이야기이니까 다른 세계이다. 예수를 믿어도 죽고, 예수를 안 믿어도 죽고, 죽기는 다 죽는다. 영광의 빛 가운데서 한 말이니까 다른 말이다. 다른 세계를 본 것이다. 정숙희 자매를 살았을 때 한번 봤으면 좋았는데, 못 봐서 너무나 아쉽지만 하여간 길이길이 그렇게 교회 안에서 간직하게 될 수 있기를 바라고, 또 우리 형제들 속에서도 깊이 간직되기를 바란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에게 이렇게 좋은 날을 주시고 주의 영광 가운데서 함께 살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새 생명 가운데서 당신이 우리를 포함한 그 자리에서 우리가 주의 영광을 드러내길 원하고 새 사람으로 살기를 원하고 이 복음을 늘 널리널리 전파하기를 원합니다. 숙희 자매 간증을 통해서 그가 생생하게 우리 안에 살아 있고 우리가 더 영원히 기려야할 그런 그림으로 우리 안에 남습니다. 주님, 그 가족과 자손들에게도, 주님, 이 자매의 축복이 이루어지게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도 모든 사람이 다 이 은혜에 참여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