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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9] 해월신사의 연대기2
신인간 ・ 2021. 9. 30. 10:09
특집
해월신사의 연대기2
지일기념 특집으로 삼암 표영삼 종법사가 정리한 ‘해월신사의 연대기’를 세 차례 나누어 싣는다. /편집실
7. 내칙과 내수도문
자리를 잡자 11월에는 경상도 쪽으로 내려가 금능군(김산군) 구성면 용호리 복호동 김창준의 집에서 내칙과 내수도문을 찬제하여 반포했다. 1891년 2월에는 공주 활원 인근인 동막으로 이사했다. 3월에는 호남 도인 남계천과 김영조(석윤), 김락철, 김낙삼, 김낙봉, 손화중 등이 신평리로 찾아와 분쟁 대책을 호소했다.
전라 좌도 편의장 남계천과 우도 편의장 윤상오가 서로 반목하며 다투었다. “우리 도운은 동방 목운이라 나무가 서로 비비면 불이나니 인심을 화순케 하면 한울님이 반드시 감응하시리라…”하시며 화합을 당부했다. 그러나 불화가 끈이지 않자 남계천을 좌우도 편의장으로 임명했다. 5월에 호남지역을 수습하기 위해 남계천을 대동하고 부안 옹정(영원면 동정리 화봉) 김윤석(영조=석윤)의 집을 거쳐 태인 동곡리 김낙삼의 집에 이르렀다. 모처럼 내려온 기회라 접주 임첩을 많이 발행했다.
6월초에는 지금실 김기범(개남)의 집으로 옮겼다. 거의 보름간 체류한 다음 6월 망간에 김덕명의 집으로 넘어왔다. 오지영의 동학사에는 “이때 호남 도인 김영조, 김낙철, 김낙봉, 김낙삼, 남계천, 손화중, 김상필(덕명), 박치경, 옹택규, 김기범, 조원집 등 유수한 두령들이 선생을 상종하였다”고 했다. 12월초에는 충주 수접주 신재련의 주선으로 충주 외서촌에 이사했다. 신재련은 신사에게 “언제 발뻗고 동학을 하겠습니까”고 물었다. 한참 생각하던 신사는 “모든 산이 검어지고 모든 길에 비단이 깔리고 만국과 더불어 통상할 때니라”고 했다. 그리고 백년 뒤 사람이나 가히 알 수 있다고 했다.
1892년 1월에 진천군 초평면 부창리로 이사한 신사는 1월 19일에 “도인들은 대전과 가사를 열람할 때 혹은 누어서 보거나 혹은 옆으로 앉아 읽거나 혹은 허리춤에 끼어 넣거나 혹은 더러운 첨상가에 던져두니 불경스럽기 이를 데 없으니…” 경전을 경건히 다루라는 통유문을 반포했다. 1월 25일에는 다시 통문을 내어 도인다운 몸가짐을 지켜서 사치하지 말고 절제 있는 생활을 하라고 했다.
해월신사께서 교조신원을 지휘하신 상주 효곡리. 사진출처(http://cafe.daum.net/sjggmcf/8Fhk/3)
1월 29일에는 육임 임첩을 남발하지 말라는 통문을 발송했다. “당초 육임직 차출은 각포에서 명망이 높고 행실이 독실한 이를 선발하여 주는 것인데 … 근자에 규모가 해이해 져서 … 집집이 첨지요 사람마다 임직이니 … 차임을 잠시 중단할 것이니 신망을 알아본 연후에 차례로 승천하라”는 요지였다. 5월 15일경에는 김주원의 주선으로 상주군 공성면 효곡리 윗왕실 깊은 산중으로 들어갔다.
8. 교조신원운동
교조(대선생)신원운동은 1892년 7월에 서인주․서병학으로부터 발론 됐으나 신사의 결단으로 1892년 10월 17일에 입의문을 발송함으로써 시작됐다. 이 운동은 단순한 신앙 자유 운동이 아니라 생존권 확보 운동이었다. 1892년 4월부터 충청 전라의 관리들은 동학도라는 이유로 체포 유배하거나 재산을 약탈하는 일을 다반사로 했다. 동학도 조가회통朝家回通에 보면 “영동, 영천(옥천), 청산의 수재守宰는 백성을 학대하고 재물을 빼앗으니 각기 만이나 되며 탕패산업하여 고향에서 이산하였으며… 전라도는 김제, 만경, 무장, 정읍, 여산 등에서 탐관오리들의 화를 당하여 죽어 나가는 사람이 연속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신사는 청주 솔뫼(송산동) 손천민의 집에 도소를 설치하고 준비에 들어갔다. 매우 온건하고 평화적이며 신사적인 운동을 추진키로 방침을 세웠다. 입의문 말미에 “… 신망이 있는 사람 중에서 성실하고 덕이 있고 신의가 있으며 사리를 판단할 줄 아는 도유를 택하라. … 의송단자를 제출하려 들어갈 때에는 의관을 정제하고 엄숙하면서 위엄 있게 할 것이며 혹시 착난하여 법을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당부했다.
공주 선화당
운동의 순서는 먼저 충청감사에게 소청하고 연이어 전라감사에게 소청하기로 했다. 10월 20일에 공주의송소로 모인 1천여 동학도들은 서인주․서병학의 인도로 21일에 행렬을 지어 당당하게 공주 관아로 들어갔다. 예를 갖추어 충청감사 조병식에게 의송단자를 올리자 감사는 사태의 확대를 막기 위해 22일에 제음을 내렸다. 그리고 24일에는 각읍 수령들에게 감결까지 시달했다. “아전들에게 명하여 일체로 횡포와 침탈을 못하게 하여 편히 생업을 가지게 하라”고 명령했다.
공주 교조신원운동을 일단 마무리 지은 다음 1892년 10월 25일경에는 삼례에 도회소를 설치하고 전라감사를 상대로 한 운동에 들어갔다. 10월 27일 밤에 “접장들은 11월 1일까지 삼례로 모이라”는 경통을 발송하자 10월 29일부터 앞다투어 수천 명이 모여들었다. 최영년의 동도문변에도 “천여 명이 모였다”고 했다. 역시 서인주(서장옥․일해)․서병학이 앞장섰다. 고부접주 전봉준도 전면에 나서 활동했다.
11월 2일에 전라감사 이경직에게 의송단자가 전달됐다. 감사에게 전할 때 고부접주 전봉준과 남원접주 유태홍이 자원하여 전주 감영에 갔다 한다. 한편 ① 수운선사 신원, ② 탐관오리 제거, ③ 교당 설치 허가를 요구 조건을 명기한 게서도 요소요소에 붙였다. 6일간이 지나도 제서가 없자 다시 의송단자를 제출하자 9일에 보내 왔으나 퇴산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300여명의 군졸을 이끌고 영장 김시풍이 나타나 해산시키려 했다. 그는 동학의 동태를 살펴보자 평화적이었으므로 그대로 돌아가 보고했다. 감사는 11일에 “동학도의 전재(錢財)를 약탈하는 행위를 엄금하라”는 감결을 각읍에 시달하자 11일 만에 삼례 교조신원운동도 막을 내렸다.
11월 12일에 “선생님의 신원은 얻어내지 못했으니 이제부터 각고의 노력을 다하자”는 사후 대책의 하나로 경통을 보냈다. 감결이 내렸으나 각읍에서는 여전히 동학도를 탄압하고 있었다. 충청도 보다 전라도가 더 심했으며 삼례와 원평에는 오갈 데 없는 도인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동학 지도부는 11월 19일에 최후의 수단으로 서울에 올라가 복합상소를 단행키로 했다. “장차 대궐에 나아가 복합할 방도를 다시 의논하니 다음 조치를 기다리라”고 각포에 통지했다.
신사는 11월 하순경에 장내리에다 도소를 설치하고 육임을 임명한 후 상소 대책을 의논했다. 12월 중순경 우선 소청을 조정에 제출해 보기로 했다. 요지는 ① 유불선 삼도가 이단이 아니라면 동학도 이단이 아니다. ② 동학은 한울님 섬기듯이 임금님과 어버이를 섬기는 도(道)이니 보부상처럼 특별한 조치를 해 달라. ③ 김제, 만경, 무장, 정읍, 여산, 영동, 청산, 옥천 등에서 탐학이 심하니 엄금해 달라는 것이었다. 정부는 조가회통(朝家回通)에 의할 때 정부는 기각해 버린 것 같다.
▲ 손천민의 글씨. 손천민은 문필이 뛰어나 1880년대 중반 이후 동학 교단의 문서를 대부분 작성. 이 문서는 3인 집단지도체제와 관련한 내용이다. ▲ 손천민의 집터. 청주 산외면 솔뫼의 손천민 집터는 현재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신송리 202번지. 동학혁명으로 불타버린 후 마을 사람들이 다시 이곳에 집을 세워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성강현
1893년 1월 중순에 청원군 솔뫼(松山里) 손천민의 집에 봉소도소를 설치하고 복합상소의 준비에 들어갔다. 1월 20일에 “2월 10일까지 한성도소에 참여하라”는 경통을 띄웠으며 선발대가 상경하여 남서 남소동 최창한의 집에 도소를 마련했다. 10일에 수천 명이 상경했으며 전면에 나설 인사를 선정했다. 동학도종역사는 “소수 박광호, 제소 손천민, 서사 남홍원, 도인 대표 박규석, 임규호, 이용구, 박윤서, 김영조, 김낙철, 권병덕, 박원칠, 김석도, 이찬문” 등을 거명하고 있다.
권병덕에 의하면 11일 아침 봉소인 9명이 소장을 받들고 광화문 전에 나아가 자리를 폈다. 13일 정오까지 아무런 반응이 없다가 하오에 사알이 나와 소원 요지를 물어다가 임금에게 상주하자 “집으로 돌아가 안업하면 소원을 들어주리라”는 전언을 내려 주었다. 광화문 복합상소도 돌아가라는 말 한마디를 듣고 해산하고 말았다. 그러나 동학의 위력을 과시하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공주와 삼례에서 지역민들에게 동학의 참모습을 인식시켰다면 광화문전 복합상소는 전국 민중들과 외국에까지 동학의 위력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광화문광장. 2017년 6월항쟁 30주년에
특기할 것은 삼례 교조신원운동 때부터 외세 침략을 경계해 오던 동학은 광화문전 복소운동을 계기로 반외세 운동에 적극 나섰다는 점이다. 거리에 내걸은 동학도들의 괘서에는 ① 그리스도교 교두(敎頭;선교사)에게 경고하는 괘서, ②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경고하는 괘서, ③ 일본인들에게 경고하는 괘서 등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동학운동은 점차 반외세운동으로 바뀌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9. 척왜양창의운동
3월 10일(양 4월 25일)은 대신사 순도기념제일로 청성면 거포리 갯밭(浦田) 김연국의 집에 동학 지도급 인사들이 모였다. 신사는 10일 밤 제례를 마치고 척왜양斥倭洋창의운동을 선언했다. 이 운동은 도를 지키고 스승님을 받들기 위함이요, 보국안민을 확보하기 위함이라는 내용의 통유문을 발송했다.
11일 새벽에는 보은 관아 삼문 밖에도 척왜양창의운동을 선언하는 방을 부쳤다. “지금 왜놈과 양놈들이 이 나라 중심부에 들어와 난동을 피우고 있으니… 서울 형편은 오랑캐들의 소굴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원수롭던 일본과 병인양요 때 치욕스럽던 양인(洋人)의 일을 어찌 잊으랴”. “저희들은 죽기로 서약하고 왜양을 쓸어버리고 나라에 보답하는 의리를 다하고자 일어났다”고 했다.
3월 12일에 보은군수 이중익은 동학도의 동태를 탐지하여 상부에 보고했다. 14일에는 “각처 동학인들이 모여들어 낮에는 장내리 뒤쪽 천변에 유진 했다가 밤이 되면 본동 민가나 부근 민가에 유숙한다. 날마다 모여드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다”고 했다. 3월 17일에 정부는 호조참판 어윤중을 양호도어사로 임명하고 “곧바로 취회처에 내려가 효유해서 해산시키라“는 칙유문을 내렸다.
18일에는 옥녀봉 기슭 강변에 수백 명이 동원되어 석성을 쌓았다. 한편 신사는 동학의 단위조직인 포包의 이름을 정해주고 대접주를 임명했다. 그러자 각 포에서는 포의 이름을 나타내는 깃발과 오색기를 내 걸었다. 3월20일 현재 모여든 동학도는 2만 내지 3만에 이르렀다. 오하기문에는 8만 명으로, 선무사장계에는 수만 명으로, 일본 외교문서에는 2만 3천명으로, 조중일교섭사료 중 북양대신에 보낸 전보에는 2만 7천명으로, 속음청사에는 2만 7천여 명으로 기록했다. 그리고 보은군수는 2만여 명이라 보고했다.
보은으로 상경하지 못한 전라도 동학도들도 때를 같이하여 삼례와 금구 원평에서 1만여 명이 모였다. 영상일기에는 보은집회 때 금구 원평과 경상도 밀양에서도 수만 명씩 모였다고 했으나 밀양 집회는 확인되지 않는다. 천도교서에는 “시時에 호남 도인 수천 명이 삼례역에 회집하여 관찰사에게 명원하니 그 사의는 제해구생除害救生이러라”고 했다. 최영년의 동도문변에도 삼례집회를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보은 장내리. 옥녀봉, 보은취회 안내판, 북접사업회 사무실
조정은 초조한 나머지 3월25일(양5월10일)에 청국군 차병론을 제기하고 은밀히 원세개에 교섭했으나 반대하여 철회했다. 한편 이날 양호도어사인 어윤중이 충청 영장 이승원과 순영 군관 이주덕 등 많은 관속들을 대동하고 보은 관아에 나타났다. 그는 미리 동학도들에게 사리를 이해하는 이를 선발하여 연유를 구비했다가 면대하도록 기다리게 했다. 어윤중과 단판할 대표자로 허연, 이중창, 서병학, 이희인, 손병희, 조재하, 이근풍 등 7명을 선발했다.
26일(양5월11일)에 어윤중이 장내리에 오자 동학 대표들은 글로 요구조건을 제시했다. 취어에는 ① 광화문 복소 때 어명을 믿고 퇴산 했으나 달라진 것이 없었으며 ② 우리의 의거는 척왜양에 있으며 ③ 동학을 모함하는 쪽은 서학일 것이며 ④ 장계를 다시 올려 우리들에게 새로운 혜택을 베풀어 달라는 내용이었다고 했다. 어윤중은 질서 정연한 동학도들의 행동을 보고 자신이 판단한 내용을 3월 27일(양 5월 12일)에 보고했다. 즉 “… 그들은 단지 척양척왜하여 충성하려는 것뿐인데 방백과 장리들이 비류로 취급, 침탈 학대함이 지나치다 했으며, 이제 스스로 물러가면 비류로 오인할 것이니 …임금으로부터 분명한 명지을 받게 해 달라”고 했다 한다.
3월28일(양5월13일) 어윤중의 장계를 심의한 조정은 “뉘우치지 않고 해산치 않으면 크게 처분할 것”이라는 협박적인 윤음을 내렸다. 그리고 29일에는 친군 장위영 정령관 홍계훈에게 병력 6백 병력을 이끌고 청주목으로 내려가게 했다. 어윤중은 군관과 보은 군수를 대동하고 4월 1일에 장내리로 왔다. 동학도들에게 윤음을 봉독해 주고 3일 내에 퇴거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군대까지 동원된 상황에서 해산을 강요당한 동학도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또한 저녁에는 청주병 1백명이 보은에 나타나 위협을 가해 왔다.
장장 20일간이나 계속해 오던 시위운동은 더 이상 버티기가 어려웠다. 신사는 도인들리 상할까 염려하여 눈물을 머금고 퇴산 명령을 내렸다. 4월2일(양5월17일)부터 전 동학군은 장내리를 떠나갔다. 해산을 확인한 신사도 저녁때에 상주 왕실촌 본댁으로 돌아왔다. 금구 원평에 모였던 동학도들도 보은의 해산 소식을 전해 듣고 같은 날에 해산했다.
그러나 울분을 참지 못한 일부 도인들은 보은으로 올라왔다. 진산에서 어윤중를 만나 윤음을 접하고 그들로 돌아갔다. 척왜양창의운동은 정부로부터 받아 내지 못하고 해산했으나 동학의 일사불란한 조직력을 강화할 수 있었던 것은 큰 수확이라 할 수 있다. (다음호에 계속)
[출처] [162.9] 해월신사의 연대기2|작성자 신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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