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60년 전에 춘천에 왔다.
5.16혁명이 나던해 내 아버지는 효자동에다 터를 잡고 시멘트 벽돌 공장을 차리셨다.
아버지가 집짓는 목수였기에 당시 춘천의 낡은 집들을 보시고 건축재료인 벽돌을 찍어 팔면 승산이 있겠다고 판단 하셨던 것 같다.
집(공장) 가까이가 공지천이고 그곳에서 벽돌의 재료인 모래를 퍼 날랐다.
그시절은 자동차가 흔하지 못 했던 때였으므로 모래운반은 우마차가 담당했다. 모래뿐만 아니라 완제품인 벽돌을 현장까지 운송하는것도 우마차였다.
춘천에 마차꾼들은 돈벌러 우리 공장으로 몰여왔다.
일자리를 찾던 농사꾼 아저씨 한 분은 우마차를 작만해 가지고 아예 우리집 이웃으로 이사를 오시기도 했다.
그게 농사보다 돈벌이가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다.
수제 벽돌을 찍어내는데엔 일꾼도 많이 필요하다.
시멘트와 모래와 물을 비율에 맞게 삽질로 섞어 배합하고 그걸 틀에다 퍼 넣고 흔들어 다지는 일은 아주 고된 노동이다.
일꾼들은 힘든 일에 지쳐 가끔 파업을 시도 하기도 했다.
그럴때면 주문은 밀리는데 생산에 착오가 생겨서 아버지가 애를 태우시곤 했다.
그렇지만 우리 공장은 그런대로 잘 돌아갔고 먹여 살릴 가족이 많았다.
그때 십대 시절이었던 나도 담당해야 하는 일이 많았다.
우마차가 모래를 싣고 와서 공장에 부릴때 나는 술상을 마당가운데 평상에 내다 놓아야 한다.
마차꾼 아저씨는 차려진 술상에 와서 선채로 막걸리 한사발 들이키고 안주로 김치 한젓가락 집어 입어넣고 씹어가며 또 모래 실러 나간다.
나는 날마다 그렇게 일꾼들이 마실 막걸리 상을 차려내고 설거지하고 술안주 김치담그고...
보수 한푼 받지않고 그런 일들을 했다.
나는 벽돌공장 집 딸이니까 우리집 일이니까 돈 받고 하는 일이 아니었다.
시멘트 벽돌 공장에서 필요한 주 재료는 시멘트와 모래다.
공장창고엔 항상 시멘트가 그득이 쌓여있고 넓은 공장 부지엔 모래가 산더미 같고 덜 굳은 벽돌이 팔려나갈 때를 기다리고 있다.
여기에서 숨박꼭질을 한다면 술래가 너무 찾기어려울 것 같은, 공장은 그런 곳이었다.
벽돌공장에서 쓰는 재료중 가장 값나가는 게 시멘트였다.
아버지는 일꾼들 행동을 무심한 듯 티안나게 감시하셨던 것 같다.
'어느 날, 하루 일과를 끝내고 어스름이 공장에 찾아왔을 때 아버지는 모래더미를 파헤치고 있는 사람을 발견 하셨고, 조용히 지켜 보셨다고...
예상대로 그 사람은 모래속에서 시멘트포대를 꺼내더니 리어카에 싣고 어딘가로 끌고 가더라고...
아버지가 뒤따르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남자는 이웃 시멘트 매점에 가서 주인과 흥정하더니 돈을 받아가지고 사라졌단다.
잠시후, 아버지는 시멘트 상점으로 들어가서 "좀 전에 아무개가 시멘트 가지고 와서 팔고갔지? 얼마에 샀소? 장물을 사고 파는 건 범죄인 거 아시오?"
아버지는 시멘트값을 돌려 받았다고...
다음 날, 출근한 일꾼에게 아버지는 아무일 없었다는 듯 대하고 일을 마친 다음 그를 대포집으로 데려가서 그 돈으로 술을 샀더니 그후 그가 가장 말 잘 듣는 일꾼 우리 공장에서 없으면 안되는 충성스런 직원이 되었다고...'
기계로 찍어내는 대형 벽돌공장이 생기고, 수제벽돌의 인기가 떨어지면서 우리 공장은 자진 폐업했다.
폐업하고 세월이 흐른 후, 지금은 고인이 되신 아버지가 사람 다루는 법에 대해 들려 주셨던 이야기다.
그땐 사람들이 나를 벽돌공장 집 딸, 부잣집 딸이라고 했었다. 속모르는 사람들은 공장사람들 비위 맞추느라 힘들고 부대끼며 사는 줄은 모르고 허울만 보고 나를 부러워 했는데...
일만 많았던 그때 그 벽돌공장 집 딸을 회상해보면 가난했던 시대였기에 그랬던 것 같다.
그 시절엔 사람이 하던 일 지금은 모두 기계가 한다.
이 시대 도로 위엔 수 많은 자동차들이 달리고 우마차는 눈씻고 찾아봐도 볼 수가 없다.
인건비가 비싼 요즘 트럭한대가 운반하는 분량을 우마차가 열번도 넘게 실어 날라야 할 것 같으니 효율성이 떨어지는 직업은 사라지는 게 당연하다.
요즘같았으면 우리 아버지도 어린딸에게 일 시키고 시급을 따져가며 높은 임금을 지불 했을 텐데...
가족이 다 같이 힘을 모아야 잘 살 수 있다고 무보수로 일 하면서도 그땐 불만이 없었다.
그렇게 착했던 벽돌공장 집 딸도 결혼하고 자식낳고 살면서 시대가 변한만큼이나 억척스러운 아줌마로 살았는데, 흐르는 세월은 그 억척아줌마를 또다시 계산할 줄 모르는 바보로 돌려 놓았는가 싶더니
이젠 늙고 힘없는 할머니가 되었다.
잘 사는 나라에선 할머니의 삶도 그런대로 좋다.
노인복지시설도 많고 찾아보면 노인이 받을 수 있는 혜택도 많이 있고, 연금수급자 남편덕에 먹고 사는 걱정 안해도 되고...
지금 나의 삶은 여유롭고 편안해서 좋다.
2021년 6월 24일. 글:이복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