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칼과 線을 빼고는 전부 붉은 색 입니다.
대광리.신망리 연천 일대와 전곡방향에서도 도깨비 마크를 달고 있는 우리를 보면 헌병도
텃치를 안하고 무사 통과 시켜주곤 했습니다.
백마가 越南 參戰時,그 당시의 부대원들 그대로 몽땅 월남에 갔었다면, 논산 군번이고 울타리 군번,
1117~8과 1120(63년도 말 군번들)군번들이 많아 그들이 근무지에 배속 됐을때 부대의 "년혁"이 많이
전해져이어 왔을것 이라고 생각됩니다.
이것은 마치, 가령..."창설 20년도 안된 ooo"이라는 회사가 지금의 제주도로 이사를 갔을때...
정년퇴직을 50세로 보고 45세된 직원들은 다 퇴직 시키고 모자른 절반 이상인 4.500명 이상의 직원을
다른 회사 사람으로 뽑았다면... 인터넷도 없고 거의 50年代 중엽때쯤에 그리됐다면 이사하느라 없어진
기록과 서류도 많고...그렇게 4~50年이 지났을때에 "ooo"이라는 회사의 역사가 처음 그대로.........
또한,제대로 전해 오지는 못했을 겁니다.
그러나 삼성이나 현대 엘지 같은 지금의 회사들은 역사적인 회사의 발전 상황과 지금에 이르기까지가
회사 창설 당싱,; 개인 서장을 바롯해 고스란히 남아 회사 기념관 같은 곳에 많이 남아있어 後年에 입사한
분들에게 도움이 됩니다.
어떤 집안의 아이가 자랄때, 할아버지 할머니 계시고 큰아버지 작은아버지.그리고 그사이에 조카들 형제가같이
자란 사람과 ..불가항력으로 결손 가정이이나 고아원서 자란 사람도 있습니다.
이사람들의 어릴적 기억들은 다 다를 겁니다.
6.35 사변과 1.4후퇴로 두번이나 피난을 떠났던 다섯살짜리와 열살된 아이의 기억이 다르고, 그들이 3년간
피난 생활 했던 고장에서 피난생활없이 피난민들 때문에,피해를 본 또래에 토박이(토백이)애들의 기억이
다를것 입니다. 휴전되고 나서 독립군과 그 자녀들이 있고 일본서 살던 교포들이 귀국헀으면 그들의 기억도
다를것 입니다. 여기에,國家도 그렇고 家庭도 족보가 없다면 국가와 각 가정의 역사를 깊히 모를 겁니다.
역사에는 正史가 있고 야사도 있습니다.
이들이 결국 한자리에 모여서 페허가 된 이나라에서 서로 부딪혀가며 도우며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섰고
우리는 그런말 한적 없는데 유엔과 전세계에서 우리나라를 우러러보고 선진국 반열에 올린것이죠.
이런 모든 사실들은 우리들도 그동안 허리띠 졸라메며, 그런 가운데 배우며 고생한 보람입니다.
9사단이 파병될때 처음 나온게,"파병된 군인이 몇개월간 월남에 있느냐!"가 관건 였죠.
우리 9사단의 파병결정은 65년 12월과 66년초로 압니다.
이렇게 되면 軍 개편은 필수입니다.
저는 그당시 원주1군하사관학교서 교육 1개월쯤 됐을때 입니다.
나중에 그냥 ㅡ 전해진 얘기로는 육본에서,먼저 파병된 맹호와 청룡기준으로
당연히 " 월남에서 근무는 1년으로 한다."로 했겠죠,
9사단이 파병 날자는 " 정글교육과 유격교육"을 마친 후로서 66년 7~8월에 "파병 예정" 으로 잡고
부대 개편이 이루어 진겁니다.
그런데 장병 모두에게 "월남에서 근무는 1년으로 한다" 로 定해 졌지만 본인도 그렇고 작전상
몇개월 더 근무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 제대 기한이 1년 미만 남은 사병 병력이 사단 전체에 절반이 넘었다고 합니다.
그냥 쉽게 계산해서 28 연대 병력이 대략 3,000명이라면, 2.000명정도가 제대 1년 미만에 해당되니
그들이 "월남에 안가겠다" 하면 못 보내는 거죠.
그러다 보니 9사단은 북새통이 됐고 어느새 66년 2월.3월.4월달이 됐고 맹호와 청룡이 파병된지 6개월 정도
됐는데 벌써 死傷者가 꽤 생겨 파병 가족들의 걱정 근심이 생기고 소문이란게 무서운게"월남에 가면 죽는데...!!"
이런 말이 퍼지고 있었습니다.이런 소문에 제대 미만인자는 물론이고.제대날자가 67년 8월 이후인1대독자로
입대한 군인과 바로위 형님 돌아가시고 자신만 남아 부모님 모셔야하는 무진 가난한자도 사정하면 제외시켰습니다.
그러니까 제대가 1년이상 남은 군인들은 1.000명 정도 인 겁니다.
그렇게 되니 제대가 1년이상 남은 사병 2천명을 다른 보병 사단서 데려와야 했습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前方의 보병 사단들에겐 "자매부대"라는 게 있었습니다.
즉, 부대가 전방과 후방근무를 경험하기 위함인데 보병 9사단과 28사단이 그러했습니다.
당시 9사단 본부는 동두천에 28연대는 전곡에, 1대대는 gop에 있었고 大隊 4개 중대는 저녁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이북방송 꽝꽝 들리는 철색선 가까이에 있었죠.
당시 2중대는"신병교육중대"로 6주간 부대 교육을받고....
그러니까 2중대에 신병 200명 가까이 들어오면 28연대 12개 중대에 각각 열 두어명 정도 고참 사병들이
"제대특명"을 받습니다.
나는 논산과 금마에서 6주와 4주인 10週 교육을받고 창동101 보충대(배출대)에서 200명가량이 왼쪽 팔뚝에
말 이 그려진 수명의 기간병이 트럭 10대 가량 갖고와 우리들을 태우고 7~8시간읗 달려 한밤중에 gop에
있는 신병교육 2중대에 도착을 했습니다.
거기 28연대 교육2중대서 교육을 5주쯤 받았읗때 병장 한명이 새로 왔는데 그가 바로 대구 근방 경산사람으로
신춘균 입니다. 그는 나처럼 여러형제중 막내로 6.25때 서울서 대구로 피난 왔다가 그냥 거기서 눌러 산다고 하더군요.
그와 동갑이고 가까이 지냈습니다.
6주 교육을 마친후,난 조교로 자충되고 며칠 안됐는데 하사 한명이 부임해 왔습니다.