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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 1장
죄인을 권고하시고 돌이키시는 하나님
(찬송 502장,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월, 2016-8-29
오늘부터 룻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이방 여인 룻이 하나님의 자비를 받아서 구원을 얻고 다윗의 조상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한 작은 이방 여인이 이스라엘 가문에 들어와 구원을 얻은 것만도 큰 일인데 어떻게 다윗 왕의 조상이 되고 더 나아가서는 그리스도의 조상이 될 수 있는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여인에게 행하신 크신 구원의 일을 같이 살펴봅시다. 비천한 자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함께 찬양하고 우리에게도 그 자비를 베풀어 주시길 구하는 복된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1. 하나님께 징계를 당할 때에는 회개하고 자비를 구하자 (1-5절)
룻기는 ‘사사들이 다스리던 때에’ 하고 시작합니다. 가나안 땅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 정복 전쟁을 벌였습니다.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있던 여러 이방 민족들을 다 물리치고 각 지파 별로 땅을 분배받았습니다. 하지만 여호수아가 죽고 난 뒤 이스라엘 백성들은 현실에 안주해 버렸습니다. 가나안 땅 곳곳에 남아있던 이방 세력을 완전히 토벌하는 일을 게을리 했습니다. 오히려 이방인들과 혼인하고 교류하면서 우상 숭배에 점차 빠져들었습니다. 어느새 하나님을 예배하고 율법을 지키는 일은 뒷전이 되었습니다.
사사들이 다스리던 시대는 여호수아 이후에 사무엘 선지자가 나와서 이스라엘의 왕이 세워지기 전까지의 암흑기입니다. 사사기를 보면 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이 얼마나 심각했는지가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룻기는 이런 타락한 시대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온통 이방 민족의 풍습에 물들어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던 시기에 오히려 이방 여인 중에서 이스라엘로 돌이킨 사람도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밤하늘이 깜깜할수록 별빛이 밝게 빛나듯이 어두운 시대적 배경은 룻의 이야기를 더욱 아름답게 돋보이게 해 줍니다.
유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 조금 아래쪽에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이기도 합니다. 그곳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4절에 보면 엘리멜렉 가문이 베들레헴 지방에서 떠난 지 10년 즈음에 흉년이 멈췄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이 가뭄을 못 견뎌서 빠져나왔다고 한 걸 보면 10년도 훨씬 더 되는 큰 흉년이었던 것 같습니다. 창세기에 요셉 이야기를 보면 에굽에 흉년이 7년만 되어도 온 나라 사람들이 큰 고통을 당한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두 배가 넘는 기간동안 흉년이 지속될 때 그 어려움은 말로 다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와중에 한 남자가 기근을 피하기 위해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모압 땅으로 내려갑니다. 가장으로서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질 대책을 마련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일은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에 내린 흉년은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특히 이런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큰 흉년은 하나님이 이 지역 사람들의 죄를 보시고 심판하신 것임이 분명합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자비를 구하기는커녕 이방 나라 모압으로 피난을 떠났습니다. 아버지가 자기의 잘못을 꾸짖으니까 집을 뛰쳐 나가버린 셈입니다.
이 사람이 떠난 모압은 보통 이방 나라가 아닙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곳입니다. 신명기 23장 3-6절을 같이 읽어봅시다. (합독) 베들레헴에서 모압으로 갔다 하는 말에는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에게로 갔다 하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먹을 것을 없어서 베들레헴을 떠났다 하는 말에 씁쓸한 유머가 담겨있습니다. 베들레헴이 히브리어로 빵집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빵집에서 살던 사람이 스스로 먹을 것을 찾아 보겠다고 저주받은 땅으로 가는 모습에서 사람의 어리석음을 봅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우거하려고, 즉 잠시 머물러 있으려고 모압으로 갔습니다. 조금만 살다가 힘든 시기만 넘기면 다시 돌아오자 하는 마음으로 갔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죽었습니다. 이제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 말론과 기룐만 남았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죽음에서 무언가 깨닫지 못한 채 계속 모압에 머물렀습니다. 아마도 그쪽 지역에서 상당한 수준으로 정착했던 것 같습니다. 새로운 터전에 완전히 뿌리내릴 작정으로 자식들을 이방 여인들과 결혼까지 시켰습니다.
어느새 10여 년이 지났습니다. 처음에는 잠깐만 하고 갔는데 아예 그곳에서 눌러앉아 버렸습니다. 그런데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이 모두 죽게 됩니다. 이방 여인과 결혼시킬 때에는 그렇게 해서라도 가문을 번성하게 하려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집안의 모든 남자들이 죽게 되고 가문의 씨가 말라 버렸습니다. 구약에서 대를 잇지 못하고 멸족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해 하나님의 총회에서 도망쳐 나왔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더 큰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돌이키도록 하시려고 고난을 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고난 가운데 하나님이 원망스럽기도 하고 믿음이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때에도 하나님과 교회를 떠나서 우상 숭배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식으로는 결코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고난당할 때에는 겸손히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해 주시기를 구합시다. 고난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하나님께서 이 고난을 해결해 달라고 하나님을 더욱 간절히 의지함으로써 고난을 이깁시다.
2.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죄를 용서하시고 죄인들을 부르신다 (6-18절)
다음으로 나오미와 두 며느리가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이야기입니다. 6절에 보면 나오미가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서서 돌아오려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이제 모압에서 먹고 살기가 어려우니 베들레헴으로 돌아가서 먹고 살 길을 마련해야겠다 하는 게 아닙니다.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한다 하는 말은 회개한다는 말과 같은 표현으로 쓰였습니다. 지금까지 모압 지방에서 살았던 것을 뉘우치고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겠다는 심경의 변화가 이 속에 깔려 있습니다. 10년도 넘게 모압 지방에서 살고 그곳에서 며느리까지 본 과부가 갑자기 자신의 삶을 뉘우칩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권고한다는 말은 방문하다, 돌봐준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별히 찾아오셔서 돌봐주시고 가뭄을 없애 주셨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당할 때에 그 고난으로부터 회복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돌봐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다가 그 죄를 뉘우치는 것도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돌봐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나서 고난을 이기고, 또 죄를 뉘우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혹시 고난이나 죄 가운데서 벗어났다면 자기를 내세우지 말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감사합시다. 혹시 아직도 고난이나 죄 가운데 머물러 있다면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돌봐주시기를 구하십시오.
나오미가 돌아오겠다고 하자 두 며느리도 함께 가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오미가 두 며느리를 말립니다. 괜히 나와 같이 가서 고생하지 말고 모압 땅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나오미는 말리고 며느리들은 가겠다고 옥신각신하는 대화가 세 번 반복됩니다.
먼저 8절에 보면 지금까지 너희는 남편과 시어머니에 대한 도리를 다 했으니 이제 관계를 마무리하자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한다는 말은 이제 사람끼리 선대해야 할 도리는 다 끝났다는 말입니다. 이제 그만 친정으로 돌아가서 각각 남편을 얻고 편히 쉬라고 복을 빌어 줍니다. 또 11-12절에 보면 이제 자기는 남편도 없고 늙어서 새로 자식을 낳을 수도 없으니 자신과 함께 떠나면 아무런 소망이 없다고 합니다. 옛날 이스라엘에는 형사취수제가 있어서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재혼해서 형수의 생활을 돌봐주었는데 너와 결혼할 동생을 새로 낳아줄 수 없다고 합니다. 과부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아는 시어머니로서는 며느리들이 젊어서 청상과부가 되어 평생동안 홀몸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고 하며 재혼을 권합니다.
10절에서 며느리들은 시어머니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다고 합니다. 남편까지 죽은 마당에 시어머니를 모시고 새로운 환경에서 살고자 하는 결심이 장한 일입니다. 하지만 나오미는 한 번 더 만류를 하면서 13절에서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나오미가 남편과 아들들을 잃은 것은 자기에게 임한 여호와의 심판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장차 자기와 함께 이스라엘로 돌아가게 되면 여호와의 심판을 계속 당해서 더 큰 고난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정말 나와 함께 갈 수 있겠는가 하고 묻는 것입니다.
결국 큰 며느리 오르바는 시어머니에게 입맞춤으로 작별 인사를 하고 모압 땅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작은 며느리 룻은 시어머니를 찰싹 붙어서 쫓아갑니다. 두 며느리의 선택이 갈립니다. 15절에 보면 오르바가 모압 땅으로 돌아간 것은 결국 이방 신들에게로 돌아간 것이라고 합니다. 남편 없이 홀로 사는 것, 다른 민족의 땅에서 이방인으로 천대받으며 살아갈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포기하고 계속해서 이방 신을 섬기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반면에 룻은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시어머니를 따라 이스라엘로 가겠다고 결심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남편과 시어머니에 대한 의리를 넘어선 일입니다. 여기 16절 끝부분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시어머니가 믿는 하나님,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을 나도 믿고 따르겠다고 합니다. 만일 내가 시어머니를 떠나고 하나님을 떠나는 일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벌을 받겠다고 합니다.
시어머니는 룻이 굳게 결심한 것을 보고 더 이상 말리는 것을 그만 둡니다. 세 차례의 대화의 과정을 통해 이 두 사람이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것이 큰 회개와 믿음의 심정에서 나온 것임이 분명히 확인됩니다. 남편의 죽음 가운데에서 친정으로 돌아간 큰며느리와 시어머니를 계속 따르는 작은 며느리에 관한 쉬운 이야기를 통해서, 현실적인 이익을 따라 우상을 섬길 것인가 아니면 모든 어려움을 넘어서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 하는 선택의 문제를 보여 줍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는 오르바와 같은 사람입니까, 룻과 같은 사람입니까? 눈앞에 현실적인 어려움이 닥쳤을 때 우상을 섬기는 일로 돌아갑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길 구하며 계속해서 하나님을 따릅니까? 모든 성도가 룻과 같은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3. 하나님께서는 회개한 자의 빈 손을 가득 채우신다 (19-22절)
나오미와 룻이 베들레헴에 돌아가니 이 일을 두고 온 성이 소란스러워졌습니다. 반가워하는 사람, 깜짝 놀라는 사람, 나오미의 불행을 동정하는 사람, 그럴 줄 알았다고 조롱하는 사람, 왜 그 좋은 모압 땅을 두고 이곳으로 돌아왔냐고 어리석다고 하는 사람 등등이 있었을 것입니다.
나오미는 자신의 이름을 바꾸겠다는 말로 심경을 털어놓습니다. 나오미는 기쁨이라는 뜻인데 자기같이 박복한 여인에게 기쁨아, 기쁨아 하고 부르는 게 말이 되냐고 합니다. 그래서 이름을 마라라고 바꾸겠다고 합니다. 쓰다, 쓰다 하고 불러달라고 합니다. 정말 바꾸겠다는 게 아니라 자기 마음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풍족하게 나갔다고 하는데 오늘 말씀 앞부분에 보면 흉년이 들어 나갔다고 하지 않습니까? 남편과 자식이 다 있었던 것을 보고 풍족하다 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가난이 싫어서 하나님 곁을 떠났는데 돌이켜 보니 하나님 품 속에 있을 때가 풍족한 때였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자기를 풍족하게 채워주셨는데 헛된 욕심을 채우려다 심판을 당했다는 회개의 심정이 들어있는 말입니다. 우리도 바로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풍성하게 채우고 계신다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자신이 지금 가지지 못한 것에 욕심을 부려서 하나님을 배반하는 일이 없으시길 바랍니다.
나오미는 자기에게 벌 주신 분이 전능자시라고 합니다. 자신에게 벌을 내리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자신의 빈 손을 채우실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신뢰가 이 말 속에 담겨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전능자이십니다. 나오미가 룻과 함께 돌아온 시기는 풍성한 보리 추수의 시기입니다. 베들레헴에 오랜 가뭄이 끝나고 큰 수확이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작은 두 여인에게도 장차 풍성한 수확이 있을 것을 기대하게 해 줍니다. 내일 그 뒷 이야기를 계속 살펴 보겠습니다.
믿고 복종할 일
우상 신들은 자기를 따르면 마치 좋은 것들을 줄 것처럼 우리의 마음을 유혹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거짓말쟁이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의 마음을 빼앗기 위해 감언이설로 유혹하지만 결국 그들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죽음 뿐입니다. 남편과 두 아들이 모두 죽은 것은 이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실 때에는 회개하고 겸손히 하나님의 자비를 구합시다.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니 오직 그분께서 우리의 고난을 옮기시고 빈 손을 채우실 수 있는 능력을 지니신 분임을 굳게 신뢰합시다. 오직 하나님께만 찰싹 붙어 있읍시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복된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